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아들 장군의 소천(召天) 길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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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일! 57년 전에 만나 국가간성 육군 장교의 길을 함께 가기 위해 4년간 화랑대 한 생활관에서의 절차탁마를 시작으로 현역에서나 전역 후에서나 애국전선에서 동무했던 동기생이자 동지였다.
그가 2024년 1월16일 소천(召天)했다. 수년간 복합적 병마와의 투병 끝이었지만. 5년 전만 해도 그 옛날 4년간 한 생활관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동기생들의 모임에 정정한 모습으로 나왔었고, 그 동기생들이 지난 12월11일 집으로 병문안을 갔을 때만 해도. 비록 병상에 누운 채로 맞았지만 정신과 의기는 꿋꿋했었다.
실상은 병세가 한참 기울어 머지않은 날의 이별을 예상하고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보길 원해 갔었고, 찾아와 줘 고맙다고도 하고 50년도 넘은 친구 하나하나와의 소소한 옛 추억들도 다 기억하며 웃기까지 해, 친구들이 교가를 합창하면서 감격적이기도 한 기를 힘껏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 친구들의 기에 힘입어 좀 더 견뎌낼 수 있겠구나 다행이라 여겼는데, 기어이 제 길을 가고 말았다.
박영일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해 평생 군인의 길을 걸은 장군이었다. 부친에게 부끄럽지 않는 영예로운 일생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이 길이길이 기리고 있는 항일애국 열혈지사 “박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니 그럴 것이다.
처음 본 게 육사입학시험 고사장이자 지금의 경희궁 자리 옛 서울고등학교 교정이었다. 체력측정 턱걸이를 하는 철봉대 앞에서 본 영일이는 학부형으로 알았을 만큼 어른스러운 외양의 체중 100kg이 넘는 거구였다.
그 거구가 무슨 100m를 달리며 턱걸이 합격기준횟수를 채울 수 있었을까?
화랑대에서 재회하며, 학부형이 아닌 입교수험생이었으며 박열 지사의 아들이란 점도 알게 되면서, ‘아! 낙하산!’ 특례입학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됐는데, 어허! 생도생활 4년을 한 생활관에서 기숙하며 부대끼는 고락을 함께할 같은 중대원이 될 줄이야~!
특례입학에 대한 그 어떤 불편한 감정은 없었다. 애국자의 후손이 영예로운 길을 가도록 기회를 부여한 국가의 조치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함께 하는 내 스스로가 영예로운 일이었다.
박영일은 부친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신이 곧 바랐다. 100kg의 거구가 정신적으로 엄정하고 체력적으로 고강한 연마과정의 생도생활을 잘 이겨내 1학년 하기군사훈련을 마치면서는 76kg의 건강한 청년으로 변모했다. 본인도 힘들었겠지만. 절차탁마의 동무들인 같은 중대 동기생들의 길도 영일이의 핸디캡을 함께 짊어지느라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상적인 구보에서 늘 낙오하는 신세였지만, 결코 중도 포기해 차량신세를 지는 일은 없었고, 구보종점 생도대의 광장 언덕길에선 괴성을 지르며 치고 올라 뛰곤 했다. 그 과정에서 이거 저거 영일이의 군장 한 번 들어주고 메어주지 않은 중대 동기생이 없었을 것이다.
오후 무도시간. 일본에서부터 연마한 검도 장면은 실전처럼 무시무시했다. 죽도로만 그냥 겨루는 게 아니라 밀어붙여 쓰러뜨리며 자빠진 상대생도를 향해서도 정말 죽일 듯이 소리치며 가격한다. 바로 사무라이의 모습이었다.
입교 당시는 모습만 비대했었던 거다. 열혈지사 부친의 열혈의 혼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최근년의 영화 박열과 그에 따른 여러 매체 기사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육사입교는 그냥 특혜의 낙하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돼 조국으로 돌아왔던 부친은 북한공산군의 남침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서 머물다 납북되고 말았고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1948년생인 박영일이 19세가 되던 해 북에서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달랑 한 장의 사진 뒷면에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란 한마디를 남겼고, 그 한마디를 쫓아 고교시절까지 일본에서 보냈던 아들은 부랴부랴 입시공부를 하고 육군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 과정은 결국 비범한 것이었다.
생도생활을 하는 동안만 해도 조국의 말과 글이 한참 서툴렀다. “ㅇ” 발음과 받침 발음이 온전치 못했다. 이제 생각하니 시인이기도 했던 부친을 닮아선지 문학적이기도 했었구나 하고 생각된다.
눈 내리는 날의 고요한 정경을 한자(漢字)투성이 일본어로 시(詩)를 쓰고는 당시 편집부 기자생도이던 나에게 뜻을 전하며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임관 후 보병병과 나와 기갑병과 영일이는 친교하지 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 둘 다 정보전선에서 복무하게 되면서 통신을 통한 교감의 길이 제법 자주 열리게 됐었다. 전역을 얼마 두지 않고 보내준 국가차원의 정보 방략에 대한 글은 공감되며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공개 못할 전문분야의 것이기에 사라졌다. 영일이도 나도 실현하지 못한 시절의 시대적 상황이 지금도 아쉽다.
전역 후엔 남아연방공화국에 선교사로 나갔었다. 아들에게서 전해 들으니, 이후로는 장군출신이란 점을 감추고 겸손과 봉사의 길만을 걸었다고 한다. 너무나 정결했다.
국가에서 받을 혜택 같은 것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답답할 지경이기도 했다. 군인정신만 내세우고 건강을 자만해 부인이 하려고 한 실비 의료보험 같은 것도 들지 못하게 하더니, 말년에 위장과 신장이 고장 나면서 입 퇴원을 상시로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고, 애꿎은 부인만 생고생 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박영일이 갔다. 장군출신 국가의 간성으로서 국립 서울현충원으로 모셔졌으니 마땅한 것이고 영예로운 길을 갔다 할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 한심하고 아쉬운 심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내는 길의 모습이 뭔가 2% 정도가 부족해 보여서다. 세상이 달라지고 제도도 달라지며, 현충원 관리가 국방부에서 보훈처로 변경된 상황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별도의 장군 묘역이란 것이 없어지고, 진열장 형태의 충혼당으로 다 모셔진다. 장군과 부사관 출신이 나란히 이웃을 한다. 꼭대기에는 주먹만 한 꽃이라도 헌화하려면, 무거운 사다리차를 옮겨다 놓고 올라가야 한다. 동년배이니 7~80세 나이의 친구로선 힘들기도 위험하기도 한 현실이니 어쩌랴?
자택 방배동 근처 병원 응급실에서 운명했다. 장례식장 빈소가 마련되지 않아 다음날에야 빈소가 차려져 4일장으로 됐다. 현충원 안장 신청에 그 어떤 혜택도 없이, 동기생들이 알아봐 준 절차대로 민간인 아들이 현충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다음날 출근한 담당공무원과 통화해서 안장절차를 밟았다.
장군 출신인데, 소년시절 일본에서 자라. 군문에서도 일본으로 되 건너가 일본을 무대로 참 중요한 별도의 애국활동에 복무했는데, 더욱이 애국지사의 아들인데, 의장대가 출현하는 의장행사 같은 것도 하나도 없다. 빈소에 보내진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검정 조기가 다이다.
유해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서울추모공원으로 옮겨져 화장되고 현충원으로 가는 길목의 자택에 잠시 들린 후, 현충원으로 들어서 애국지사 묘에 들려 여기에 모셔진 부친께 신고? 인사를 드린 후, 1충 혼당으로 가 창구에 접수하고 한참의 순서를 기다린 후, 제례당 태극기 아래 영정을 두고, 가족들의 영결인사와 동기생들의 경례를 받고 제2충혼당 2층 608호 위에서 두 번째 사다리를 타야만 마주할 수 있는 진열장 안으로 들어서고 끝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고? 글쎄~ 민주시대 평등시대 인권시대의 바뀐 세상에서 합리적인 제도를 통해 이뤄지는 한 군인의 장례절차가 어떻다고 불만이 있다는 것이냐? 하니 할 말은 없다만.
57년 인연의 동기생이냐 아니냐를 떠나, 나라는 엘리트들이 이끌어야 하고 엘리트이든 아니든 능력과 공헌에 따라 나라에서 베푸는 처우도 달라져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신을 가진 나이기에 그렇다.
이제 누가 존중받을 명예를 안고 나라를 위해 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려 할 것인가? 누가 그런 영웅이 되고자 할 것인가? 나라도 걱정이다!
동기생으로서 더 멋진 장례를 갖춰주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의 괜한 감상(感傷)에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현충원을 나서니 뒤통수가 한참이나 당겨지더라는 이야기를 여기 이런 글로 남기나 보다. 박영일 장군! 잘 가시게!!
2024년 1월21일
故 박영일의 동기생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