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와 글쓰기
무인 출신의 그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54년경
송요찬 등 4명의 장성과 술자리에서 에도시대의 유학자 라이산요의 한시를 읊었다고 한다. (지동욱, <한국대통령열전>, 동경, 2002)
채찍소리 조용히 밤 강을 건넜으나
대장기의 수천군사 새벽녘 발각되니
원한은 십 년이라 갈아온 칼이건만
번뜩인 검광 밑에서 큰 뱀을 놓치누나
이 시는 1561년 일본 전국시대 무장의 하나였던 우에스기 겐신이 10년간 복수의 칼을 갈아오다 야밤에 습격을 단행했으나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 빛 아래서 큰 뱀, 곧 다케다 신겐을 놓친 사실을 노래한 것이다.
동석했던 한 소장이 "거 일본 거 되게 좋아하네" 라고 빈정거리자 박정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구형, 갑시다. 이런 속물들
하고는 술 못 마시겠어요" 하고 영남일보 주필이었던 구상을 재촉했다는데, 이 때 그는 왜 그런 일본 한시를 그 자리에서 읊었을까?
시의 내용에 그가 계획했었으나 군 수뇌의 동조를 얻지 못해 볼발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1952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었던 까닭이다. 쿠데타와 시,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당일 술자리의 주빈이었던 구상은 평소 박정희가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 평한 일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발표한 두어 편의 시와 그 후 아내 육영수를 그린
시 등 20편 정도를 남겼다. 육영수는 남편이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썼을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글쓰기를 좋아
했다는 뜻인데, 실제 박정희는 오랫동안 일기를 썼고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삶의 주요 고비마다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던 대목이 흥미롭다.
첫번째는 만주군관학교 응시자격을 허락해 달라고 당국에 보낸 혈서다. 두 번째는 1952년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거사의 결단을 내린
것만 못했다면서 다음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다. 세 번째는 1960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용퇴할 것을 건의한 편지다. 네 번째는
1961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거사에 가담할 것을 종용한 편지다. 그의 글이 매우 문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사람의 생각을 정리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는 대체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왔던 것일까?
◇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술집에서 언쟁이 붙은 손님들 이야기를 등 뒤로 들어보니 한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옹호자, 다른 한쪽은 비판자였다.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훼예포폄이 엇갈리는 대통령은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일반인의 좌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문학자들의 논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햇살이 강하면 그늘이 짙다고 했다. 그래서 논제를 민주냐 반민주냐 하는 정치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로 옮긴다 해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는 쪽과 "한국 경제를 비뜰어지게 했다" 는 쪽으로 갈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상반된 시각과는 별도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를 평가하느냐는 여론조사에서는 벌써 16년째 박정희가 단연 톱이다.
또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 하면 '가난, 혼란, 어두움' 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박정희 정권 하면 '발전, 안정, 밝음' 의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많았다는 조사도 있다. (<조선일보> 2004년 12월 31일)
정통성이나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를 위축시킨 마이너스 유산을 남긴 것이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계속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간주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공동의 삶의 기원에 '먹는 것' 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역시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신드롬에는 일부 맹목적인 향수 같은 것도 있고, 군사정권 시대에 절대선이라 믿었던 민주화의 신념이 깨진 데 대한 실망같은 것이 역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중에게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권 후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 너무 무의미한 것"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1962) 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배고픔을 벗어나는 것이 당대 민주주의라고 본 대중의 정서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는 데 그가 헌신적이었고 열심히 일했으며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가난을 벗기 위해 노력한다. 그 성과로 기업가가 된 사람도 있고 전문직 종사자가 된 사람도 있으며 개중에는 정계로 나아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입신영달이나 치부를 넘어 집단이나 민족을 위해 노력한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역시 한 시대의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 박정희와 억눌린 삶
정치학자 해럴드 D 라스웰은 "억눌린 경력이 정치가를 만든다" 고 지적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말솜씨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박정희를
혁명가 내지 정치가로 만든 것은 '억눌린 경력' 이었다. 그의 삶을 가장 억눌렀던 짐은 '가난' 이었을 것이다.
1917년 경북 선산의 빈농에서 아버니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태어나기 전부터 가난 때문에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의 작은 누나 박재희는 그 점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더랍니다."
(정재경, <위인 박정희>, 1992)
이렇게 시달리다 태어난 탓인지 박정희는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나 형들과 달리 체구가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 든
어머니의 젖이 말라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을 먹으며 자랐다. 그는 턱없이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내일이 추석명절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떡을 치고 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집에 들어서자 전혀 음식을 장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날의 냉랭하던 정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박정희 수기 <나의 소년시절>, 1970년 4월 26일)
우등 자리를 놓치니 않던 그는 어떻게든 가난만은 벗어나고 싶었다. 소년의 이 같은 결심은 대개 판검사든 사업가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에의 개인적인 출구를 찾는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고 박정희는 수기에 적었다. 그 직업이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있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롤모델이 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병정놀이를 즐겨 했던 그는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같은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우선 주변의 권유에 따라 학비가 들지 않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들이 입시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수업료 면제라곤 해도 기숙사비는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해마다 고향에 돌아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몇 주고 한 달이고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입학 때 중간 정도였던 그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4학년 때는 꼴찌, 5학년 때는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가난의 그늘은 짙었다.
그의 조행평가서에는 "음울하고 빈곤한 듯 함" 이라는 식이 코멘트가 기재되었다. 나약한 정신력은 대개 여기에서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태내에서부터 사선을 넘나들며 태어난 그였다. 이런 유의 사람에게는 역경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된다. 강인함을 키우는 훈련장이 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장군이 되고 싶은 꿈을 안으로 더욱 다져나갔다.
그것을 방증하는 것이 쳐지는 학과성적과 달리 뛰어난 점수를 얻은 교련과목이었다. 대구사범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한다.
◇ 박정희와 나폴레옹
나폴레옹에 심취했던 이유는 그가 자기처럼 키가 작았고, 자기처럼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면서 꿈을 펼쳐나간 나폴레옹을 닮고 싶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라는 롤모델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 교사로 임용된 뒤에도 계속 그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당시 제자였던 정순옥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 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 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 (이낙선 비망록, 1962)
그런 그가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갑자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다. 이 돌연한 행위를 두고 "친일행위다."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입대했다" 는 등 상반된 해설이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문경소학교 시절의 제자 전도인의 증언에 귀 기울일 내용이 들어 있다.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어이 교장 계신가?'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는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있는 국민이 되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정재경)
이를 다시 읽어보면 "상전이면 상전답게 굴어야지, 왜 내선일체라면서 조선인을 함부로 대하느냐?" 는 뜻으로 민족감정이 내재된 발언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상전인 일본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다만 민족을 차별하지 말고 정당히 대접해 달라는 것이 당시 그의 민족주의 콘텐츠였던 것 같다.
따라서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간 것은 친일을 하기 위해서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지 않고 대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군대로 향하게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욕망은 그가 보통학교 시절 80연대의 야외훈련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이후 마음속에 키워 온 장군에의 꿈이기도 했다.
◇ 긴 칼 차고 싶어서
그가 갑자기 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 보다 선명한 답을 내놓은 것은 역설적으로 박정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한 연구소였다. 2009년 말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면서 박정희는 "만주국 군적이 없는 데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3차례의 시도 끝에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 일본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 발표했다. (<경향신문> 2009년 11월 5일)
3차례(경향신문) 또는 2차례(만주신문)의 시도 끝이라면 박정희는 갑자기 만주군관학교에 갔던 것이 아니라 문경소학교에 부임한 1937~1938년부터 게속 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리다가 1939년 10월에야 비로소 응시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940년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박정희는 15등의 합격자로 발표되었다.
문경소학교를 떠나던 날 그를 배웅하러 나온 제자들이 울며불며 가지 말라고 매달리자 박정희는 "너희는 모른다. 내가 긴 칼 차고 대장이 되어 돌아오면 군수보다도 더 높다" 고 했다는데 (박동성. 심고령, <여명의 기수>, 1963), 이는 훗날 소년용 <박정희 전기>를 준비하던 당시 공보비서관 김종신이 왜 만주에 가셨느냐고 물어보자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라고 단순 명쾌하게 대답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월간중앙> 2005년 3월호)
긴 칼은 권(權)의 상징이다. 권이 있으면 부도 따른다. 가난의 억눌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의 꿈이 긴 칼을 찬 군인의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0년 4월 그는 만주국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예과 2년의 군관학교 생활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구타하는 일이 잦았다. 1기생이었던 방원철은 군기를 잡는다며 주먹을 날렸다. 어려서부터 '대추방망이' 라는 별명을 듣고 자란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차돌같이 단단한 자세를 유지했는데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자리로 와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독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 회고했다. 박정희에게는 그런 악바리 근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이는 대구사범 시절의 꼴찌와는 판이한 결과였다.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검도. 유도. 승마. 교련 같은 육체적인 과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1942년 3월 그는 조선인이 포함된 만계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로부터 금시계를 부상으로 받는 동시에 일본육사 본과에 편입하는 특전을 누리게 된다.
이후 도쿄에 건너온 작은누나 박재희 부부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부에 전념한 박정희는 1944년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 그 해 7월에는 열하성에 있던 보병 제8단에 배속,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만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 박정희와 건국동맹
이 시기 박정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있었다. "독립군을 토벌하러 다녔다." 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1999/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2000),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 는 주장도 있다. (정재경)
그러나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동만주의 열하성 지역에서는 1944년 7월 시점으로 독립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독립군을 사냥하러 다녔다" 는 비난은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팔로군과의 접전은 있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의 동기생이었던 중국인 고경인은 "19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결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대토벌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습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지요. 그러나 작전에는 참가했어도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라고 증언했다. (정운현, <군인 박정희>, 2004)
한편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은 만주분맹의 군사책임자였던 만주군 대위 박승환이 그해 국치일인 8월 29일을 기점으로 국내 진공을 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조선 출신 군인들을 많이 포섭했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1946 / 송남헌, <해방3년사>, 1985)
박정희의 친일 논쟁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건국동맹과의 연계설' 에 대해 한 연구자는 그가 해방 직후 봉천(선양)을 거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베이징 쪽의 우회로를 택한 것을 보면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무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 라고 지적했다. (전인권, <박정희 평전>, 2006) 여러 정황으로 보면 박승환 쪽에서 그에게 접촉해왔을 개연성이 있지만 과연 박정희가 그들 비밀결사에 가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본 패망에 따라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제8단은 험하 산길을 걸어 8월 17일 홍콩에 도착, 국민당 정부에 투항한 뒤 무장해제됐다.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부대에 들어가 제2중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바람에 광복군으로 지낸 중국에서의 10개월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미 해군 수송함을 얻어 타고 1946년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 했다.
빈털털이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형 박상희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 고 면박을 주었다. (정재경) 이로 보면 박정희가 만주에서 건국동맹에 관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운형계의 박상희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장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고향에서 넉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 동기생들은 그보다 8~9세나 어렸다. 심지어 그가 속한 생도대의 중대장조차 일본육사 3년 후배였다. 그러나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꼿꼿한 몸가짐으로 대열의 맨 끝을 따라다녔다. 나이 어린 동기들과 구보를 하는 데도 그는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했다.
이윽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7년 2월 소위로 임관하여 조선경비대 제8연대에 배속되었고, 그 해 9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승진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훗날 거사의 동조세력이 될 5기생에게 전술학을 가르치다 1948년 11월 11일 전격 구속된다.
◇ 박정희와 남로당
박정희의 남로당 사건은 훗날 5대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 후보가 사상 논쟁을 일으키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초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5일 제주도의 '공비토벌 작전' 에 투입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여수 주둔 육군 제14연대에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20여 명의 장교를 사살하고 여수를 점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자 순천에 파견되었던 2개 중대도 동조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했다. 이어 반란세력과 회복세력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여수에서 1,700명의 사상자와 9,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순천에서도 4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이에 크게 놀란 군 당국은 여수. 순천 지구의 군인 3,000여 명을 수사,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계열의 적색분자 150여 명을 색출해냈다. 여기에서 군 수사당국은 육군사관학교로까지 범위를 넓혀 수사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군사부의 고위 간부임을 밝혀 냈다.
그 해 11월 11일은 육사 7기의 졸업식 날이었다. 여순사건 관련자 토벌 때문에 광주에 따라 내려갔다가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귀경한 박정희는 바로 그날 수사당국에 연행되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숙군 피의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박정희는 몇 차례 전기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어떤 시점부터는 순순히 자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사를 총괄했던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의 김안일 소령은 당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동기에 대해 형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경찰 총에 맞아 죽었는데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이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 이었다고 자술서에 쓰여 있더라면서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죄다 털어놓았다. 남로당 조직도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술을 자주 먹었을 뿐이다. 그는 순전히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이 되어 있었다. 자술서을 읽어 보니 분명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정재경) 고 증언했다.
김안일은 이 문제를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에게 가지고 가 "국장님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박정희 소령을 한 번 면담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이후 김안일은 박정희를 정보국장실로 데려왔는데 이때의 일을 백선엽은 이렇게 적었다.
"박 소령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중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일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 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백선엽, <군과 나>, 1989)
이후 백선엽. 정일권. 원용덕. 김일환. 김백일 등 만군 인맥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박정희는 그 해 12월 10일 구속수사 한 달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 박정희의 관상
당시 숙군 수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백선엽이 감동을 받았다고 묘사한 박정희의 의연함에 주목한다. 의연한 척했던 것이 아니다. 연기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내 운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면 여기에서 죽는 거고, 아니면 산다" 는 식의 의연한 태도는 타고난 그릇의 크기에서 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연함과 관련해서는 만주군관학교 예과 2년 때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1941년 가을의 어느 휴일, 박정희는 동기생 이병주, 이상진과 함께 신경(창춘)의 구 시가지를 거닐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관상을 보게 되었다. 박정희의 얼굴을 흘깃 본 60대의 중국인 관상쟁이는 "삼군질타지상장(三軍叱咤之上將) 치천하지대두령(治天下之大頭領)" 이란 붓글씨를 써주어 함께 간 친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3군 호령의 상장에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 상" 이란 뜻이다. (정영진, <청년 박정희>, 1998)
봉황상이라 보는 이도 있고, 그의 목소리에 권(權)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물론 관상이니 사주니 하는 것은 호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당사자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의연함과 무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관상 이야기는 왜 그가 남로당의 조직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을까 하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만주군 → 독립군 → 국군 → 남로당 → 전향이라는 기회주의적 행보를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현상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노선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벗어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행보는 그가 나폴레옹을 숭배하고, 긴 칼을 차고 싶어 만주로 갔던 것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가난을 비롯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그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엘리트주의적이며 하향식이었다" (전인권)는 지적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류적인 이념을 따른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쪽의 정치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의 기저에는 "3군을 호령하고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가 될 팔자를 타고났다" 는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로당 조직명단을 불게 된 배경에 대해 조금 색다른 견해를 제시한 책도 있다.
여기에 보면 박정희와 함께 살았던 한 여인이 박정희 체포 직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는 저로서는 ... 이북에서 그게 싫어 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얼마 후 김창룡이가 찾아와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의 메모도 전해주었습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육사 7기생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를 하고 아침에 국방부로 출근을 하니 어떤 사람이 귀뜀해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 아는가.'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998)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하지 않은 박정희가 구속 후 남로당 조직을 불게 된 동기가 실은 같이 살았던 이 미모의 동거녀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과묵하고 잘 웃지 않는 박정희의 얼굴에는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그가 애착을 느꼈던 미모의 동거녀 이름은 이현란 이었다. 어떤 자료에 보면 이성희 라고도 기재되어 있는 이현란은 원래 원산 루시여고를 졸업한 뒤 단신으로 월남,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 여고 동창 고금옥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박정희 대위를 처음 만났다. 이후 박정희는 함남 출신의 사관학교 동기 이효 대위에게 8살 연하였던 이현란과의 만남을 부탁했고, 이후 그녀와 1948년 초 약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여름부터 같이 살다가 그 해 11월 11일 느닷없이 구속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늘씬하고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미인 아내를 잃게 될까봐 애절한 고백을 적은 쪽지를 수사 실무담당자 김창룡을 통해 이현란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꿈의 여인이었던 그녀는 '빨갱이가 싫어 월남했는데 빨갱이 마누라' 가 되어 버린 것. 그 무렵 박정희의 전처와 딸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그리고 수사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후의 군법회의에서 군적이 박탈됨으로써 장래가 불투명해진 것 등 정나미가 떨어져 1950년 2월 6일 자기를 찾지 말라는 쪽지를 남긴 채 박정희의 곁을 떠났다.
당시 방첩대 본부장으로 박정희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한웅전 중령은 이렇게 증언했다.
"박정희는 비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내 방에 기어 들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 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 (조갑제)
아픔을 주고 떠난 이현란 이전에 그에게는 이미 결혼한 첫 부인이 있었다. 대구사범 5년 때 부친 박성빈이 당신 생전에 손자를 보겠다며 데려온 이웃 선산 읍내의 부잣집 딸 김호남이 바로 그녀였다. 훤칠하게 잘 생긴 처녀였다는데 처음부터 마음 내켜하지 않았던 박정희는 1937년 첫딸(박재옥)을 낳은 뒤에도 냉랭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가 강제로 시킨 결혼이었던 데다 2년제 간이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문화적 격차를 느끼에 했다는 것이다. 이현란이 떠난 뒤 매일 밤 과음하며 혼자 괴로워 하면서도 박정희는 군복을 벗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만군 선배 백선엽의 배려로 육군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훗날 거사의 핵심 세력이 될 김종필 등 육사 8기생 15명과 같이 일하게 된다. 일본육사(57기)를 3등으로 나온 박정희의 탁월한 군사적 판단력에 감탄한 8기생들이 모두 그를 믿고 따르는 가운데 6.25가 터졌다. 이 시기의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6월 30일 오전 중 수원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정보국에 나갔더니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와 있었다. 28일 새벽에 적군이 서울에 진입한 상황으로 보아 그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장도영, '나는 박정희를 신임했다', <신동아>, 1948년 7월호) 이후 장도영은 박정희의 복직을 상부에 건의했다.
그 결과 박정희는 상부의 재가를 거쳐 1950년 7월 14일 현역 소령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6.25와 장도영이 그를 살린 셈이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지만 좋은 일도 함께 온다. 같은 정보과에 근무하던 대구사범 후배 송재천 소위가 외가 쪽 동생뻘이 되는 육영수란 처녀를 소개했던 것이다.
부산 영도로 피난 내려와 일본식 2층집에 세 들어 살던 육영수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던 9월 15일 박정희는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2일 대구 계산동의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실을 올렸다. 이때 신랑 신부와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주례를 섰던 허억(許億) 대구시장이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 하고 서두를 떼는 바람에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얼굴에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 박정희와 이승만 제거 계획
1951년 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에 임명된다. 작전국장은 일본육사(50기) 출신의 이용문 준장이었는데 호방한 그는 치밀한 박정희와 대조적인 성격이었지만 시국을 보고 역사를 인식하는 면에서 서로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이 무렵 국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하고 있던 이승만은 국회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가망이 없다고 보고 관제 데모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추진했고, 이에 맞선 야당은 야당 나름대로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했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가 정면으로 맞서자 이승만은 전방에 있던 군부대의 일부를 빼돌려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던 각국은 미국에 항의를 퍼부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하여 귀중한 피를 흘려온 것인데, 한국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 을 세웠고 이 같은 방침은 한국군 수뇌부에도 암묵적으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제거계획은 한국군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작전국장 이용문은 작전차장 박정희와 거사를 의논했다.
당시 작전과장 유원식에 따르면 박정희는 언양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를 동원,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과도정부를 세워 민정에 이양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유원식, 5.16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1987
한편 이용문은 평양고보 2년 후배인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 선우종원을 만나 "우리 함께 혁명을 해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만들자" 며 쿠데타를 제안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선우종원, <격랑 80년>, 1998)
6월 2일경 육본 참모회의에서 이승만에 대한 쿠데타 논의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남계엄사령관 원용덕 휘하의 계엄군은 200~300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2개 대대병력만 투입하면 임시수도 부산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박정희는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한다고 결정되면 지장이 없게시리 수배되어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제거를 바라던 미국은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은 쿠데타보다 국회의 합법적 선거를 통해 장면이 당선되기를 더 바라는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회의는 미국의 보다 명시적인 입장 표명이 없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쪽으로 결말을 냄으로써 거사에 대한 박정희와 이용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이승만은 7월 11일 이용문을 수도사단장으로 전출시키고, 7월 22일 이종찬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함으로써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박정희는 도미 유학을 떠나는 이종찬에게 "차라리 지난번 구국을 위해 행동을 단행한 것만 못했다.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지도편달을 받겠다." (강성재, <참군인 이종찬 장군>, 1986)는 요지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무산된 거사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군의 정치 개입을 학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의미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 박정희의 사주
박정희는 1917년 9월 30일 인(寅)시 생이다. 이를 간지로 옮기면 정사(丁巳)년, 신해(辛亥)월, 경신(庚申)일, 무인(戊寅)시가 된다. 이 사주의 특징은 지지의 네 글자가 사주족보에 올라있는 '인신사해(寅申巳亥)' 를 다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주를 그쪽 전문용어로는 '사맹격(四孟格)' 쉬운 말로는 '제왕격' 이라고 한다. 일본의 평민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주가 바로 사맹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가 끝나고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그 해 말 미국 포병학교로 유학을 간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2군단 포병사령관, 포병학교 교장, 제5사단장을 역임했고 1956년에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1958년 육군소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1군단 참모장, 6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 21일에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했다. 여기에서 그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재현이란 젊은이를 만난다. 계급은 일등병이었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는 그는 거창농고를 졸업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그곳의 기인.달사들과 교유하면서 도룡, 곧 용 잡는 기술을 익힌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나이가 되자 입대하여 부산군수기지에 배속되었다. 아직 20대였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속칭 '박 도사' 를 부른 것이었는데 한 저서는 그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산(박재현)은 이때 박 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 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조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 2002)
지난날 만주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이 말은 거사에 대한 심리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5.16군사혁명사> 편찬간사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가 거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아직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이 나기 전인 6관구사령관 시절이었다.
그 계기는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콜론보고서' 였는데,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가 요청하여 미국 콜론연구소가 작성했다는 이 보고서가 왜 그 시점에 한국의 <사상계>에 실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왜냐하면 거사에 참가했던 한 장성이 회고한 것처럼 그 보고서는 한국의 "젊은 장교들을 분개시켜 결국 5.16군사혁명을 태동케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윤근, <해병대와 5.16>, 1987)
당시 군 안팎에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한국 군부의 궐기를 종용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민주주의가 부적절할지도 모르는" "한국에는 현재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군부지배가 발생할 것 같지 않다" 는 요지의 이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도 분개했던 것 같다.
"없긴 왜 없나? 여기 한 사람 있는데!" 필시 그런 기분에서 그는 김동하 해병대 소장을 신당동 자택으로 불러 거사를 의논했던 것 같다. 그 직후 부산군수기지로 전보되어 일등병 박도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제왕의 운세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동래온천장 등지에서 이주일.윤태일.최주종.김윤근 등 뜻있는 장성들과 5월 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모의하는 가운데 4.19를 맞았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두 집단은 대학과 군부였다. 현실에 분노하여 먼저 일어선 것이 대학생 집단이었지만 군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5월 2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에게 3.16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편지를 써 보낸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이를 신호탄으로 김종필 등 육사 8기가 연판장을 돌리며 정군운동을 펴나갔다.
이에 송요찬은 물러났고, 뒤이어 출범한 장면 내각에 정군을 건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은 "투쟁방법을 정군에서 혁명으로 바꿀 것" 을 결의했다. 정군 과정을 겪으면서 박정희는 '콜론보고서' 가 한국에는 없다고 한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 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장면 정권은 4.19혁명 후 분출하는 민중의 욕망과 사회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이를 구실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에 가르쳤던 5기생, 육본 정보국 시절에 같이 일했던 8기생, 포병학교 시절에 맺은 포병 인맥, 해방 전 만군 인맥 등을 규합했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상되는 4.19혁명 1주년 기념일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러나 1961년 4월 19일이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에 거사일이 연기되었다. 그 직후 박정희는 자형 한정복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 이런 시가 실려 있었다.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 있거라
3차 걸쳐 성공 못한 흥국일념 박정희는
일편단심 굳은결의 소원성취 못하오면
쾌도할복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
이 시에 보이는 '3차' 란 무위로 끝났던 1952년 6월,1960년 5월 8일, 그리고 1961년 4월 19일을 가리킨다. 마침내 박적희와 그 동조세력은 5월 16일 새벽 쿠데타를 단행했다.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공정단과 해병여단의 병력 3,500명뿐이었다. 믿었던 육군 제30사단은 동원계획이 사전 누설되는 바람에 출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이 있는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그를 지도자에 추대한다는 작정희의 친서를 받고 사실상 묵인했다. 그러자 이집트 나세르의 사례를 연구했던 쿠데타 세력은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와 방송국을 점거한 뒤 "은인자중하던 군부가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하는 대국민 방송부터 행해 쿠데타의 성공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쿠데타의 성공은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다. 쿠데타란 본래 은밀히 행해지는 것인데 이 거사는 거의 반공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사일 정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안에 부쳐졌지만 거사계획 자체는 미국 CIA도 알고 있었고, 한국 경찰과 검찰도 알고 있었으며, 장면 국무총리도 알고 있었고, 윤보선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항간에도 쿠데타 소문이 나돌았고, 비슷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거사를 적극적으로 막으려 한 사람이나 세력이 아무도 없었다. 희한한 일이다. 물론 경찰과 검찰 정보에 접한 장면 정권이 박정희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시키는 정도의 재동은 걸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쿠데타와 관련하여
① 진압 책임이 있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양 다리를 걸쳤고
② 진압명령을 내려야 할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에 숨었으며
③ 헌법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 기회가 오는 줄 알고 오히려 진압을 막는 특사를 보냈고
④ 이에 따라 진압을 준비하고 있던 1군사령관 이한림은 출병을 포기했다.
군부 내에는 거사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동조하는 이가 많았다. 남은 것은 미국뿐이었다. 쿠데타 발발 직후 매그루더 유엔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 미 대리대사가 장면 정권의 지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워싱턴에서 후속 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 사람도 많았으나, 여러 자료는 캐네디 정권이 군사세력을 즉시 승인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군부 궐기를 촉구하는 듯한 1959년 말의 '콜론보고서' 나 군부 등장을 예고하는 듯한 1961년 2월의 '팔리보고서' 와 맥을 같이 한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의 월트 W 로스토는 '팔리보고서' 를 이용하여 장면의 손을 놓고 냉전시대의 안보문제를 확실히 할 군사세력과 손잡도록 케네디를 종용했던 것이다.
◇ 쿠데타를 하고 싶었던 이유
이상한 현상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반 민중도 분개는 커녕 대통령 윤보선이 그랬다는 것처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분위기였다. 누가 이런 모든 우연의 일치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한없이 장황해지겠지만 예의 박 도사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게 다 운인기라."
"쿠데타는 헌정사의 훼손" 이라는 교과서적 논리에 집착하면 있는 그대로의 박정희는 보이지 않는다. 쿠데타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구사범에 다닐 때 그가 최초로 인식한 쿠데타는 일본의 2.26사건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는 2.26사건의 연루자였던 간노 히로시 교관으로부터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거사의 실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는 실제 거사계획을 수립했는데, 그는 이때도 쿠데타를 야밤의 음침한 음모행위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밝은 대낮의 구국행위로 인식했다. 그래서 5.16을 앞두고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는 "나 쿠데타할 거요" 라고 터놓고 말했고, 반대자를 만날때는 "혁명을 도와 달라" 고 부탁하기도 했다. 자신이 일으킬 정변이 모두를 위해 단행하는 정당행위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사 이유를 1979년 5월 16일자 일기에 "무능과 부정부패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궐기했었다." 고 적었다. 그러나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그 이유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쿠데타의 불가피성은 그 지도자들이 종종 말하듯 쿠데타 이전에 존재했던 민간정부의 잘못에 있는 게 아니라, 전쟁을 통한 군부 자체의 성장과 미국의 지원하에 잘 정비된 군사 제도들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군부를 제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 관리능력, 전문지식, 그리고 새롭게 습득한 방식 등을 소유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Gregory Henderson, , 1968)
한마디로 군부의 힘이 넘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핸더슨의 지적처럼 당시 군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선진화한 집단이었다. 대학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의해 교육받은 집단이었다면 군대는 실용주의와 효율성의 이념에 의해 교육받은 집단이었다. 전쟁 후 70만 대군으로 성장한 한국군은 질적인 면에서도 창군 이래 4.19까지 미국에 유학한 장병들의 누계가 7,049명으로 민간 유학생의 수를 능가했다.
이 선진화한 집단이 마음먹으면 사실상 막을 세력이 없었다. 5.16은 그 점을 입증한 셈이었다. 그럼 왜 박정희는 그토록 오랫동안 거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사 후에 그가 집필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책에 보면 '혁명은 왜 필요하였는가? 라는 첫 장을 경제 문제로부터 풀어나간다.
결국 그는 경제 문제, 곧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데타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된다. 뒤에 그가 집필한 저서에는 그 점이 좀 더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국가와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은 무었인가! 먼저 가난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건설부터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소박한 정치철학인 것이다." (박정희, <민족의 저력>, 1971)
빈농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삶을 억누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그를 평가하고 싶은 대목은 자기만 가난에서 벗어나는 개별적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 곧 민족이 함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시대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군인이 되고 싶었고, 긴 칼을 차고 싶었으며, 쿠데타를 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 박정희와 경제 개발
쿠데타에 성공하자 박정희와 5.16 주체세력들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수많은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고 처리했는데, 그 일들은 마치 "의적 홍길동이나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에서 가난한 백성들의 박수를 받는 의로운 행위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양곡을 매점매석했다는 혐의로 압수한 쌀 600가마를 영세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대낮에 춤을 춘 남여를 무허가 옥내집회라는 혐의를 걸어 체포하고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시내 다방의 커피 판매를 금지하고, 이름난 폭력배 이정재를 포함하여 200여명의 깡패를 잡아들여 '나는 깡패입니다.' 라는 글귀를 가슴에 써 붙이고 거리를 행진 하게 하여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전인권)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해프닝의 조합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는 없었다. 주체세력은 검토 끝에 장면 정권이 표방했던 경제제일주의를 이어받기로 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에 필적할 만한 테마였다. 먹고사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이는 박정희 자신이 어릴 때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가난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빈곤 탈출의 목표는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당시 남한의 1인당 GNP는 82달러, 수출은 4,100만 달로로 아시아 최빈국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의 1인당 GNP는 195달러, 수출은 2억 달러로 남한을 2배 이상 앞서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막막했던 그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경제정책을 구체화했다.
이는 본래 자유당 정권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가 1960년 초에 입안한 '경제개발 3개년계획' 을 장면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 으로 수정.완성한 것을 다시 원용한 것이었다. 쉽지 않았다. 정치적 목적에서 단행한 화폐개혁은 실패했고, 연이은 흉작으로 곡물 부족현상이 야기되었으며, 통화량 급증에 따라 물가가 폭등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적표는 불량이었다. 여기에 민정이양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정치정화법으로 정치인 4,369명의 발을 묶어둔 상태에서 군사정부를 이끌어왔던 박정희는 군정 연장을 반대하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공표한다.
주체세력은 민정이양에 대비하기 위해 신당을 만들어야 했다. 그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권에 개입하면서 4대 의혹사건 (증권파동, 3분폭리사건, 빠찡꼬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이 터졌다. 군사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윤보선이 군사정권의 실정과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더 효과를 보았을지 모르는데,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 사실을 폭로하는 '사상논쟁' 에 불을 붙였다.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사상논쟁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였던 황태성이 밀사로 남파된 사건을 끌어들이면서 더욱 격화되어갔다. 윤보선 쪽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창당자금을 댔다." 는 식의 전단지를 뿌리며 파상공세를 펴나갔다. 이러한 야당의 매카시즘 전략은 좌익용공의 상처를 안고 있던 유권자들에게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가 15만 6,000표 차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 달 뒤 총선에서 공화당은 다수당이 되었다. 이로서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경제정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가는 동력과 시간을 벌게 됐다.
◇ 박정희의 추진력 문제는 자본이었다.
경제개발에 투자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확보할 요량으로 1962년 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시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청구권 액수와 명분을 둘러싼 최종 합의를 보게 한 바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 다. 그러나 1963년 2월 김종필이 공화당 사전조직과 4대 의혹사건 등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면서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야당과 학생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점차 격렬해져 6.3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에 박적희는 새로운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1964년 말 서독을 방문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의 회담에서 담보가 필요없는 재정차관 2얼 5,000만 마르크를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에르하르트는 독일도 프랑스와 그랬다면서 일본과 손을 잡으라고 충고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함께 3공을 안정과 성장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또 다른 사건은 1964년 9월부터 모두 6차례에 걸쳐 진행된 월남파병이었다. 용병이다, 뭐다 하는 비난도 있었지만 월남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실리는 막대했다. 한국 기업들이 국제적 시각을 획득하고 해외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된 것도, 1960년대 고도성장의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월남파병이었다.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은 점차 성과를 내기 시작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마지막 해인 1966년에는 경제성장율이 두 자릿수(11.9%)까지 뛰어올랐다. 저절로 뛰어오른 것이 아니었다.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었다. 경제개발 초기에 박정희는 수입대체산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장면 정부의 경제계획을 처음 2년 동안 그대로 밀고 나가다가 외환 부족으로 낭패를 보았다.
그래서 1964년에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른바 수출제일주의 정책이었다. 박정희는 그 해 1억달러의 수출목표를 제시했다. 수출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되었는데 이 전쟁의 총사령관은 박정희, 참모장은 상공장관이었다. 전쟁이란 전세가 불리하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고, 그 목표를 정복할 때까지 "밀어붙이라!" 고 독려했다. 이 같은 강력한 추진력에 대해 훗날 최장수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은 "박 대통령은 과묵한 분이며 남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난상토론을 거친 후 결단을 내리면 소기의 성과가 날 때까지 초지일관 꾸준히 추진하는 분이었다." 고 회고했다. (김정렴, <아, 박정희>,1997)
또한 그의 철저한 현장주의도 간과할 수 없는데 3군단 포병단장 시절 그의 작전참모였던 오정석 예비역 장군은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은 95%" 라는 말로 박정희의 현장주의를 요약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일하는 분위기 조성이었다. 당시 상공차관 박충훈은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죠. 최고지도자께서 적극 지원하니까 모두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 라며 그 신바람의 근원이 박정희의 분위기 조성 때문이었음을 밝혔다. (이근미, <국운을 좌우한 위대한 선택>, 2004)
이런 가운데 1967년 5월 3일에 치러진 제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다시 맞붙은 윤보선을 100만 표 이상 누르고 당선되었다. 뒤 이은 총선에서 공화당이 총 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박정희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 박정희와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는 정신(Can-do-spirit)을 심어준 것은 박정희의 최대 공로다. 캠페인 이전의 한국인들은 패배주의적이고 체념적이며 의존적이어서 스스로 '엽전' 이니 뭐니 하며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한심한 국민적 에토스를 박정희가 일거에 바꿔놓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의 정치적 유산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DJ(김대중)조차 "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 는 정신을 갖게 하고 사기를 북돋워준 공이 크다. 빈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해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분명한 공이다." 라고 언급한 일이 있다.
박정희는 한 달에 한 번씩 수출확대회의를 가졌다. 당시 목표는 수출액을 매년 40%씩 늘리는 것이었다. 총사령관인 박정희는 만사를 제쳐놓고 이 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에서 수출에 장애가 되는 애로사항의 해결책들이 마련되었다. 처음 청와대에서 시작된 이 회의는 해를 거듭하며 참석인원이 늘어나 나중에는 장소를 중앙청 대회의실로 옮기에 되었다. 박정희는 제1회 회의 때부터 18년 동안 이 회의에 도합 백수십 회 참가했다. 그러니 수출에 관한 한 어느 장관, 어느 전문가도 그를 따라올 수 없는 경지가 되었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 수출 장려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수출행진곡 가사 모집, 수출진흥 웅변대회, 수출진흥 글짓기대회, 수출진흥 노래 모집, 수출진흥 영화 제작 등 갖가지 행사를 벌여나갔다.
이러니 수출 종사자는 국가적 우대를 받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통금시간이 지난 시각에 트럭을 몰다 붙잡혀도 "수출품입니다" 하고 말하면 경찰도 "아, 수고하십니다." 하고 거수경례를 붙여 깍듯이 예를 표했다는 식이었다. 행상이 버스 같은데 올라와 "이 제품은 수출품으로 나가던 건데..." 라고 하면 그거 하나 달라는 음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기도 했다.
수출액은 점점 늘어나 1967년 수출 3억 달러의 벽을 깬 지 3년 만인 1970년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다. 이때의 감격을 당시 상공부 한 고위관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수출 10억 달러 달성! 꿈만 같이 멀게만 느껴지던 산업혁명 제2단계의 목표를 1970년에 달성한 것이다. '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가 메아리쳤다. 모두 보통학교 학생같이 기뻐했으며 그 중에서도 이낙선 장관이 제일 기뻐했다. 이 장관은 즉시 박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를 하였다. '각하! 지금 10억불을 돌파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박 대통령의 치하가 있었나 보다. 이 장관의 검은 테 안경 속의 눈이 젖어 보였다. 내가 차관보 시절일 때였다. 나도 열심히 뛰었으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오원철, <한국인의 재발견>, 2001)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박정희식의 '하면 된다' 를 보여준 가장 상징적인 공사는 1970년 준공한 경부고속도로였다. 그러나 그러한 보람과 기쁨도 다음해인 1971년 그의 임기와 함께 끝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추진하며,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7대 대선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가 안 되면 이 나라는 영원히 파멸의 길을 걷게 되며, 박정희 씨 한 사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 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여러분이 나를 다시 뽑아주면 이 기회가 마지막 장치 연설이 될 것" 이라고 호소했다.
당시 유권자들은 그가 3선을 끝으로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라 믿고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7대 대선에서 95만 표 차로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박정희와 유신
<지도자도(指導者道)>라는 소책자가 있다. 박정희가 1961년 6월 16일 비매품으로 출간해 배포했던 소논문인데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건강하고 동등권을 가진 두 사람 중 갑은 을의 의식주를 무제한 제한할 수 없다. 그러나 을이 병이 들어 갑(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할 때에는 의사와 환자란 조건하에 갑은 을의 식사제한 및 조절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집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금반 군사혁명은 일종의 수술이다." (박정희, <지도자도-혁명과정에 처하여>, 1961)
3선개헌이나 10월유신을 장기집권의 욕망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박정희 자신의 논리구조에 입각해서 보면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박정희 자신은 국민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며, 따라서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하다면 환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병' 은 가난이다. 그는 가난을 수술하기 위해 5.16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소책자에 썼다. 따라서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와 같은 비상사태에 처했을 때는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3공 초 학생.재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민족적 민주주의' 를 제시했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과 민족의 행복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면 유보할 수도 있는 하나의 도구적 또는 행정적 민주주의였다. 다시 말해,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는 것이 박정희식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10년 이상 고도성장을 해오다 보니 민중은 이제 배부르고 등 따신 박정희식 민주주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발전을 구실로 한 개발 독재가 내포하고 있는 자기 모순이었다. 번영을 달성해도 달성하지 못해도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병이라는 위기가 사라지면 의사가 필요 없게 된다. 여기에서 박정희는 새로운 위기를 창출해냈다. 그가 사관햑교에서 전술학을 가르치기도 한 뛰어난 전략가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더 큰 문제를 창출하여 원래의 문제를 왜소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식의 전략을 그는 집권 후 여러 차례 구사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연설집을 읽어보면 시기에 따라 이런 저런 위기를 끊임없이 새로 창출해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7대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다음해 당시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한다.
곧 통일이 될 듯한 열기 속에서 그는 갑자기 유신을 발표하고 "이번 비상조치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 전쟁 재발의 위험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고 말했다. (박정희,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4>, 1973) 전쟁 재발의 위기 창출이었다.
가난의 위기 대신 새로 창출된 이 안보 위기를 명분으로 나라를 준전시동원체제로 꾸려나갔다. 한 일본 자료는 이것이 만주군관학교 시절에 그가 목격했던 만주국의 '나라 만들기' 복사판이었다고 지적한다. 비정치적으로 출발한 새마을운동도 궁극적으로는 체제 확립과 관계가 있었다.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그에 연관된 방위산업과 중화학산업을 육성해나가던 그에게 1975년 월남 패망은 전시동원체제의 성격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떤 학자는 그 시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유신독재하의 사회는 남발되는 긴급조치와 빈틈없는 통제로 꽉 짜인 숨막히는 사회였다.
그런 만큼 그 틈새마다 민주화의 저항이 치받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회이기도 했다.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은 그 충돌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거칠고 적나라해졌다. 백만인 개헌청원운동, 긴급조치 1.3호, 민청학련사건 및 인혁당재건위원회사건, 서울대 김상진의 할복자살, 긴급조치9호, 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과 제명조치, 부마항쟁 등 등....." (정해구, <박정희 그 치욕과 영광의 삶>, 2007)
열거된 것들을 보니 새삼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 다시 보는 지도자상
하버드대학의 사회학 교수 에즈라 보겔은 박정희에 대해 "특히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히 통제된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리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 평한 것을 신문이 보도했다. (<조선일보> 2006년 11월 11일)
산업화 초기단계에서는 영국도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한 사례는 없다는 설도 있지만,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민주적 산업화는 선택의 문제일 뿐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설이 옳은지 모르겠다.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한 헨리 키신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러시아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말했다. (<국민일보> 1999년 10월 23일)
그러나 가난에서 빨리 탈출하기 위해 박정희가 추구했던 성장제일주의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설적과 효율을 위해 정치는 극도로 위축되고 행정만능사회가 되었다. 정부는 사실상 경제를 통제했다. 이 같은 관치경제를 통해 지배층과 기업 간에 정경유착이 생겨났다.
그래서 특혜를 받는 특정 기업은 점점 더 부를 축적하여 재벌로 커갔고, 반대로 아무 특혜도 받지 못하는 영세기업이나 서민은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의 피해 속에 소득감소를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빈부격차 현상은 지역적으로도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역감정으로 이어져 그 폐혜는 상당한 정치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치가 실종되고 인권이 제한된 이 유신기간에는 각계각층의 반체제운동이 광범위하고 줄기차게 일어났다. 공업화와 더불어 비약적으로 성장한 노동운동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5공에 들어가서 꽃 피는 의식화 운동이나 변혁운동의 태동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코리아게이트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이나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사이에 문세광의 흉탄에 의해 부인 육영수도 세상을 떠났다. 안팎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탓인지 그 무렵의 사진을 보면 60도 안 된 얼굴이 많이 늙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부인과의 사별 후 금계(金鷄)도 키우고 '방울이' 라는 이름의 강아지도 키웠지만 외로움과 실의에 시달린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역시 술이었던 모양이다. 초기의 막걸리에서 말년에는 시바스 리갈 같은 양주로 바뀌었는데, 술에 취해 기분이 좋을 때는 자신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나 <짝사랑>을 부르곤 했다.
1979년 10월 26일 그가 궁정동 안가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술도 막걸리가 아닌 시바스 리갈이었다고 한다. 그날 김재규의 총에 맞아 등에선 선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화장실로 도망가 있던 차지철과 옆에 있던 두 여인이 번갈아가며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난 괜찮아" 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국군병원에 옮겨진 시신을 보니 손목엔 평범한 세이코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넥타이핀의 도금이 벗겨져 있었으며, 허리띠는 해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두운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권력자의 이 검소한 모습에서, 그리고 "자식을 위해 미전(美田)을 남기지 않겠다" 던 그의 쳥렴함과 네포티즘(nepotism)이 없는 능력 본위의 인사, 그리고 '하면 된다' 는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개인의 치부가 아닌 공동의 꿈(빈곤 탈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나는 한 시대의 지도자상을 본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던 그가 누린 해는 62년이었다.
◈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학과 미국 일리노이대.FTU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에 몸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