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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수도회]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5,1-10
† 복음 루카 19,41-44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십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말은 없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대목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눈물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바로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히브리어 살렘)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계약의 궤를 이곳에 모셔 온 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 곧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과 무관심은
계속 반복되고, 이 죄를 예언자들이 거듭 경고했지만, 기원전 6세기에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유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다시 이 도시에 예수님께서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시려고 입성하시건만, 정작 예루살렘은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에 대한 안타까움에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쏟아
내십니다.
나환우들의 섬인 소록도에 있는 성당 제대 뒷면에는 하느님의 눈물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자그마한 섬 소록도 위에 온통 붕대로 칭칭 감은 십자가가 커다랗게
서 있고, 그 바다와 섬과 십자가 위로 주먹만 한 크기의 하느님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나환우들의 아픔과 고통을
당사자들보다 더 처참하게 가슴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눈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대가로 하느님께서 치르시는 처절한 고통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뜻만을 철저히 따를 때에 평화를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1-44
옛날 어느 마을에 돈밖에 모르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돈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 것입니다.
결국 부자는 왕 앞에 끌려 나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이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 50냥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 벌은 채찍
50대를 맞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벌은 생마늘 50개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자는 과연 어떤 벌을 선택했을까요?
부자는 돈이 차고 넘쳤지만 단 한 푼의 돈도 아까워하는 사람이라서
벌금은 도저히 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두 번째 벌인 채찍을 맞는
것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벌은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눈 딱 감고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요. 더군다나 마늘은 많이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 벌을 선택한 부자는 마늘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열 개 정도밖에 안 먹었는데 벌써
너무 매워서 입도 얼얼하고, 심지어는 속까지 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지요. 참지 못한 부자는 결국 큰 소리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마늘을 이제 더 이상 먹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두 번째
벌인 채찍으로 때려주십시오.”
이제 벌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를 맞자마자 너무 큰 고통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하지만 ‘50대 꾹 참자.’고 버텼지요. 결국 20대를
맞고는 기절하고 말았고, 깨어나서는 도저히 맞지 못하겠다면서 결국
금 50냥을 내고서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돈을 그냥 해결했으면 간단할 것을, 돈을 아끼겠다는 마음
때문에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을 위해서 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괜찮다는 생각들, 즉 가족도 내
이웃도 심지어 내 자신의 희생까지도 서슴지 하고 있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평화는 점점
사라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면서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도시’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뜻이 무색하게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외침으로 계속해서
파괴되었고 후에는 로마의 점령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화려함만을 보고 있었지요. 주님의 뜻만을 철저히
따를 때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에도 어떤 이권만을 추구하는
장사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추구할 때, 평화는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평화와 함께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습니다.
지속적인 우정, 끊임없는 감동 같은. 이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 것을 요구할 줄 압니다. 그냥 말없이 있어 주는 것
같은(알베르 카뮈).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우셨던 예루살렘.
행복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최천호)
우연히 나를 찾아온 행복(Happiness)이 어느 날 갑자기 우연
(Happening)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
노력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누가 가져다주기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연(Happening)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행복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간다. 행복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선택이고 선택에 의해 운명은 정해진다. 나의 목표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고 나의 선택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과거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선택은
곧 나의 미래가 된다.
혹시... 우리들은... 행복지수를 부의 척도로 삼고 있는지는 않은지...
사실 많은 사람들이 행복 뒤에 물질적 뒷받침으로 생각 하고 있다.
아세요? 대한민국도 60-70년대에는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던 사실.
그런데 지금은 행복지수가 아주 낮다. 왜 그럴까?
여러분들의 행복지수는 어떠합니까? 혹시 지금 내가 선택하고 있는
것 때문에 그 행복지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질적
뒷받침이 행복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기념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탄식하십니다(19,41).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여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19,44)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로움을 지녀야 할 도시가 평화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슬프게 한 근원적인 이유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루살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교회, 나 자신과 형제자매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 곳이며 예수님 자신이 선물이자 평화로서
다가오신 곳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내 마음 안에 평화를 간직하고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꽃피도록 할 때 눈물을 멈추실 것입니다. 평화를 간직하려면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고, 평화를 보도록 눈을 떠야 하며 하느님의 가치에
젖어 평화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의 무리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였지요(19,37-38). 그러나 실제 삶은 평화와는 거리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평화란 피상적인 정적이나 고요가 아닙니다. 평화란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는 것과는 달리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선이 확인되지 않으면 정의의 실현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화도 주저이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사회상처럼,
하느님의 선이 모두에게 드러나는 공동선도 찾아볼 수 없고, 하느님의
의도 실현되지 않는 권력욕과 탐욕, 이기심에 눈이 멀어 이미 곁에 와
계신 평화의 임금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구원의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정의의 질서는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사랑에
의해 실질적으로 추진되고 사랑이 완성됨으로써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사랑으로 실행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사랑으로 오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이 사라져버린 삶의 현실과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뜻과 세상
재물에 기대어 제멋대로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삶이
그분을 슬프게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평화 가운데 머무는 평화의
도구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우리를 영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때임을 알아차려, 사랑과 정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오염되고
있는 이 땅의 어둡고 아픈 현실 한복판에서 묵묵히 사랑을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기념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루카 19,41-42)
오늘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시며 우시네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정쟁만 일삼고 온갖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서로 싸우고 헐뜯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무엇보다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욕심에 눈이 가려져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니
너무도 안타까워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네요.
작금의 우리나라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똑같이
마음아파 하시며 울지 않으실까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특히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모든 욕심 내려놓고 진정 백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진정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사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그분이 우리나라를 보시며 슬퍼하시지 않고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시는 그런 나라,
옥 국민 모두가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믿고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는
참평화의 나라가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러실꺼죠?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눈 일곱 개
2016년 다해 11월17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
독서: 요한 묵시록 5,1-10
‘마시멜로우 실험’은 1960년대 스텐포드 대학에서 실시하였던
지금까지도 매우 유명하게 알려진 실험입니다. 유치원생 어린아이
수백명을 대상으로 각각 독방에 배치하고 미시멜로우를 접시에 하나씩
주면서 말합니다.
“이 마시멜로우는 네가 여기 있는 종을 치고 언제든 먹을 수 있다.
그러나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는다면 상으로 한 개를 더 주마.”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참는 능력을 ‘만족지연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15년 후에 이루어진 조사연구입니다.
마시멜로우를 바로 먹지 않고 두 개를 얻었던 아이들은 성장한 후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보다 더 낮은 체질량지수(건강과 직결됨)와 더
나은 자아 존중감을 보여주었고, 또 목표를 더욱 효과적으로
추구하였으며 좌절과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라고 가르치십니다.
인내란 나의 육체적, 정신적 욕망을 참아내는 능력입니다. 이를 또 다른
말로 ‘만족지연능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그
욕망에 쉽게 떨어져버리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지연능력’이나 ‘육체적 욕망을 견뎌내는 힘’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습되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실험을 하였는데 어린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약속을 잘
지켜주어 보상을 잘 해 주고, 한 그룹에서는 참고 기다리면 상을
주겠다는 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시멜로우 실험을
하였습니다. 결과는 선생님이 약속을 잘 지켜 보상을 해주었던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두 배의 숫자가 더 잘 견뎌내어 마시멜로우를
두 개씩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잘 참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오는 이익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님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볼 수 있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죄를 이기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처럼 몸에 눈이 가득하다거나,
오늘 나오는 눈 일곱 개를 가진 목이 잘린 하느님의 어린양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육신을 이긴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환시로 하느님의 어좌에서 하느님께서 앞뒤로 글이 쓰인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고 일곱 인장이 찍혀 있지만 천상천하에서 누구도
그 두루마리를 열어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기에 몹시
슬퍼합니다. 아마도 이는 신비적인 가르침이 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구원될 하느님 백성의 명단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두루마리를 누군가가 열어야만 참 진리를 사람들이 깨우치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천사는 순교하여
일곱 눈을 가진 하느님의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요한을 위로합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당신 육신의
욕망을 참아낸 그리스도만이 인류 구원의 능력을 지닌 분이시란 상징인
것입니다.
바오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과 반대되는 것은 인간 육체의 욕망이라고도
말합니다.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갈라 5,16-17)
우리가 육체적 욕망에 쓰러져 마시멜로우를 먹듯 그 쾌락의 기쁨을
순식간에 맛보고 성령의 불을 꺼버리는 이유는 그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며 이루어주시는 그 보상을 신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이겼을 때 얼마나 더 큰 은총이 오는지 맛보는
신뢰의 교육을 아직까지 충실히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그런 기쁨이 있었더라도 다른 기쁨을 원하고 있었기에 은총을
받았는데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죄로 성령의 일곱 눈을
잃게 되면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합니다. 물론 자신의 구원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일곱 눈을 지켜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두루마리를
펴 줄 수 있는 구원의 도구가 되고 싶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실 그 영광스러운 열매가 얼마나 큰 행복과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는 믿음의 훈련을 먼저 열심히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죄를 이기게 하고 우리를 세상의 복이 되게 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루카 19,41-44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현의 방법이 다른
경우도 비슷합니다. 개는 좋으면 꼬리를 흔듭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세우고 경계 표시를 합니다. 같은 표현이지만 이해의
폭은 정반대입니다. 꼬리를 흔드는 개와 싸우자고 하면 이상할 것이고,
꼬리를 세운 고양이를 가까이하면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경우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고,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를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권력, 재물, 명예를 얻는 자리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배반했고, 모른다고 했고, 무서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차이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이야기처럼 남자와 여자는 심리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은 ‘사랑하는데 그럴 수 있지.’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럴 수 있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바라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소유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입니다. 사랑을
헌신과 나눔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퇴진시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촛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길 것입니다. 촛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잡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불법과 불의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촛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학생들까지 촛불을 들었을까요?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기만과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금수저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평등의 세상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배를 띄우는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잔잔한 물결이 되어 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도 하지만 거센 풍랑이 되어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습니다. 국민과 ‘동상동몽(同床同夢)’는 사람들에게 국민들은
박수를 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그림을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같은 편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원수처럼 지내야 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정책을 개발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역을 나누는
것은 다른 지역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특색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학연을 나누는 것은 다른 학교 출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을 사랑하고, 학교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것이 다른 가족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눈물을 닦아 드리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루카 19,41-44
눈물을 닦아드리자.
수능에 임하는 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요즘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마음에
변화된 것은 없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와중에도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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