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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을 주름잡은 한국영화들의 특징은 중견 감독의 실험성과 신인 감독의 안전성으로 요약된다. 이는 한국영화의 지형도가 뒤바뀜을 나타낸다. 또 도시 남녀의 사랑 밀고 당기기와 순정, 신파로의 회귀는 올 한국 영화계의 풍속을 드러내는 두 가지 길이었다.
12월에 출간된 글 모음집 <박찬욱의 몽타쥬>에는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박찬욱 감독의 글과 글로 쓴 인터뷰들이 수록되어 있다. 셀프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을 가져와 자문 자답하는 내용 중에는 웃음 짓게 하는 대목이 많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대중이 싫어하는 이유는 뭔가요?” “여러 면에서 그렇지만 가장 치명적인 건 유독 한국의 기자, 비평가들이 중시하는, 이른바 ‘완성도’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난 돈 많이 들여서 잘 다듬어진, 명배우의 열연이 돋보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전개되며 기술적으로 한 치의 흠도 없는 ‘웰메이드’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터뷰의 기능은 감독이 만들어 가는 영화들 사이에 놓여 있는 궁금증 해소이므로, 지금의 박찬욱 감독에게 옛말을 따져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2005년에 선보인 <친절한 금자씨>는 웰메이드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을 어김 없이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비약적인 화면의 전환과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스토리 영화와는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당시의 시대상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중은 <친절한 금자씨>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05년을 사는 대중들의 취향이 변화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박찬욱 감독은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웰메이드 영화와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었다는 말인가.
2005년 한국영화 시장에서 다수의 관객을 사로잡은 작품은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과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이었다. 두 영화는 명배우의 열연이 돋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전개되는 ‘웰메이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속의 자문 자답하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명세 감독의 <형사>의 흥행 참패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형사>는 올해 개봉된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과 취향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호화로운 캐스팅과 상당한 제작비 그리고 TV로 먼저 제작된 원작 만화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요소와 매끄러워질 수 있는 조건을 고루 갖췄지만 <형사>는 이 모든 것을 배반하면서 나아간다. 대중적인 제작 여건을 갖추지 않았으면서도 더욱 깊숙이 자신의 영화 속으로 들어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은 컷을 줌으로 대체하고, 영화 속의 영화라는 형식을 선보이면서 ‘탐구하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의 대규모 홍보전 속에서 스타가 설 자리는 있어도, 감독의 개인적인 비전이 설 자리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예외적인 영화였다. 대중영화를 위한 매끄러움을 위반하면서도 많은 대중들과 만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개인적인 비전을 피력하는 영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타감독이라는 영화 바깥의 요인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올드 보이>의 칸 영화제의 수상 이후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과 경향은 모방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단편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들의 영화 속에서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것은 홍상수의 아류라고 불리었던 일상의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선보이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올드보이의 추억>과 같은 제목에서부터 확연하게 다가오는 박찬욱의 영향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다수의 관객들에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2005년의 어떤 영화보다 많은 관심과 해석의 사례를 낳았고, 그의 영화는 이해하고 싶은 주요한 목록이 되었다. 한 편의 영화가 관심을 끄는 것은 박찬욱 감독의 표현한 대로 작품의 ‘완성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뒤섞이면서 한국영화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풍경을 위한 한 장의 지도
2005년의 한국영화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위해 앞서 언급한 다섯 편의 영화를 두고 한 장의 가이드라인을 그려보기로 하자.
(1)<극장전>, <형사> --- (2)<친절한 금자씨> --- (3)<말아톤>, <웰컴 투 동막골>
단순한 지도여서 상상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2005년의 한국영화의 주요한 틀을 보여 준다. 먼저 오른편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3)에 해당하는 것은 상반기와 하반기를 주름 잡은 올해의 흥행작이다. 동시에 두 편의 영화는 신인감독의 데뷔작이었다. 그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1)의 영화는 중견감독의 영화다. 2005년에 선보인 한국영화 중 절반 정도는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으로 채워졌다. 90년대부터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신인감독들의 무수한 등장은 한때 한국영화의 새로움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그러나 사정은 점차 달라지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신인감독의 영화가 흥행에서는 몰라도 한국영화의 새로운 예로 부각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에 반해 흥행이나 명성을 경험한 중견감독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명세 감독은 <형사>를 통해 영화라는 인공 낙원의 절정을 드러낸다. <형사>의 빛과 어둠이 갈린 골목길에서 검을 든 남녀 주인공이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흥행의 목적이 아니라 예술가의 목적을 드러내는 야심찬 시도일 것이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드라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는 보고, 듣고, 느끼는 지각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근본주의 정신의 선언이다. 홍상수의 <극장전>이 보여 주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삶을 모방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전작과는 달리 예술을 모방하는 삶의 단면을 짚어내고 있는 점이다. <말아톤>이나 <웰컴 투 동막골>은 현재와 과거로부터 경험해 온 삶의 일면들을 영화의 양식을 바꿔놓은 예이다. 그것은 대중 영화에서 친숙한 화술이고,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내기에도 유용하다. <말아톤> 흥행은 자연스럽게 각종 언론에 자폐인의 문제를 제기하는 창구 역할을 했고, <웰컴 투 동막골>은 보수 언론의 시비로 인해 한국 사회의 잔존하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촉발시키면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질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극장전>은 주인공 동수가 선배의 단편영화를 관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한 편의 영화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 밖에서 만난 동수와 여배우는 단편영화를 모방하듯이 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삶은 단편영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수는 영화의 몇몇 모티프를 제공한 것이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여배우는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삶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부터 키스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삶으로부터 예술을 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부터 삶을 배워야 한다는 태도는 “생각하며 살자”는 동수의 마지막 대사로 마무리된다. 오늘날 동수의 대사는 너무나 철학적인 대사가 되어버린 것일까.
여기에 박찬욱의 영화까지 포함하면 이들은 다양한 제작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명세 감독은 자신의 명성을 밑천 삼아 제작비를 투자받을 수 있었다면, 홍상수와 박찬욱은 자신이 만든 영화사를 통해 자본을 끌어들였다. 박찬욱의 명성은 이영애와 같은 스타를 캐스팅하고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지만 홍상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이들의 영화가 각기 다른 것처럼 세 명의 감독들은 다른 조건에서 자신의 비전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의 문제도, 시스템의 문제도 아닌 결국 영화만들기의 철학이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중요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견감독들은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적인 비전으로서의 영화를 가능케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기회가 신인들에게 주어지기란 영화 산업 시대에 쉬운 일이 아니다.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가 막대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송강호와 유지태라는 두 배우의 참여를 통해 가능해졌다. 덕분에 영화의 규모는 커졌지만 임필성 감독의 원래 시나리오는 곳곳에서 수정되어야만 했다. 기획된 수많은 영화에 동원되는 신인감독들은 매번 자신의 의도와 요구 사이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2005년 여름 공포 영화는 예년처럼 신인들의 격전장이었다. <가발>, <첼로>, <여고괴담 4: 목소리>는 가장 관습적인 장르인 공포영화와 신인감독들이 만난 사례였다. 관습적인 장르와 신인감독의 만남은 한 마디로 어색했다. 관습에 충실한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렇다고 관습으로부터 이탈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가발>을 만든 원신연 감독은 단편 <자장가>와 <빵과 우유>를 통해 데뷔 전부터 촉망받는 감독이었다. 이것은 비단 원신연 감독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는 많은 단편영화감독들이 흥행을 끌어내야 하는 충무로에 와서는 과거의 이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일정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올해 흥행 감독이자 각종 영화제를 휩쓴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과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이 손쉽게 만들어 질 수 있는 기획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실존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말아톤>의 자폐인 묘사는 상업 영화가 선뜻 손을 내밀기에는 어려운 소재의 선택이고, 원작 연극이 있기는 했지만 <웰컴 투 동막골>의 분단과 화합이라는 소재는 분단이라는 무거운 이데올로기를 대해야 하는 부담이 동반된다. 두 감독은 상업적인 안정성보다는 위험성 있는 소재를 선택하고 돌파해 나가면서 2005년 한국영화의 스타가 됐다. 그러나 이들 영화가 가족주의와 민족 화합이라는 안전한 그물 속에서 마무리되는 영화라는 사실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신인들의 영화 속에는 도표의 좌측에 해당하는 ‘영화란 무엇인가’를 향한 근본주의자의 물음이 없다. 이러한 질문이 지루하게 되풀이될 때 영화 산업이 휘정거리고,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소지는 있겠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이러한 질문이 동반되지 않을 때에 미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중견의 실험성과 신인의 안정감은 뒤바뀐 한국영화 문화의 지형도를 보여 준다. 소수의 독립영화는 배급의 기회를 맞이해도 극장을 잡기가 어렵거나 많은 젊은 감독들의 장편 신작이 영화제용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현재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자괴감이 드는 것은 동세대의 젊은 감독들과 함께 갈 수 없는 비평의 현실이다. 젊은 감독들의 영화와 함께 갈 수 없는 비평의 언어는 과거의 영화들을 반복하는 중견들의 세계를 답습하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어 반복과 익숙한 용어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영화의 고루함은 젊은 영화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풍속을 위한 한 장의 지도
이번에는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는 작은 지도 한 장을 안내하고자 한다. 장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올해 한국영화의 주요 장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멜로물이 대종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남녀의 연애를 다루는 영화들이 다양하게 제작됐다. 흥행 결과로 보자면 <연애의 목적>과 <너는 내 운명>이 마주보고 있는 두 진영이다. <연애의 목적>을 따르는 <광식이 동생 광태>, <애인>, <작업의 정석>과 같은 한국영화는 도시 남녀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작업의 기술을 발휘하는 고수들이 펼치는 혈전은 감각적인 연애 풍속도를 앞세워 관객들을 유혹한다. 반대편에 놓여 있는 영화는 시골의 농촌 총각들이 벌이는 순정이 넘치는 로맨스이다. <너는 내 운명>의 뒤를 따르는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시골 총각들은 한없는 순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도시와 농촌의 로맨스는 대단히 정형화되어 있다. 농촌은 여전히 순박하고 사람의 향기가 넘쳐나는 공간이고, 도시는 서로를 재보는 암컷과 수컷들의 격전장이다.
한 영화 제작자는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국영화만큼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오는 곳도 드물다고 말했지만 도시와 시골이라는 이분법에 따라 로맨스의 운명은 시작부터 결정된다. 농촌 총각은 사랑을 찾아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고, 도시의 남녀는 온갖 유혹의 기술로 이것이 오늘날의 세태라고 설득해야 한다. 시골과 도시라는 이분법의 공간 설정은 통속적인 상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연애의 목적>에서 박해일이 느끼한 표정으로 노골적인 대사를 펼쳤을 때 놀라는 척하지만 대사는 곧 쾌락이 되고, 대중문화 안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광식이 동생 광태>의 광태 친구들의 말처럼 커피 쿠폰에 도장을 찍으며 섹스의 숫자를 헤아리는 풍속의 반영인 것이다. 역사의 근대가 형성된 이후 남녀의 연애담은 한 개인이 어떻게 성장을 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숙해가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바로미터가 되어 왔었다. 수많은 연애 소설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 주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시골이 되었건, 도시가 되었던 성숙해 가는 개인을 만나기는 좀처럼 어렵다. 순박한 숙명론자인 촌부에게서도, 영악한 작업의 고수에게서도 풍속의 단면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줄지언정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애를 하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이 되어주기에는 부족하다. 그 사이에 논평이 개입할 수는 있어도 비평이 개입할 여지는 적다. 오늘날 교양 소설(혹은 성장 소설)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영화라는 것을 분명한 사실이지만 쏟아지는 영화들 속에서 타인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 것인지를 보여 주는 영화는 드물다. 자, 당신은 어떤 사랑을 드시겠습니까. 인기 있는 2005년 인기를 누린 식당(장르)의 선택 메뉴는 호화스런 선전과는 달리 두 가지가 전부였다.
이상용(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