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뿌리를 생각한다
박 현 기
담장을 타고 오르는 장미의 붉은 색깔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들이다. 툭툭 지는 목련과 후루룩 날리는 벚꽃이 삶의 허무를 곱씹게 하더니 어느새 장미가 만발하여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코로나로 열지 못했던 장미축제가 다시 열렸다며 TV에서 연일 화려한 화면을 내보낸다. 전국이 들썩거린다. 활기로 충만한 오월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출근길에 나선다. 산 아래의 조금 후미진 동네지만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이 골목이 나는 좋다.
골목 초입 쓰레기봉투 두는 곳에 카네이션 꽃바구니 하나가 동그마니 버려져 있다. 쓰레기봉투에 담지 않았기에 미화원이 수거하지 않았나 보다. 꽃은 이미 시들고 쪼그라들었지만, 바구니는 아직 깔끔하고 “어버이날. 감사합니다.”란 리본도 선명하다. 깨끗한 장식품에 담겨 있어서일까 시든 카네이션이 더 시들고 초라해 보인다. 뿌리 없이 떠돌다 끝내 세상에서 밀려나 버린 어느 남루한 인생이 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왠지 모를 연민이 인다. 낡고 오래된 빌라들만 있는 동네라서, 집만큼이나 늙은 사람들이 많은 동네라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른다.
곰곰이 헤아려보니 어버이날 지난 지 이십여 일이 흘렀다. 이 골목 누군가의 집 어느 젊은이가 그날 제 부모에게 드린 것인가 보다. 카네이션 바구니 들고 와서 같이 둘러앉아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갔는지, 택배로 보내고 통장에 얼마간의 용돈만 송금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만, 시들었다고 밖으로 밀려난 꽃을 보며 알 수 없는 연민이 치솟는 것은 나도 늙어가는 부모 중의 한 사람이라서 그럴까. 현재의 내 모습과 가버린 부모님 생각이 불현듯 밀려온다. 자식일 때와 부모일 때의 이율배반적 심리를 요즘 참 많이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어느 집에서 나온 것일까. 속절없이 늙어가는 세월과 세태에 대한 연민이 일다가 버린 사람에 대한 분노가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버리려면 최소 리본이라도 떼든지, 쓰레기봉투에라도 담든지, 아니면 자식의 성의를 생각하며 곱게 말렸다가 장식으로 쓰든지 하면 오죽 좋았으랴. 요즘 꽃값도 비싸다는데 저렇게 골목 입구 쓰레기 더미에 그냥 팽개치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기상천외한 가족 간의 불화가 워낙 많은 세상이지만, 부모라면 한 번쯤 더 생각해서 실행할 일이었다. 부모의 행실을 자식이 따라 배우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평소엔 도통 연락 없다가 그날 하루 꽃바구니 들고 불쑥 나타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자식이 답답했을 수도 있고, 늙고 능력 없는 부모 돌봐주지 않는 젊은 자식이 야속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되었든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젊은 날 내가 뿌린 만큼 자식에게서 거둔다.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꽃에게 화풀이한 것이라면 그 인연은 일찌감치 정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리라. 어찌 보면 부모가 자식을 버린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생각하면 자식이 부모를 버린 것 같기도 하여 심란하다.
요즘 세상에 부모 버리는 자식도 많고 자식 버리는 부모도 많으니 구석구석 쌓인 남의 사연을 내 어찌 알랴마는 가볍게 흥얼거리던 노래가 쑥 들어가고 나 혼자 괜히 종주먹을 흔들며 심각하다. 버려진 꽃바구니에 내가 담긴듯한 착각에 빠진다. 내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부모든 자식이든 꽃을 가꾸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 수는 없을까. 오월의 장미가 저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 것은 뿌리가 그만큼 튼튼하기 때문이리라. 버려진 저 카네이션 바구니는 차라리 인지장애로 앞뒤 분간 못하는 노인의 무심한 행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필문예》 제22집, 2023. 수필문예회)
-------------------
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영남수필문학회 수필미학문학회 회원.
수필문예회장 역임.
수필집 “민들레 피는 골목”
대구수필문예대학 10기 수료.
dst10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