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일지 -8. 라임 주스와 의자매 결성
FULLMOON
-8.
8월 6일, 그날 밤 11시.
내일 아침이 되어도 바람이 불지 않을 경우 폭발을 일으켜 그 힘으로 구지까지 날아가기로 결정한 그 날 밤. 사흘 가까이 배 위에서만 있었던 탓에 함대 전체에 가벼운 괴혈병이 찾아왔다.
“함장!!!!”
바다 위에 떠 있는 함대가 모두 크게 흔들렸다. 그 배 위를 선원 한 명이 빠른 속도로 달려 1호 앞에 섰다.
“함장!! 일어나 봐요!!”
[응?!]
갑판 위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선실에서 자던 일행 모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큰일 났어요! 선원들 모두 괴혈병에 걸린 것 같아요!!”
[‥!!]
첼로의 눈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오래 전 한 소녀가 걸려 있던 병도 그 병이었다. 그렇다. 10년 전 자신이 태어났던 나라를 잃어버리고 뗏목에 온 몸을 유지하며, 식량도 끊겨버린 상태에서 몸 속 에너지 조달이 제대로 안 되지 않고 더더욱 비타민C가 부족해 괴혈병에 걸렸고, 그 상태로 10일 버티다가 항구 앞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첼로에게 발견됐었다.
그 소녀가 바로 “문” 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미가 중얼거리며 선실을 나왔다.
“괴혈병이면 수진과 토니가 만든 그 가루약 사람들에게 돌리면 되는데, 어떻게 먹는 거지?”
선실 옆으로 다른 동료들도 나왔다. 막 나온 첼로가 연구실에서 나오는 토니를 불렀다.
“아, 토니! 라임 가루약 어떻게 먹어?”
“물에 타서 마시면 돼. 모두 서둘러 진료실로 가자. 첼로는 스피커를 통해 선원들을 모두 갑판 위로 올라오라고 해줘.”
“알았어!”
토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첼로는 마이크 폰을 켰다.
“모두 일어나!! 일어나서 갑판으로 나와 있어!”
[알았습니다!]
선원들은 일제히 대답하며 우르르르 갑판으로 올라왔다. 잠을 잘 때는 모자를 쓰고 자는 스타일의 수진은 눈을 비비며 냉장고 위의 컵에 물을 붓고 약대의 가루약을 꺼내어 컵에 조금 붓고 젓가락으로 저었다. 가루가 다 녹았는지 토니는 그 컵을 문에게 건넸다.
“이거. 한 모금씩 마시라고 전해줘. 20명은 마실 수 있을 거야. 수진, 우린 어서 가루약을 만들자.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미는 가루를 물에 타면 돼. 조금만 타도 돼. 유리병에 숫자 있지? 거기서 10씩.”
“어, 알았어. 그럼 첼로와 로빈, 쉘과 문은 컵을 가지고 갑판으로 올라가줘.”
“한 모금씩만 마셔도 되거든.”
나미의 말에 수진이 덧붙였다. 나미에게서 컵을 건네받은 쉘이 막 선실을 나가려고 할 때 웬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잇몸에서 피가 나!!]
“릴리?!”
일행이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릴리의 외침은 계속 되었다.
[의사!! 의사 어딨어!! 나 잇몸에서 피가 난단 말이야! 죽을 것 같다고!!]
“멍청이. 괴혈병으로 죽으면 항해사들 다 죽겠네?”
짜증 섞인 얼굴로 투덜거리던 문은 자신의 긴 금발머리를 흩날리며 선실을 나갔다. 갑판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갑판 위에서 난리를 치는 릴리의 뺨을 짝 때렸다. 함장의 뺨도 아무렇지도 않게 때리는 그녀가 왕녀라고 가리라는 법은 없을 터. 뺨을 맞고 얼이 나가 있는 릴리의 귀에 문의 차갑고 거친 말소리가 들어왔다.
“시끄러, 너. 그리고! 왕녀라고 한번만 더 거들먹거리면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아가씨, 등을 굽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너 누구편이야, 포어!!”
자기편을 안 들어주는 호위기사 포어가 미웠는지 되려 화를 내는 릴리를 그가 잠자코 말렸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공주마마께서는 좀 누그러질 필요가 있으시옵니다. 그 건방진 말투가 싫고 거슬린다고 마이틴 대륙의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래서? 이 내가 상선함대밖… 히익?!”
챙-! 전투가 아닌데 문이 검을 꺼내드는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다. 검날을 릴리의 목에 댄 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말했지. 한번만 더 거들먹거리면 정말 죽여 버린다고. 죽여줄까? 내가 왕녀 왕자 같은 거 따질 것 같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그녀의 지금 말투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첼로가 싫어하는 만큼 문 역시 왕녀라고 거들먹거리는 족속을 제일 싫어했다. 릴리는 문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 코코넛 왕국에 가기만 해봐. 사형 시켜버릴 거야.”
“호, 그래? 직위상으로 따졌을 때, 네가 높을까 아니면 세계해군정부가 높을까?”
“뭐?”
하지만 릴리에게 문은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문은 입가의 조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한 나라의 왕녀보다는 세계의 바다를 지키는 해군정부의 직위가 훨씬 더 높아. 우리 배는 그런 해군정부의 부름에 따라 제 2바다에 있는 본부에 가야 한다고. 근데 내가 코코넛 왕국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정부에서는 해군기지에 연락해서 코코넛 왕국을 치라고 할 걸?”
그 때 문의 손에서 장검이 사라졌다. 소리 없이 다가와서 문이 든 장검을 빼어든 사람은 함장 첼로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배에서 너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 그 차이가 뭔지 말해줄까?”
“그 차이가 뭔데?”
“우리의 태도, 다시 말해 문의 태도야. 문은 함대의 동료로 받아들인 자의 주머니는 화끈하게 몽땅 털어버려. 경제권을 쥐고 있는 자의 행동이지. 로빈 역시 동료로 합류하고 3일도 안 돼서 갖고 있던 보석까지 몽땅 받혔다 ㅡ만약 그걸 헌납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ㅡ 고 하더군. 근데 넌? 문이 너한테 가지고 있는 자금 내놓으라고 한 적 있어?”
“…….”
없었다.
첼로단에 오른 지 오늘로 나흘째이지만 문은 자신에게 자금 달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첼로단에게 있어서 그녀는, 릴리는 동료가 아닌 그저 “손님” 에 불과했다. 허리에 찬 검짐을 풀어 첼로에게 뺏긴 검을 아래에서부터 넣으며 문이 물었다.
“웬일로 강하게 나오시네, 오라버니?”
“나도 강하게 나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의미에서?”
“내일 아침은 2인분 먹으면 안 될까?”
“흠-. 생각은 해볼게.”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입이 나오기 직전인 첼로를 문이 웃는 얼굴로 다독였다. 질투가 날 일이지만 문은 무표정의 싸늘함과 웃을 때의 환함은 정말 사람을 달라보이게 했다.
“…….”
릴리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뜻도 다르고 남매도 아닌데 같은 배 위의 동료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상당히 친한 첼로와 문의 모습을-
“얼른 대답해, 얼른.”
“생각해본다니까? 그러니까 그만해.”
문은 손으로 첼로의 어깨 아래를 살짝 때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자. 내려가서 라임 주스 돌리자.”
“어-”
문의 말에 이어진 첼로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라임 주스를 나눠주고 괴혈병이 모두 가라앉자 시간은 벌써 새벽 3시. 갑판을 오르내리며 왕복을 꽤나 한 탓에 첼로들의 몸은 사우나를 한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문! 목욕하러 가자! 로빈은 미안하지만 밖에서 망 좀 봐줄래? 웃딘과 첼로 때문에 말이지.”
“그래, 알았어.”
로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에 잠시 선실에 내려가서 옷과 수건을 챙기고, 추가로 책도 한 권 챙긴 로빈과 같이 목욕탕으로 향했다.
“근데 나미, 왜 나만 끌어들인 거야?”
“얘기 좀 하자고.”
배 뒤쪽에 있는 여자용 목욕탕으로 간 그녀들. 로빈은 밖에 남아 책을 보면서 망을 보고, 나미와 문은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나미, 로빈을 밖에 있게 한 이유는 뭐야? 같은 여자니까 상관없는 거잖아. 그렇다는 건 동료 남자들의 속 외에도 로빈 모르게 단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는 게 되는데?”
“후훗! 역시 너다, 문.”
문의 추리 아닌 추리에 나미는 싱긋 웃었다가 말았다.
“문. 너 정말 복수를 끝내고 나면 배에서 내릴 거야?”
“…….”
나미의 물음에 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나미는 등 중간에서 그쳐 물 끝에 살짝 젖은 자신의 흑녹색 머리카락을 만지며 다시 말했다.
“대답이 듣고 싶어, 문.”
“글세. 내리고 싶기도 하고, 안 내리고 싶기도 하고.”
문의 말에 나미가 말했다.
“나야 어차피 태어난 곳도 돌아가야 할 곳도 <바그리든> 이기는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서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첼로단에 합류한 거야.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면 전 세계를 돌면서 더 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듣기로는 부모님이 있다고-”
“하하핫! 양부모님이야.”
그렇게 말하는 나미의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맺혔다. 사실, 문에게는 비밀이었지만 그녀 역시 알게 모르게 양가에 편지를 넣고 있었다. 그리고 양부모로부터 답장도 오고 있었다. 모두 입 밖에 내는 건 아니었지만 각자의 집에 편지를 하는 것이다.
“좋겠네, 나미는. 자신을 키워주는 부모님이라도 있어서.”
문의 고개가 조금씩 숙여졌다. 감겨진 눈가 사이로 이슬이 맺히는 걸 나미는 볼 수 있었다.
“문.”
“그래. 난 돌아갈 곳이 없어. 그런데 왜? 그런 내가 불쌍해? 넌 내가 불쌍하니!?”
“-! 문! 그런 거 아냐.”
나미는 눈치 챘다. 지금 자신의 태도와 말로 인해서 문이 속에 숨겼던 “분노” 라는 감정이 확 터진 것을. 언젠가는 터질 걸 예상했다. 그래서 오늘 살짝 건드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표 안 나게 쉬쉬하고, 뒤에서 조용히 편지 붙이고! 모르는 것 같지? 그럼 내가 고마워할 것 같지? 아니야, 아니라고!!”
“문.”
“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사람들이 싫어! 날 겪어봐서 아는 동료라는 자들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 할 거면 당당하게 해!! 그런 식으로 사람 가슴에 화살 더 꽂지 마!!”
“…….”
말릴 수 없는 걸 알아챈 나미는 그냥 입으 닫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알게 모르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첼로들이, 네가. 토니가. 부러웠어. 그리고 질투가 났어. 아침 7시가 되면 배 위에 도착하는 신문배달부나, 아니면 도시에 있는 새들을 이용해서 이렇게 저렇게 본가에 편지를 붙이는 동료들이. 애완견을 키우고 있지만 그뿐이야. 내게 하리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니까.”
“…….”
“가족이 없다는 게,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게 날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데!! 근데... 동료라는 녀석들은 쉬쉬하면서 날 불쌍하게 여겼다고 생각하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 미칠 것 같다고!!”
“문.”
나미는 팔을 뻗어 문을 품에 안았다. 둘의 봉긋한 가슴이 서로 닿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울어. 울어도 돼. 다 뱉었니?”
“흑-!”
“울고 싶은 만큼 울어. 울어도 돼.”
나미의 어깨에 기댄 채 문은 그렇게 펑펑 울었다. 밖에서 책을 보고 있던 로빈의 시선이 살짝 문으로 움직였다.
“나랑 의자매할까? 친구 겸 언니. 때로는 서로 아양도 떨 수 있는.”
“…….”
“앞으로도 계속 동료로 함께 할 거니까, 자매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지금의 양부모님께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문이라면 금방 적응될 거야. 내가 편지로 의견 물어볼게.”
“그래도- 돼?”
“물론이지!”
문의 망설임을 한꺼번에 떨쳐주는 나미의 끄덕임이었다.
“고마워. 기다리고 있었어.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한 번쯤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고마워. 고마워, 나미.”
“그러니까 내리지 마. 네 목적을 달성해도, 그냥 배에 있는 거다? 우리도 수교라는 걸 건너보자.”
“윽! 나미. 너 목적이 그거야?”
“하하하하! 난 계획한 거 다 얻었어!”
나미의 웃음에 의해 문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줄어들 때쯤 탕문이 확 열렸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미와 문의 시선이 동시에 열린 탕문으로 향했다. 동시에 넋이 나간 상황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로빈이었다.
“어머.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
“아, 로빈!”
문이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문밖의 로빈을 불렀다.
“나도 의자매 해줄게, 문. 난 가정이 있기는 하지만 무남독녀거든. 형제가 없어서 솔직히 외롭기는 해. 너희만 좋다면, 나도 그 의자매에 들어가고 싶어.”
“응! 언니도 와요!”
“후훗, 고마워!”
나미의 문의 끄덕임에 로빈은 윙크로 대답했다.
음-
또 진도가 느려지는 듯?!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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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Star.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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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 대항의 시대할 적에 라임쥬스가 생각나는 군요 괴혈병엔 라임쥬스!
예, 그 라임이 그 라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