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형님이 공직생활 40여년동안 틈틈이 쓴 원고를 모아 퇴직즈음에 발간한 "눈길따라 발길따라"에 나오는 한단락 소개 합니다
"발길따라 눈길따라" 책 표지
울 형님 소개
목차
내 서재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발길따라 눈길따라"
구포다리목
사람들은 옛 구포다리 주위를 일컬어 구포다리목이라고 하였다
구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범방산의 한줄기인 구포 지역이 낙동강을 향하여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그 형상이 거북이와 흡사하여 지역명을 거북 귀(龜)자와 물가 포(浦)자를 써서 구포(龜浦)라 하였다
구포라 불리기 전에는 신(神)의 뜻으로 이 지역을 감동진(甘同津)이란 지명을 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구포는 조선시대 양산군 좌이면에 속한 이후로 지명이 여러 번 변하였고 이제 사람이 많이 살게 되어 3개 동으로 분리되기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는 취직하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농촌진흥청에서 식량증산을 하기 위해 농촌지도기구를 확대하면서「4급을류 대우」라는 임시직 직명을 걸고 농촌지도직 공무원을 모집하였다
그 당시 심정으로는 직장의 질을 따질 수도 없고 농학을 공부하였으니 농학과 관련된 농촌지도직에 들어가 일을 해 보자며 시험에 응시하여 마침 합격을 하였다
농촌진흥원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발령을 받도록 되어 있어 1964년 날씨도 추웠던 2월에 한 달간 구포다리목 옆 김해군 대저1동 옛 일제시대 절간에서 교육을 받았다
필자는 의령에서 태어나 줄곧 진주에서 학업을 했기 때문에 구포다리는 부산에 시험 볼 때 처음 건넜고 교육을 받을 때 이 구포교를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셈이다
아침이면 교관의 구령에 맞추어 구포다리를 뛰어 건너 왔다 갔다 해야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구보를 할 때의 느낌은 구포다리처럼 이렇게 크고 긴 다리가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되어 낡았고, 옆에 놓인 새 다리와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교육 중에 시간을 내어 몇 명이 구포다리를 걸어 넘어서 구포역 주위 식당과 선술집에가 이것저것 사먹고 시간을 즐기는 것도 교육중의 재미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그 후 구포에 삶의 터전을 잡아 20여년 살게 되었다
낙동강7백리…….
낙동강은 태백산 황지(黃地 )에서 발원되어 구포다리목까지 오는 거리가 7백리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강이 굽이굽이 돌고 돌아오는 유정(流程)거리는 무려 525킬로미터인 1,300리나 된다.
낙동강의 기나긴 거리에서 많은 물이 구포다리목에서 모여든다. 특히 비가 올 때 많은 사람이 구포둑에 나와 물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6.25사변 때 이 강을 사이에 두고 격전 끝에 부산을 방어하여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를 수호 하였기에 낙동강은 승리의 강이요 애국의 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강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전통의 낙동강이라 한다. 이 전통의 의미를 담은 노래 한 구절을 같이 음미해 보고자 한다.
「보아라. 신라가야
빛나는 역사
흐르며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
오호 낙동강
오호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전통의 낙동강.」
구포다리는 70년 전 일제시대 때 세워졌기에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당시 다리를 놓을 때 비가 오면 몇 번을 떠내려 보낼지도 모르기에 많은 공사비를 책정하였다 하지만 마침 다리공사를 하던 그 해 날이 가물어 한 해 동안에 완공하게 되어 공사비는 아주 적게 들었고 건설회사는 횡재를 만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구포다리목 근처에 사는 사람은 농사일로 하루에도 몇 번 이 다리를 건너야 했고 구포장 보는 사람을 비롯한 상인들도 이 다리를 많이 건너야 했다
김해와 부산 간의 왕래는 물론 경상남도나 전라남도 사람들까지 많이 건너는 다리였다
많은 사람 많은 차량이 이 구포다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이 구포다리와 얽힌 이야기 거리가 많다고 한다.
홍수가 나면 물이 제일 많이 불어나는 곳이 이 구포다리 밑이다
물난리가 나면 물 구경 가자하는 곳이 바로 구포둑이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소, 돼지, 수박, 참외, 가제도구 등 안 떠내려 오는 것이 없다할 지경이었다. 어떤 이는 이것들을 건질 새라 아찔한 곡예를 하기도 했다
구포 노을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부산팔경중의 하나이다. 구포와 대리, 구포와 대동으로 잇는 나룻배는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고기잡이, 재첩 잡이, 유람선 등의 다목적 역할을 하였다
구포 다리목 주위에는 여러 가지 명산물도 많아 이와 관련되는 이야기가 다수 전해 내려온다.
이 지역에는 예부터 배와 딸기를 많이 팔았다
1950년대 구포다리목에는 진해, 김해, 마산쪽으로 오가는 버스가 정차 하였는데 이곳에 버스가 도착하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아가씨, 아주머니들이 광주리에 배를 담아 ‘내 배 사이소! 내 배! 하고 외쳐댄다
버스정류장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오면 구포역이 있는데 구포역에서도 배와 딸기 파는 방식은 버스에 파는 방식과 다를 바 없었다.
봄에는 딸기 겨울에는 배를 사라고 외쳐대던 소리가 구포에 대한 인상을 깊게 해 주었다
구포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배와 딸기가 왜 구포에서 많이 팔리곤 하였을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08년 일본이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일 합병 후 김해 삼각주 일대에 수리(水利)사업을 벌이면서 일본사람들이 이주해와 김해 대저 출두리를 중심으로 배나무를 심게 되었고 강 동쪽에는 기름진 땅 삼락 유두리 일대는 딸기를 재배하였다 해방이 된 후에도 생산된 배와 딸기를 가까운 거리인 구포 버스정류장이나 구포역에서 팔게 되어 구포가 배와 딸기를 팔고 사는 곳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봄철이 되면 삼락동의 낙동강 강변에서 딸기가 익을 무렵 주말이 되면 부산시민이 구포다리를 건너가거나 김해 대동행 나룻배를 타고 출두리 딸기밭으로 바람도 쏘이고 딸기도 사먹을 겸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지주들은 소득 높은 다른 작물을 재배하게 되어 그 명성도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부녀자들이 팔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내 딸기를 “내 딸”이라 하면서 “내 딸 사이소!”하는 소리와 배(梨)를 사람의 배(腹)로 착각하듯 표현하며 익살스럽게 “내 배 사이소”란 외침은 들은 이들의 오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구포에는 뭔가 맛이 다른 구포국수가 유명하다
구포에는 국수 맛이 좋아 “국수 먹으러 구포가자” 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구포장에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국수공장이 죽 들어서 있었는데 공장에서 뽑아낸 국수를 장대에 꽂아 길게 널어놓은 모습은 실로 멋진 풍경이었다고 한다.
구포국수가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 직후 피난민들이 몰려 와 값도 싸고 허기를 채우기에도 좋은 구포국수를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간 짠 듯한 맛과 쫄깃한 맛은 다른 곳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구포국수 맛의 특성이었다.
6.25동란 직후 구포에서 부녀자들이 국수를 머리에 이고 열차를 이용하여 부산시내에까지 공급 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포국수가 잘 팔리자 1959년 10월 구포 장터에 있던 20개 국수공장이 구포 건면(乾麵)조합을 결성하고 국수생산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그 많았던 국수공장도 차츰 국수 애호가도 줄고 식생활 수준이 높아져서인지 이제는 두 곳의 국수공장 밖에 남아있지 않다.
구포에는 낙동강 잉어회가 또한 명물이다
구포 강어귀에는 낙동강 잉어가 많이 잡혔다 그래서 잉어회 요릿집은 뗏목으로 엮은 수상
간이횟집과 구포역 주위 식당에 많았다
잉어에 관한 옛 이야기도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용(龍)이 되기 위해 중국 황하(黃河)에 모여든 잉어가 그 곳을 오르면 용이 되고 오르지 못하면 이마에 점이 찍혀 물러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잉어이마에는 점이 찍혀 있다고 한다.“잉어가 뛰니 망두어도 뛴다. 라는 말과 같이 잉어는 물살을 거슬러 잘 뛰어 오른다
잉어회를 먹고 간(肝)디스토마나 폐(肺)디스토마에 걸려 생명까지 잃을 수 있어도 잉어회 맛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잉어회」란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구포잉어회를 먹었다고 하니 그 맛이 여간 아니 모양이다
구포잉어는 지금도 임산부들이「곰」국을 해먹으면 보신이 된다고 하여 많이 먹고 있다
구포에는 부산의 7진미(七珍味)중 하나인 장어구이가 별미였다
장어는 다른 고기와 달라 50년 이상 살기 때문에 탁월한 영양가가 있다고 한다.
뱀장어가 바다에 알을 산란하러 가기 전에 체질을 바꾸는 훈련장소가 구포와 금곡 사이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장어가 많이 잡혔다
구포선창 나루터의 잉어회 요릿집에선 반드시 장어구이도 같이 팔았다
그래서 금곡동 동원마을은 조선시대부터「장어 마을」로 지정되어 오고 있다 이 뱀장어는 보양(保養)식품으로 병환 후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이 이상 좋을 게 없다
빠뜨릴 수 없는 구포의 명산물로는 구포재첩이 있다
나무로 만든 배를 띄워놓고 「갈쿠리」로 긁어모은 재첩을 그냥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 국을 끊여 새벽녘 골목골목 다니며 팔았다 ‘재첩국 사이소’ ‘와 안 삼니꺼’라는 로고송과 함께 구포시장 식당가에는 재첩국 파는 집이 즐비하였고 어려웠던 1960년대 구포다리 밑에서 잡은 재첩을 판돈으로 자녀들 공부를 시켰었다
재첩은 공사이후 재첩서식이 줄어들자 하동 섬진강에서 잡은 재첩을 사 와서까지 식당을 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김해패총」도 사실은 이 낙동강 재첩과 다대포 앞바다에서 잡은 조개를 먹고 껍질이 쌓인 것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구포에는 소 도살장이 유명하다
사람들은 싱싱한 쇠고기를 사려면 구포에 가야한다 라는 말을 한다.
신선한 쇠고기를 믿고 사기 위해 구포에 오는 사람이 많아 지금도 성시를 이루고 있다
소개한 명산물 외에도 명산물 아닌 명산물이 구포에 있다
다름 아닌 「구포시장」이다 3일과 8일에 서는 구포장은 김해, 밀양, 진해, 마산 등지의 사람과 부산 사람이 주로 이 장을 이용하는데 더 먼 곳에서도 이 구포장을 자주 이용한다.
앞서 말한 명산물 거래도 거래이거니와 농산물, 수산물, 공산품 할 것 없이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 지금도 장날이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구포에는「장타령」으로 소문난 구포2동에 거주하는 박복명 할머니(80세)가 계신다. 얼굴의 주름은 깊지만 목소리만은 정정하다 할머니는「낙동민속예술제」나 기회 있으면 구포장에서 창창한 목소리로 장타령을 뽑는다.
우리 것 우리만의 소리를 생생하게 듣는 듯한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타령이다 할머니는 동서들과 구포장에 무 사러 갔다가 장타령을 듣고 배운다고 배운 것도 아닌데 노래를 좋아하고 흥이 많기 때문에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다고 한다.
박복명 할머니는 「구포장타령」을 낙동민속경연대회에 우승한 뒤 MBC-TV 특집프로에 소개되었고 KBS특집「낙동강」등 3회에 걸쳐 소개된 바도 있다
“어얼 시구 들어간다. 저얼 시구나 나온다…….”하는 박봉명 할머니의 장타령은 구포 명물로 오래 남을 것이다
어제도 조르고
오늘도 조른다.
어디냐고 했더니
구포 가잔다.
내 배 사이소…….!
내 배 사이소....!
차창 밖 떠드는 소리
구포가 여기 왔네.
잉어회 한 점
소주잔 불러오고
강바람은 차마
옷자락을 붙드는데
어이타!
외로운 뱃사공은
갈 길을 재촉하네…….
노을 진 낙동강에
취선이 떠 있네.
노을 진 낙동강에
나룻배만 떠 있네.
구포 지역 민속을 보존하기 위한 모임인 「낙동민속보존회」에서는 구포역앞 낙동강변「감동진 나룻터」에서 정월 대보름날 낙동민속 달맞이 한마당 잔치가 벌어진다.
이 행사는 달집 불 지르기 민속행사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경노(敬老)사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에서 경로잔치가 함께 펼쳐진다.
정월 대보름날 우리나라 어느 곳이나 달집지어 불 지르기를 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은 1년 중 첫 번째 보름달이고 달이 또한 유난히 큰 달이므로 소중히 여기고 달을 보고 절을 하며 한해의 소원을 빌고 농부들은 한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이 달맞이 한마당 잔치에 펼쳐지는 민속놀이는 구포대리(龜浦大里)와 당산제(當山地祭)와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널뛰기, 그네뛰기, 연날리기, 다리 밟기 등을 하는데 구포대리 당산제는 구포 고유의 민속놀이이다
낙동강(洛東江) 하류지역의 구포다리목 주위 마을에는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고 새해가 되면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당산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구포의 대리 마을은 금정산(金井山)으로 이어지는 주지봉(蛛蜘峰)봉우리 아래 음정(陰井)골과 시랑(侍郞)골을 끼고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당산나무 중에도 수령 500년이 훨씬 넘은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당산 앞에서 지신밟기를 시작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면서 지신풀이를 하고 있다
이 달맞이 한마당 잔치 때는 구포다리목 주위의 주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천 명이 나와서 하루를 즐긴다.
여름이면 구포다리 밑이 시원하기 때문에 노인들이 모여 피서 겸 쉬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구포둑에 박보장기를 비롯한 윷놀이와 심지어는 야바위꾼들이 줄을 이어 있는가 하면 사주관상 보는 사람, 점치는 사람 등 주야로 붐빈다.
무료한 사람들이 시간 보내고, 구경 잘하는 곳이 구포둑이기에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그래서 노인들의 안락한 휴식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고도의 발달된 산업사회로, 인구가 늘어가고 교통량이 많아지자 이 구포다리와 남해안 고속도로, 낙동강 하구언 새 구포대교 등 대규모 다리가 3개나 세워졌다
새로 세워진 큰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옛 구포다리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옛 구포다리는 오랜 세월동안 이 구포다리목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지금은 강물이 많이 오염되고 위천공단건설계획 등으로 더욱 강물이 오염될 위기에 처해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철새들은 인근 파래양식장으로, 주남저수지로, 우포늪으로 날아가고 이제 낙동강하구의 철새는 조류학자, 환경보호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운명을 맞고 있다
시인 류천 선생은「구포둑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구포둑을 이렇게 노래한다.
「지는 놀과 걸어보면 마중 오는 고향 내음
허전한 어깨 위로 맨 산의 추억이 업히고
돋아난 분주의 뿌리 씻어 가는 강이 된다.
달빛과 걸어보면 소록소록 새로워지는 길
강물은 마른 의식에 와 눈물을 쏟아 놓고
사랑의 숨소리까지 버리라 타이른다.
나를 찾아 걸어보면 나를 버리는 둑길
바람에 밀리다가 남의 발로 걷기도 한
두텁게 입을 우상을 한겹 한겹 던진다.」
구포 다리목은 필자의 사회생활 첫 걸음마를 함께 하였고 그 후20여 년 동안 삶터였기에 포근한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제 구포다리목은 콘크리트문명에 밀려 그 옛날 풍경다운 풍경을 보여줄 수도 없거니와 떠다니던 나룻배와 재첩잡이꾼들도 점점이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나의 마음의 고향을 앗아갔는지…….
이제 구포다리목의 낭만과 정서는 저만치 가고 추억만 아련할 뿐이다
-끝-
첫댓글 예전 창원에 잠깐있을때 부산으로 가려면 구포 대교을 건너다녔는데
시골과 도시를 잇는 다리라 생각하고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형님의 글 솜씨를 보니 형제들께서 글을 잘 쓰시는것 같습니다.
하상웅님께서도 좋은 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옛생각을 떠올리게하는 추억의 여행입니다.![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래는데는 국수가 최고인데![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아드리겠습니다.....
장문이어서 읽는데 다소시간이 걸립니다.
반씩 끊어서 연재해주세요.
허기진 배를
국수 저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반쯤읽었는데 역사.지리공부가 솔솔합니다.
또 읽고 답변
함양에는 어탕국수가있는데......
형님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부산 구포 시장에서 강재선 교수(현대악품 종합연구소 근무함)와 소주먹으면서 부천공장 추억을 이야기했지요.
구포는 동서가 살고있어서 자주감니다.금정산에도 가보았고요.형님은 퇴임후 구포 향토사학자로 추천합니다.
생활 터전이 거의 서울쪽인 방장님도 구포를 아시는군요
구포가 부산의 첫 관문이면서 지리적으로 꽤 유명한 곳입니다, 저 도 이곳 구포둑길에서 데이트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국장님
형님이 대단한것은 아니고 항상 기록을 잘 남기는분이라서...
고향집은 리모델링하여 우리가족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형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한번 구포여행시켜줘요...
군수님
왜 군수며 왜 글을 잘 쓰시는지 형님을 알게됐는대요
아버님한테 물려받은 지식이 있었군요..
아버님이 정말 훌륭하십니다....
신사님
회사생활은 즐거우신지요?
가족과 떨어져 있어 고생이 많을줄 압니다
그렇지만 간혹 한번씩 만나는 것도 신혼처럼 재밌을때가 있죠?
강박사와 구포시장에서 소주 한잔 하셨군요...
나름대로 사람사는 향기가 있는 시장입니다.
울 형님은 아버지보다 먼저 4년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년이 보장된곳.복지관에서 이곳 타지로 처음에는 약간에 후회도했지만.
지금은 즐겁게.일하고. 생활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