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개발사업, 우리 뜻대로 잘 진행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정말 그 활동(개발)이 그 지역사회에 유익했을까? 우리가 들어가서 개입하는 것이 과연 잘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멀쩡한 사람 복지대상자 만들어 버리는 과잉 친절이 문제입니다. 약자들을 사회로부터 분류, 추출, 분리하여 결국 사회를 해체해 버리는 그 어설픈 전문화가 문제입니다.(「사회복지의 문제」중)' '어설픈 전문'란 말이 와 닿았다. 어느 마을에 처음 들어갔을 때 소위 전문가라는 내 관점으로만 판단하려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과연 옳을까?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많이 배웠다는 것은 결국 배운 만큼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문가일수록 사회적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니 겸손해야 하는 것은 당여한 것 아닌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불쌍해 보인다고 함부로 들어가 개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해외개발사업 현장, '관계'는 없고 '목표'만 남아있는 듯 하다.
당사자를 대할 때, 처음에는 선한 마음으로 일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도움 받는 이들의 몰염치, 개인주의 등으로 활동가들이 상처받기도 한다. 이처럼 도움 받는 이들이 한 없이 선량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인데, '복지요결'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 듯 하다.
'복지요결'은 전반적으로 어떤 주장 후에 반드시 여지를 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처럼 '복지요결'은 도그마 속에 있지 않으며 오소독스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장에 적용할 수 없지만, 그러한 바탕으로 상황에 임하자는 것이다. 그렇게하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겠는가.
어느 마을에 들어가 일을 할 때에, 만약 그 현장에서 활동가와 주민들간의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면 현장을 떠나는 것이 옳을까?
정토회는 떠나기도 했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활동할 때에 마을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흥정하였다. 저 단체는 무엇무엇을 준다는데, 당신들의 단체는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저 단체는 병원을 지어주고 경비원으로 우리 마을 주민을 고용한다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다면 함께 일할 수 있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럴 때에 정토회는 원칙을 되돌아봤다. 원칙에 맞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자립과 자치를 원했고 때문에 물질로 돕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시작도 하지 않고 떠나기도 했고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기도 했다.
사업기금을 받지 않았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단체들은 KOICA사업비를 많이 지원받는다. 그런데 그것이 함정이다. 돈을 받았으니 계획에 맞춰 써야하고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해도 수정하거나 떠나기 힘든 것이다. 준다고 다 받아버리면 감당할 수 없게된다.
기금에 의존하다보면 돈에 의해 현장이 휘둘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기에 해외개발사업은 인내가 필요하다. 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스리랑카의 한 단체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국내 본부에서는 사업비를 보내야 했고, 또 그 사업비를 규모있게 써 주길 바랐다. 현장의 입장도 있으나 본부의 입장도 있으니 그리한 것이다. 하지만 현장 지부장님은 돈이 들어오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고 협동조합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면 끝까지 사업비를 받지 않으셨다.
KOICA와 공동모금회와 같은 외부기금은 주로 1년 단위로 사업비 사용을 보고해야 하는데 기금을 다 써서 잔액을 0원으로 만들지 못하면 사업운영을 못한 것 같은 평가를 받게되고 상황을 보고 마을을 위해 물러날 수도 있으나 그렇게되면 사업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에 소신껏 운영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돈은 독이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마을에 새로운 건물, 반듯한 건물이 들어서면 그 건물을 지키기위해 마을에는 없던 담장이 생기고 또 그 담장이 점점 높아진다. 이런 현상은 그 건물이 마을의 것이 아니라 외부인의 것이 불쑥 마을 가운데 위치하게 되는 것으로 마을의 생태를 교란시킨다. 우리가 사는 곳과 저들이 사는 곳.
안전과 지역사회 통합, 딜레마다.
지부를 새로 설립할 때 'UN건물 옆'에 위치해야 한다는 지침도 있다.
한국의 해외개발사업의 경험이 짧기에 이미 한국 사회복지 현장에서 논의가 끝난 것 같은 이야기들도 이제 시작되고 있다. '해외'라는 현장을 우리들이 사는 곳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곳'으로 여기기에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관점을 놓치는 것 같다.
관계의 깊이가 깊어져야 드러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당사자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외부인에게는 특별해 보이는 것도 있다. 어떤 심각한 질병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으로 느낀다. 나름대로 대처하기도 하고 그 질병으로 마을이 결속되기도 한다. 외부 활동가가 그 심각해보이는 질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걸언'할 때에 묻는 주체는 나이다. 여기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나를 지우고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대 주체의 만남으로 봐야한다. 경우에따라 마치 나를 외부인이 아닌 것 처럼, 외부인이 아니어야만 하는 것 처럼 감추고 상대를 대하는데, 나를 드러내야 상대도 인정하는 것 아닌가. 건강한 만남이란 평등한 관계이기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걸언'이란 이런 서로가 인정되고 관계가 평등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친구와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상대의 이야기에 내 색깍을 지우고 무조건 옳다, 맞다라고 한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여길까? 좋은 것은 좋다, 또 아니다라도 생각할 때에는 직언을 하는 것이 친구다.
나의 색깔이란 것이 상대를 배척하거나 무비판적인 포용이 아니어야 한다. 고집스럽게 내 주장만을 하면서 그것을 내 색깔이라 해서도 안된다.
서로 자극이 되어야 서로의 닫혀있는 틀을 깨고 성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의 문화를 인정한다고하여 무조건 보호만 하여 고립되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문화적 충격이란 것은 있을 수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걸언'이 평범한 예와 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옳으나 지나친 겸손은 상대에 대한 무시로 보일 수 있다. (입장이 다르니) 오만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외부기금에 상관없이 소신껏 일하는 것도 중요하나 있는 기금을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금을 사용할 때에 도우너(후원자)의 입장에 맞게 행한다는 것인데, 후원자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개발기관이 먼저 나서서 현장을 외곡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후원자의 입장, 기관 대표들의 입장을 변화시켜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
복지요결에서 읽은 '전투에 급급하다 전쟁에서 지는 장수'이야기 처럼, 당장의 사업의 성패를 위해서 필요도 없는 돈 받고, 돈으로 해결하다보면 전쟁에서 질 수 있다.
OECD 가입국들의 평균적 수준을 맞추기 위해 내년에도 지금보다 몇 배의 ODA(공적개발원조)기금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지금 사용하는 돈도 다 소화하지 못한다. 현장에서 외부기금 없이, 혹은 최소한의 예산으로 소신껏 사업을 운영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야 기금의 성격도 달라진다.
단체의 성격이 어떻고 대표이 성격이 어떻다고 하여도 개발현장을 다니다보면 지부장들의 관점에 따라 사업이 천차만별이다. 현지 지부장의 능력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달려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부장의 세계관에 따라 사업의 모습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러한 지부장들에 대한 공부의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
현지인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입장을 보이나 외부인으로 보기에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때, 어떻게 해야할까?
사회사업 현장이 어디인가?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는 곳 아닌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해도 인정과 나눔이 메마른 곳,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곳이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이고 사회사업가의 개입 지점이다. 필요하다면 개입하되 역시 '걸언'해야 한다.
문제가 없는 사회가 존재하는가? 어느 곳이나 문제가 있다. 때문에 어느 지역을 특별하게 볼 것도 없다. (물론 긴급구호, 전쟁으로 인한 피해지역 등 특별한 곳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곳을 제외한 일반적인 개발사업의 경우.)
아프카니스탄의 여성을 생각하면 차별로 억압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현지에서 보니 많은 지방에서는 여성들의 힘이 더 세더라. 외부인의 시각으로 현지의 실상이 왜곡될 수도 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계적 보편기준으로 보면서 개입의 필요를 판단해야 한다.
세계적 보편 기준이라는 것도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며 보편선을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매, 미국에서는 아동학대다. 싱가폴에서 범죄를 저지른 미국인이 태형을 당했다. 싱가폴에서는 당연한 것이나 미국에서는 반인권적 형벌이라며 분개했다. 이와 같은 것이다. 보편성을 누가 설정했나? 과연 인류의 보편성이란 것이 있기는 한가?
여기에 신앙까지 더해지면 문제는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NGO들이 다른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국내에 방한한 어떤 유명한 박사는 이런 보편성을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이다. 복지요결을 읽으니 각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느꼈다.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들과 같은 모습인데, 바퀴의 크기와 상관없이 잘 맞물려 작동되면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일 때에 그 방향은 선을 좇게 되어있다.
그것이 정말 선일까?
기독교와 이슬람은 불교와 달리 아직 '보편'이란 테두리에 못 들어갔다. 이 두 종교가 주장하는 '선민'사상이 갈등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원주민들이 여자아이가 첫 생리를 하게되면 마을과 격리시켜 몇 주를 살게하는 것을 보았다. 생리는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결하게보아 마을과 분리시켜 따로 거주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여성의 인권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들이 그런 관습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마을 할머니들이 그런 문화를 적극 옹호하는 모습을 보고 같은 여자로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러나 마을의 모든 상황들은 문화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그럴지라도 그 이면에 그러한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상황을 살펴야 한다. 성인이 된 여자아이를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남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일해야 한다.
'보편성'이라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의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해보자, 이렇게 만들어보자'고 합의하는 것. 복지요결을 해외현장에서 실천해보자고 합의하면 그것이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도움 받는 이들의 몰염치, 개인주의 등으로 활동가들이 상처받기도 한다. 이처럼 도움 받는 이들이 한 없이 선량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인데, '복지요결'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 듯 하다. -> 제본한 책은 어디쯤인지 모르나, 지금 파일에서는 20쪽 모母 가치에 대한 윤리, 40~41쪽 평지풍파 이야기가 그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꼭 복지사업때문인가? 137쪽, 기우인지도 모릅니다... 직접 듣고 싶습니다.
아직 복지요결 전체를 읽지 않았고 모두가 복지요결을 처음 접한 분들입니다. 다양한 생각을 쏟아내고 다듬어가는 분위기이지요. 현장경험들이 많으신 분들이기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도 있었으나,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활동가라고 모두 다 선한가'로 이어지거든요. 선한가 악한가의 기준도 애매합니다. '주는 것의 늪에 빠진 복지관'이야기 처럼 외부에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준'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제 공부 내용 중 「주선하고 거들어 주는 사람」부분에서도 '이래저래 공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법입니다'를 모두 읽었습니다. 해외개발사업에 참여하시는 이 분들도 복지요결을 읽으며 크게 기뻐하시고 적용하는 방법을 궁리하시고 계십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여성을 생각하면 차별로 억압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현지에서 보니 많은 지방에서는 여성들의 힘이 더 세더라". 에서 "지방"이 아니라 "집안" 이었습니다. 정확한 문헌조사는 아니고 그곳에 오래사역하신 분의 얘기였습니다. 아프간 여성들이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고 실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Q. 보통 해외사업은 단기(2-3년)파견일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 사업은 관계와 신뢰의 형성을 바탕으로하는 충분한 시간을 요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드는데 과연 단기로 들어가면서 개발사업을 할 수 있을까? 지역사회에 개발이란 바람을 집어넣고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단기로 들어갈 경우 무엇을 목표로 잡고 일을 해야 할까? (특히 단기 봉사단의 경우 일회성 이벤트가 되기 쉽지 않을까?)
Q. 단체가 정한 원칙이 깨지면 떠나야 하는가? 떠날 수 있는가? Q. 해외에서의 외국인의 안전확보 VS 현지인과의 분리 Q. 해외사업 실적을 "연예산"이란 양적측정으로만 통계를 내야 하는가? Q. 양적평가, 시간안의 성과와 실적요구, "그림이 나오는" 사진(불쌍한 모습의 사진, 로고박힌 건물사진 등) 등 자본주의적이고 비 윤리적인 Donor들의 태도에 대해 NGO가 설득하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지부의 지속적 운영과 사업확장을위해 NGO가 오히려 Donor를 길들이고 있던것은 아닌가? Q. 인류의 보편성(원주민이 받는 문화충격) VS 지역문화의 인정(보편적 인권문제야기) - 그 지역의 문화수용 속도에 맞춰(한발짝이 아닌 반발짝만 앞서가자
이런 우리들의 고민들이 토론과 논쟁이라 할 지라도 저는 우리 안에 깨달음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논쟁과 토론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깊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민했다해도 나누지 못했던 것을 나누는 자리이니 어떤 면에서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삶의 가치를 찾는 듯하기도 하고...모두가 진정한 복지인(실천가)가 되려고 하는 듯 보여 기뻤습니다. 그곳에 함께 있으니 저 또한 멋진 인격체로 다시 서는듯 느꼈다고나 할까요.....
첫댓글 도움 받는 이들의 몰염치, 개인주의 등으로 활동가들이 상처받기도 한다. 이처럼 도움 받는 이들이 한 없이 선량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인데, '복지요결'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 듯 하다. -> 제본한 책은 어디쯤인지 모르나, 지금 파일에서는 20쪽 모母 가치에 대한 윤리, 40~41쪽 평지풍파 이야기가 그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꼭 복지사업때문인가? 137쪽, 기우인지도 모릅니다... 직접 듣고 싶습니다.
아직 복지요결 전체를 읽지 않았고 모두가 복지요결을 처음 접한 분들입니다. 다양한 생각을 쏟아내고 다듬어가는 분위기이지요. 현장경험들이 많으신 분들이기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도 있었으나,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활동가라고 모두 다 선한가'로 이어지거든요. 선한가 악한가의 기준도 애매합니다. '주는 것의 늪에 빠진 복지관'이야기 처럼 외부에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준'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제 공부 내용 중 「주선하고 거들어 주는 사람」부분에서도 '이래저래 공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법입니다'를 모두 읽었습니다. 해외개발사업에 참여하시는 이 분들도 복지요결을 읽으며 크게 기뻐하시고 적용하는 방법을 궁리하시고 계십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여성을 생각하면 차별로 억압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현지에서 보니 많은 지방에서는 여성들의 힘이 더 세더라". 에서 "지방"이 아니라 "집안" 이었습니다. 정확한 문헌조사는 아니고 그곳에 오래사역하신 분의 얘기였습니다. 아프간 여성들이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고 실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Q. 보통 해외사업은 단기(2-3년)파견일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 사업은 관계와 신뢰의 형성을 바탕으로하는 충분한 시간을 요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드는데 과연 단기로 들어가면서 개발사업을 할 수 있을까? 지역사회에 개발이란 바람을 집어넣고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단기로 들어갈 경우 무엇을 목표로 잡고 일을 해야 할까? (특히 단기 봉사단의 경우 일회성 이벤트가 되기 쉽지 않을까?)
Q. 단체가 정한 원칙이 깨지면 떠나야 하는가? 떠날 수 있는가? Q. 해외에서의 외국인의 안전확보 VS 현지인과의 분리 Q. 해외사업 실적을 "연예산"이란 양적측정으로만 통계를 내야 하는가? Q. 양적평가, 시간안의 성과와 실적요구, "그림이 나오는" 사진(불쌍한 모습의 사진, 로고박힌 건물사진 등) 등 자본주의적이고 비 윤리적인 Donor들의 태도에 대해 NGO가 설득하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지부의 지속적 운영과 사업확장을위해 NGO가 오히려 Donor를 길들이고 있던것은 아닌가? Q. 인류의 보편성(원주민이 받는 문화충격) VS 지역문화의 인정(보편적 인권문제야기) - 그 지역의 문화수용 속도에 맞춰(한발짝이 아닌 반발짝만 앞서가자
어렵군요...
어쩌면 쉬운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임도 토론만을 위한, 논쟁만을 위한 자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민들이 토론과 논쟁이라 할 지라도 저는 우리 안에 깨달음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논쟁과 토론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깊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민했다해도 나누지 못했던 것을 나누는 자리이니 어떤 면에서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삶의 가치를 찾는 듯하기도 하고...모두가 진정한 복지인(실천가)가 되려고 하는 듯 보여 기뻤습니다. 그곳에 함께 있으니 저 또한 멋진 인격체로 다시 서는듯 느꼈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