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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rose of sharon , 無窮花) 2022. 9. 14(수)10.00시 제5회 -1-
분류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강 > 아욱목 > 아욱과 > 무궁화속
원산지 아시아 (대만,싱가포르,대한민국)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여름 내내 이어 피기를 계속하는 꽃의 특성처럼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5천 년 역사를 이어온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러나 ‘무궁화를 국화로 한다’라는 법률이나 조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꽃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00년경 애국가 가사가 만들어질 때 후렴으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 들어가면서부터다. 질곡의 근세를 살아온 세대들은 무궁화가 바로 애국의 상징이었다. 삼천리강산이 무궁화 꽃으로 덮이는 이상향을 그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무궁화가 선택되었다. 국기봉이 무궁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정부와 국회 포장이 무궁화 꽃 도안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른다. 1963년부터는 무궁화를 감싸고 있는 한 쌍의 봉황새 무늬를 대통령 휘장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한국동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에 화훼연구가 조동화 씨와 식물학자 이민재 씨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당시 일간지에 지적하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1) 에는 무궁화로 짐작되는 ‘훈화초(薰華草)’가 군자의 나라인 우리나라에 자란다고 했다. 우리 문헌에도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 ‘근화지향(槿花之鄕)’이란 말이 들어 있다. 《산해경》의 기록대로라면 당시는 삼한시대일 것이고, 또 최치원이 국서를 보낸 시기를 따져보면 적어도 1천 년 이전부터 이 땅에 무궁화가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 자라던 무궁화이지만 원산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학명의 종명에 중동의 시리아를 뜻하는 ‘syriacus’가 들어 있으며, 최근 그리스에서 무궁화 꽃을 새긴 은전이 발굴되어 시리아를 포함한 중동이 원산지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2) 또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왕유(王維, 699?~759)의 〈장맛비 속의 망천장〉이란 시에는 “녹음 짙은 여름 숲엔 꾀꼬리 소리가 들려온다/산속에서 조용히 수양하며 무궁화를 감상하고”란 구절이 나온다.3) 무궁화가 중국 땅의 숲속에 자연 상태로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니 중국 남부 원산지설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그 외에 우리나라 안에 자연 상태로 분포하는 자람 터가 발견되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한반도가 원산지라는 주장도 있다.
근화(槿花)나 목근(木槿)으로 불리다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이 꽃은 꽃 피기 시작하면서/하루도 빠짐없이 피고 지는데/사람들은 뜬세상을 싫어하고/뒤떨어진 -2-
걸 참지 못한다네/도리어 무궁이란 이름으로/무궁(無窮)하길 바란 것일세”라고 하여 처음으로 무궁화의 어원이 나온다.
무궁화는 보통 사람 키 조금 넘게 자라며 지름이 4~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나무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를 자르는 등 간섭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중간 키 정도로 자란다.
무궁화의 수명은 30~40년 정도로 짧다. 하지만 동물이나 식물 모두 목숨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다. 무궁화도 마찬가지로 100년 전후의 고목이 전국적으로 몇 그루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고 오래된 무궁화는 강릉 사천면 방동리 강릉 박씨 제실 안에서 자라는 천연기념물 520호 무궁화다. 키 4미터, 밑동 둘레가 150센티미터(거의 한 아름)이며 나이는 110년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천연기념물 521호 무궁화가 있고, 남원 산동면 대상리 및 홍천 고양산 중턱에도 크고 오래된 무궁화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무궁화 잎은 깊게 세 갈래로 갈라지며 어긋나기로 달린다. 다섯 장의 꽃잎이 서로 반쯤 겹쳐져 작은 주먹만 한 꽃이 핀다.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양성화이며, 꽃잎의 안쪽 가운데는 품종에 따라 붉은색 무늬가 생기는데, 흔히 ‘단심(丹心)’이라고 부른다. 무궁화는 새벽에 피기 시작하여 정오를 지나면서 활짝 피고, 해거름에는 오므라들어 다음날이면 땅에 떨어진다. 여름에서부터 늦가을까지 거의 3~4개월이나 피는데,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무궁화는 세계적인 정원수로서 수많은 품종이 있고, 장려하는 종류만도 20여 종이 넘는다. 색깔로 본다면 붉은색, 분홍색, 보라색, 흰색이 있으며 홑꽃과 겹꽃도 있다. 그중 나라꽃의 표준으로 정한 것은 분홍 꽃잎 가운데 붉은 무늬가 생긴 홍단심과 흰 꽃잎 가운데 역시 붉은 무늬가 들어간 백단심이다.
[참 고]
아욱과--->남북 양반구의 열대,온대에서 자라며 세계 200여속에 2,300종이 있
으며 한국에는 목화 수박풀 어저귀 황촉규 무궁화등이 있다.
산해경--->중국 선진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신화집 및 지리서이다.
춘추시대부터 한 대 초기까지 학자들이 첨가한 총18권으로 이루어짐.
천문과 함께 중국신화를 기록한 귀한 고전이다.
춘추시대(BC1500~400) 전국시대(BC400~200)이후 진.전. 한으로 이어짐.
최치원--->신라 문성왕19년(857년)출생. 본관 경주.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문장의 대가로 12세에에 당에 유학 18세에 장원급제함. 시무책15조(894년
진성왕에계 집권체계와 골품제 사회의 모순에 문제점 지적) 유교 불교
도교에 깊은 이해로 많은글을 남김.
이규보--->백운거사(1168~1241년)본관 황려(경기 여주) 고려시대 시인 철학자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과거에 떨어지었고 무신정권의 최충헌에게 등용
되었고, 몽골왕에계 고려의 억압을 감해줄 것을 간구하는 진정표로 유
명함.
애국가愛國歌 2022.9.28.(수)10.00시 제7회 -1-
요약 한국의 국가.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노래로서의 애국가는 갑오개혁 이후로 여러 사람이 만들었으며 <독립신문> 창간 이후 많은 가사들이 수록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애국가〉를 정식으로 제정했으나 이후에도 많은 애국가가 지어졌다. 그중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붙여 부르던 〈애국가〉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형태의 〈애국가〉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른다. 모두 4절의 가사로 된 16마디의 4/4박자의 곡이다. 작사가는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윤치호·안창호가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개요
나라 사랑을 고취하는 노래, 혹은 안익태가 곡을 지어 국가로 애창되는 곡.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노래로서의 애국가는 갑오개혁 이후로 상당히 많았다. 그중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붙여 부르던 〈애국가〉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애국가〉가 1948년 정부수립 때 채택되어 국가로 불려진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애국가의 역사
서구 열강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세기 말부터 나라를 사랑하자는 뜻을 담은 애국가가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1896년에 만들어진 학부주사 이필균의 〈애국가〉를 필두로 인천 제물포 전경퇴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북서순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회당예수교인의 〈애국가〉, 새문안교회 신도들이 지은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학당 김종섭의 〈애국가〉, 정동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묘동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 학도들의 〈애국가〉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 190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곡조를 알 수 없으며, 새문안교회의 〈애국가〉와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만 그 곡조가 전한다. 새문안교회에서는 1896년 7월 25일 고종의 생일에 축하예배를 보면서 "높으신 상쥬님 자비론 상쥬님……"의 가사를 가진 애국가를 지어 영국의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에 얹어 불렀다고 하며, 같은 해 독립문 정초식 때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의 가사로 된 애국가를 배재학당 학도들이 불렀다는데 이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구는 이때 처음 등장했다.
광무개혁을 진행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정식으로 제정·공포했다. 이 애국가는 당시 군악대 지휘자 F. 에케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대한제국애국가〉는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난무하던 애국가를 하나로 정리하려 했으나 이후에도 많은 -2-
애국가가 지어졌다. 이렇게 유행처럼 번진 애국가의 창작과 보급은 사회적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애국독립가류의 창가로 분류할 수 있다. 애국가 가사의 주된 내용은 자주독립·문명개화·부국강병·신교육 등이었다.
지금의 <애국가>
많은 애국가 중,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구가 붙은 애국가가 〈올드 랭 사인〉곡에 붙여 많이 불렸는데, 안익태가 1936년 <한국환상곡>과 〈애국가〉를 작곡하여 그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이 곡을 함께 불렀으며,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일본 등지의 교포들에게 악보를 보내어 이를 알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 사용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올드 랭 사인> 곡에 붙여 불렀다.
1945년 11월12일 백범 김구가 <애국가>의 악보를 국내외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한국 애국가’ 악보집을 중국에서 발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지금의 가사와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의 애국가가 정부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불려지기 시작했고, 곧 해외에도 이 애국가가 널리 전파되어 실질적인 국가(國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작사자에 대한 논란
현행 <애국가>는 모두 4절의 가사로 된 16마디의 4/4박자의 곡이다. <애국가>의 작사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55년 정부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기 위해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고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 1955년 4월4일부터 1955년 7월 28일까지 작사자를 밝히기 위해 폭넓은 연구 조사 활동과 회의를 거쳐 논의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등이 단독으로 작사했다는 설, 여러 사람의 합작이라는 설, 배재학당 애국가가 여러 단계를 거쳐 개작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능성에 대해 연구했으며 안창호와 윤치호가 가장 유력한 인물로 거론되었고, 최종적인 표결에서 윤치호 11인, 확정 유보 2인의 결과가 나온 상태에서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도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려는 노력은 여러번 시도되었으나 국가적으로 공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행정안전부의 자료에는 "애국가의 노랫말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을 전후하여 조국애와 충성심 그리고 자주 의식을 북돋우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여러 선각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내용을 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작곡자에 대한 논란
안익태가 1936년 작곡했다. 한때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와 거의 비슷하다는 표절시비가 붙으면서 애국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는 1965년 안익태가 사망한 후 부인 로리타 안이 저작권을 상속받아 보유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통해 신탁 관리해오다가 2005년 3월 16일 “애국가가 한국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불리기를 소망하며 고인이 사랑했던 조국에 이 곡을 기증합니다”라는 기증서와 함께 한국 정부에 저작재산권을 기증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비영리적 목적에 한해 한국저작권위원에서 규정한 일정한 절차를 거쳐 애국가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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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작곡가인 안익태가 <친일인명사전>(2009)에 등재되면서, <애국가>의 존폐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안익태가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 아악곡의 선율을 차용한 <에텐라쿠>를 작곡하고, 1942년에는 나치 독일을 위한 연주회에서 공연했으며, 같은 해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곡인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베를린에서 초연하는 등 친일과 친나치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 주된 이유로 제시되었다.
법적 지위
<애국가>를 한국의 공식적인 국가로 지정한 법률적 근거는 없다. 다만 정부수립때부터 국가로 불렸던 오랜 역사를 근거로 국가로서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규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따라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1984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이를 대체하여 2007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2010년 제정된 <국민의례규정>에서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 국민의례 등에서 <애국가>를 연주하도록 규정하여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 국가
관련 법령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제4조(국기에 대한 맹세) ①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때에는 다음의 맹세문을 낭송하되, 애국가를 연주하는 경우에는 낭송하지 아니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제19조(게양식 및 강하식) ①법 제8조제4항의 낮에만 국기를 게양하는 학교 및 군부대는 그 주된 국기게양대의 국기를 게양·강하하는 때에는 게양식 및 강하식을 행한다. 다만, 같은 조 제5항의 사유로 국기를 게양·강하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법 제9조의 게양식 및 강하식은 애국가의 연주에 맞추어 행한다. 다만, 주변여건상 부득이한 경우에는 애국가의 연주를 생략할 수 있다.
<국민의례규정>
제4조(국민의례의 절차 및 시행방법)
① 국민의례의 절차는 정식절차와 약식절차로 구분하며, 정식절차로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행사의 유형 또는 행사장의 여건 등에 따라 약식절차로 시행할 수 있다.
②국민의례의 정식절차는 다음 각 호의 순서와 방법으로 시행한다. <개정 2016.12.30>
1. 국기에 대한 경례: 국기에 대한 경례곡 연주와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문 낭송
2. 애국가 제창: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제창하거나 1절만 제창
독립문獨立門 2022.9.21.(수)10.00시 제6회 -1-
요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사적 제32호. 높이 14.28m, 너비 11.48m. 모화관 정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 발의로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설계자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만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1917년 수리공사를 했으며 1928년 기초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벽체 안쪽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동판이 묻혀 있다.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석재 초석이 있는데 이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은문迎恩門
조선시대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아들이기 위해 중종 34년(1536년)에 세운 문으로 1896년에 헐리고, 이후 독립 협회의 주도로 그 자리에 독립문울 세움.
모화관慕華館--->중국사신 영접하던 곳.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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