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
아이러니 · 기지 · 야유 · 조소 등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대한 허무 의식에서 싹터 사회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 기법은 김유정 문학에 이어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태평 천하(太平天下)」와 「탁류(濁流)」에 와서 극치를 이룬다. 평론가 김병익은 채만식에 대해 “경향 문학에 동조하되 결코 카프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프로 문학을 벗어나되 당대의 구조적인 모순의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며, 발랄한 풍자 정신으로 인간과 세태를 묘사하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통철한 비판 정신을 잃지 않은 작가―채옹(采翁) 채만식은 「삼대」의 횡보 염상섭과 함께 30년대 조선의 비극적인 상황을 가장 깊이 인식하고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진보에의 신념’을 끝까지 감추지 못한 대기(大器)의 지성인이었다.”고 평가한다.1)
〈탁류〉와 〈태평 천하〉의 작가 채만식
그는 발랄한 풍자로 세태를 묘사하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통철한 비판 정신 또한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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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다. 보통 학교를 거쳐 1918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보를 나온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채만식은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 나서는 등 활기에 찬 대학 생활을 하지만, 관동 대지진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졸업을 포기하고 1923년 귀국한다. 귀국 뒤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그는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며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 길로」를 추천받아 등단한다. 이후 단편 소설을 비롯해 수필 · 희곡 · 평론 등을 꾸준히 쓰지만 지면에 발표는 별로 하지 않다가 1930년에 접어들며 『별건곤(別乾坤)』에 단편 「병조와 영복이」, 희곡 「낙일(落日)」 등을 내놓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벌인다. 이어 그는 1931년 『동광』에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혜성』에 「화물 자동차」를, 1932년 『신동아』에 단편 「부촌」 등을 발표한다.
1922년 가을 중앙고보 시절의 채만식(뒷줄 가운데)과 급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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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문학 단체나 동인지 활동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작품 속에서 동반자 성향을 보여주던 채만식은 1934년 『신동아』에 풍자적인 수법으로 인텔리의 실직 문제를 다루어 사회 현실을 고발한 희곡 「인텔리와 빈대떡」을 발표한다. 그는 이어 주인공이 실직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자식만은 인텔리를 만들지 않을 결심으로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시킨다는 내용의 단편 「레디 메이드 인생」을 내놓아 ‘풍자 작가’로 주목받게 된다. 이로써 채만식은 함께 동반자 작가 계열로 분류되던 유진오나 이효석 등과 구별된다. 아울러 그는 작품의 바탕에 여전히 사회 비판 의식을 짙게 깔아, 풍자 작가로 꼽히면서도 관능적 분위기가 감도는 단편을 즐겨 쓰던 김유정과도 구별된다.
1935년 채만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개벽사』와 『중앙사』, 다시 『조선일보』로 이어지는 10여 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금광업을 하던 형과 개성 · 강화 · 안양으로 돌아다니며 창작 활동에 매달린다. 이 무렵 그는 일제의 농업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소설 「보리방아」를 신문에 연재하나 곧 검열에 걸리고 만다. 채만식은 「보리방아」의 연재를 중단한 이후 일제 검열 당국을 따돌리기 위해 더욱 은밀하고 세련된 풍자 기법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 「탁류(濁流)」다.
채만식은 단편 「치숙(痴叔)」에서,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일본식 생활을 하는 등 일본에 기대어 출세를 꿈꾸는 ‘조카’의 눈을 통해, 대학을 나오고 사회주의 운동에 얽혀 감옥살이까지 했으면서도 아내를 내쫓고 다른 여자를 들이는가 하면, 얼마 뒤 힘들여 한푼 두푼 모아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돈으로 생활해나가는, 무력하고 위선적인 지식인 ‘아저씨’의 행태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단편 「소망」에서는, 5년 넘게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책만 보다가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간 남편의 현실 불만 행동을 정신 이상으로 간주하고, 의사와 결혼해 사는 언니를 겉만 보고 부러워하는 아내를 등장시킨다.
1938년 채만식은 또 하나의 대표작인 장편 소설 「태평 천하」[원제 「천하 태평춘(天下太平春)」]를 『조광』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말미암은 구속 체험과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체념 섞인 비관주의로 기울면서 신변을 살피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의 작품들을 내놓는다. 1939년의 「금의 정열」을 비롯해, 1940년의 「순공(巡公) 있는 일요일」 · 「냉동어」 · 「회」 · 「당랑의 전설」, 1941년의 「해후」 · 「근일」 · 「집」, 1942년의 「삼화」, 1944년의 「처자」 등이 이런 변화를 반영한 작품들이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그는 장편 「여인 전기(女人戰記)」를 발표하는 한편, 『매일신보』 등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 · 「영예의 유가족 방문기」 등 친일 색채를 띤 잡문들을 내놓는다. 1945년 초, 그는 절필하고 고향으로 가서 술과 마작 등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뒤 채만식은 『세계일보』와 『군산일보』의 문예란 심사 고문을 잠시 지내기도 하지만, 갈산동 셋집에서 가난과 지병인 폐결핵에 묻혀 비참한 생활을 한다. 이런 처지에서도 그는 사과 궤짝을 책상 삼아 1946년에 발표한 장편 「아름다운 새벽」을 비롯해, 해방 전의 친일 행위에 대한 자아 비판 또는 자기 변호류의 글들인 「미스터 방」 · 「맹 순사」 · 「논 이야기」를 집필한다. 이어 그는 1948년에 「민족의 죄인」 · 「낙조」 · 「돼지」, 1949년에 「늙은 극동 선수」 · 「역사」 · 「허생전」 등을 내놓는다. 1950년 6월 11일, 백릉(白菱) 채만식은 들꽃과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탁류」와 「태평 천하」
「탁류」는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돈과 전통적 가부장 제도라는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제목처럼 탁하고 어지러운 이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아니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불안과 절망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는 이 소설에서 남승재와 계봉이를 통해 ‘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선택적인 삶의 욕구를 대비시켜 어렴풋하게나마 앞날에 대한 희망도 예시하고 있다.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일제의 잉여 자본이 흘러드는 군산항을 배경으로 미두(米豆)라는 노름이 성행하던 시기, 군 서기 출신의 정 주사는 미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그는 여학교를 나와 약사가 될 날을 꿈꾸며 약국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던 맏딸 초봉이를 은행원 고태수에게 시집 보내 덕을 보려 한다. 그러나 탐욕과 허위로 뭉친 고태수가 살해됨으로써 초봉이는 약국 주인 박재호와 동거 생활을 한다. 얼마 뒤 초봉이는 그에게서도 버림받고 나중에는 부를 쌓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고리 대금업자이자 꼽추인 형보에게 정신과 육체를 모두 유린당한다. 한편 예전에 초봉이를 사랑하던 남승재는 초봉이와 고태수 사이에 혼담이 오간 뒤 그 동생인 계봉이와 연인 사이가 된다. 남승재는 형보의 손아귀에서 초봉이를 구출하려 애쓰지만, 그 사이에 초봉이가 꼽추 장형보를 죽이고 만다.
일제 강점기의 군산항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그려낸 채만식의 장편 소설 〈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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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동반자 작가’로 불리던 채만식의 「탁류」가 나오자 임화와 김남천 등 계급 문학 진영의 비평가들은 “작가의 내부에 있어서 말하려는 것과 그리려는 것과의 분열”2) 이 느껴지며, 작품의 후반부가 “저조에 빠진 세태 풍속의 지나친 과잉”3) 에 흘러 단지 현실의 표피만 펼쳐놓은4) 세태 소설이라고 비판한다.
채만식의 또다른 걸작 장편 「태평 천하」는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계층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돈의 가치를 신봉해 부를 쌓으나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난날 권세를 부리던 전통적 지주의 삶을 동경, 돈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어 현재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다지려는 계층의 얘기를 담아낸 것이다.
“우리만 빼놓고 모두 망해라.”는 식의 이기심을 가진 윤두섭은 일제 강점기를 오히려 조선이 발전을 거듭하는 태평 세월로 인식한다. 그는 약삭빠르게 격동기의 흐름을 파악해 가난한 소작인들을 등쳐먹는 고리 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뒤 ‘직원’이라는 벼슬을 산다. 그러고 나서 딸을 양반 집안으로 시집 보내는가 하면, 손자 종수와 종학을 군수와 경찰 서장 자리에 앉혀 자신의 신분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시집간 딸은 과부가 되고, 종수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며, 종학마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만다. 이로써 구한말 세대인 윤 직원부터 개화기 세대인 종수와 종학에 이르는 윤씨 일가는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작가 채만식은 이와 같은 줄거리를 당시의 풍속과 특유의 방언, 설화체, 아이러니 등을 총동원해 생동감 있게 엮어나간다. 이로써 그는 「탁류」에 이어 다시 한 번 풍자 작가의 기질을 발휘한다. 그러나 채만식의 이런 풍자를 통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폭로는 「탁류」에서와 마찬가지로 변죽만 울렸을 뿐 핵심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채만식은 거의 평생 동안 가난과 지병의 고통을 안은 채 창작 활동에 임한 불운한 작가다. 그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 10년 넘게 기자로 일하고, 잠시 사립 중학교 교사직을 거치기도 한다. 그러나 워낙 이재에 둔감한 탓에, 특히 전업 작가로 나선 뒤에는, 늘 쪼들리고 끼니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당시 출판사들은 그렇찮아도 박한 원고료를 깎아내리기 일쑤였고, 그마저 제대로 지급하는 곳이 드물었다. 내성적이고 외곬이어서 소설 쓰는 일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던 그는 푼돈밖에 되지 않는 원고료와 금광을 경영하는 형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림을 꾸려간다. 이렇게 가난에 시달리던 채만식은 1950년 6월에 전북 이리에서 늑간 신경통과 노후성 폐결핵이 악화되어 쉰 살을 채우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채만식 문학은 그가 죽은 지 20년 만인 1970년께부터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단편 「소년은 자란다」와 「과도기」, 희곡 「가죽버선」 등이 『문학사상』과 『월간문학』을 통해 차례대로 공개되면서 다시 한 번 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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