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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2
베스 추천 0 조회 43 13.06.17 1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삼천리 금수강산?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에게만 이롭다?

1800년대 초엽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해 돋는 고요한 나라'라고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들와 각종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냇다.

"서울에는 넓은 거리와 좋은 건물 몇 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이 없다. 거리의 더러움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1885년 서울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단의 의사 겸 선교사인 사우드 홀의 기록이다.

 

또 미국 선교사 알렌이 평양에 들어가서 목격한 광경을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평양은 서울보다 더 번창한 상업도시이며 근대도시였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직항로가 나 있었고 외국문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좋은 물건을 사려면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야 했다. 해방 후까지도 평양으로 레코드를 사기 위해 보따리상들이 드나들곤 했다. 가장 개화된 도시가 평양이었던 셈이다. 알렌의 보고 문서다.

 

"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거리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기에도 비좁으며 진흙탕 길에 온갖 짐승들의 배설물이 깔려 있어서 숨을 쉬며 지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그 길을 태연히 오고가는 남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제멋대로 헐클어진 머리에 위통을 벗었으며 바지는 처음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맨발이 대부분이고 여자들은 위통은 벗지 않았지만 짧고 누런 상의 아래로 젖을 내놓고 다니는데 그것이 유행인지는 모르겠다.

 

길 양편으로 가축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흙과 풀로 만든 작고 납작한 집들이 끓임없이 마치 버섯단지처럼 이어져 있고 부유한 동네에 가서야 다소 기와집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그 선교사 한 사람만의 기록이라고 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보고서가 공통적이다.

 

"서울의 대감들이 몰려 살고 있는 부촌도 ?반 다르지 않다. 커다란 기와집의 담장 앞으로는 시궁창 하수로가 있는데 대부분 씻고 버린 채소나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바람에 부패한 하수가 좁은 길로 넘쳐 나와 악취가 범람하고 있다. 그런 길을 태연하게 대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간다. 그런 불결한 위생상태 때문에 서울과 대도시에는 끓임없이 전염병이 돌아 서울 인구의 10%가 콜레라와 페스트로 죽어나가는 참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런 선교사들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도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가 들어온  뒤 시작되었는데, 당시 서울에서도 큰 거리라는 것이 우마차 2대가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나머지 작은 도로는 겨우 몇 사람이 통행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국도 역시 산길이나 밭길 수준이었다. 수레가 다니지도 않고 그저 사람이나 말이 지나가기에 적합한 소로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도로를 닦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전국을 잇는 도로라는 것은 모두 농로 수준밖에 안 됐다. 가마 한 대만 지나가면 족했다.

 

도로의 의미라는 것은 왕의 행차나 중국 사절들이 통과하는 경우에만 해당이 될 뿐 백성들이 통행하는 도로는 그냥 사람이 다닐 정도로 그쳤다. 심지어 일부러 도로를 닦지 않았다.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나 내부의 적을이 침략했을 때 오리혀 불리하다는 주장이 조선의 도로 정책에 대한 생각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양곡의 운반도 육로가 아닌 해운으로만 했으니 사실 도로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도로가 이렇게 협소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도시가 형성되었으니 청결이라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당초 무리였다. 동물들의 배설물과 인분, 넘치는 하수, 온갖 쓰레기, 그런 곳에서 틈만 나면 발생하는 온갖 전염병, 그것이야말로 조선 후반의 고질적인 도시 풍속도였던 셈이다.

 

조선에서 도로 조성계획이라는 것은 1896년 대한제국 정부가 한성 내의 도로 폭을 규정하는 내부 명령을 내린 것이 그나마 최초에 속한다. 이때 비로소 4대문 내의 도로와 왕궁 주변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불법 가게들이 철거되고 고종은 서양에 다녀온 개화파들의 건의에 따라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 중심 도로망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획뿐이었다.

 

일제는 이런 계획 대신 거주의 편의성 위주로 격자형 도로 계획을 세워 비로소 근대식 도로들을 닦기 시작했는데 현재 서울의 중앙부가 이때 모두 확장되고 신설되었다. 새로 도로를 만들었다고 해서 신작로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런 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주지, 거기에 불결하기 짝이 없는 환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휩쓸었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는데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도 병의 원인이 쥐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의 무당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집집마다 고양이 그림을 내걸고 무당들이 굿판을 벌여 고양이 울음을 내면서 콜레라 귀신을 내쫓았다. 콜레라가 걸리면 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콕콕 쑤시며 발을 떠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쥐가 무는 형상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쥐 귀신이 몸 안에 들어와서 생기는 병이라 하여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 20세기 초반에 말이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에는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고 마을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다. 소작농이 대부분이고 나무, 나물, 강아지, 닭, 계란 등을 장에다 내다 팔거나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겨울내내 목욕한 번 못하고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비누가 없어 돌로 떼를 벗기곤 했다. 휴지도 없어서 재래식 화장실에는 짚이나 다쓴 노트, 헌책, 시멘트 종이나 신문지가 뒷처리용으로 사용되었고, 어린이가 체하거나 열이나면 병원은 커녕 약방도 없어서 동네 무당을 불러 손가락을 따거나 부억칼과 바가지물로 주술식으로 치유하곤 했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온 몸에는 종기가 쉬임없이 났고 코를 흘리고 손에는 떼가 새까맣게 끼곤 했으며 겨울에는 손발이 갈라지고 터졌다. 

 

봄이면 춘궁기라 식량이 부족하여 동네 부자집에서 양식을 빌려다가 허기를 채웠고 그것이 어려우면 산이나 밭에 가서 나무껍질, 생무우, 오이, 토마토, 감자, 배추뿌리, 생감, 산딸기, 칡뿌리, 소나무 껍질, 쑥, 고사리, 두릅, 호박, 가지, 옥수수, 고구마, 미숫가루, 수제비, 칼국수 등으로 끼니를 떼우곤 했다. 가을철에는 추수를 하고 빌린 양곡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궁이 불을 피우던 시절이라 모든 땔감은 산에서 나무를 해와서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후 자유당 시절에는 온 산이 나무가 없어서 빨갛게 민둥산으로 변했다. 그래서 여름철 홍수가 빈번하였고 산사태가 빈번하였다. 그래서 땔감이 부족하여 잡풀이나 볏짚, 산에는 나무 뿌리까지 캐다가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다. 당시 지방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자갈 도로였고 차가 지나가면 번지가 뽀얗게 피어나곤 했다. 당시 노력동원이 자주 있어서 있어서 주민들이 도로에 나가서 자갈길을 고르기도 했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우유가루나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해 주었고 반드시 계몽영화나 종교 관련 영화를 상영해 주기도 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집에 올 때는 학교에서 옥수수가루로 떡을 만들어 나누어 주곤했는데 손 떼가 새카맣게 뭍어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먹었다. 

 

산에 나무가 없자 그때부터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방공사를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가을이면 야산에 올라가 잡초 씨앗을 채집하였던 기억이 난다. 엿장수와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을 다니면서 고철, 고무신, 그릇 등을 엿과 바꿔주며 팔았고 돈이란 구경도 못하고 대부분 물물교환으로 외상빚을 갚았다. 농촌에는 머슴살이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이를 불문하고 어른 어린이 거지들이 아침.점심.저녁으로 구걸을 하려 다녔던 시절이 겨우 30~40년 전 우리나라의 농촌 모습이었다. 일제 36년 수탈과 억압의 시대를 지나고 해방이 되었으나 자유당 정권은 친일청산과 정권 안정에 주력하다 한국전쟁을 겪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장기집권에 관심이 있었을 뿐 백성들의 삶은 조선 말기 시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양에서는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수도 보급과 빌딩과 병원들이 일반화되고 있을 때 서울과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이었다.

 

서울에서 고아원이 처음으로 생겻을 때는 그 앞에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거의 폭동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을 모아 키우면서 살을 찌운 다음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사진관도 플래쉬가 터지는 것을 보고 사람의 혼이 빠져나가면서 서양 사람의 노에가 되어 버린다는 소문으로 폭동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자 서울의 풍수지리상 나라의 종말이 다가왔다면서 백성들이 거리를 가로막고 운행을 막았으며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폐쇄적인 사회였는지, 그리고 국제정세를 모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개화파를 모두 숙청하고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와 매관매직과 탐욕, 그리고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싸움에 외세의 끌어들임, 임금 고종의 우유부단함으로 아까운 허송세월을 보낸 결과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었다.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았다

세계 유레없는 아름다운 한복을 자랑하고 백의민족임을 자랑하지만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복식이다. 일 년 내내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흰옷만 입게 한 것은 우리 양반들이다. 게다가 한 벌만 가지고 입기 때문에 나중에는 본래 색깔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엇다. 그런 옷을 깁고 또 기워 입었다. 보통 백성드은 그 한 벌이 잠옷이고 작업복이고 외출복이엇다. 그나마 없거나 아껴 입으려고 여름철에는 웃통을 벗고 살앗다.

 

정자 위에서 주인 대감이 기생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아래에 대감의 말을 보살피고 있는 노비는 웃통을 벗은 봉두나발의 차림새다. 이것은 근래 방영된 KBS 진품명품에 소개된 한 충청도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그림의 내용이다.

 

상민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당연히 옷은 얼마가지 않아 누런 옷, 검은 옷이 되어 버린다. 흔한 풀물을 들여도 됐을 것이다. 각종 열매로도 얼마던지 염색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굳이 흰색만 입게 한 것이다.

 

허려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옷은 양반들만 입었다. 상민들이 혹시라도 색깔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앗다. 

 

1671년 현종 12년 부응교 홍주국이 상소하여 백성들의 흰옷을 볼래 물들여 입는 폐단에 대해서 말하였다.

 

미국의 선교사 게리 길모어의 기록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것으로 비난하지만 그것은 조선인들의 옷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잇다 때가 타기 쉬운 흰옷을 입기 때문에 더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검정 옷이 되어 있으니,  더 유별나게 더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옷은 목과 소매 끝부분이 더 빨리 더러워지고 여인네들은 머리 기름을 바르는데 그것이 옷에 닿아 시커메지고 애초에 색깔과 대조가 되면서 더 한층 더러워 보인다. 왜 굳이 이런 흰색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요즘 각종 드라만 영화가 화려한 궁중 비사만 다루느라고 백성들의 이러한 실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차 한 대 다니기도 불편한 좁은 거리, 당연히 가마를 타거나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던 그 거리들이 그렇게 더럽고 어지러웠다는 기록들은 차마 믿기지가 않는다.

 

조선 시대 내낸 도시 계획을 세워 도로를 확장하고 가옥들을 개선하며 위생 관념을 위해 의복을 개량하고 질병 예방을 위해 무슨 시책을 펼쳤다는 기록은 ?기 힘들다.

 

196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전국적으로 당시의 도로가 얼마나 좁고 집들이 작고 거리가 더러웠는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독히 더러웠던 길거리 공중화장실은 말 할 것도 없었고 지금처럼 비교적 깨끗하게 개선된 것이 최근이다. 1960년대 종로의 길들은 좁은 거리가 온통 인분천지여서 날마다 몇 차례씩 발을 씻었다고 한다. 시골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길을 가다가 대변이나 소변은 아무 곳에서나 누었고 휴지가 없으니 나뭇잎이나 풀잎, 돌 등으로 뒤를 닦았다. 어떤 사람은 아예 닦지도 않고 그냥 지냈다.

 

자기 집의 쓰레기를 태연히 집 밖으로 던져 버리고 이웃집은 아랑곳 없이 자기 집반 돋보이게 하려는 본성, 자기 가게의 간판이 옆집보다 돋보이게 튀어야 한다는 전투적인 경쟁심리, 이런 성품은 모두 어디선가 은연중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 원천이 조선 오백 년의 속성이라 한다면 과장이라 할 것인가.

 

도시 계획기은 선진국은 전체적인 균형을 중시하여 집단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일본이안 유럽을 돌아보면 어디를 가 봐도 자연이 비교적 아름답게 보전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런 개념이 없다. 조금만 풍치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 그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모텔과 매운탕집, 삽겹살집들이다. 전체 도시 계획이라는 것은 없이 일부 그 동네 단지계획만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조금 비약하여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부분적으로 거리가 깨끗해지고 화장실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산천 전체를 통틀어 평한다면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축에 들어간다. 얼마던지 계획도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계획도시는 경남 창원시밖에 없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혼란스런 가게들만 산천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피 속에 지저분한 생활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 년 위선의 역사

 

 

"내 어진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

1849년 6월초. 충청감사 김수근이 병조판서인 김좌근을 급히 ?아왔다. 그들은 안동 김씨 집안이지만 한 살 터울이며 사촌형제간이다.

 

그때 조선의 24대 왕 헌종의 재위 15년째이다. 당시 헌종의 나이 고작 22세. 그는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후손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상감이 심상치가 않으니 전 의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데 가망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왕실의 종친부에서는 긴급회동을 열고 후사를 결정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하전이 낙점될 것 같습니다"

 

이하전은 완창군 이시인의 아들로 적장자가 없는 현재로서는 가장 가까운 왕손이었다. 기개가 있고 똑똑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다음 왕을 추대한다면 이론 없이 1순위였다.

 

"그 자가 만약 왕이 된다면 대감,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두 사람은 심각한 의논 끝에 일치된 결론에 이른다.

 

조선조의 특징인 4색 당파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의 사건이다. 김좌근 등 안동 김씨 세력은 시파인데 이하전은 그들과 등을 지고 있는 벽파이다. 그동안 시파는 많은 벽파를 죽였다. 천주교도들을 비호하고 있는 세력이라 하여 함께 엮어서 처형을 거듭했다.

 

영조 재임 시절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사건이 난 뒤 사도세자를 온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시파이고 허위보고로 사도세자를 죽게 한 강경파들이 벽파인데, 두 파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당시는 안동 김씨들이 주축인 시파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벽파인 이하전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반대파인 시파는 씨를 말리는 것이 조선의 오랜 당쟁의 관습이었다.

 

"이하전 말고 왕손으로 누가 있는가?"

 

그들은 똑똑한 이하전 대신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줄 수 있는 어리숙한 왕손을 급히 수소문했다.

 

부랴부랴 이삼일 만에 허급지급 골라낸 인물이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이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부친과 형이 모두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았기 때문에 일가붙이도 없는 천애 고아로 살아 왔다.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고 글자 한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왕으로 골라 뽑은 것이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철종은 불우하고 가여운 왕이었다. 섬 무지렁이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지만 평생을 신하들에게 눌려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다가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는 죽을 때 유언을 했는데, " 내 어진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고 했다. 왕들은 생전에 모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 어진은 규장각에 모셔지고 거상 기간이 끄나면 종친부로 옮겨졌다. 철종은 죽기 2년 전에 어진을 그렸는데 당시는 어진을 먼저 그리고 다시 그 뒤에 배경인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었다. 일월오봉도란 달과 해 앞의 다섯 봉우리 그림인데 장엄하여 왕의 위상을 더해 주는 그림이다. 그런데 철종은 자신이 임금이면서도 백성들의 어버이 노릇을 제대로 못한 점 때문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철종의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이어 붙여간 것이 조선왕조라는 것이다. 유럽 왕조들은 조선왕조처럼 억지로 껍데기만 동일한 채로 유지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 편에서 권력을 빼앗으면 지난 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새 왕조를 시작했다.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도 조선을 거론할 때 가장 훌륭한 점으로 한 왕조의 역사가 오백 년이나 이어졌다는 긍지를 내세운다. 거기에 따른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 유산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오백 년 역사를 이어간 왕조는 없다. 유럽 대륙은 워낙 부침이 심하여 일이백 년 가기도 힘들었고 섬나라 영국이라고 해도 엇비슷하다. 자꾸 왕조가 바뀌었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하여 1910년 한일합방으로 문을 닫았으니 그 역사가 518년이다.

 

유럽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왕조가 긴 편이다. 왜 조선은 오백 년이나 지속되었을까.

 

영국은 비슷한 시기만으로 본다 해도 1309년 랭커스터 왕조, 1461년 요크 왕조, 1603년 스튜어트 왕조, 1714년 하노버 왕조, 그런 식이다. 모두 엇비슷한 왕족의 후에들이었지만 그들은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면서 전 왕조와는 차별된 새 이름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물론 그만큼 내분이 많았고 전쟁이 뒤따랐다.

 

좀 오래되었다는 국가가 유럽에서는 북쪽의 스웨덴, 남쪽의 스페인 정도지만 역시 이백 년을 한계로 왕조가 바뀌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도 삼백 년이고 일본의 마지막 왕조인 에도 막부도 우리나라와 전쟁인 정유재란 이후 세워졌으니 비교할 바가 못된다. 에스파냐 제국이 1516년 합스부르크 왕조를 시작으로 상당히 길었지만 그 사이 나폴레옹이 실질 지배한 기간도 있었고 공화제가 등장하는 등 복잡하여 오백 년 역사로 치지는 않는다.

 

중국의 원나라가 백여 년, 명나라가 삽백 년 정도, 청나라도 삼백년 정도인 데 비하여 동쪽의 소국이었던 조선만이 기이하게도 오백 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반정공신과 역적이 무엇이 다른가

조선왕조 오백 년의 긴 역사는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자랑일까?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의견들이 많겠으나 실제는 아니다고 생각한다. 까뒤집어 보면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 왕조의 새 인물이 뭔가 새로운 정책을 가지고 종전과는 다른 시대를 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세습권력의 맹점이 개혁보다는 유지와 보존에 중점을 두고 개혁은 불순한 생각으로 간주하는 습성이 강하다. 그래서 발전과 진보보다는 안주하거나 퇴보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오백 년 27대 왕 동안 한 가문만 왕위를 물려주고 내려받았다. 모름지기 전주 이씨가 우리 조선을 계속하여 통치해 왔다. 몰론 말엽에는 의척인 안동 김씨들이 60여 년 동안 실질 권력을 쥐었지만 왕은 언제나 한 가문이었다.

 

이렇게 한쪽의 오랜 통치는 상식적으로 봐도 새로운 기풍이나 제도, 개혁이 등장하기 어렵다. 선대왕들이 이뤄놓은 치적이라 하여 그걸 승계하고 받들이 모시면서 새로운 시책이 혹시라도 선왕에게 해가 될까봐 오히려 삼갔다. 종묘에 가면 역대 왕의 위폐가 즐비하다. 자손이 선대왕의 치적에 누를 끼칠 수가 없었다. 손톱만큼의 비방도 허용되지 않았고 그런 자세로 정사를 펼쳐 갔으니 획기적인 개혁정책이 애초애 나올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왕이 바뀌어도 개혁이라 할 만한 것은 의지도 발상도 없었다. 어떻게 새 국가를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비젼은 전무한 것이 당시 지배층들인 사대부 양반들이었다. 가끔식 등장한 개혁주의자들은 오히려 걸림돌로 사회혼란자나 역모로 몰려 죽거나 관직에서 ?겨났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부족하고 장수도 무능하여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자 면천법을 건의하여 시행하였는데 많은 상놈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였다. 그래서 유성룡은 이제야 말로 양반 상놈의 신분제도가 철폐되는 호기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선조도 전란 중 처음에는 그런 주장이 옳다고 했으나 전란이 장기화되자 양반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유성룡은 계속 개혁을 논하다가 아예 삭탈관직이 되어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은 중국에 가 보고 너무나 놀랐다. 넓고 쭉 뻗은 대로, 벽돌로 지은 커다란 2층 주택들, 거리를 오가는 무수한 수레들, 박지원은 우리도 빨리 그런 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렸지만 개혁군주 정조는 한번 검토해 보겠다고 했으나 결국 노론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혀 아무런 결실을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당시 손수 종군했던 광해군 역시 왕이 된 후 세금 정책을 혁파하자는 일부 논의에 대신들이 극력 반대하자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의 특징이 바로 그런 식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나기는 했으나 생각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순리적으로 왕권이 계승되지 못하면 그 나라를 끝내고 새 나라를 만들어 뭔가 새 정치를 펼쳐야 하는데, 조선의 권력자들에겐 그런 방식은 전무하고 껍데기는 그대로 둔 채 왕만 바꿨다. 적임자가 없을 때는 집권층 신하들이 들고 나서서 억지로 허수아비 왕을 끌어다 놨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없이 죽자 한명회와 인수대비가 짜고 성종을 옹립했다. 그런 성종이 한명회를 포함한 훈구대신들과 인수대비의 품 속에서 연산군을 낳았고 폭정이 이어졌다. 연산군의 폭정을 참지 못하고 중종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승계했지만 성희안,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에 치세 내내 휘둘렸다. 인종이 급사하고 명종이 들어섰으나  그는 효심이 지극한 마마보이였다. 그러다가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신들이 골라낸 왕이 바로 선조다. 선조는 비교적 영민한 왕이었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여지없이 무능이 드러났다. 조선에는 장부상 군대만 있었지 실질적인 군대가 없었고 장수들만 날뛰었지만 왜군이 다가오자 관청, 성, 군졸, 무기를 방치하거나 버리고 대부분 도망치기에 바빴다. 지방에서 스스로 일어난 의병과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충신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일본에 패망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버티다가 명나라가 도운 결과 일본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나이 50줄에 10대의 나이어린 왕비를 맞았는데, 바로 인목대비였다. 그러다가 선조가 급사하자 대북파들이 재빠르게 광해군을 옹립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치며 비교적 영민한 왕이었으나 서자라는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고 인목대비가 낳은 적자인 어린 영창대군이 있는 한 왕위가 불안하였다. 이에 대북파는 각종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더니 결국 영창대군까지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그러자 유교적 충효심이 지극한 조선의 유신들이 폐모론을 들먹이며 들고 일어섰다. 부모를 학대한 왕은 왕이 아니라고 내세운 것이다. 그것은 대북파들이 주동이 되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물론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랜 기간 세자에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부왕 선조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북파들인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나서서 그를 옹호하였고 선조가 갑자기 죽자 바로 다음 날 상복을 벗기고 번개처럼 왕위 계승 일을 처리했다. 물론 어린 영창대군이 있었고 젊은 인목대비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지만 대북파의 주도로 광해군이 대권을 이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이은 인조는 조선을 다시 과거로 한참 되돌린  점에서 가장 무능한 왕이었으며 무너져가던 명을 섬기며 청을 배척하다가 정묘,병자호란을 당하여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고 소현, 봉림대군, 3학사 등을 포함하여 조선인 30만~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왕들이 재위기간 내내 자신을 추대한 대신들에게 휘둘려 제대로 국정을 소신껏 펼수 없음은 당연했다. 광해군은 은인 정인홍이 들어오면 일어서서 절을 하면서 맞이했고 나가기 전까지는 자리에 안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정대감의 뜻 입니다'라고 보고가 올라가면 두말없이 '그렇다면 그대로 하시오'라고 했다.

 

조선의 명맥이 사실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 번째 사건으로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폐위사건을 들 수 있다. 극도의 패륜아이고 탕아였던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쿠테타로 쫓겨났다. 주동인물은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충주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다. 모두 왕족 출신이 아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반란 역시 주동인물이 왕족이 아닌 반대파 서인이었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었다. 이괄과 이귀는 이씨였지만 전주 이씨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그다음 행동이다. 그들은 왕을 몰아냈으면서도 꼭 왕족 가운데 촌수가 먼 힘없는 인물을 골라 새 왕으로 추대했다.

 

유럽에서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면 당연히 반란을 성사시킨 장군이 다음 왕이 되었다. 국가를 그대로 둔 채 승계하여 다음 왕이 되는 것보다도 그 왕실을 모두 없애버리고 자신의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쿠테타에 성공한 무리들은 왕의 실정을 보면서도 뭔가 새로운 설계를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보려는 의지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물론 그것이 유교 사상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공통적이었다. 그냥 그대로의 틀 속에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만 추구한 것이었다.

 

철종이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을 때도 왕실 종친부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적합한 인물을 한 사람 골라냈다. 그러나 이때도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엉뚱한 소년을 왕으로 끌여들인 사람은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군의 밀약으로 꾸며진 일이었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안동 김씨들의 세상이 계속될까봐 서둘러서 어릴 때 이름이 개똥이였던 소년을 양자로 입적하고 새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 혼란스런 조선 말기에 좀 더 영민한 인재가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데 조대비가 섭정을 하다가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이 직접 섭정을 하면서 10여 년 동안 강력한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개혁을 시도하다가 며느리 민비와 권력을 두고 다투다가 조선은 결국 망하고 말았다.

조선을 통틀어 개혁을 주장하고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인물들은 많다. 그러나 나라를 뒤엎고 반정에 성공한 인물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새롭고 건강한 나라를 만들어 보려는 생각은 애당초 가져보지도 않은 채 자신이 무시 받은 데 대한 보복심, 반대파에 대한 원한, 그런 것들만이 반정의 골격이었다.

 

차라리 태조 이성계는 그런 면에서 솔직하다. 신하도 왕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수도도 개성에서 한성으로 옮겨 새 터를 잡았다. 기존의 제도를 파하고 많은 개혁정책을 만들었다. 법 제도도 대대적으로 바꿨다. 차라리 그 쪽이 낫지 않는가?

 

연산군을 폐위시킨 무리들이 가령 주동자 성희안을 왕으로 추대하여 양반 상놈으로 나뉜 반상제도를 철폐하고 세금문제를 개혁하며 모든 제도를 백성들 편에서 연구하고 제정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씨 조선이든 성씨 조선이든 백성들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자리만 새로 장만했던 무리들, 무지한 산골 청년 철종을 내세워놓고 뒤에서 호의호식한 사람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열 두 살짜리를 왕으로 삼아 섭정을 하려는 늙은 조대비와 가진 자들에 대한 앙심만 똘똘 뭉쳐 있던 대원군이 만들어낸 나라였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타락하고 무능한 왕을 몰아내거나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던 조선이었다.

 

그들은 충효를 내세운 성리학적인 명분 때문에, 반역을 했으면서도 결코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만 급급했던 셈이다. 허수아비 임금을 세우고 그들은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렸다. 백성을 위한 반역이 아니라 임금을 갈아치우거나 집권층을 제거하기 위한 반역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새로운 집권층은 기존의 집권층이던 대북파를 역적으로 처단하였는데, 이이첨, 박승훈, 정인홍 등의 집과 처자식, 재산, 노비들을 죄다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린 부류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다시 대명사대외교를 전개하면서 과거로 회귀하고 말았다. 날로 성장하며 조선을 위협하고 있던 후금은 오랑캐요 상대할 수 없는 나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가운데 그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며 싸움질에 빠져 서로 모함을 벌이다가 인조반정 2등공신이던 이괄을 몰아세워 목숨을 위협하지 서북방면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이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괄은 서북방면 군사력 중 거의 대부분인 1만 5천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평양을 우회하여 파죽지세로 내려와 한성을 향해 다가오자 인조는 급히 공주로 피난을 갔다. 대궐을 점령한 이괄의 반란군은 반란이 거의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고 축재 분위기에 들떠 방심하다가 뒤따라온 관군이 위협하며 버티고 있던 서울 인근 안산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대패하게 되자 반란군은 반란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래서 밤에 몰래 궁궐을 빠져나간 이괄을 위시한 반란군 잔여 세력은 이천까지 도망하였다가 반란이 실패한 것으로 판단한 부하 장수들에게 이괄을 포함한 지휘부 장수 대부분이 목숨을 잃게 되는 비운을 겪고 반란은 진압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괄이 이끌고 내려온 서북방면 방어군 1만 5천여 명이 모두 지리멸렬되는 바람에 서북면의 방어가 구멍이 뚤려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는데, 인조 정권은 서북방의 군대를 새로 보충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국가 재정이 바닥나 갑론을박 끝에 서북방면 군사력 보강은 거의 방치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 한성 위주로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여 전투력을 보강하였으나 막상 후금이 침공하자 압록강에서 한성까지 주요 지형을 사수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결국 정묘.병자호란을 당하는 참담한 비극을 초래하였던 인조정권이었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했으면 이름도 바꾸고 경영진도 교체하며 경영전략도 새로 짜서 새 출발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고 껍데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똑같은 시스템과 경영전략 위에 그냥 눌러 앉아 자신의 봉급반 몇 배로  올린다면 그 기업이 잘 될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현실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유교라는 성리학적 폐쇄주의 사상적 함장에 빠진채 오백 년을 이어온 그런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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