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40
4월27일[부활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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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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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Hl57tLLORU
[서울대교구 강선훈 세례자 요한(신월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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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젊은 시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을. 한번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눈도 내리고 있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안전하게 올라온 길로 신속히 내려가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사전에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며 홀로 능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옆으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능선만 이어졌습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얼어 죽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능선 타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길도 아닌 길고 긴 계곡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을 고생 끝에 동사 및 아사 일보 직전, 그것도 심야에 겨우겨우 한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해 한 집 문을 두드리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위 조사까지 받고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길도 길이 아닌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면 ‘개고생’이 분명한 길, 멸망으로 가는 길, 인생 종치는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네 인생에서 돈이나 명예, 권위나 자리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은 아닌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 해서 돈이 아닌가요? 없다가도 생기는 것, 목돈 좀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손에 쥔 한 줌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차지하게 되는 권한이나 직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맡겨진 임기가 채워지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물려주고 내려와야 할 부초나 뜬구름같이 허망한 별 것 아닌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결국 우리가 선택할 최종적인 길, 진리와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올라가셨던 길입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올라갔던 예루살렘 언덕길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니 올라갔던 골고타 언덕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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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더욱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발언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는데도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 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우리의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 가운데,
고통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또 무엇인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이라는 것,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라는 것,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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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VmVSCHm8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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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니면 정말 예수님을 맞으시는 분들의 얼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사제를 맞습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천사였습니다. 봉성체가 끝나면 이불 밑에서 몇만원이 돈 봉투를 꺼내서 꼭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고우신지 저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그렇게 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에게 성체를 영해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얼굴이 마치 마귀와 같았습니다. 심지어 치아도 육식동물처럼 뾰족해져 있었고 눈은 흰자가 많이 보였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몸은 사람들에 의해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온전한 의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체를 영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식도 있는 사람이고 봉성체를 기다렸다고 하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식을 진행하고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성체를 뱉어버렸고 침이 묻어 녹아내리는 성체를 제가 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서 계속 끊임없이 욕설해 댔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외모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유튜브에 지금 올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는 한 분 안으로 다른 분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친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신 분이 그 받아들인 이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받아들인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 안의 보이지 않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결국, 외모까지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계신 분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인간들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시고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격을 알려면 그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밖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보면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도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이니 우리가 당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사시면 우리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표징입니다. 물론 표징이나 이적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고 결국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그 마을의 매우 온화한 인간의 얼굴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그 마을에 나타날 것이란 예언도 믿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런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그 얼굴로 변해가고 있음을 잊은 채로.
한 시인이 늙고 주름졌지만 온화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한 죽음이 임박한 어니스트를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고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면서 분명히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그를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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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8명이 함께 한 성지순례였습니다.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본당 교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순례 중에 함께한 분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교우들을 아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기억력이 있어서인지, 하루 지나니 모두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도 제가 세례명을 기억하고, 불러드리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순례 중에 들려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말 대신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날씨가 흐릴 수도 있고, 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비행기의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고, 샤워기가 고장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순례의 여정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럴 수 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원망이 되고, 화가 나기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순례의 여정이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좋은 향기가 주변에 퍼지면 기분이 좋기 마련입니다. 좋은 기운이 주변에 퍼지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마련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안내하는 분이 두 가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하나는 지나친 걱정 때문에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산에 오를 때도 바위가 뾰족하니 절대로 맨발로 오르지 말라고 합니다. 늘 조심하라고 합니다. 예전에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다친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길 잃어버린 사람을 찾느라고 3시간씩 기다렸다고 합니다. 소매치기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가방을 뒤로 매면 남의 것이고, 옆으로 매년 반만 나의 것이고, 앞으로 매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조심하라고 하는 이야기지만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 성지순례가 은총과 축복의 시간이 아니라, 긴장과 걱정의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즐거웠던, 은혜로웠던 시간을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이웃들의 도움으로 아무 걱정 없이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방을 다시 찾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억지로 따라온 남편이 성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즐거웠던 시간, 감사했던 시간, 치유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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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아들은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 그래서 당신을 본 사람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절)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는 인간이 되신 아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뵌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의 눈이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 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계속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상이시다. 아들은 진리와 하느님의 권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절)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라고 하신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더 큰 일도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3절)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도 하느님께 참된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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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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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1-14)
1)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요한 1서 4장에 있는 요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ㄴㄷ)
사랑을 주든지 받든지 간에, 사랑을 통해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사랑이 있고,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생생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사랑을 줄 때와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요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가 하느님을 보았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가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이긴 해도, 그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뵌 것은 아니고(탈출 33,18-23; 1열왕 19,11-13; 이사 6,1-8ㄷ), 하느님의 등만 보았거나, 하느님의 음성만 들었습니다.>
2) 7절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면”으로 우리말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 하느님과도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은 이미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이미 일치를 이룬 상태이고, 하느님을 이미 뵌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사도들이 완전하게 일치를 이룬 것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시작한’ 상태였고,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성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었습니다.>
3)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뵙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는 말씀은,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들과 표징들을 보았다면 당신과 하느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이라는 말씀을, 표현만 보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데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예수님 말씀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믿으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과 표징들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데, 대표적인 표징은 ‘부활’입니다.>
4)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사도들이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먼 곳까지 가서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승천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라고 기도하셨는데(요한 17,15),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만, 지상에서의 신앙생활 자체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인생과 신앙생활을 모두 건너뛰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청하는 것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약속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신 가르침이기도 하고, 언제나 항상 신앙인들과 함께하면서 신앙인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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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어느 수도원의 원장님이 많은 제자 가운데 특별히 한 제자만 사랑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머리도 가장 나빴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님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애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불만이 점점 불거질 무렵, 원장님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새를 한 마리씩 나눠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 새를 죽여 다시 이 자리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였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새를 죽여 가지고 왔지만 사랑받는 그 제자만은 새를 산 채로 안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도 하느님은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은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실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구약의 성조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치 수도원 원장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 제자처럼 인간적 나약함과 부족함에도 스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부활 4주간 토요일입니다. 그동안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두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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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도 하느님을 모르는 일이 가능할까요? 오늘 복음의 필립보는 예수님을 두고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의 필립보를 통하여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일이나 취미 때문에 또는 우연히 알게 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수많은 지인들,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요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육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상화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이 부족하고 못난 인간의 한계가 곧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라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을 탓하면서 내일만을 향하여 있는 우리의 시선은 그리 복음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부족하다는 우리의 모습 안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런 모습은 자기 부정이자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부정일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을 우상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이 꿈꾸는 내일에 우상 하나를 세워 놓고 그것이 하느님이라 고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생각나는 사람, 지금 기도를 해 주고 싶은 사람, 지금 마음이 불편한 사람, 그 속에서 당신을 제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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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토마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뒷부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이에,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예수님께서는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과시해 보여 달다’는 의미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이는 아들 안에 아버지의 본질이 있고 아버지 안에 아들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들이 하신 모든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들이 하신 모든 행동이 아버지의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호내재가 꽃피우는 것이 바로 두 분이 함께 하신 “일들”이며, 그것은 곧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일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 강조하여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당신께 청하라는 말씀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하는 것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 결국, 당신이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전능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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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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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14,8.7)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알고 있다, 는 말씀과 우리가 ‘아버지를 알고 있다, 는 말의 의미와 깊이가 전혀 다름을 인정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러기에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 알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더 알고 있나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14,7) 하고 말씀하신 까닭은 토마스의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사실 토마스가 찾고 알고자 하는 아버지께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어디로 갈 필요가 없듯이, 우리가 볼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집 또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 계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고 아는 것’은 사물을 관찰하고 아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사도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난 뒤 ‘보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아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고, ‘나를 알고 보는 것’은 결국 나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뵌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전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하는 표현이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사실 저는 제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를 아는 듯싶지만, 인격적인 관계나 체험을 통한 앎의 차원에서 잘 모릅니다. 저는 불효자인지도 모릅니다. 흔히 남자는 자식을 낳고 길러봐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를 알게 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로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참으로 한 사람, 한 남자로서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정호승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 병드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허리가 구부려져 더이상 펴지지 않게 된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시인에 비해서 저는 제 아버지를 모시고 살지도 못했으며 사랑할 그런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미국 유학 다녀온 1986년 10월, 부모님 모시고 제주도를 거쳐 경상도 부곡 온천으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때 온천에서 아버지와 함께 목욕하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습니다. 나이 드시어 쇠잔해진 아버지의 삭은 몸을 보고서 마음이 아파 아버지의 등에 제 얼굴을 대고 울었던 기억이 다행스럽게 정호승 시인의 시, <못>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튼 저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아버지를 사랑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진면목을 잘 모릅니다.
이렇게 제 아버지의 있음과 행하심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 제가 하물며, 어찌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필립보의 우문에 공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14,8) 그런데 시선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제 형제와 누이들을 보면 예전 부모님의 모습이 언뜻 보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는 말처럼 자녀들의 모습에서 그 부모님의 모습을 능히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아버지를 볼 수 있기 위해서 인간적인 봄이 아니라 신앙적인 봄이 요구되고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4,10) 하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14,11) 하고 재차 강조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나, 아버지가 될 때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아빠 하느님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보는 것이로되,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를 볼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할 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은 단지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 역시 실행하면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고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했기에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알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가렵니다.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깨달아 알고 살아가렵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정호승의 못을 보냅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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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병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병실을 돌며 병실 청소를 합니다. 그가 맡은 병실 중에는 싸움에 휘말려서 몇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지요.
그날도 이 병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년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하게 청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른 병실 청소로 옮기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에서 이 청년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자기 아들 병실을 왜 청소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소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금 전에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청년 병실에 들어가 청소했습니다. 다시 청소한다는 것에 어떤 불평이나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동안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픔에 쉽게 감정이 동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상황 자체보다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불가능할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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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분과 하나 되어야>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요한 1장1절이하를 보면,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1,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신 모습들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됨으로써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라 2,20-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주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챙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공허한 만족보다는 예수님을 차지해서 누리는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라도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건설과 관련된 것인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여 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보다 늦게 응답하시거나 오히려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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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밖에서 당신 안으로>
요한 14,7-14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당신 밖에서 당신 안으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당신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안에서만
당신
안에 계신 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그대로
닮아갑니다
당신을
닮아야만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안에서만
당신
내 안에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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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것에 ‘한 눈을 파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말고 딱히 더 바라는 무엇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분이 주시는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다보니,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믿음도 약하다며 하느님을 제대로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다보니, 다른 것으로라도 만족하고 싶은 겁니다. 소위 ‘대리만족’이라는 것인데, 세상의 것들로는 내 마음을 완전히 채우지 못하니 지속적인 결핍 상태에서 마음에 헛헛함을 느끼게 되지요. 더구나 그 ‘한 눈 팔기’에 적극적이라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하느님 말고도, 신앙 말고도 대리만족할 것들이 많아지면 굳이 하느님으로 만족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여러 즐거움들 중 하나를 골라 몰두해보다가, 그것이 영 성에 안차면 다른 것을 찾을지언정, 굳이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하는 이들이 자주 빠지곤 하는,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함정입니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 청하는 필립보의 모습은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 그분의 현존을, 그분의 사랑을 느껴보고 싶은 열망을 마음에 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하느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말에서 ‘보여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뜻은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즉 필립보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믿음으로 식별하고 양심으로 판단하며 행동으로 따르는 어려운 길을 걷기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100% 확실한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쉬운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필립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쉽고 확실하게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그렇게 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건 100% 확실한 근거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수동적이고 굴욕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구원의 진리를 그저 머리로 인정하는데에 그치면,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꾸만 다른 것에 한눈을 팔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신앙은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귀기울여 잘 듣고 그것에 맞지 않는 것들은 양심으로 잘 걸러내며, 그 뜻을 실천하는게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뜻을 스스로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고 편한 길을 찾겠다며 여기저기를 헤매다 삥 돌아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힘들지만 단순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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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가 배은망덕할 때>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받은 덕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바로 배은망덕을 톡톡히 경험합니다. 그렇게 열렬히 복음을 전해줬는데 그러니까 은혜를 베풀었는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덕분에 참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무슨 개뼈다귀 같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나 하느냐고 사람들은 모독적인 말로 오히려 은혜 갚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는 나도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닌지. 다른 하나는 누가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 생각에 은혜와 덕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도 배반하거나 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가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덕인지 몰라 그러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사실 오늘 사도행전의 유다인들에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해준 복음이 자기들에게 행복과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 시기심에 꽉 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아직 맛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주님의 복음이 아직 내게 참 행복과 구원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보다 돈을 주는 것을 내가 더 은혜롭게 여기는 수준이라면, 복음 선포가 내게는 은혜도 아니고 덕을 나눠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알 줄 알아야 하고,
덕을 덕으로 알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고, ‘네 덕 내 탓’할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을 겁니다. 네 덕에 그 귀한 복음을 알게 되었는데 내 탓으로 그 복음을 잘살고 있지 못하다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이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입니다. 배은망덕해도 그것으로 불행해지지 않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은혜를 베풀고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은혜를 베풀고 고맙다는 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 돈이나 재물과 같이 세속적인 무엇을 주는 것은, 그것을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아예 생각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대단히 은혜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꼴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줘버리고 말고 줬다는 기억조차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은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은혜롭지 않은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진정 은혜로운 것으로 여기는 내가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내가 은혜롭게 여기는 주님 말씀을 전해줬는데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처럼 모독적인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배은망덕이라고 분노해야겠습니까?
만일 주님 말씀을 전하고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할 때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 주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전한 것이며, 그를 위해서 전한 사랑의 말씀이 아니고, 주님 말씀으로 충만하고 고맙고 행복한 사람의 사랑 나눔이 아니지요.
주님의 그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줬는데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말씀이 은혜롭지 않은 그가 딱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주말이 되면 또는 행락철이 되면 제가 강론을 올려도 많은 분이 읽지 않으시거나 읽지 못하십니다. 그때 애써 주님 말씀을 나눴는데 읽지 않는다고 제가 분노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냥 애석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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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어디에 계시는가?>
오늘 복음(요한 14,7-14)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그러자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하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뵈오면 됩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나는 그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는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체 안에' 계십니다. '말씀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이시고 하느님이신 성체와 말씀'은 늘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나는 성체와 말씀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서 만나 뵙고 있는가?'
온전한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해 성체를 바라보고,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모실 때만, 그리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듣고 대할 때만,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뵙게 되면 너무 기쁩니다. 나의 영이 맑아집니다. 그러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가정에서.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이것이 곧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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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A0ezt6qB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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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 14)
가장 좋은 계절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계절은 잡을 수
없는 흐름이며
기도는 성장하는
인격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찾아갈
기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이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면
다 이루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곳에
가장 좋은
은총도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버리고
기도의 꽃과
최선의
열매를
피워내고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십자가의
이름이며
부활의
이름이며
완성의
이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라는
이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해야 할
날들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결코
메시아가 아님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어떤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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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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