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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아주 대단한 고문기술자군요......깡패! 지금 민주당 정권 망하면 이런꼴 또 당한다. 이정권 과거청산 못한것 두고두고 후회될거다, <신동아 99년 9월호, 정형근의원의 서경원 전의원, 박노해 시인 고문광경.> ―생각보다는 건강해 보이십니다.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속으로 곯아서 그렇지』 ―유선호의원이 얼마 전 국회에서 서의원 방북사건 때 정형근 당 시 수사국장이 서의원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의 연루사실에 관해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 나 정의원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는데 어느 게 진실입니까. 『내가 참, 지난 일이고 인간적으로 창피하기도 해서 말 안하려 고 했습니다만, 신문을 보니까 정의원측에서 「어떻게 국회의원 을 때릴 수 있었겠느냐」고 합디다. 그 말 참 잘했습니다. 그래 요, 어떻게 일개 수사국장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원을 때릴 수 있습니까.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나는 아직도 그런 위선이 혹시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말하렵니다』 ―조사를 받던 조사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89년 6월 무렵 남산의 안기부 건물 지하 6층인 가 3층에서 조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지하를 빙빙 돌아 3~4평 남짓 되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창문이 없어 햇볕이 안 들어오니까 저녁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어려웠어요. 들어가자 마자 옷을 다 벗으라더니 군복바지와 러닝셔츠 하나만 입으라더군요. 처음 1~2시간은 아무 말도 안 시키고 쥐죽은 듯 침묵을 깔아놔요. 그 러다 갑자기 「잘 생각해봐」로 시작해서 「야, ××자식아」 정 도는 보통이고…. 수사관 7명이 3교대로 돌아가면서 나를 맡아 잠을 안 재우고 몇날 며칠 수사를 계속하는 데 그 사람(정형근의 원)이 가끔 들르더라구요. 그 때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요. 가끔 들러서 부하들에게 「뭐 새로운 거 나왔느냐」 하고 묻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 똑바로 다뤄」라고 분위기 를 잡곤 했어요. 난 말 그대로 짐승 취급당한 겁니다』 『때리는 것은 내가 말도 안해요』 ―정형근국장으로부터 직접 조사를 받은 것은 언제입니까.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부하 직 원들을 다 내보내고 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어요. 저녁 9시 15분 부터 시작해서 새벽 1시 45분까지 맞았어요. 나는 맨발 벗고 의 자에 앉아 있었는데 정의원이 구두 신은 발로 내 발등 위에 올라 서서 한 바퀴 빙글 돌며 지근지근 밟았어요. 발로 가슴과 어깨를 걷어차기도 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그렇게 때리더라고요. 나중에는 지쳐서 때리지도 못합디다』 ―당시 조사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밖으로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나요. 『아무도 없고 소리쳐 봐야 저만 불쌍한 놈이 되죠. 바닥엔 카펫 이 깔려 있고 벽에는 방음장치가 다 돼 있는데다가 지하인데 소 리쳐봐야 어디 들리기나 하겠어요? 욕실이 하나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막 쏟아지니까 재떨이로 하나 받 아내고, 양재기로 한번 받아내고 바가지로 받아내고 모두 세 그 릇을 받아냈어요. 아이고, 때리는 것은 내가 말 안 합니다. 솔직 히 남자끼리 때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피를 세 바가지나 받아낸 것은 때린 정도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양반(정형근 국장) 당시엔 아주 몸이 좋았어요. 가벼운 옷만 입고 내려왔었는데 마음껏 때 렸어요. 그런 사람이 지금 신성한 의회에 가 있다는 게 역사의 현주소라는 생각을 해보면 인간적으로 허탈감, 배신감을 느낍니 다. 정의원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떠나서 말입니다』 ―누가 피를 받아냈다는 말입니까. 『정의원이 갖다 대더라고요』 ―무조건 때리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처음엔 느닷없이 종로사건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당시 내가 이 해찬(李海瓚)의원 그리고 농민들과 같이 행진하다가 돌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어요. 당시 내가 일부 농민의 과격행위를 말리러 갔다가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져 고려병원에 이송됐는데 정의원 은 「이 ××, 왜 너 우리 경찰이 하지도 않은 일을, 경찰이 돌 을 던져 찢어졌다고 해서 경찰을 골탕먹이느냐고 해요.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그런 얘기를 꺼냈어요』 ―방북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떤 심문을 받았습니까. 『먼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야, 서경원, 나하고 같이 살 자. 나 좀 살려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살려주는 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북한 3번 갔다 온 것 다 안다. 자백하라」는 거예요』 ―3번이라고요? 『예, 나는 한 번밖에 갖다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내가 「근거가 있으면 대라. 나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왔다」고 얘기했 어요. 그랬더니 「이 ××, 근거가 있다는데 건방지게 누구한테 대라 말라 하느냐」면서 그때부터 주먹이 날아오기 시작한 거죠. 그 다음에는 「너는 김대중이 꼬붕이니까 사실대로 안 불면 내 손에 죽는다」면서 「방북 전에 김대중이가 시킨 것과 갔다 와서 김일성이가 전해주라고 한 것, 그리고 가져와서 전해준 것, 즉 지령을 밝히라」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진술했습니까. 『그런 것 없다고 했죠. 난 사흘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 앞에 가서 간첩남파 중단과, 대남 과격방송의 금지, 88 올림픽에 대한 북한측 참가 등을 요구했다고 그대로 진술했어요. 그랬더니 정의원은 「이 ×× 거짓말한다. 묻는 말에나 답변하라. 넌 분명 평양에 3번 갔다. 김대중이 (사전에) 지시한 문서내용이 뭐냐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말 안하고 갔다 왔다」고 다시 말했죠. 그랬더니 말도 점점 거칠어졌어요. 이 자리에서 내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자식아」 정도는 준수해요. 난 그렇습니 다. 그래도 잘났든 못났든 간에 국민이 직접 뽑아준 국회의원인 데, 존대말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나올 수 있는지. 그래도 박세직씨가 안기부장 할 때는 그렇게 심하게 안 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안기부장이 바 뀌고 나서 아주 심해진 겁니다. 아마 박세직씨가 제대로 조이지 않는다고 (안기부장을) 바꾼 것 같아요. 현역의원이 이 정도로 당했다면 일반 국민들이야 어땠겠어요』 『내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리 못할 것』 ―사실 그때 서의원이 소속된 평민당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이었 는데 총재에게 아무런 보고 없이 갔다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갈 때나 올 때 당과 일절 연계없이 갔어요. 안기부나 검 찰에서도 핵심적인 쟁점이 그것이었어요. 그래서 모 언론에서는 나를 또라이나, 소영웅주의자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서의원께서 북한의 돈(5만 달러)을 받아서 김대중총재에 게 (1만 달러를)전달했느냐 여부도 큰 쟁점이었죠. 『돈은 내가 통일사업을 위해 (북한측에) 달라고 했어요. 그 부 분은 당시 내가 모두 진술했고 다 조사받았어요. 안기부측은 7월 17일 이를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으로 발표해버렸어요. 그러 더니 검찰로 송치된 뒤 재판과정에서 검찰측이 느닷없이 「그 가 운데 1만 달러가 김대중씨에게 전달됐다」고 나왔어요. 검찰에서 사나흘 동안 그 문제로 얼마나 나를 조여대고 비서관들을 다 죽 일 정도로 몰아치는지, 검찰조사에서는 내가 일단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주었다는 검찰측 요구대로 자백했어요. 그랬다가 재 판에서는 이를 전면부인한 거죠』 ― 김총재에게 1만 달러를 전달한 것은 사실입니까. 혹시 선물이 라도…. 『일절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려면 5만 달러 다 주지 치사하게 왜 1만 달러만 주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 ―안기부에서는 1만 달러 전달 여부를 추궁받지 않았습니까 『안기부에선 그냥 공작금 5만 달러 받았다는 진술만 받아낸 거 지. 그러나 정형근씨가 「김대중의 지시」 등을 자백하라고 어찌 나 두들겨 팼는지 다음날 아침 거울에 내 얼굴을 비쳐보니 기자 양반 양복처럼 (멍이 들어) 까만 색이 돼버렸더라고. 고문 앞에 는 천하장사가 없어요. 내가 하고픈 말을 하기라도 하면 즉각 주 먹이 날아오니까. 설사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우선 숨을 쉴 수 없으니까 일단 숨은 쉬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 에 굳이 더 버틸 생각도 안 들어요. 내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고 평양을 갔던 것도 아닌데 내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위해, 북 한에 갔다 왔는지는 살아서 얘기해야겠다는 생각뿐이더라구요. 다음날부터 의사가 와서 상주하면서 매일 아침 약을 먹이는데, 내가 안 먹으면 강제로 먹이곤 했어요. 안 먹을 수 없는 공포분 위기였어요. 나중에 검찰로 넘어가서 내가 「강제로 약을 먹었다 」고 했는데 신문을 보니까 당시 안기부장이 「소화가 안 되서 소화제를 주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더라고. 허허』 서 전의원은 지금도 날씨가 궂으면 머리와 가슴 등이 쑤시고 아 프다고 호소했다. 서 전의원은 『제가 일반 농민이라도 그렇게는 못하는 겁니다. 문제는 서경원 개인을 때린 것이 아니고 통일운 동 세력에 대해 매질을 한 그 사람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면서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때 가혹하게 군 사람이 정의원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됐 습니까. 『90년엔가 그 이듬해인가 내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때에 어느 신문에서 정형근씨가 무슨 큰 대공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 는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데 이번에 풀려나와 보니까 국회의원이 돼 있더라고요. 법적으로 는 몰라도 고문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아주 긴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법 이전에 역사의 심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끔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이 당했다는 가혹행위 상황을 털어놓 은 서 전의원은 최근 정국의 뜨거운 쟁점이 된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과 관련한 고문논란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 혔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아마 고문했다는 증거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아요. 고문은 없어져야 하고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야 합니 다. 이것은 내가 어느 쪽과 인연이 있었느냐와는 상관없어요. 반 (反)인간적 행위는 없어져야 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합 니다』 서 전의원이 자신의 사건과 관련해 무엇보다 분노를 느끼는 대목 은 『서울법대와 검사 출신의 양식 있는 엘리트가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을 때리고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낼 수가 있느냐』는 것 이었다. 또한 『정의원이 나름대로 국가안위를 위해 직무에 충실 하다 보니 생긴 불상사 아니겠느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국가 안위가 달린 문제일수록 철저하고 증거 위주로 처리하는 것이 직 업인의 윤리 아니냐』고 반문했다. 헌법과 법률이 있고 3권분립 이 있는데 공권력이 고문을 해서 사건을 두드려 맞추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부분적 인용 ..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지난 8·15특사로 풀려난 노동 자 시인 박노해씨는 정의원에 관해 서 전의원과는 또 다른 차원 의 기억을 갖고 있다. 91년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씨가 안기부에 검거돼 남산 안기부 청사로 끌려간 것은 그해 3월12일. 50여명의 수사관들이 24시간 3교대로 심문했다. 옆방에서는 심문 사항을 감청하다가 진술중 어떤 단서가 나오면 요원들이 즉시 현 장으로 뛰어가곤 했다. 조사현장에는 절대로 안기부 직원을 혼자 놔두는 법이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3명 이상이 따라 붙었 다. 고문은 15일 정도 이어졌다. 나중에는 입이 마르고 침 대신 피가 나왔다. 날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장엔 하얀 방음벽이 덮여 있고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책상 위엔 고무판이 깔려 있었다. 죽는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동맥 그어 보름쯤 됐을까. 헛소리가 다 나왔다. 조사는 1초의 생각할 시간 도 주지 않고 계속됐다. 일제 CASIO 전자수첩에 나온 전화연락 번호의 당사자들을 대라는 대목에서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있었다. 보름쯤 되던 날 오른팔로 거울을 깨서 왼팔 동맥을 그었 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 7바늘이나 꿰맸다. 지금도 그 흉터는 남아 있다. 피를 흘리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그날 이후 거울이 사라졌다. 자살 기도를 막기 위해서다. 상처를 수술하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수사관들이 긴장하기 시작 했다. 수사를 할 수 있는 시한이 구속된 뒤 20일간인데 조사가 기대했던 만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평화롭게 서류나 꾸미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럴 무렵 군대 사령관이 사열 나오듯 수사관들이 긴장했다. 조사 현장을 지휘하던 남자까지 기립한 가운데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가 정형근 대공수사국장이라는 사실을 박씨가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정국장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 조사실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사노맹의 최고책임자가 누구냐?』 『나와 백태웅이 실질적인 공동대표입니다』 순간 정국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쾌하다는 투였다. 『조직이나 권력에 수뇌가 둘일 수 있는가. 너는 대학도 못 나왔 고 너의 시나 글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 모든 수사관들이 기립해 있는 가운데 정국장은 권위를 잃지 않으 려는 듯 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톤을 낮추었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 느냐. 다 남들이 써준 거지』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젖은 출세주의자의 눈에는 「공돌이」 가 조직을 이끈다는 것이 이해될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박씨의 머리를 스쳤다. 박씨가 희미하게 웃으며 쏘아 붙였다. 『그럼 이 나라에 미국유학을 갔다 온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왜 육사출신 밑에서 밥을 빌어 먹고 있습니까』 이 말에 화가 치민 듯 정국장은 『임마, 나도 육사출신이야』라 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조사실을 나가 버렸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숨죽이고 지켜보던 수사관들은 안 됐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끝났다. 마지막 얘기에서 처신을 잘 했으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이젠 사형이다』 『사장님(정국장을 지칭) 말처럼 스파르타쿠스는 죽어야 해. 카이사르끼리는 얘기가 통할 수 있지 만』 『너는 설령 사형을 면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국장은 운동권 출신이라도 자신의 출신 학교인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는 것 이다. 그러나 박씨가 스파르타쿠스와 카이사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나서였다. 정국장의 엘리트주의 계급주의 기준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스파르타쿠스가 바로 「공돌이 박노해」였다는 것을. 야간고를 겨우 나온 「무지렁이」가 이대 출신 명문가 여인과 결 혼하고, 명문장의 시도 쓰고 이념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사회적 파문까지 일으키니, 이런 놈은 정국장의 기준에서 볼 때는 죽어 야 마땅했다는 것을. 구속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조사실을 나서게 된 박씨는 수사관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 고문의 기억을 역사에 남기고 싶지만 감정은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박씨의 경우 정형근의원으로부터 직접 가혹행위를 당한 일은 없 다. 다만 정의원은 이미 고문을 당해 심신이 피폐해진 박씨에 대 해 인간적 모멸감을 주어 심리적인 자포자기를 유도하려 했다는게 박씨 나름의 분석이다. 출처_ http:gukae.com/jh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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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 부터 한나라 파괴공작 들어 갑니다....쭈.............욱...................
기렇지요 여의도로 놀러오소 직장이 여기라 아주 편해요 ㅎㅎㅎ
정형근 ..크.킄 이런넘~을 죽자 사자 뽑아 주었던 위대한 시민들이 있었죠.. 부산시민들 화~이팅!
읽기 힘들어요.
정형근~~ 참으루 대단 하고 그 지역 역시 대단한 투표권을 가지셨네요,,,
미안합니다
정형근이 국회의원 당선때 사용하는 연장은.......지역감정,빨간물감,김대중적대감,....잊지도 않는다 2000년 총선에서 [절뚝바리 가 대통령이라고....] 눈 아파 못읽었슈...이놈은 제거 1 순위로 충분합니다.
읽기 힘들어요,,222
나쁜 넘인줄은 알았었는데...진짜 이런 인간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는지 이해가 안되는 군요..
눈이 아퍼..아퍼.. ~~!!! 나쁜넘...진즉 알고 있던대롭니다,,ㅠㅜ
음...글 읽기가 넘 힘들어요...ㅠㅠ
글이 너무 빡빡해서 읽기가 힘들어요... 띄어쓰기 해주 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