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사회의 허위의식
우리가 흔히 ‘미개’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는 단순사회에서는 영아(嬰兒. 순우리말로는 ‘젖먹이’ - 옮긴이) 살해 관습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미개 단순사회에서 영아를 살해하는 관습은 대체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남자아이보다는 (어른이 된 뒤 아기를 배고 낳을 수 있는 - 옮긴이) 여자아이가 살해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비인도적이며 야만적인 관행으로 보이는 이와 같은 관습에 접하게 되면, 우리는 현대사회와 원시사회의 차이를 문명과 야만, 또는 이성과 야성으로 대비시키는 단순논리에 빠지기 쉽다. 또 문화적 우월의식과 편견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은 온당치 못할 뿐 아니라, 다분히 위선적인 것이다.
영아를 살해하는 관습은 미개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아버지가 - 옮긴이) 자기의 자녀를 죽이는 것이 용인되었고, 많은 문명사회에서도 기형아의 출산 직후 살해는 정당화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영아 살해에는 공공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미개사회의 영아 살해는 대부분 제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 있다. 그에 반해 문명사회의 영아 살해는 숨겨져 있는 양상을 띤다. 현대사회에서 유아가 학대되고 영양실조로 인해 죽는 현상은 영아 살해의 숨겨진 형태다.
이에 더해 대규모로 자행되는 인공유산은 영아 살해 관습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특히, 뱃속의 아기가 딸일 경우 낙태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일종의 성차별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남미의 한 부족과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 야노마뫼족의 여아 살해
여자아이를 살해하는 관습으로 유명한 집단은 남미의 야노마뫼 족(族)이다(‘야노마뫼’는 ‘야노마모’나 ‘야노마미’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야노마뫼족은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접경의 아마존 강 유역 열대우림 지역에 사는 부족인데, 마을 단위로 산재해 있는 집단들 사이에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져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부족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인류학자인 나폴레옹 샤그논의 보고서에는 촌락간의 고도로 잔인한 전투가 잘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토로포 테리 마을의 남자들은 그들의 동맹자인 이웃 야마호 테리 마을의 매복에 참가했다. 이 두 집단은 걸어서 나흘씩이나 걸리는 먼 곳에 사는 코바리와 테리 사람들을 야마호 테리의 축제에 초청했던 것이다.
초청객들이 아무 의심 없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습격을 하여 다섯 사람을 피살하였다(죽였다 - 옮긴이). 몇 주일이 지나서 토로포 테리와 야마호 테리의 남자들은 다른 동맹자들의 원조를 받으며 코바리와 테리를 다시 침공하기 위한 험한 여정에 올랐다.
야노마뫼족은 끊임없이 집단간에 전쟁을 벌인다고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샤그논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인류학 관계로 현지조사를 하느라 머물고 있던 마을이 저녁에 습격을 받아서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늘어놓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야노마뫼족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전쟁의 구체적인 목적은 경작지의 확보나 과거 공격에 대한 보복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언제나 공격의 저변에 깔려 있는 목표는 여자의 약탈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쟁이 잦은 (야노마뫼 족의 - 옮긴이) 여러 마을에서는 성비(性比, 여자 100명당 남자의 수)가 148까지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자연상태에서의 성비는 어느 인구집단에서나 대체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인구학자들에 의하면 출생시의 성비는 105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연령층에서나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그리고 더 일찍/더 자주 - 옮긴이) 사망하기 때문에, 성비는 100을 유지하는 경향이 보편적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야노마뫼족은 여아 살해 관습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여아 살해 관습은 여자아이의 수를 인위적으로 줄였고, 그 결과 성비가 148까지 높게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인류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야노마뫼족과 같은 단순사회의 여아 살해 관습을 이해하는 데는 생태인류학 분야의 문화유물론자들의 이론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문화 유물론자들에 따르면, 야노마뫼족의 여아 살해 관습은 아마존 열대우림이라는 생태계에 적응하는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야노마뫼족 수준의 기술체계를 갖는 사회(쇠붙이를 직접 만들어서 쓰지 못하고 바깥세상에서 들여와야 하며, 농경은 화전이 전부인 사회 - 옮긴이)에서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통제하는 수단이 없다면, 열대우림 생태계의 균형은 쉽게 깨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성 단백질의 결핍현상을 크게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태계 자체의 파괴를 가져와 결국 모든 집단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효율적인 인구조절 수단이 필요한 것이고, 여아 살해 관습이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여자아이가 자라서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여자아이를 죽여서 그 수를 줄이는 것은 인구를 줄이는 수단이 된다 - 옮긴이).
실제로 시스킨드나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 같은 문화유물론자들은 아마존 사회들(아마존 원주민 사회들 - 옮긴이)을 비교한 자료들을 통해 인구밀도와 단백질 획득 가능성, 정착유형, 그리고 집단간의 갈등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아 살해를 통한 인구의 통제는 인위적으로 여성의 부족 현상을 발생시키며, 이는 남자들을 끊임없는 침략과 혈투의 와중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역으로(逆으로 → 거꾸로 : 옮긴이) 인구를 분산시켜 소규모 주거지(작은 마을 - 옮긴이)를 이루며 살게끔 한다. 그리고 이 정주(定住) 유형은 생태계의 균형을 깨지 않고 최소한의 동물성 단백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아 살해로 인한 성비의 불균형과 야노마뫼족의 혈투는 아마존 유역 생태계에 적응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한국의 남아선호사상
얼마 전(최협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서기 1996년에 이 글을 썼다 - 옮긴이) 정부가 발표한 남/북한 인구통계 중에는 퍽 흥미로운 차이가 발견된다. 북한(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 - 옮긴이)의 경우 남녀 모두 평균 수명이 남한(한국 - 옮긴이) 사람들보다 훨씬 짧으며, 남성보다 여성이 약간 많다. 이에 비해 남한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수명의 차이는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남한에서 성비의 불균형이 나타난 것은 남한사회가 갖는 문제점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감회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남한의 성비는 현재(서기 1996년 - 옮긴이) 약 107 정도로 일견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6년에서 1990년 사이에 출생한 유아들(서기 2015년 현재, 이들은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살이나 서른 살이다 - 옮긴이)의 경우는 112로 성비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것을 다시 출생 순서에 따른 남녀 성비로 세분화할 때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금방 드러난다.
1988년(이 해에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 6 공화국이 세워지고,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 옮긴이) 한국 전체 출생아의 성비는 113이다. 이를 출생 순서별로 살펴보면 세 번째 출생아의 성비는 173, 네 번째는 199.5로서 자연상태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물론 인공유산(‘낙태’라고도 부른다 - 옮긴이)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의학기술의 발달로 초음파검사나 양수검사를 통해 태아의 성별감식이 용이해졌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김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방법들을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아무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태아의 성감별을 하는 경우는 아들이면 낳고 딸이면 유산을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인 성비는 우리 사회에서 태아 감별과 그에 따른 여아에 대한 체계적인 인공유산이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계속 심화된다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지금 벌써 초등학교에서는 여학생이 부족해서 짝을 맞출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결혼할 연령이 되는 2000년대에는 여자가 부족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1988년도의 성비 구성을 기초로 계산을 하면 그들이 결혼할 2010년도에는 신부감 100명에 신랑감이 125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성비 불균형 추세가 심화된 경향을 고려해 추계를 하게 되면 신부감 100명에 신랑감은 150명을 상회하게 된다는, 다소 지나치게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요즈음처럼 태아 성감별 ‘범죄’가 계속해서 성행한다면, 사태를 낙관적으로 볼 수 없음이 확실하다.
(이 글이 쓰인 지 19년이 흘렀다. 한국의 성비는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상황은 19년 전보다 더 심각해졌다.
『시사 IN』지의 ‘천관율’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몇 번 들쭉날쭉하던 출생 성비는 1983년 들어 107.3으로 다시 자연 성비 범위를 벗어난다. 이후 성비 왜곡이 그야말로 폭주했다. 2006년까지 무려 24년 연속으로 남아 비율이 자연 성비를 초과한다. 가장 심했던 1990년에는 성비가 116.5까지 치솟았고, 성비가 110을 넘긴 해도 13번이나 된다. 남자 10명 중 1명은 짝이 없는 거대한 남성잉여세대가 탄생했다.”
게다가 “1983년생은 올해로 32세이다. 남성 평균 초혼연령이 32.4세이니, 이 남성잉여세대의 맏형도 아직 연애 시장에 머물러 있다. 이후로도 4반세기 동안 남성잉여세대가 연애 시장에 진입할 것이고 잉여 남성은 시간이 갈수록 누적된다(천 기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남성잉여세대의 맏형 그룹이 포함된 30~ 34세(2010년 조사에서는 25~29세)에서는 남자가 6만7000명이 남는다. 이 연령대 남성 인구의 3% 정도다. 그다음 세대부터가 본격적인 잉여 축적 세대다. 25~29세에서 남자는 19만5000명이 남는다. 남성 인구의 12%다. 20~24세 그룹에서는 21만4000명, 11.7%가 남는다. 연애 시장의 핵심 연령대인 20~34세에서 잉여 남성 숫자가 47만 명이다. 그나마도 이 수치는 과소평가되어 있다. 인구 총 조사에서는 25~29세 구간에서 남성 인구가 갑자기 줄어드는 현상이 1990년 이후로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인구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 세대 남성 인구의 이동성이 높아 총 조사에 제대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잉여 남성 인구가 실제로는 47만 명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천 기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높은 성비, 그러니까 연애와 결혼을 하지 못하고 가정을 이루지도 못하는 남성이 늘어나면 범죄율이 높아지고 사회가 거칠어지고 잔인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천 기자가 인용한 마라 비슨달 기자의 책 『남성과잉사회』도 지적한 문젠데, 비슨달 기자에 따르면 “성비가 1% 높아지면 범죄율이 5~6% 올라간다(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홍콩 중문대학의 공동연구 결과).” 한마디로 “중국의 젊은 남성이 늘어난 것만으로 전체 범죄 증가의 3분의 1을 설명할 수 있다.” 한국도 이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더해 ‘문화적 성비 붕괴’ 현상도 관찰된다. 여자보다 남자가 결혼에 더 적극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2012)에서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와 ‘하는 편이 좋다’를 합친 비율이 남자는 67.5%였던 반면 여자는 57%에 그쳤다. 한국의 연애 시장에서는 생물학적 성비 붕괴 위에 ‘문화적 성비 붕괴’ 10%포인트가 추가로 붙는다(천 기자).”
“결혼 회피의 성별 격차를 만들어낸 범인은 가부장제의 압력일 가능성이 높다. ‘시댁 또는 처가 중심의 결혼 생활이 부담스러워서 결혼을 회피한다’라는 설명에 비혼 여성 중 72.2%가 찬성했다. 비혼 남성 중 찬성 비율은 49.4%였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이중 공급과잉 상태다(천 기자).”
그럼 왜 예전에는 이런 문제가 안 일어났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이에 대한 천 기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남성잉여세대의 선배 그룹인 1970년대 이전 출생 세대도 남초 성비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배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았던 ‘덕’을 보았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결혼을 더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천 기자).”
독신을 ‘강요’당하는 한국 남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절망적이다. 서기 2015년 현재 “남성잉여세대의 맏형들”은 젊은 한국 여성들의 연애/결혼 거부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제 막 들어섰고, “그 뒤로도 25년 동안 동생들이 줄을 서 있다(천 기자).” 치열한 경쟁은 피할 수 없을 테고, 그 과정에서 범죄나 비도덕적인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라운 일은 못 된다.
일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한국보다 가난하거나 약한 나라 출신인 젊은 여성들을 (그들의 부모나 결혼중개회사에게) 돈을 주고 데려와서 결혼하지만 - 이 과정에서 연애감정이나 자유의지는 끼일 틈이 없다 - , 지난 15년 동안 한국인 남편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을 고집하다 못해 미성년자인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고집하거나, 외국인 아내에게 욕을 퍼붓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종처럼 부려먹거나, 모욕하거나 감옥의 죄수처럼 가두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 개탄스럽게도 그들의 어머니, 그러니까 외국인 아내의 시어머니까지 이 일을 막지 않았다! - 이에 분노한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성단체들이 외국인 아내와의 이혼을 종용하고 “이런 결혼은 막아야 한다. 비도덕적이고 절대 허락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캄보디아나 베트남이나 필리핀 정부도 “앞으로는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을 중개하거나 추천하지 않겠다.”며 결혼 조건을 더 엄격하고 까다롭게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에, 국제결혼도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참고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인 남성’에 대한 호감도는 아주 낮다. 내가 2년 전 한국 언론사의 기사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인 백인 여성인 ‘니콜라 권’ 씨가 누리그물에서 ‘한국인 남편[Korean Husband]’이라는 말로 자료를 뒤져 봤더니, “온통 부정적인 것뿐”이었고 “한국 남편과 문화를 비난하는 아내들의 글”이라서 안타까웠다고 한다.
또한 내가 2년 전『서울신문』에서 읽은 기사에 따르면, “근처의 이성친구들을 찾아주는 미국의 유명 데이트 앱인 '아 유 인터레스티드'(Are you interested, 이하 AYI) 측이 사용자 240만 명의 이성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흑인 여성은 (다른 남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흑인 남성을 데이트 상대로 고르지만, 백인/아시아인/라틴계(라티노. 라틴아메리카계) 여성은 백인 남성을 데이트 상대로 고르고, (황인종을 포함한) 아시아인 남성이나 라틴계 남성은 고르지 않았다.(이와는 반대로, 아시아인 남성은 라틴계 여성을 골랐고, 흑인/라틴계/백인 남성은 아시아계 여성을 골랐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 나는 7년 전, 네이버 회원인 ‘speed910hun’씨의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 따르면 “미국의 한 사이트에서 했던 조사”에서 “인종간 성[性] 궁합도가 가장 나쁘게 나온 경우”가 “백인여자”와 (한국인을 포함한) 황인종 남성의 결합이었다고 한다. 그는 “[흑인이나 라틴계나 백인인 여성들이 황인종 남성의 사진을 보고]‘남자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대답한 사실”을 말해주고 그것이 “동양남자에 대한 가장 많은 답변으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7년 전 ‘상속녀’라는 다음 넷 회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털어놔야겠다. 그는 “한국남자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서양여자들 사이에선 안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까닭을 “이민자들”이건 “유학생”이건 가릴 것 없이 “거칠고 객기 부리는 게 멋있는 일이나 자랑인줄 알고 그러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종종 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서양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는 동양남자는 거의 없”는데, 백인 여성, 그러니까 “서양여자들은 그냥 거의 80% 같은 나라의 백인남자를 선호”하고, 나머지 “15%는 유럽계나 남미계~ 5%가 성공한 동양계”라고 한다.
또한 내가 8~9년 전에 들은 말에 따르면 북아메리카의 백인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을 잘 알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데, 그 까닭이 한국인[또는 한국계] 남성들이 여성을 때리고, 걸핏하면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고, 여성을 종처럼 부려먹는 족속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남성이라면 지금까지 읽은 글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참고 읽어보시기 바란다.
내가 2년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흑인이나 백인 여성들이 황인종 남성을 꺼리고 싫어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자기들보다 키가 작거나 비슷하고[여성은 자기보다 키가 큰 남성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어깨 폭이 좁아서 여자 같고 남자다운 매력이 없다[여성은 자기보다 어깨가 넓고 떡 벌어진 남성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 누리꾼은 내게 “[미국에서는] 우리 [황인종] 남성들을 남자로도 안 보기 때문에, 흑인 여자가 방에 들어와서는 한국인 남자가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훌렁 옷을 벗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간다. 그런 일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이 그린 자전적인 만화에서도, 학창 시절 자신이 마음에 들어했던 백인 소녀에게 구애했다가, 그에게 “우리의 ‘우정’이 깨지는 게 싫으므로”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너 이가 튀어나온 걸 보니 문제가 있어. 병원에 가서 수술 좀 받아봐.”[황인종, 특히 북방 몽골로이드는 흑인이나 백인에 비해 이가 크고 특히 대문니는 크고 길며 앞으로 비스듬히 튀어나왔는데,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했던 사실이 나온다.
미국 백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프랑스 백인 여성들도 선입견을 품고 있다. 나는 몇 년 전 신문에서 프랑스 백인 여성이 쓴 글을 읽었는데, 그 여성은 고국에 있을 때 친구 - 물론 같은 백인 여성들이다 - 들에게 “어쩌면 난 한국인 남자하고 결혼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더니, 그들이 울고 화를 내며 “너 미쳤니? 만약 그랬다가는 넌 남자의 집안에 붙잡혀서 노예처럼 집안 일만 해야 할 테고, 아기를 줄줄이 낳아서 그 아기들을 키우느라 아주 비참하게 살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1년 전에는 ‘TV의 연속극이나 가수들의 공연에서 본 잘 생기고 자상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한국인 남자들’에 감동해서 필리핀에 찾아온 한국인 남성과 사귀었다가, 자신이 아기를 배었다는 것을 알자 기겁하고 한국으로 달아나서 연락을 끊어버린 그 남성 때문에, 이제는 한국과 한국인 남성에 대한 분노만 남아 있게 된 필리핀의 젊은 여성을 다룬 신문기사가 나왔다.
베트남인 아내를 때려죽인 한국인 남성의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이젠 뉴스거리도 안 되고 있고, 농업노동자가 되어 한국의 농촌에서 일하던 캄보디아인 여성을 한국인 농장주가 성추행하고 희롱한 일이 도마에 오른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이게 현실이다. 한국 남성들은 자신들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 누리 사람들의 분노를 산 한국 남성들이 공격당해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터지기를 기다리는 시한폭탄이며, 만약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미래의 한국사회도 오늘날의 중국사회와 마찬가지로 범죄율 증가와 사회 동요라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옮긴이)
▶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미개사회’라고 부르는 야노마뫼족은 공공연하게 여아를 살해하고, 외견상 잔인하며, 그 결과 역시 전쟁과 같은 야만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반만 년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여아 살해 관행이 은폐되어 있다. 의학기술을 동원해 외견상 ‘합리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으로 여아를 살해하고, 그 결과 또한 쉽게 예견할 수 없는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아를 살해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술(여기서는 먹고사는 문제를 푸는 방법인 여름지이를 하는 방법 - 옮긴이)이 발달하지 못한 단순 사회인 야노마뫼족은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해, 즉 (다른 사회의 도움을 받거나, 교역이나 피임 같은 방법으로 인구증가라는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 옮긴이) 소규모 집단이 자기생존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여아를 살해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측면을 갖는다.
이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자행되는 선별적이고 대규모적인 인공유산은 집단의 생존 문제와는 무관하다. 유교에 기초한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도가 남존여비 및 남아선호사상을 뿌리내리게 하였고, 그것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여아를 살해하고, 비정상적인 성비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야노마뫼족보다 더 ‘야만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야만’과 ‘문명’의 진정한 의미를 되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인류학에서 말하는 자민족(自民族) 중심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에 대한 논의를 떠올리게 된다.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어느 사회의 사람들이나 자기들의 행동양식이 가장 자연스럽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다고 한다. 낯선 집단의 신념이나 관습들은 그것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고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며 경멸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자민족 중심주의’라 부른다.
자민족 중심주의는 자기집단 성원들간의 결속을 강화시켜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문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인 자민족 중심주의는 다른 문화의 풍요로움과 지식을 ‘불필요한 것’으로 거부하게끔 유도한다. 나아가 그것은 민족 차별(또는 인종차별/종교차별/지역차별 - 옮긴이)과 집단간의 분열 및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자민족 중심주의의 극단적인 예는 문화적 제국주의다. 문화적 제국주의는 한 집단이 그들의 문화를 다른 집단에게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데, 근대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근대 이후 유럽의 식민주의 세력은 식민지 주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개사회’를 ‘문명화’한다는 허울로 문화 이식(移植. 옮겨서[移] 심다[植] - 옮긴이)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류는 너무나 많은 공동의 유산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아마존에서 발견한 ‘미개사회’는 ‘슬픈 열대’였던 것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민족 중심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자민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이 관점은 각 문화를 그 자체의 맥락에서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극단적인 문화적 상대주의 역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집단들의 문화적 방식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인류학에서 중요시하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원시사회를 ‘야만적’ 혹은 ‘미개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현대인의 편견일 뿐이다.
- 최협,『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49 ~ 59쪽
- 출처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최협 지음, ‘풀빛’ 펴냄, 서기 1996년 초판 펴냄, 서기 2009년 개정판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