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돌아가시자 괘종시계가 멈췄다
긴 긴 하루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료한 탓이었을까
어머니는 꼭, 괘종시계만을 고집하셨다
삼십 년 넘도록 벽에 기대 함께 살아온
세이코 시계는 목소리도 거칠어지고
밥 한술 뜨고 나서야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어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만만한 아범을 불러서 수시로 밥을 주자니
아들의 불만도 서서히 원을 따라 돌았다
건전지를 한 번만 넣어도
오랫동안 제 본분을 다하는 디지털시계
뻐꾸기 소리 정겨운 그런 시계도 지천인데
하필 제 구실 성치 않은 불알시계
툭하면 허기져 늘어지는
늙은 시계의 심줄을 조이라 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쉰 소리 들리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아들 딸 서울 가고 아내 없어 혼자 사는 날
방 한구석에서 아직도 벽을 기대있는
그 늙은 괘종시계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어머니 마음
죽어서 살아야 할 그 길고 긴 적막강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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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기를 그만둔 자들……
고대 희랍인들이 인식한 사자(死者)들이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그 세속화된 불교의 세계관 같은 그러한 사생관(死生觀)은 박봉준에게서는
어머니 돌아가시자 멈춘 괘종시계로 촉발되어 오고감도 없다는 원래의 불교적 시간관과
그 사생관을 일상의 짧은 에피소드와 그 직관적인 단상(斷想)을 통하여 육화(肉化)시킨다.
죽는 것을 '입적(入寂)'혹은 '적멸(寂滅)'이라고 표현하는 영혼들을 생각하면
박봉준의 시적 직관은 반딧불이다.
반딧불은 그 배경이 어둠일 때만 빛나는, 그리고 현존하는 생명이 내는 빛 아닌가.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같은 박봉준의 이 「적막강산(寂寞江山)」은
결국 우리 모두의 실존적 고독이며 그 시적 정각(正覺)인 것이다.(행갈이 임의로 수정했음)
꽤 먼 거리를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밟히는 것이 모두 날카로운 유리 조각 아니던가요? 가신 만큼 한참을 되돌아 나오셔야 할텐데 그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동행이 없으니 외롭기도.... 하나 적막강산을 언제 맛 보겠습니까. 시야가 확 하고 넓어지시기를 ......
첫댓글 담담히 말했을 뿐인데 감동이 괘종시계 종소리처럼 가슴에서 울립니다. 거듭 축하합니다.
꽤 먼 거리를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밟히는 것이 모두 날카로운 유리 조각 아니던가요? 가신 만큼 한참을 되돌아 나오셔야 할텐데 그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동행이 없으니 외롭기도.... 하나 적막강산을 언제 맛 보겠습니까. 시야가 확 하고 넓어지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