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도난사건
Mona Lisa
Oil on poplar panel, c.1503-1505
30 1/4 x 20 3/4 inches (77×53cm)
Louvre, Paris
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 대단한 이름이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이름이다. 광기(狂氣)로 가득찬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기이한 인생을 살아간 그가 그린 이 그림에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품이 되려면 스토리가 있어야”
그는 공동묘지에서 갓 죽은 시체를 모르게 훔쳐와 집에서 직접 해부해 해부도를 만들었다. |
그림 그려서 판 돈으로 여자를 사서 육체를 뜯어보고 감상하면서
인간의 완전한 육체가 무엇인지를 그렸으며 여성해부도까지 만들어냈다.
괴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비밀과 미스터리가 많은 걸까?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은 왜 그렇게 세상을 흔들어 놓은 작품이 됐을까?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에 반항했다는 이유 때문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종교에 대항한 작품이 한두 개인가?
‘간염에 걸린 임신부’라는 평가도 있어
외신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모나리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주 순결하고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여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모나리자처럼 생긴 여자와 결혼하고 싶습니까?
그런 꿈은 접어 두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실망할 겁니다.
그리고 여성분들은 모나리자에게 질투를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모나리자보다 훨씬 잘 낫고 똑똑합니다.
생각하기에 모나리자는 괜찮은 여자라고 추천할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들처럼 젊은이로 돌아간다면 모나리자와 같은 사람은 결코 찾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그림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면 일반 사람과는 다릅니다.
눈썹이 없다는 것은 당시 사회환경이 그러니까 넘어가고…,
얼굴에 황색의 기운이 많습니다. 이 얼굴이 정확한 모델이라면 모나리자는 간염에 걸린 여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황달에 걸려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아랫부분을 유심히 보기 바랍니다.
당시 여성의 미(美)의 기준이 요즘과 달리 통통한 편이라고 해도 배가 너무 큽니다.
이는 모나리자라는 모델이 임신한 여성이라는 겁니다.
얼굴 크기와 몸매를 견주어 짐작하건대 배의 크기가 이 정도라면 분명히 임신한 여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황달에 걸린 임신한 여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반론을 제기하는 리포트를 제출하기 바랍니다.
저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바랍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교수다.
예술품, 그러니까 미술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
2005년 최고 경매낙찰가를 기록한 미술작품은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다.
1억400만 달러, 현재의 환율로 계산해보면 대충 1천4백억 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부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124평형이 50억 원 정도니
20채 정도를 살 수 있는 액수다. 엄청난 돈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얼마나 될까?
거래시장에 내놓지 않기 때문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프랑스 정부의 루브르 박물관이 팔려고 내놓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문화 강국이라는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에게 가당하기나 한 이야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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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로 더욱 유명해졌다. |
그러나 경매에 팔린다는 것을 전제로 기네스북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모나리자를 올려놓고 있다. 6억7천만 달러다.
이 돈이면 기아로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다. 광기의 천재 화가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 말이다.
사람들은 왜 명품에 집착하는 걸까?
예술, 그리고 예술품은 가장 주관적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주관적인 예술품에 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걸까?
아니, 수억 달러라는 돈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이성적일까?
명품의 조건은 무엇일까?
천재 화가로 통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고매한 작품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유명한 그림인 것은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그림과 같은 예술품이 명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둘러싼 스토리가 많아야 한다.
작품을 그린 화가도 그렇고, 작품의 역사가 파란만장할수록 값어치가 있게 마련이다.
모진 굴곡과 풍상(風霜)을 거듭해야 명품으로 나는 것이다.
風霜을 거듭해야 명품이 돼
아마 1911년 8월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광하는 ‘영원한 미소’ 모나리자는
결코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르네상스의 천재 다빈치의 주가도 그렇게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악마의 서적으로 비난 받기도 한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면서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루브르 박물관이 세계 최대 박물관으로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그저 평범한 도난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박물관에 갔다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이어서
‘슬쩍’한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모나리자는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작품으로 꼽히지는 않았다.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시, 그것도 벌건 대낮에
세계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이후부터였다.
도난 당할 당시 모나리자는 그리 중요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의 한 복도에 걸려 있었고 도난 방지 시스템도 없었다.
프랑스 수사기관은 모나리자를 찾는 데 대단한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인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2년 후
모나리자의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범인이 자수했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
이로 인해 모나리자는 세기의 관심이 됐다. 관심이 되자 모나리자의 주가는 치솟았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대상이 됐다. 쳐다보지도 않았던 모나리자는 성모(聖母)의 상으로 둔갑하면서
성스러운 종교의 대상으로까지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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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완벽한 인간을 기하학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
뿐만이 아니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주가도 뛰었다.
성모를 방문하기 위한 행렬이 계속됐고, 그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합장(合掌)과 기도 속에서
종교적 희열을 만끽했다. 왜 그랬을까? 도난 됐던 성모가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왜 이 그림을 훔쳤을까? 그리고 왜 다시 자수해서 고스란히 되돌려 준 것일까?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아니면 시중에 팔려고 했는데 별로 돈이 되지 않아서?
또 아니면 모나리자를 세기의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지른 고도의 술책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신비로운 미소’ 모나리자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출세하게 된 것은 도난 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확실하다.
지난 2007년 삼성 특검이 있었다.
이로 인해 홍라희 여사의 소유로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유명세를 탔다.
이 사건으로 이 그림이 더욱 유명해지고 주가가 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명품은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흥망성쇠의 역사처럼 굴곡과 풍상을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접할 필요가 있다.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냉정하고 차가운 시각으로 말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민족주의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사람들은 예상했다.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색깔이 강한 종교도 점차 그 색이 바랠 것으로 기대했다.
종교, 정치, 인종을 대변하는 문명적 이데올로기가 끝날 것이라고 점치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종교와 민족에 호소하여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다.
이라크 전쟁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이다.
민족주의와 종교는 여전히 폭발력이 커
사람의 감정에 불을 붙이는 데 가장 폭발력을 발휘하는 것이 종교와 민족이다.
쉬운 예로 월드컵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수나 관중 모두가 마치 축구라는 이데올로기에 홀려 전장에 참여한 전사들 같다.
일부 유럽 관중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전쟁으로 꼽히는 십자군 전쟁의 전사들의 복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자비한 십자군 전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 인 이슬람 영토에서 십자군이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축구장에서는 십자군 전사가 되고 싶어진다. 모든 수를 동원해서 이겨야 한다.
“To the Victors, Goes the Spoils. 전리품은 승자에게”는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의 원칙이다.
전리품은 전쟁에서 패배한 상대국의 영토가 될 수 있고, 각종 재물, 여자, 노예들이다.
따지자면 역사 또한 위대한 전리품이다. 역사는 강자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쓰기 때문이다.
전리품 가운데 또 중요한 것이 있다. 상대국의 훌륭한 예술품들이다.
각종 유명한 조각이나 공예품과 같은 문화적 유산들도 중요한 전리품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몫이다.
특히 불교문화를 근간으로 한 동양의 불상(佛像)들은 중요한 전리품들이다.
“예술품은 중요한 전리품”
“전리품은 승자에게” 원칙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이긴 대통령이나 총리는 행정수반이 돼 각 부처 장관을 지명한다.
정부투자기관을 비롯해 국영기업체 사장도 사실은 대통령의 임명에 따라 이루어진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 국가들의 거대한 박물관에 가보면 그들의 고유한 문화재는 거의 없다. 외국 문화재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중국, 이집트, 이란, 인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등
소위 문명의 발상지에서 온 문화재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박물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고국의 문화재가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빼앗겼다는 민족주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유통경로를 따지기 앞서 말하자면 세계적인 우리의 보물 직지심경(直指心經) 또한 마찬가지다.
어쨌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것은
일부 관람객에게는 민족적 울분을 충분히 자아낼 만하다.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세계를 지배했으며 서양문명의 근간이 된 천 년의 로마제국이다.
아마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모나리자가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탄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민족주의를 자극시킨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민족주의를 자극시킨 도난사건
다시 말해서 훔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그는 모나리자를 그린 사람이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민족적 감정에 호소해서 훔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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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 그림이 걸렸다가 뜯겨나간 자리. |
이로 인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언론의 집중을 받으면서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호하고(ambiguous), 신비하며(myth), 마치 암호처럼 그 비밀을 풀 수 없는(enigmatic) 모나리자는
역시 대단한 가치를 누릴 운명을 이미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나리자의 인생역정이 만만치가 않다.
우선 광기(狂氣)의 천재화가이자, 그 역시 신비스럽고 모호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외에 탄생 이후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과 풍상을 안고 있는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다.
모나리자 도난사건 자체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에 앞서 모나리자가 걸어온 굴곡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파란만장한 역정의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1503년에 그리기 시작했다.
4년 동안 중간에 방치했다가 다시 시작해서 완성했다고 한다.
아마 별로 돈벌이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작품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르네상스가 시작됐던 이탈리아는 사분오열 찢어져 가난했던 대신 프랑스는
유럽의 최대 강국이었다. 프랑스 궁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돈도 자주 얻어 썼던 다빈치는
1516년 프랑스로 가면서 모나리자를 갖고 갔다.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Francois I)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간 다빈치는
국왕의 풍부한 지원 아래 앙브와즈(Amboise) 성 근처에 있는 클로루세(Clos Luce)라는 저택에서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현재 다빈치 박물관 자리다.
다빈치는 1519년 죽기까지 이 곳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클로루세를 종종 방문하며 다빈치를 격려하던 왕은 다빈치가 갖고 있던 모나리자에 관심을 가졌다.
기록에 따르면 왕은 당시 돈으로 4천 에쿠스(ecus)를 주고 이 그림을 매입한 후
퐁텐블로(Fontainebleau) 궁에 비치했다. 그 후 국왕 루이 14세는 그림을 베르사이유 궁으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