♣복음말씀의 향기♣ No3836
4월23일[부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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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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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3r9QxhKhEHk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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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축제!>
우리나라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점이 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수시로 외침을 받아, 식민 통치를 받고 유배를 떠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축제를 즐겼습니다. 계절별로,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는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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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rj7rT9nZ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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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면서 누군가가 나와 일치한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치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성경을 읽으면 일치하게 될까요? 물론 그것도 일치의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방법을 알 때 사람들을 나와 일치하게 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세바시 1814회 ‘우울증과의 위험한 동거 7년, 기적적인 탈출 스토리’에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시다』라는 책을 쓴 최의종 씨가 강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있는 최의종 씨에게 아내가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서 달려가 봤더니 몸이 아프기는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는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울증이었습니다.
두 아이이면서도 자살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는 이 자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집은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빨래를 못 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최의종 씨도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해 주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렸냐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운동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나아지지 않고 남편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도 거의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아내가 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갔는데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겉이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신도 아내에게 그런 모습일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최의종 씨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범을 보입니다. 먼저 쉬운 운동부터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합니다. 집이 헬스장이 되어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해 하는 그런 행동들에 미안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러니 입맛도 좋아지고 7년이 지난 지금은 수영을 자신보다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우울증을 함께 극복한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일치의 핵심이 있습니다. 남편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어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할 수 있다고 믿고 남편을 따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그분이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하신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최의종 씨는 이미 우울증을 극복한 이들의 책을 공부해서 그것을 따라 했습니다. 따라 하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아내가 자신에게 일치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둘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하.사.시.’를 함께 전하고 있는 카타리나란 자매가 드디어 하.사.시. 10권을 다 읽은 것을 알았습니다. 벌써 다시 2권째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톡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글이 왔습니다.
“읽은 날은 죄를 덜 짓고…. 못 읽는 날은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기도의 효과를 느끼고 있으면… 기도하고 있는 것임.”
그러니 장문의 글이 왔습니다.
“이거는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죄 많은 저를 늘 도와주고 계심을요…. 그래서 미사 중에 주책맞게 자주 웁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을 위해 미움을 기도로 올리니 화해로 결실을 맺게 해주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 또 감사로 기도합니다…. 요즘은 기도의 힘이 너무 큰 것을 알기에 죄인인 제가 그 기도라는 것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전 요셉 신부님 덕분이에요!!^^”
제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카타리나 자매가 저와 더 일치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것이지만. 저는 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 자매는 그것을 따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저와 일치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법을 모를 때는 누군가를 나와 일치하게 하는 법을 알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치는 비난이나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진정으로 일치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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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부활 대축일 미사 때입니다. 3시 미사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 자매님이 아이 셋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첫영성체는 했는데 아직 첫 고백을 못 했다고 합니다. 제게 고백성사를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젊은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고백성사를 보는 줄 알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부부는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개신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는 한국에서 성당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아이’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성당에 찾아가서 신부님에게 안수받으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 없었고,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저는 젊은 부부를 위해서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도 성당이 밝고, 깨끗해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와 젊은 부부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갈망’에서 시작되고, ‘감사’에서 성장하고, ‘기도’로 꽃을 피우고, ‘나눔’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 시작은 ‘갈망’입니다.
속담에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계명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예언자’를 보내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외아들의 말을 듣고, 외아들을 믿으면 유대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지가 동냥 통을 버린다는 말처럼 계명을 어겼고,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유대인들은 굴러들어 온 복을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메시아이심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78년 전입니다. 관리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고 물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인정하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모진 고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조선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주교인이라고 말하였고, 사제생활 1년 만에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하였던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말과 행동으로 천주교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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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유다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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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기원을 전하여 줍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지만(인성)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신성)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시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며 무기력한 불통을 지적하십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견제와 위협만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상대의 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어제 복음), 그 소리를 따라야 하며(오늘 복음), 그 따름으로 상대방의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 관계성을 증언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하여도 다시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똑같은 의심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을 붙잡고 있으니 믿음도 생겨날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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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5ㄴ-30)
1)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시는 말씀을 하신 적은 많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2)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믿는다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 곧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의 9장에 바리사이들 사이에 일어난 논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일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일을 하셨다는 것만, 즉 안식일을 안 지켰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규정보다는 기적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신념’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만들어 주신 뜻은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 규정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3)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나를 믿지 않으면 내 양이 될 수 없다.”입니다. <양이 아니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기 때문에 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27절-29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양이 되었을 때 얻어 누리게 될 은총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영원히 죽음에서 해방될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호 속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라는 말씀은, 하느님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얻은 영원한 생명, 구원, 영원한 행복도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4)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선언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뒤의 14장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속죄제물이 되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부활 후에도 사람들 가운데에 살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호해 주시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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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안티오키아 교회의 그리스도인>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확신에 차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차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한편 하루하루 신자들이 늘어가며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동시에 유다인들의 박해 또한 시작이 되지요.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대대적인 박해를 가해옵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 때 제일 많이 갔던 곳이 안티오키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500Km 정도 떨어진 도시 안티오키아는 안디옥이라고도 불리는데 로마의 3대 거점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소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거점 도시들이 바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티오키아였습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 모든 문화와 경제, 정치, 교육, 그리고 문명과 교통의 중심지였지요.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모든 것이 로마로 통했고 동시에 또 모든 문명이 로마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거점 역할이 되었던 이들 도시는 당연히 경제적인 풍요와 함께 환락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 차례에 걸친 이동 경로를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옮겨오고 여기에서 또 로마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이렇게 유다인들의 박해를 피해서 안티오키아로 옮겨오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탄생됩니다. 사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는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들’이라는 의미로 비웃음과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었지요.
우리나라 해미성지에 ‘여수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죽어가면서 ‘예수 마리아!’를 목청껏 외치자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이 ‘여우머리’라고 잘못 듣고 여우에 홀려 머리채로 들어갔다고 하여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밤이나 낮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어서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것과도 같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서 독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한 아류 정도로만 여겼지요. 사실 이때까지 유다교 신자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구별은 어려웠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면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유다교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리스도에 미친 ‘그리스도인’이라는 조롱을 받는 이 시점이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인 중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면 이제 안티오키아에서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다른 민족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출발하게 된 셈이지요.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그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인 중심의 선교 정책을 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율법의 지배를 그대로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규정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규정, 할례에 관한 세부 규정을 놓고 여러 번 충돌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기점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민족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지요. 그 전까지 복음이 유다인들에게만 전해진 것과는 큰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1,19-20)
유다인들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넘어가는 시점이 바로 안티오키아 시대였던 것이지요.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하여 유다인 중심의 선교가 다른 민족 중심의 선교로 바뀌고 차차 전 세계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어 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한편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 신자들을 잡으러 가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열심한 유다교 신자에서 열정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로 한순간에 변화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도 많은 세월을 실의에 빠져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을 하고 난 후 유다인에게 따돌림을 받고 또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외면을 받았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변절자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믿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지요.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꽤 긴 기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기로 공모하였는데,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보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사도 9,20-26)
다마스쿠스 체험 이후 11년이 지난 후에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에 의해 다시 안티오키아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 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사도11,26)친 후 사도 바오로의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안티오키아는 이방 선교의 거점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13,2)
그전에는 유다교의 이상한 교파 정도로 생각되었던 그리스도교는 이 안티오키아에서부터 유다교와 구별이 되어 하나의 공동체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미친놈들이라는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구원의 의미로 변화되는 시점인 것이지요.
우리는 천주교 신자라고 불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천주교 신자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천주교인은 세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의 중심에 담고 죽은 후까지도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천주교인’이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의 인생관과 신앙관, 그리고 교육관 등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름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삶이나 신앙, 교육 등이 세상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다면 이는 올바른 천주교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천주교인과 아닌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같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삶의 중심에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모시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목숨이 최고이지요.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가꾸고 먹고 입는데 몰두하며 세상의 성공을 위해 내 자식을 교육시키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고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이와 다릅니다. 목숨보다도 재산보다도 심지어는 자녀보다도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이 세상의 삶보다는 영원한 세상을 지향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하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한 상급을 보증 받는 길임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하신 예수님의 최후 심판의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목숨보다도, 재산보다도, 자식보다도 주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천주교인이 되면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게 되지요. 특히 자녀 교육은 더욱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 자식이 공부만 잘하고 세상의 출세에 오르면 그것으로 자녀 교육이 완성된 것으로 여긴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자녀를 정말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 이것이 자녀 교육의 첫 번째 목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살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그리고 내 삶의 근거로 모시고 살고 있는지 우리는 늘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여수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은 하느님께 미칠 정도로 열심한 신자들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 그 삶이 구원의 표징이 되었듯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에 살았지만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했기에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열심히 살면 주위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요.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미쳐서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모신 초대 안티오키아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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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마디로 신뢰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양들은 시력이 약해서 앞을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이끌어 주는 목자의 음성과 다른 사람의 음성은 정확히 구별하지요. 그러기에 양들은 자신을 이끄는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신뢰란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어도, 손으로 확인해 보지 못했어도, 신뢰하는 상대방이기에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상대방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의 계약을 맺은 하느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신뢰가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을 다양하게 찾아야 합니다. 신뢰 회복을 위한 첫 번째 길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듣고 이해하고 있는지, 또 그런 노력을 어느 정도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도 늘 생각하며,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며, 그를 배려하는 습관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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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확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오늘 복음을 포함한 요한 복음 10,22-42는 예수의 신성에 관한 유다인과의 논쟁을 보도하고 있다. 이 논쟁보도는 앞서간 '목자와 문'과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말씀(10,1-21)과 비교해 볼 때, 장소는 같은 예루살렘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바로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인 22절이 밝히고 있듯이 논쟁의 시점은 성전 봉헌절 축제기간이며 계절은 겨울철이다. 반면에 비유말씀은 요한복음 7,10이 보도하는 초막절 축제기간 중에 행해진 말씀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7,10-10,21의 보도는 시기적으로 봉헌절보다 2달 정도 빠른 초막절에 속한다. 성전 봉헌절은 기원전 165년 기슬레우 달(12월)에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번제 제단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일주일간 계속 지냈으며, 초막절과 비슷한 전례의식들을 거행하였다.
(2마카 1,9; 10,6 참조) 그러나 전체 구조상의 논리성은 상당히 면밀하여 착한 목자를 주제로 한 그리스도론은 일관성 있게 추구되고 있다.
시간은 흘러 예루살렘 성전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계절적으로 시간만 흐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주기를 재촉한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24절)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고 대답하신다.(25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아버지께서 자기를 파견하셨으며, 종말론적 계시자임을 언급하셨을 뿐 아니라 (5,17; 5,38; 6,36; 8,54 등 참조), 이 언명(言明)을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업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메시아이심을 밝힌 적은 요한복음에 딱 한 번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에서 한 여인이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신 부분이다.(4,25-26)
유다인들은 그러나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불신하는 이유로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을 재삼 언급하신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으며,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26-27절)
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이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과 양들이 자기 주인이 아닌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양들이 주인의 말을 따라 행동할 것은 뻔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양들이 주인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듣다'와 '믿다'의 상호관계가 부각된다.
즉 믿음은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믿음의 원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 결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증을 먼저 손에 쥐려했던 것이다.(24절) 확증을 손에 쥐고 그 다음에 믿겠다는 심산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확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자명한 사실을 두고는 믿음을 거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30절)라는 말씀은 유다인들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어렵게 들린다.
예수님 편에서 볼 때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심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나 우리들 편에서는 믿음이 따라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믿음은 고귀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이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로 내어 맡길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출 때 그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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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오늘 복음에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10,24)라고 묻습니다. “내가 다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10,2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요. 당신들은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사실 복음은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4~15)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었기에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니 사랑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으니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자신들의 선택과 삶의 결과,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고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과 은총에서 벗어나기에 악의 세력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는 신뢰의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이다,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이 전적인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서 두 분은 하나이면서 두 분이시고, 두 분이시면서 하나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앙의 관점은 마치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며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 는 사실입니다. 스테파노의 박해는 분명 교회의 엄청난 충격이었고 위기였지만 이 박해를 계기로 흩어진 사도들은 세상 곳곳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던 것”(사11,21)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 보냈고, 그곳에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1,25)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11,25)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 세상을 사랑과 생명으로 구원하시고 진리로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심)을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완수하시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맞아들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신지는 오직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양들만이 알아듣습니다. 양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자신들의 참된 목자인지를 알아차리고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이는 곧 우리 역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신적 본능인 영으로 거듭나고 영으로 살아갈 때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께서는 예수 추종은 오직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로8, 4)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10,27) 이는 곧 양들을 위하여 목자이신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가져다준 생명입니다. 양인 우리는 주님께서 가져다준 생명을 얻음으로끝나지 아니하고 얻고 또 얻기 위해서 늘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아버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는 것처럼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8, 38~39)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시며 기도하셨듯이 저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해주고, 해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세상에 아직도 아버지의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합시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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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에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외부 강의도 많았고, 특히 본당에서 성삼일을 보내면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끝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딱 일주일만 아파지고 싶다.’
놀라운 것은 다음 날부터 아픈 것입니다. 우선 고개를 돌리기 힘들 정도로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었지만, 계속 일정이 있어서 쉴 수 없었습니다. 아픈 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 금요일부터는 목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몸 곳곳에 찰과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일주일만 아프고 싶다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자.”
우리 신앙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께 하는 헛된 맹세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내게 필요한 대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양이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을 이끄는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뜻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을 뜻을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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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 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종으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 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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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빼앗지 못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요한 10,22-30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믿음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믿음 따르네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희망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희망 따르네
아무도
빼앗지 못할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앞서니
아무도
빼앗지 못할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 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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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갈 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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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때를 묻히십니다.
제 손을 꽉 붙들고 놓치지 않으시려 손깍지를 꼭 끼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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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중심의 내적일치의 공동체 삶>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공동의 집, 지구 만세!”
제 좋아하는 만세칠창으로 시작한 하루입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이 한창인 요즘, 때가 되니 어김없이 밤마다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노래보다는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어제 4월22일은 “지구의 날(Earth Day)”이었습니다. 세기의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공동의 집과 세계 평화를 위한 담대한 행위의 긴급한 호소를 반복하셨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우리 세대는 많은 부요함을 남겼으나, 우리는 지구를 보호하는데 실패하고 있고 평화를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파멸로 치닫는 지구이자 우리 공동의 집의 장인들이, 관리인들이 되라는 불림을 받고 있다.”
뜬구름 잡는 막연한 영성이 아니라 발딛고 있는 땅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성찰도 밑받침해야 건전하고 건강한 영성이겠습니다. 교황님의 관심사는 하늘과 땅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고 특히 공동의 집인 지구에 대한 관심은 남다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우리의 구도 여정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고되더라도 힘주어 뻗은 걸음이 발자국이 깊고, 느리더라도 우직한 걸음이 가장 먼곳을 간다.”-다산.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뤄지고(대기만성大器晩成)’ 큰 소리는 듣기 어렵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도덕경
진리 추구의 구도자라면 한결같이 소리없이 묵묵히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겸손히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삶의 중심, 공동체 중심을 새로히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35년동안 한결같이 강론시 강조해온 주제 말마디가 ‘삶의 중심’,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저절로 이뤄지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영원한 중심인 파스카의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이런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가고 닮아가는 공부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가 따르고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내적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추구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고맙게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생략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혼자는 추상이요 환상입니다. 공동체와 격리된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이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 착한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더불어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따르지만 획일적이 아니라 각기 고유의 자리에서 고유의 모습으로 따릅니다.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에 예닮의 여정은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을 향하지만 삶의 자리는 다 다릅니다. 내 삶이나 공동체의 내적일치는 이런 예수님과 일치와 더불어 함께 갑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내적일치와 더불어 이웃형제들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바로 이런 심정의 고백이 요즘 자주 부르는 성가 61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슬픔과 괴로움 밀려와도
영원히 주님만 의지하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이런 성가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로 고백할 때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수행을 주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삶이 영원한 생명의 삶이요, 결코 누구도 우리를 빼앗아갈 수 없는 평화와 안정(安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무지와 허무로부터,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참 자유인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입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품성을 지닌 교회공동체의 바람직한 인물인지 다음 묘사가 입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사절로 파견됩니다. 다음 단락의 묘사가 바르나바가 얼마나 사심없는 아름다운 품성에 주님과 깊은 친교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주님 사랑에 기인한 꾸밈없는 순수와 열정에서 샘솟는 기쁨의 사도 바르나바요, 이런 삶자체가 그대로 사랑의 주님의 현존이요 빛나는 복음 선포가 됩니다. 이어 소외되어 외톨이가 된 사울을 타르수스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끌어 올리니 그의 적극적 동료애, 형제애가 감동적입니다.
사울과 함께 만 1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 머물며 신자들을 가르치니 바르나바는 명실공히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임이 입증됩니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됐다니 괄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4대 중심지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였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과 더불어 당신 중심의 내적일치를 견고히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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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문을 넓혀야>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유대교 신자가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약성서가 훌륭하고 그 성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이 저의 신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도 유대교 신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과 유대교는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인데 잘못된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의 백성이고, 다른 족속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기에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어제 사도행전의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을 두고 비난을 한 것 말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제 이런 말씀들로 아주 적절한 대처를 하였지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올바른 유대교는 같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엘닷과 메닷은 70인 장로가 아니고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말해서 만남의 장막 안에 장로들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영을 받았고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그것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의 말문을 막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의젓하고도 올바른 대처 덕분에 그리고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의 동의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었는데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얘기합니다.
스테파노의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의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도들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하고,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 사울을 데리고 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오늘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흩어져 안티오키아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전히 유대교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극복한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을 우리가 나만 또는 우리만 드나드는 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닫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교황님께서 동성 커풀을 비전례적으로 그러니까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 때문에 비판과 반대를 하거나 혼란을 겪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축복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교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결합이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축복을 청하는데도 너희들은 비정상적이기에 축복해줄 수 없다고, 반대로 너희들은 축복 대신 저주받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합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합을 전례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원하고 청하는 사람을 사목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며 좋다고 축복하신 피조물을 누구도 축복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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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10,27)
<목자와 양!>
오늘 복음(요한10,22-30)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이고, 양들이 드나드는 구원의 문'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시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결정적인 또 하나의 신원, 곧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메시아이심이 선포되는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십자나무에 매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사도 11,19-26)는 이방인 지역인 안티오키아에 교회가 세워지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곳으로 파견된 예수님의 양인 바르나바의 믿음과 따름 때문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하느님 뜻에 순종하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며,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계시이신 예수님,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착한 양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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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ZcCp_wsw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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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4.23.화."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를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를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가
하나를
내놓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를 지향하며
하나로 완성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완성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몸과 마음이
따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믿음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구원의
시작은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하는
하나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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