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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보위에 오른 덕종(1016~1034. 재위 1031~1034)은 부왕 현종이 이룩해놓은 안정된 정치적‧
군사적 기반 위에서 명민하게 통치했다.
즉위 2개월 뒤 측근 장극맹을 병부상서에, 유소를 병마원수에 제수하여 가장 먼저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로 백관들을 대거 교체했다. 거란과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 안정화에도 신경을 썼다. 즉위년 윤10월에는 국자감에 시험제도를 도입하여 국자감을
차츰 KAIST급 명문대학으로 성장시켰다.과거제도도 강화하여 계속 유능한 인재들을 요직에 제수했다.
덕종은 거란이 제3차 침입 때 잡아간 고려 백성들을 돌려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즉각 국교를 단
절했다. 1031년 정월에는 거란이 사신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하고 압록강에 놓여 있던 다리
도 철거해버렸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3만 명의 국군포로 귀환문
제에 입도 벙긋 못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에 비하면 훨씬 줏대 있는 왕이었다. 덕종은 병마원수
유소에게 명하여 거란과 맞대고 있는 국경의 성곽을 일제히 정비하여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다. 덕종
의 과단성 있는 조치에 감복한 거란 관료들은 1032년 3월에 20명, 4월에 27명, 6월에 53명이 차례로
귀순해왔다. 덕종은 이부(吏部)에 명하여 이들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로 채
용하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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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강경조치와 관리들의 망명에 자존심이 잔뜩 상한 거란은 1033년 10월 압록강을 건너와 정주
에 침입했지만 고려군에게 초전박살이 나서 패주했다. 거란의 마지막 고려 침입이었다. 정치‧군사‧경
제‧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원만하게 국정을 수행하던 덕종은, 어릴 때부터 워낙 병약하던 터라 1
034년 9월 각중에 중병이 들자 동복아우 평양군에게 선위하고 18세에 승하했다. 즉위한 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덕종은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다섯 왕비를 두었는데, 그 중 제2비와 제5비 사이에 각각 딸
을 하나씩 낳았다.
제8대 현종의 차남인 정종(1018~1046. 재위 1034~1046)은 친형으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았는데, 그
역시 부왕인 현종이 이룩해놓은 안정된 국정기반 덕분에 평탄하게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백성들
은 태평성대를 누렸고 국경은 평온했다.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개경과 서경에서 잇달아 팔관회를 개
최하고 大사면령을 내려 관료와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내외가 안정된 시기였으므로 부패한 교
육부장관 김상곤, 무능한 식품의약품안전처장 류영진 등 몇몇 장관만 축출하고 덕종 대의 내각을 그
대로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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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은 거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사절단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국교 재개는 계속 미루었다. 덕종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에도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이는 거란이 남의 나라 장성 축조를 중단하라
마라 간섭했기 때문이었다. 거란은 덕종이 요청한 지 7년 만인 1038년 4월에야 납치해간 고려인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정종은 비로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해주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요나라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
국교 재개에도 불구하고 정종은 장성 축조를 계속하여 승하하기 2년 전인 1044년,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공했다. 천리장성은 거란과 여진의 침입뿐만 아니라 비적(匪
賊)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며 민가에 노략질을 일삼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야만행위까지 차단했다. 천
리장성은 백성들에게 정신적 안정을 주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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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9년에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하여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인 자녀는 대를 이어 노비가
되도록 했다. 이 악법은 조선조까지 지속되어 수많은 노비 출신 천재들에게 신분의 족쇄를 채웠다. 1
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제정하여 장자에게만 호주 자리와 함께 모든 재산을 물려주도록 했다. 이
역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까지 지속된 악법이었다. 내 아버지는 지차로 태어난 죄
로 논밭 한 뙈기 물려받지 못한 채 땅부자인 큰아버지 밑에서 머슴살이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 좌파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고집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라는 개념도
모르는 파벌주의적 주장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좌파의 원조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좌파들이 세운 좌파들의 나라라는 인식이다. 국가는 국민‧영토‧주권을
갖춘 집단을 말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통성 있는 국가
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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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은 28세인 1046년 5월 중병이 들자 이복동생인 낙랑군에게 선위하고 편안하게 승하했다. 재위 1
1년 8개월 만이었다. 정종은 5명의 왕비로부터 4남 1녀를 얻었다. 족내혼이 많았던 선대왕들과 달리
왕비들은 모두 족외혼이었다. 정종의 4남 가운데 보위에 오른 아들은 아무도 없었다. 왕비 가운데 제
1비와 제2비는 친자매 간이었으며, 제5비는 궁녀로 들어왔다가 빼어난 자색 덕분에 정종의 승은(承
恩)을 입은 뒤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 않고도 비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그녀가 정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늘 함께 붙어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녀의 미모가 ‘청보리밭의 신부’ 이나
영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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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요일 마다 아파트 한켠에서 시장이 서는데 얼마전 부터는 절반이상으로 줄어들어 먹거리 몇곳만 눈에 띄여 물어보니 장사가 안되어 거의 접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이런 영세 영업이야 원래 종업원없이 장사를 하고있어 최저임금과는 무관해도 일반적인 경기가 많이 침체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많은 정책들이 친노동 반기업 색채가 강한 탓도 영향을 미치는것 같습니다. 곳곳 장미가 피어난 길을 많이 걸으시며 즐겁게 보내는 일상을 만들어 가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