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선대가 치른 ‘근로보국대’와 ‘조요’
(작성 중 : 징용시리즈 1회)
친애하는 회원 여러분! ‘외동사투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앞쪽 파일(외동읍 가리개 ‘북띠이-북띠’에 얽힌 사연들)에서 ‘천인침’과 관련한 일제의 만행과 친일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다보니 옛적 우리들의 선대들이 일제와 6.25에 걸쳐 치르신 고통의 세월이 떠올라 그 분들이 겪은 인고의 세월을 시리즈로 소개드리고자 한다.
이때의 고통을 부추긴 친일분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자행한 인면수심의 행적들을 그냥 넘기자니 너무나 울화가 치밀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근로보국대’, ‘민간노무단’, '학병', ‘국토건설단’의 순서로 게재하오니 그 시절 순박하기만 했던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과연 어떠한 세월을 살다 가셨는지 숙고의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란다.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는 회원님들도 계시겠지만, 친인척이나 같은 고향마을에는 이에 해당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리고 매번 같은 말이지만, 글의 길이가 엄청나게 길다는 점을 감안하여 회원님들께서는 몇 번에 나누어서 읽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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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에 광복군 제3지대에 대한 해설이 포함되어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광복군 제3지대가'를 먼저 게재한다.
광복군 제3지대가
장호광 작사.작곡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
태극기 밑에서 뭉쳐진 우리
독립의 만세를 높이 부르며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첩첩한 산악이 앞을 가리고
망망한 대양이 길을 막아도
무엇에 굴할소냐. 주저할소냐.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굳세게 싸우자 피를 흘리며
총칼이 부셔져도 열과 힘으로
원수의 무리를 소멸시키려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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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일제 시절에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 약칭으로 ‘보국대’라 함)’와 ‘조요’라는 말이 있었다.
‘근로보국대’는 외동읍 뿐 아니라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직이었고, ‘조요’는 징용(徵用)이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대다수 문맹자들이었던 우리들 선대들께서는 ‘勤勞報國隊’라는 한문을 몰라 왜놈들이 쓰는 ‘징용(徵用)’이라는 의미의 ‘조요(ちょうよう)’라는 말이 외우기 쉬워 ‘근로보국대’라는 표현으로 대신했고, 세월이 흐르자 이 말이 마치 경상북도(慶尙北道) 동남부지방 사투리인양 회자(膾炙)되어 왔다.
그리고 ‘조요’라는 말은 주로 일본의 북해도(北海道) 탄광을 비롯한 광산 ‘근로보국대’로 끌려간 장정(壯丁)들을 말하는데, 이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학병(學兵)’이나, ‘지원병’으로 끌려간 학생들도 ‘조요’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광산취사장 앞에서 찍은 한국인 징용자들의 모습(1943. 11. 14)
![](https://t1.daumcdn.net/cfile/cafe/1837B7494D4A9E7C26)
물론 ‘학병’이나 ‘지원병’으로 자원하여 일본군(日本軍)에 입대한 학생들은 ‘조요’가 아니다.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고 그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선봉(先鋒)이 되기 위해 스스로 일본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원병(志願兵)으로 끌려갔다”라는 말은 말이 ‘지원병’이었지, 징용영장(徵用令狀)도 없이 그냥 끌려 간 경우를 말한다.
독립투사(獨立鬪士)의 친인척이나, 가난한 서민의 자식들은 모두가 끌려간 경우에 속한다. 지원병이나 학병은 물론 일본이나 남양군도(南洋群島)로 끌려간 ‘보국대(報國隊)’도 마찬가지였다.
근로 보국대
![](https://t1.daumcdn.net/cfile/cafe/200D45504D4A9ECD1F)
“그 집 남핀은 북해도 탄광이라 카덩가 어데라 카덩가에 ‘조요’로 끌래갔다 와가 폐삥으로 맻 해 시들시들 하다가 죽었뿌랬다(그 집 남편은 북해도 탄광이라든가 어디라든가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와서 폐병으로 몇 해 시들시들하다가 죽어 버렸다)”라는 용례가 있다.
어쨌든 그 당시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이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滿洲國)의 군관학교나 일본 육사에 입학하거나, 순수하게 자청하여 일본군(日本軍)에 ‘지원병(志願兵)’ 또는 ‘학병(學兵)’으로 입대한 경우를 제외하고, 징집영장(徵集令狀)에 의해 끌려간 모든 이들을 ‘조요’라고도 했었다.
따라서 회유와 강압에 의하여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간 우리나라 미혼여성들도 ‘근로보국대’와 마찬가지로 ‘조요’라고 볼 수 있다.
정신대로 징집된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의 여자 청소년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2E74A4D4A9F2F1C)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나온 전라북도 출신 조선인여성들과 여자
애들이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란 깃발을 앞세우고있는 모습)
‘근로보국대’란 원래 중일전쟁(中日戰爭) 후 조선인 노동력 수탈을 위해 일제(日帝)가 강제 연행하여 만든 조직으로 1941년 일제(日帝)의 ‘국민근로보국령’에 의해 편성(編成) 되었으며, 철도·도로·비행장 및 신사(神社)의 건립·확장공사에 동원되었던 징용기구였다.
그리고 이때의 보국대는 각종 ‘직장보국대(職場報國隊)’를 비롯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南方派遣報國隊)’, 그리고 농민들로 조직된 ‘강제노역보국대’ 등이 있었다.
‘농민보국대(農民報國隊)’의 경우 징용·징발·징병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다시 이에 강제연행되었다. 당시 ‘근로보국대’ 형식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숫자는 1938~44년까지 약 762만 명 정도였다.
1943년(소화18년) 근로보국대 훈련장면
![](https://t1.daumcdn.net/cfile/cafe/18083A4C4D4A9FE117)
‘보국대(保國隊)’란 사전적으로 ‘나라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하여 만드는 조직’이란 뜻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현대사(現代史)에서 세 가지의 ‘보국대’를 거쳐 오기도 했었다.
하나는 일제(日帝)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중노동에 동원하고자 만든 ‘근로보국대’, 두 번째는 6.25동란 당시 우리나라에서 조직한 ‘민간노무단(民間勞務團)’, 세 번째는 역시 6.25당시 북한군(北韓軍)이 운영한 ‘인민군보국대(人民軍報國隊)’가 그것들이다.
이 ‘보국대’나 저 ‘보국대’나 ‘보국대’의 역할은 군사시설(軍事施設)의 유지보수, 전방고지(前方高地)에 식량과 탄약(彈藥)을 짊어지고 운반하는 등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주업무였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고용계약(雇傭契約)에 의해 동원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거의가 강제동원(强制動員) 방식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원하기도 했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의 경우도 형식적으로는 ‘계약’의 방식을 취했으나 모두가 사기극이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경우 ‘보국대(報國隊)’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이던 ‘징용(徵用)’이란 말은 전시·사변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非常事態) 시 국가가 그 권력으로 국민을 강제적으로 불러내어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키는 일을 말한다.
일제 때 징용으로 동원되어 남양군도로 출발하기 전의 조선인 징용자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F3A4C4D4AA0B236)
(남양군도로 이동하기 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이제 이상에서 설명한 ‘보국대’의 창설내력(創設來歷)을 토대로 그에 얽힌 사연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6.25 때의 민간노무단과 인민군보국대는 다른 파일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제 때의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만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시대의 ‘보국대’란 앞서 소개한 대로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를 말하는데, 중일전쟁 후 노동력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인과 대만인을 강제로 연행하여 만든 조직이다.
1941년 일제가 만든 ‘국민근로보국령(國民勤勞報國令)’에 의해 편성된 것으로, 철도·도로·비행장뿐만 아니라 신사(神社)의 건립·확장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사금채취에 동원된 조선인 보국대원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3C8B494D4AA10E25)
일제 당시 일제가 만든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 제4조의 규정에 의한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은 1939년 10월 1일에 시행되었다.
시행과 동시 1945년까지 각종 수단에 의하여 동원된 우리나라 출신 ‘보국대원(報國隊員)’의 수효는 일본본토, 사할린, 남양(南洋 ; 태평양의 적도 부근에 널리 흩어져 있는 많은 섬들을 포함한 넓은 바다) 방면을 합쳐 총 75만 4,700여명이며, 우리나라 내에서는 459만 여명이 강제동원(强制動員)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동원에 의한 사망자(死亡者)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일본(日本) 당국에서는 그 숫자를 전혀 사실과 다르게 변명하고 있다.
이때의 사망자수는 징용현장(徵用現場)에서의 사상자, 남양(南洋)과 사할린, 중국 등지에 동원된 노무자, 군속, 군인과 전범(戰犯)으로 처형된 한국인, 종전(終戰) 후 귀국 도중에 사망한 자 등 그 숫자는 30만 여명으로 추산(推算)되고 있다.
그러나 군인군속(軍人軍屬)의 미귀환자 15만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그 숫자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일제와 지금의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명단을 작성하지 않았거나, 있었던 명단도 파기(破棄) 또는 은익(隱匿)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봉사에 동원된 조선 소년들의 노역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4964D4D4AA14027)
일본 후생성(厚生省)이 지난 1990년 발표한 ‘구 식민지 출신’ 군인·군속에 관한 자료에는 모두 24만 2,341명의 조선인이 군인이나 군속(軍屬)으로 징용(徵用)되어 그중 2만 2,182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민간징용자(民間徵用者)를 제외한 숫자일 뿐이다.
1947년 일본 대장성에서 발표한 자료에는 조선인 보국대(報國隊)만 750만 명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일본 대장성 자료를 소개한다.
일제시대 조선인 보국대 징용현황
구 분 |
계 |
사망 및 행방불명 |
생 환 |
비 고 |
조선내 징용 |
5,366,098명 |
26,830명 |
5,339,269명 |
생 환 ;
90%추정
7,295,726인
사망 및
행방불명
(10%추정)
220,517인
|
조선내 관알선 |
422,397 |
2,112 |
420,285 |
조선내현원징용 |
260,145 |
1,300 |
258,845 |
조선내국민징용 |
43,679 |
218 |
43,461 |
조선내 군 요원 |
33,861 |
169 |
33,692 |
계 |
6,126,180 |
30,629 |
6,095,551 |
해외 징용 |
724,727 |
72,478 |
652,309 |
해외 군 요원 |
69,932 |
6,993 |
62,939 |
해외 관 알선 |
327,013 |
32,701 |
294,312 |
해외 국민징용 |
222,082 |
22,208 |
199,874 |
남방 군 요원 |
40,318 |
4,031 |
36,287 |
남방 국민징용 |
5,931 |
593 |
5,338 |
계 |
1,390,063 |
139,006 |
1,251,057 |
합 계 |
7,516,243 |
169,633 |
7,346,610 |
자료 : 일본 대장성 관리국(1947년) 전쟁과 조선통치노무의 송출표
1930년대 동덕고등여학교 근로보국대 - 자전차부대 사열장면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93E504D4AB66921)
(왜놈이 사열을 하고 있다)
조선인 징병군인 및 군속의 사망자와 행불자
구 분 |
계 |
사망 및 행방불명 |
복원(86%) |
비 고 |
육군 지원병 |
17,664명 |
2,473명 |
15,191명 |
육군 186,279
해군 23,000
육군군속 74,838
해군군속 79,348
계 363,465인
사망 및 행불
추정 14%
(50,884)
생환추정 86%
312,581명 |
해군 지원병 |
3,000 |
420 |
2,580 |
학도 지원병 |
4,385 |
614 |
3,771 |
징병1기(육군) |
90,000 |
12,600 |
77,400 |
징병1기(해군) |
20,000 |
2,800 |
17,200 |
징병2기(육군) |
74,230 |
10,392 |
63,838 |
군속 (육군) |
74,838 |
10,477 |
64,361 |
군속 (해군) |
79,348 |
11,108 |
68,240 |
계 |
363,465 |
50,884 |
312,581 |
일제 때의 직장근로 보국대 발대식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B874A4D4AA1F62D)
(1940년 수송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한 한성은행근로보국대 발대식
1940년은 '소화(昭和)' 15년과 '일기(日紀)' 2600년에 해당되는 년도로
지나사변(支那事變 ; 중일전쟁)은 4년째로 접어들었었다. 전시 체제로
당시 은행원은 전투복에 '각반(脚絆)'을, 여행원은 ‘몸뻬’를 착용했다)
이하에서는 이렇게 강제로 동원된 당시 ‘보국대(報國隊)’의 창설동기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아닌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과 그 천황(天皇)을 위해 당해야만 했던 고통의 세월을 반추해 보기로 한다.
1937년 본격적으로 대륙침략(大陸侵略)을 개시한 이후 1941년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와 인적 자원의 심각한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식민지(植民地)인 우리나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물자와 인력을 징발(徵發)하기에 혈안이 되었는데, 농산물, 광공산물의 강제공출과 징병제(徵兵制)의 실시, 노동력의 강제징용(强制徵用)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쇠붙이라는 것은 모조리 강제공출하던 시절 공출물품과 친일분자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F60504D4AD3D02C)
앞서 말한 대로 징용(徵用)에 의해 구성되는 ‘보국대’란 전시·사변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시 국가가 그 권력으로 정규군(正規軍) 자원 외의 국민을 강제적(强制的)으로 불러내어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키는 일을 말하는데, 원칙적으로 보상(報償)을 지급하는 전제 아래 행해지는 제도였다.
그러나 일제 당시에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법률(法律)에 근거하여 강제로 징용제도(徵用制度)를 시행하여 수백만의 우리나라 장정들을 혹독한 전쟁노역(戰爭勞役)에 내몰았다.
그 중 수십만 명은 일본본토(日本本土)의 탄광이나,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전장(戰場), 사할린, 그리고 이름 없는 남양(南洋) 지역 전장(戰場)들에서 통한(痛恨)의 개죽음을 당해 시신(屍身)마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남양군도로 출발하기 전 대기하는 조선인 보국대원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30B4C4D4AA2AF22)
(대체적으로 청장년들이나 노년층도 다수 보인다)
이 뿐이 아니었다. 간악한 일제는 1939년 남방침략(南方侵略)을 위해 중국 최남단인 하이난다오(海南島)를 점령하고, 1942년 말부터 우리나라 형무소(刑務所)에 수감돼 있던 죄수(주로 독립투사들이었다) 2천여 명을 ‘남방파견보국대(南方派遣報國隊)’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 비행장·항만·철도공사·철광 채굴 등에 동원했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朝鮮人) 장정들은 무려 17만 여명이나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살아서 돌아 왔더라도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부상(負傷)을 입고 돌아온 경우는 중노동(重勞動)과 기아(飢餓)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남은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한 채 가족들의 살길조차 막아놓고 외로이 죽어갔다.
일본 북해도에서 중국인 보국대원들과 함께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6E74E4D4AA31D21)
일본 천황(天皇)에게 충성하겠다며 스스로 자원하여 입대한 지원병과 학병, 일본육사(日本陸士)와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 군관학교를 나와 독립군과 연합군을 살해하던 친일분자들은 하나 같이 해방된 조국의 군수뇌부(軍首腦部)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고 있을 때 ‘근로보국대’ 출신들과 그 가족들은 이들 친일분자들의 탄압과 홀대(忽待) 속에 쓸쓸하게 죽어간 것이다.
왜놈 천황(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은 모두가 출세하여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행복에 겨워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을 때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옥고(獄苦)를 치른 독립투사와 광복군(光復軍), 그 가족들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모두들 거지가 되고, ‘무지렁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국대로 남양군도로 이동 중 덕수궁 인근에서 가족과 상봉하는 장면
침략국도 아닌 침략을 당한 우리나라에 군정(軍政)을 실시한 미군정청(美軍政廳)의 '돌대가리'들과 명색이 독립투사라고 자처하던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이 침략군인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을 전범(戰犯)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신생 대한민국의 군수뇌부(軍首腦部)로 기용한 탓이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했는데, 울화가 치밀어 해방된 조국의 군수뇌부(軍首腦部)와 정부각료, 고급관리가 된 일본군(日本軍) 출신 장교들과 일제관리들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를 공개하고 넘어간다.
이화여자고등학교 근로 보국대 감자 캐기(1944-청평)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E0C4F4D4AA35001)
특정지역 출신 회원들의 정서를 감안하여 부통령(副統領) 이상의 일본군 장교(將校) 출신과 일제관리(日帝官吏) 출신들은 제외하였다.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독립군(獨立軍)출신이나 광복군(光復軍)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침략군(侵略軍)인 왜놈장교 출신과 악질분자(惡質分子)였던 일본관리 출신들뿐이다.
조국의 독립(獨立)과 광복(光復)을 위해 황량한 만주(滿洲) 벌판에서 이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왜놈들로부터 총탄세례를 받으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생하며, 살아남았던 독립군(獨立軍)출신이나 광복군(光復軍)출신은 아예 떠밀어내듯 모두 배제(排除)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 시절 미군정청(美軍政廳)의 '멍청이'들과 스스로 독립투사라고 자처하던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이 만들어 낸 통탄(痛嘆)할 작품이다.
침략군(侵略軍)인 일본군(日本軍) 출신 장병들은 모두 국군 수뇌부(首腦部)로 영입하고, 미국(美國)과 영국(英國), 중국의 군부(軍部)에서까지 인정하던 광복군 장군(將軍)들은 우리 정부에서만 인정하지 않고 국군창설(國軍創設)에서조차 제외시키고 말았다.
OSS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4AC334D5D1E6A17)
자신들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들에게 총질을 한 적군(敵軍)의 장교들과 그 관리들을 모셔다가 신생 대한민국의 군대(軍隊)와 나라를 통째로 맡겨버린 것이다. 그들이 누군지를 밝힌다.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국무총리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2, 7 |
장 면 |
일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 |
국무총리(2회), 부통령 |
4, 10 |
백두진 |
일제 조선은행 근무 |
조선은행이사, 재무부장관, 국회의장, 국무총리 |
9 |
정일권 |
일본육사 졸,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
12 |
최규하 |
일제 만주대동학원(15기), 만주국 관리 |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
13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장관 |
17 |
진의종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북해도청농무과장 |
국무총리, 보건사회부 장관 |
19 |
김정렬 |
일본육사, 전투기 비행중대장 |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국무총리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외무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8 |
송요찬 |
일군 지원병,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외무부장관 |
10, 15 |
김유식 |
일제 당시 청진지법 판사 |
외무부장관(2회), 통일원장관 |
11, 13 |
정일권 |
일본육사, 일제 괴뢰 만주국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장관(2) |
14 |
최규하 |
일제 만주 대동학원, 일제 괴뢰 만주국 관리 |
외무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
16 |
김동조 |
일본고등문관 행정과, 일본후생성 근무 |
주일대사, 주미대사, 외무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내무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1 |
윤치영 |
일제 당시 미영타도대좌담회에서 대동아 성전연설, 임전대책협의회 |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
9 |
김태선 |
조선총독부 경무국 수사과장 |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치안국장 |
11 |
백한성 |
일제 당시 평양, 청진, 광주, 대전지법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내무장관 |
12 |
김형근 |
일본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내무부장관, 대통령비서관, 서울지검장 |
13 |
이익흥 |
일제 당시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장관, 경기지사, 헌병사령관 |
14 |
장경근 |
일본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
15 |
이직근 |
일제 당시 원주군수 |
내무부장관, 농림부장관 |
17 |
김일환 |
일제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 대위 |
국방부장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
19 |
홍진기 |
일제 당시 전주지법 판사 |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
20, 31 |
이 호 |
일본고등문관사법과, 경성지법 및 경성고검검사 |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2회), 주일대사 |
22 |
이상철 |
일본군 장교 |
군단장, 내무부장관 |
23 |
현석호 |
일제 고등문관행정과, 화순군수 |
국방부 장관, 내무부장관 |
24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흥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
25 |
조재천 |
일본고등문관사법과, 판사 |
내무부장관, 경북도지사 |
26 |
한 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내무부장관 |
27, 28
32, 36 |
박경원 |
일본군 장교 |
군사령관, 내무부장관(4회) |
30 |
엄민영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내무부장관 |
37 |
김치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검찰총장,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법무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3 |
이우익 |
일제 재판소 서기, 부산지법 밀양지청 판사, 함흥지법․대구복심법원 판․검사 |
법무부장관 |
5 |
조진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해주지법 판사, 대구지법 부장판사, 대구복심법원판사 |
법무부장관, 대구지법, 지방판사 |
8, 20 |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고검 검사 |
법무부장관(2회), 내무부장관, 주일대사 |
9 |
홍진기 |
일제 당시 전주지법 판사 |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
11 |
조재천 |
일본고등문관 사법과, 판사 |
내무부장관, 경북지사 |
12 |
이병하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장관 |
13 |
고원증 |
일제 당시 만주 고등문관 |
법무부장관 |
16, 17, 18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검찰총장, 대법원판사, 법무부장관(3회), 대법원장 |
19 |
권오병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장관, 문교부장관 |
21 |
배영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법무부장관 |
24 |
황산덕 |
일본고등문관사법과․행정과 |
성대총장, 문교장관, 법무장관 |
26 |
김치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검찰총장, 내무장관, 법무장관 |
27 |
백상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검장, 법무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검찰총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2 |
김익진 |
일제 충주, 강원, 평양, 함흥지법판사 |
대법관, 검찰총장 |
4 |
한격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법원장, 검찰총장 |
5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검찰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장관, 대법원장 |
6 |
정순석 |
일제 대구지법 안동지원 판사 |
검찰총장 |
9 |
장영순 |
일본군 지원병 |
검찰총장 |
10 |
정창운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검사 |
검찰총장, 동국대 법정대학장 |
일본군 출신 역대 국방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4 |
신태영 |
일본육사(26기), 일군장교 |
국방부장관 |
7 |
김정렬 |
일본 육사(54기), 전투기비행중대장 |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국무총리 |
8 |
이종찬 |
일본육사(49기), 일군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9, 11 |
현석호 |
일제 당시 고등문관 행정과, 화순 군수 |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2회) |
12 |
장도영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13 |
송요찬 |
일군 지원병,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18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참총장, 국방장관 |
19 |
임충식 |
일본군 간도특설대 |
국방장관, 육참차장, 합참의장 |
20 |
정래혁 |
일본육사(58기), 일군장교 |
국방부장관 |
21 |
유재흥 |
일본 육사, 일본군 장교 |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차장, 대통령안보담당특별보좌관 |
23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
24 |
주영복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문교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2 |
백낙준 |
일제당시 ‘미영타도좌담회’ 참석, 대동아성전선전 |
문교부장관, 연세대 총장 |
4 |
이선근 |
일제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 |
문교장관, 국사편찬위원장, 성대총장, 영남대 총장 |
7 |
이병도 |
총독부 중추원 산하 조선사편수회 활동. 今西龍의 수사관보 |
문교부장관 |
12 |
박일경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문교부장관 |
14 |
고광만 |
조선총독부 시학관(학무국), 충주공립중학교장 |
문교부장관, 부산대 총장 |
16, 18 |
권오병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문교부장관(2회), 법무장관 |
22 |
황산덕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성균관대총장, 문교부장관, 법무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농림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5 |
임문환 |
일본고등문관 행정과, 용인군수, 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광공국 서기관․민정관 |
농림부장관 |
11 |
임철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한일회담대표,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
13 |
정운갑 |
일본군 군속, 일본고등문관사법과 |
농림부장관 |
15 |
이근직 |
일제 당시 원주 군수 |
내무부장관, 농림부장관 |
16 |
이해익 |
일제 고등문관 행정과, 개성 군수 |
경기도지사, 농림부장관 |
18 |
장경순 |
일본군 장교 |
농림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상공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1 |
임영신 |
일제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발족 |
상공부장관, 중앙대 총장 |
5 |
이재형 |
일제 당시 금융조합 이사 |
상공부장관, 국회의장 |
7 |
박희현 |
일본 관리 |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
9 |
김일환 |
일제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 장교 |
국방부장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
10 |
구용서 |
일제 조선은행 동경지점, 조선은행 대판지점지배인 |
한국은행․산업은행 총재, 상공부장관 |
13 |
오정수 |
일제 당시 조선곡물사․만주곡물사사장 |
체신부장관, 상공부장관 |
14 |
이태용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
상공부장관 |
15 |
주요한 |
일제 당시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임원 |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 |
17, 19 |
정래혁 |
일본육사(58기), 일군장교 |
상공부장관(2회), 군사령관 |
21 |
이병호 |
일제 동양척식회사 근무 |
상공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건설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3 |
박임항 |
일제 만주신경군관학교, 일본육사 |
국방대 총장, 건설부장관 |
6 |
전예용 |
일본고등문관 행정과, 광주군수, 총독부 사회과장, 학무국 원호과장 |
한국은행 총재, 부흥부장관, 건설부 장관 |
9 |
이한림 |
일본육사, 만주신경군관학교 |
육사 교장, 건설부장관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부흥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3 |
송인상 |
일제 당시 식산은행 |
한은부총재, 재무부․부흥장관 |
4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장관 |
5 |
전예용 |
일제 고등문관 행정과, 광주군수, 총독부 과장 |
한국은행총재, 부흥부․건설부장관 |
6 |
주요한 |
일제 당시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임원 |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보건사회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5, 16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부흥부장관, 보사부장관(2회) |
13 |
김태동 |
일제 고등문관 사법과, 조선총독부 전매국 |
보사부장관 |
14 |
이경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보사부장관, 한일회담 대표 |
15 |
고재필 |
일제 만주고등문관, 만주대동학원 |
보사부장관, 무임소장관 |
18 |
진의종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
국무총리, 보사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교통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8 |
김일환 |
일제 봉천무관학교(5기), 만주군 장교 |
국방부장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
20 |
장성환 |
일본 항공학교 장교 |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
22 |
최경록 |
일본 육군 지원병, 일본 예비사관학교 |
헌병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체신부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4 |
조주영 |
일본 변호사시험 합격 |
체신부장관 |
7 |
이응준 |
일본육사(26기), 일군장교 |
육군 참모총장, 체신부장관 |
8 |
곽의영 |
일제 당시 괴산, 청원군수 |
체신부장관 |
13 |
한통숙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체신부장관 |
16, 17 |
홍헌표 |
일제 고등문관 행정과, 강서군수, 평남도이사관, 함북도사무관, 함북농상부장 |
체신부장관(2회), 성균관대 부총장 |
18 |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양덕군수 |
충남지사, 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
21 |
황종률 |
일제 괴뢰국 만주 대동학원(3기) |
충북도지사, 재무부장관, 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
24 |
신상철 |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육군헌병사령관, 체신장관 |
31 |
김기철 |
일제 당시 강원도공립보통학교장, 神仙공립교장 |
체신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관리 출신 역대 무임소 장관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5 |
김선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무임소장관 |
6 |
신현확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일본 군수성 근무 |
국무총리, 부흥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
12, 13 |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행정과, 양덕 군수 |
충남지사, 무임소장관(2회), 체신부장관 |
17 |
황종률 |
일제 괴뢰국 만주 대동학원(3기) |
충북도지사, 재무부장관, 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
18 |
김원태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무임소장관 |
27 |
장경순 |
일본군 장교 |
농림부장관, 무임소장관 |
28 |
고재필 |
일제 만주국 대동학원11기, 만주고등문관시험 |
보사부장관, 무임소장관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대법원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2 |
조용순 |
일제 판사임용시험 |
대구고법원장, 대법관 |
3, 4 |
조진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해주지법판사, 대구지법부장판사, 대구복심법원판사 |
법무부장관, 대구지법 지방판사, 대법원장(2회) |
5, 6 |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
검찰총장, 대법원판사, 법무부장관, 대법원장(2회) |
7 |
이영섭 |
일제 경성지법 판사 |
대법원 판사, 대법원장 |
일제관리 출신 역대 대법관
이 름 |
일제 당시의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에서의 직책 및 계급 |
김찬영 |
일제 판사 |
대법관 |
김두일 |
일제 당시 청진, 광주, 함흥, 해주지법 판사 |
서울지검 인천지청장, 대법관 |
김익진 |
일제 평양복심법원 판사 |
대법관, 검찰청장 |
노진설 |
일제 당시 변호사 |
대법관 |
최병주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대법관 |
백한성 |
일제 당시 평양, 청진, 광주, 대전지법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내무부장관 |
이우식 |
일제 당시 전주지법원장 |
대법관 |
김동현 |
일제 당시 대구지검 검사 |
대법관 |
한격만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
서울지법원장, 대법관, 대검찰총장 |
김갑수 |
일제 평양복심법원 판사 |
대법관 |
김세원 |
일제 당시 경성지법 판사 |
대법관, 제주지법원장 |
고재호 |
일제 당시 판사 |
대구고등법원장, 대법관 |
허 진 |
일제 당시 판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
오필선 |
일제 당시 광주지법 목포지청 검사 |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
일본군 출신 역대 합동참모회의 의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1 |
이형근 |
일본육사56기, 일군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2 |
정일권 |
일본육사, 봉천군관학교(5기)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
3 |
유재흥 |
일본 육사,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
4 |
백선엽 |
일제 만주봉천군관학교 9기, 간도특설대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교통장관 |
5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6, 7, 8 |
김종오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3회), 육참총장 |
9 |
장창국 |
일본육사59기, 일군장교 |
합참의장 |
10 |
임충식 |
일군장교, 간도특설대 |
국방장관, 육참차장, 합참의장 |
11 |
문형태 |
일군지원병, 일군 장교 |
합참의장 |
12 |
심흥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
13 |
한 신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내무부장관 |
14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
일본군 출신 역대 육군참모총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의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에서 직책 및 계급 |
1 |
이응준 |
일본육사26기, 일군장교 |
육군참모총장, 체신부장관 |
2, 4 |
채병덕 |
일본육사49기,일군장교 |
육군참모총장(2회) |
3 |
신태영 |
일본육사26기, 일군장교 |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
5, 8 |
정일권 |
일본육사, 봉천군관학교 |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
6 |
이종찬 |
일본육사49기,일군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7, 10 |
백선엽 |
일제 만주봉천군관학교 9기, 간도특설대 |
합참의장, 육참총장(2회), 교통장관 |
9 |
이형근 |
일본육사56기, 일군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11 |
송요찬 |
일군지원병, 일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
12 |
최영희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참총장, 국방장관 |
13 |
최경록 |
일본군 지원병, 도요하시 예비사관학교 |
헌병사령관, 육군참모총장 |
14 |
장도영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15 |
김종오 |
일본군 장교 |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
16 |
민기식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7 |
김용배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8 |
김계원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19 |
서종철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20 |
노재현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21 |
이세호 |
일본군 장교 |
육군참모총장 |
일본군 출신 역대 공군참모총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1, 3 |
김정렬 |
일본육사54기, 일군장교 |
공참총장(2회), 국방부장관 |
5 |
김창규 |
일본육사55기, 일군장교 |
공군참모총장 |
7 |
장성환 |
일본항공학교, 일군장교 |
공군참모총장 |
8 |
박원석 |
일본육사58기, 일군장교 |
공군참모총장 |
9 |
장지량 |
일본육사60기, 일군장교 |
공군참모총장 |
11 |
김두만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
12 |
옥만호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
13 |
주영복 |
일본 항공학교 |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일본군 및 일제 관리 출신 역대 치안국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1 |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검․고검 검사 |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
2, 4 |
김태선 |
일제 총독부 경무국 수사부 국장 |
내무장관, 서울시장, 치안국장 |
5 |
이익흥 |
일제 당시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장관, 경기지사, 헌병사령관 |
6 |
홍순봉 |
일제 만주국 행정참사관 |
치안국장, 헌병학교장 |
7 |
윤우경 |
일제황해도송화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헌병사령부 수사과장, 치안본부장 |
11 |
김종원 |
일본군 출신 |
치안국장 |
17 |
박주식 |
일본고등문관, 전남도경찰부경부, 성동경찰서장 |
치안국장 |
일제 경찰 출신 역대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대수 |
이 름 |
일제 당시 직책 및 계급 |
우리나라 직책 및 계급 |
2 |
김태선 |
조선총독부 경무국 수사국장 |
내무장관, 서울시장, 치안국장 |
3 |
이익흥 |
일제 당시 황해도 박천경찰서장 |
내무부장관, 경기지사, 헌병사령관, 치안국장 |
4 |
윤우경 |
일제 당시 황해도 송화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헌병사령부수사과장, 치안국장 |
5 |
윤명운 |
일제 종로경찰서 경부 |
서울경찰국장, 내무부차관 |
6 |
윤기병 |
일제 당시 경기도 수원경찰서장 |
서울경찰국장, 동대문경찰서장 |
7 |
변종현 |
일제경기도경찰부 경부보, 동대문경찰서경부보 |
서울경찰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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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화가 치밀기는 하지만, 다시 근로보국대(勤勞報國臺) 얘기로 돌아간다. 일제는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공포하여 수십만 명에 달하는 12~40세의 우리나라 여성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과 한국 내 군수공장에, 또는 행방도 알리지 않은 채 남방이나 중국전선에 종군위안부로 연행했다.
1930년대 동덕고등여학교 학생들의 근로보국대 활동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305474D4AA40C33)
그 결과 수많은 조선인(朝鮮人) 장정과 여성들이 일본 등 각지의 탄광·금속광산·수력발전·철도·도로·군수공장은 물론, 군사기지 공사, 종군위안부 등으로 연행되어 생사거처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가혹한 조건 밑에서 혹사(酷使)당했다.
이렇게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朝鮮人)수는 일본·사할린·남양군도를 합쳐 72만 여 명에 달했으며, 조선 안에서는 ‘근로보국대’ 등으로 충원된 414만 여 명을 제외하고도 관(官) 알선 40만 여 명, 현원징용 26만 여 명, 일반징용 4만 여 명 등 70만 여 명에 이르렀다.
근로보국대 수료증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801474D4ADCB42E)
이는 조선인(朝鮮人) 전체인구의 5.6%에 달하는 수치로,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동안 일제는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침탈(侵奪)했으며, ‘근로보국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에 시달렸다.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고, 범위가 확대되어가자 인적자원(人的資源)의 소모는 늘어갔고, 노동력의 부족은 점차 심해져갔다. 전투원(戰鬪員)은 물론 노동력이 부족해진 후방에서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일하고, 석탄(石炭)을 캐낼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근로보국대에 동원된 몸빼 학생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1F25474D4AA46901)
일제는 이를 조선인(朝鮮人)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인들은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고, 광산(鑛山)으로 끌려가서 노예노동을 해야 했다.
일제가 조선인(朝鮮人)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30년대 전반부터였다. 그러나 이때는 주로 직업소개소(職業紹介所)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를 값싸게 확보하는 방법을 취했고, 특히 남한지역의 노동자를 북한(北韓) 공업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노동력의 해외이동(海外移動) 금지 등의 정책을 취했다.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日本人) 지주(地主)들의 가혹한 수탈과 일본 독점자본의 압박 아래 몰락(沒落)한 농민들이었다.
일본 후쿠오카현 광업소 조선인 징용 광부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5EB1494D4AA53204)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도발한 1937년서부터는 노동력의 국가적 통제와 이들에 대한 사상적 공세인 황민화(皇民化)정책이 병행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도 형식적으로나마 ‘모집’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38년 들어서는 마침내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여 조선 민중을 강제로 끌고 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후에도 ‘국민직업능력신고령(1939년 1월)’을 비롯해 서 많은 노동관계 법령을 발표하여 노동력(勞動力)의 정확한 파악을 도모하였다.
한편 1939년 7월 일본에서는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이 공포되었지만, 조선에서는 민족적(民族的) 저항을 우려하여 형태를 바꾸어 ‘모집’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이 실시되어 조선(朝鮮) 안이나 일본, 기타 지역으로 강제 연행되어 갔다.
징용 출두 명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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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끌려간 조선인 보국대(報國隊)들은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고, 관청(官廳)에서 호출(呼出)하여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갔다가 바로 끌려가는 바람에 가족의 얼굴도 못보고 헤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1940년에는 ‘조선직업소개소령’이 공포되어 서울, 대구, 부산, 평양, 신의주, 함흥 등 6개 도시에 관영(官營) 직업소개소가 설치되어 더욱 대대적인 노동력(勞動力) 동원이 강행되었다.
이와 함께 ‘종업자 이동방지령’, ‘국민 노무수첩법’ 등을 적용하여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구속(拘束)을 더욱 강화했다.
1941년 6월에는 ‘조선노무협회(朝鮮勞務協會)’가 만들어지고, 같은 해 12월에는 ‘국민 근로보국협력령’이 시행되어 노동력 동원은 보다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개시에 의하여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진 일제는 1942년 3월 다시 대규모의 국민동원계획(國民動員計劃)을 세우고, 강제력이 한층 강화된 관(官)알선의 방식으로 다수의 조선인(朝鮮人)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였다.
징용 한국인 사망 통지서(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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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44년 2월부터는 ‘국민징용령’에 기초하여 ‘현원징용(現員徵用)’을 실시하였다. 이는 이미 중요한 광산과 탄광(炭鑛)들, 그리고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현재 그가 일하고 있는 작업장에서 바로 징용(徵用)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력을 고착(固着)시키고, 무보수(無報酬)노동을 강요하기 위한 것으로, 노동자는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되, 그 신분만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이어서 4월에는 ‘긴급학도 근로동원 방책요강’, ‘학도동원 비상조치요강’ 등 각료회의(閣僚會議) 결정에 기초하여 학생동원(學生動員) 실시 방침이 만들어졌고, 4월에는 초등학교로부터 대학, 전문학교에 이르는 전학생을 군수물자 및 식량증산, 국방시설 건설 등 직접 전력증강(戰力增强)에 동원했다.
학생들에게 교실에서의 수업 대신 공장이나 작업장(作業場)에서의 육체노동을 강요한 것이었다. 한편 ‘국민 직업능력신고령’에 기초하여 기술자(技術者), 기능가(技能家) 48만 5,118명(1994년 5월), 남자 청장년 319만 4,969명, 합계 368만여 명을 등록시켜 강제 동원준비를 더욱 정비하였다.
노동자의 결핍(缺乏)이 심해진 1944년 8월부터는 관(官)알선을 존속시키면서 국민징용령에 의해 관(官)에서 발행한 징용영장 한 장으로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했다.
그러나 모두 이 같이 점잖은 방법으로 징용(徵用)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력의 동원이 힘들어 지자 일제는 서구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즉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警察署)의 조선인 직원들을 동원하여 길가는 사람,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農民), 심지어는 잠자는 청장년(靑壯年) 까지 잡아갔으니 일제의 만행(蠻行)은 극도에 달했다.
그 시절, 한 일본인(日本人)은 자신들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더 심한 것은 노무(勞務)의 징용이었다.
전쟁이 점차 가열되어 감에 따라 조선에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한편, 노무징용자(勞務徵用者)의 배당이 점차 심해졌다. 사람들을 이해시켜 응모하게 해서는 배당된 수를 도저히 채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군(郡)이나 면의 노무계(勞務係)가 밤중이나 새벽 갑자기 남자가 있는 집을 습격(襲擊)하거나, 혹은 논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를 돌려 대놓고, 조사할 것이 있다며 태연히 그들을 태워 갔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 온 장정(壯丁)들을 한 묶음을 만들어 북해도(北海道)나 구주(九州 ; 규수)의 탄광에 보내 할당책임(割當責任)을 면하는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
어쨌든 이 같이 해서 잡혀온 사람들은 일본각지의 탄광, 금속광산(金屬鑛山) 등을 비롯하여 수력발전, 철도와 도로공사, 군사공장은 물론 군사도로 비행장 등의 군사기지(軍事基地) 공사에 끌려가 가장 힘들고 고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들의 수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 시기의 통계자료(統計資料)는 부실하여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아래 표나 다른 자료를 종합해서 볼 때 대개 100만 명 이상의 조선인(朝鮮人)들이 징용에 끌려갔음을 알 수 있다.
연도별 |
탄 광 |
금속광산 |
토건 |
항만하역 |
공장기타 |
합 계 |
1939 |
24,279 |
5,042 |
9,479 |
- |
- |
38,800 |
1940 |
35,441 |
8,069 |
9,898 |
- |
1,546 |
54,954 |
1941 |
32,415 |
8,942 |
9,563 |
- |
2,672 |
53,592 |
1942 |
78,660 |
9,240 |
18,130 |
- |
15,290 |
121,320 |
1943 |
77,850 |
17,075 |
35,350 |
- |
19,455 |
149,730 |
1944 |
108,350 |
30,900 |
64,827 |
23,820 |
151,850 |
379,747 |
1945 |
136,810 |
34,060 |
29,642 |
15,333 |
114,044 |
329,889 |
합 계 |
493,805 |
113,328 |
176,889 |
39,153 |
304,857 |
1,128,032 |
출전 :박경식, 1986,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359면.
이들은 또 위의 표에서 보듯이 작업이 가장 힘든 광산(鑛山)에 가장 많이 끌려갔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노예(奴隸)처럼 혹사당하고, 구타당하고, 병들고, 죽어갔다.
그 시절의 ‘근로보국대’ 징용(徵用)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우리네 선대(先代)들은 ‘신고산타령’까지 개사(改詞)하여 불렀다. 가사를 소개한다.
신고산 타령
- 1940년대 일제 침략상을 보여준 노래 -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깻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 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
게다가 일제는 이들 ‘근로보국대’ 대원에게 매일 아침, 작업을 시작하기 전 조회(朝會)를 실시하고, ‘황성요배(皇城遙拜)’를 시킨 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봉창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성요배’란 ‘궁성요배(宮城遙拜)’ 또는 ‘동방요배(東方遙拜)’라고도 하는데, ‘동방요배’는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일본)을 향하여 90도로 허리를 굽혀 최경례(最敬禮)를 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일왕(日王)을 살아있는 신(神)으로 숭배하던 때이다.
‘황성요배’하는 조선인 직장인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18C4E4D4AACCE02)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최경례(最敬禮)’란 가장 존경하는 뜻으로 정중히 경례를 한다거나, 그런 동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인사는 일제 당시 신사(神祠)참배나 동방요배(東方遙拜)에서 하던 경례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는 ‘最敬禮(さいけいれい)’의 유습이다.
소위 ‘최경례’는 일본 ‘야쿠자(やくざ)’에서 하급조직원인 ‘고분(子分=꼬붕)’이 최고두목인 ‘오야분(親分=오야봉)’에게 복종과 충성, 그리고 존경의 표시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일본 ‘야쿠자’의 영향을 받은 국내 조폭세계에서도 관행이 되어 있다.
조회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어린이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79F7484D4ABB102F)
어쨌든 일본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은 대동아(大東亞) 공영권을 내세워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 하여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만들고자 일본 천황과 황실을 숭배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강요하였다.
아래 사진의 전단(傳單)은 당시 친일(親日) 조선인으로 구성된 ‘총동원 조선연맹’에서 발행한 전단으로, 개인 또는 단체가 전국 각 지역에 세운 신궁(神宮), 신사(神社)에 참배하여 일본 황실을 향해 허리를 굽혀 숭배하도록 했다.
순박한 조선인 가정의 ‘황성요배’
![](https://t1.daumcdn.net/cfile/cafe/111B844E4D4AAE100C)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란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敎學刷新)·국민정신함양을 목적으로 보급했다.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朝會)와 각종 집회의식에서 낭송(朗誦)이 강요되었으며,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의 실천요강’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勸獎)하고 있다.
‘황국신민서사’는 ‘아동용(兒童用)’과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일반용’의 2종류가 있는데, 내용의 함의(含意)는 대동소이하다. 아동용과 일반용(一般用)을 대비표로 소개한다.
아동용 |
일반용 |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
(조선총독부, {施政30年史}, 1940)
일제는 이 ‘황국신민서사’의 보급을 위해 아동용(兒童用) 100만 부, 일반용(一般用) 20만 부를 인쇄·배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선전했다.
문안은 직업적 친일파인 이각종(李覺鍾)이 지었다고 한다. 어쨌든 ‘황국신민서사’의 제창은 우리 스스로 일본의 식민지(植民地) 백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고백이 되고 말았다.
‘황국신민서사’ 전단
![](https://t1.daumcdn.net/cfile/cafe/112A704D4D4AAFBF21)
아침마다 궁성을 요배합시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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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 얘기로 다시 돌아간다. 일본으로 끌려간 광부(鑛夫)들은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하면서 혹사를 당하다가 밤이 되면, 비가 새고 별이 보이는 좁은 숙소(宿所)에 쓸어 넣고, 밖으로는 문을 잠그고 감금했었다.
왜놈들은 그것도 모자라 철조망(鐵條網) 울타리를 치고, 총을 들고 지켰다. 도망가다 잡히면 반죽음을 당하도록 얻어맞았다.
작업장(作業場)은 안전시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죽었다.
이 같은 국내 광산(鑛山)이나 발전소(發電所) 건설에 끌려 간 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나, 일본에 끌려간 경우는 더욱 심했다.
한 자료는 일제(日帝)가 패망한 시기 일본에 남아 있었던 징용 노동자의 수가 약 37만이었다 하는데, 이는 앞에 제시된 징용자(徵用者) 수와의 차이만큼의 조선인(朝鮮人)들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는 명목상의 임금(賃金)이 지급되었으나, 일본인 노동자의 반 이하였고, 그나마 고정되어 있었다. 또 얼마 안되는 임금에서 전불금(前拂金), 피복비, 숙식비, 상품대(商品代) 등을 빼고 나머지는 또 도주를 방지한다는 핑계로 강제저축(强制貯蓄)을 시켜 버렸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敗亡)한 뒤 이 저축은 돌려받지도 못하고 말았으니 이들은 실로 무보수(無報酬)로 노예노동(奴隸勞動)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朝鮮) 안의 군수공장(軍需工場), 발전소, 비행장의 건설에도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대개 ‘모집’, ‘관알선(官斡旋)’, ‘징용’, ‘근로 보국대’ 등의 형식으로 동원되고 있었다.
그 수는 1939∼1945년간 약 480만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勞動者)들의 처지도 일본에 징용(徵用)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또 1944년 다시 ‘여자정신대 근로령’을 시행하여 젊은 미혼여성(未婚女性)을 잡아서 일본, 조선안의 군수 공장에서 혹사(酷使)시키고, 남방, 중국 전선에 보내 일본군(日本軍)의 노리개로 삼았다.
조선(朝鮮)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려는 계획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현역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일본제국(日本帝國)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을 믿을 수 없어 함부로 총을 맡길 수도 없어 일찍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침략전쟁(侵略戰爭)이 확대, 장기화 되어가면서 드디어 1938년에 ‘육군 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어 4월부터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43년 7월에는 ‘해군 특별지원병령’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는 전문학교(專門學校), 대학생에 대한 현역병 지원을 강요하는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1938∼1943년간 약 24만 명의 지원병(志願兵)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도 한 때 일본군 사관생도로 징집되었다고 한다.
학병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7F64A4D4AB0541C)
(혈색과 복장, 뒷짐 진 손에 '지휘봉'이 들려 있는 것을 보면 '간부'로
보인다. 간부가 아니면, 감히 조센징 주제에 어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원병(志願兵)’은 말이 지원병이지, 실제로 강요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당시의 친일 인사들은 지원병이 ‘천황(天皇)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등의 말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회(講演會)를 열고, 지원을 강요했었다.
1942년부터는 중등학교 이상에서 현역장교(現役將校)를 배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육체의 단련은 물론 ‘국체(國體)의 본의(本意)’를 깨닫게 하고 일어(日語)를 습득시키는 것에 중점이 두어졌다.
한편 이 해에 징병제(徵兵制) 실시를 위한 기초작업을 벌여 드디어 1945년부터는 우리나라 청년들에 대한 현역병(現役兵)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1945년간 약 21만 명의 조선청년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때의 조선인(朝鮮人) 청년들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침략자(侵略者)의 전쟁터에 끌려가 막심한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창씨개명자료-졸업증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14D4E4D4AB1440C)
일제는 1938년 중일전쟁(中日戰爭 ; 支那事變) 1주년을 맞아 조선을 전시동원체제로 재편했다. 그리고 조선인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해 무엇보다 조선인의 정신(情神)을 완전히 뿌리 뽑는 일을 촉진하였다.
조선인의 송죽(松竹)같은 절개(節槪)를 꺾기 위해 왕릉(王陵)이나 명승지에 식재(植栽)한 소나무까지 모두 베어내던 시절이었다.
천 여 년을 자란 소나무를 몽땅 베어버린 괘릉리의 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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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를 이룩하기 위한 획책이었다. 일제는 이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일장기 게양, ‘황국신민서사’의 암송 등 유래 없는 굴종(屈從)을 강요했었다.
심지어 조선인의 성과 이름마저 일본식(日本式) 성과 이름으로 강제로 바꾸었으니 이게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창씨개명하기 위해 줄선 사람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31D484D4AB1C60E)
1938년의 지원병제도가 시원치 않자 징병제(徵兵制) 실시를 준비하면서(1942년 시행) 조선인도 일본인(日本人)과 차별이 없다는 상징으로 일본식 씨성(氏姓)을 천황(天皇)이 하사(下賜)한다는 것이었다.
일제(日帝)는 이것을 두고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은 씨성(氏姓)을 갖게 되어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완성되었다고 떠들어댔다.
혈연(血緣)과 조상을 중시하는 조선인(朝鮮人)들이 이에 반발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내 성을 갈겠다”란 말이 가장 큰 다짐의 용어(用語)였기 때문이다.
강제된 창씨개명에 저항하여 자살(自殺)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견자웅손(犬子熊孫 :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이름을 지어 은연 중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지도자였던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향산광랑(香山光郞)’아라는 일본이름으로 개명(改名)하고, “2600년전 일본 진무천황께옵서 즉위하신 향구산(香久山)을 씨로 삼았다”고 떠벌여 세인을 경악(驚愕)케 하기도 했었다.
남산 조선신궁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7114C4D4AB25318)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으면 배급도 주지 않았고, 기차표(汽車票)도 팔지 않았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당시의 일본인(日本人)들은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센징’이 건방지게 일본식(日本式) 이름을 달고 다닌다고 기분 나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세계의 눈을 속여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해 열심히 창씨개명을 강요했었다.
창씨개명을 하면 조선인(朝鮮人)은 일본인이 되는 것이고, 일본정부가 일본청장년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징용(徵用 ; 조요)으로 징집하고, 일본인으로 신분이 바뀐 여성들을 군수공장(軍需工場) 근로보국대로 끌고 가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강요(强要) 때문에 필자의 이름도 한 때 ‘월성용우(月城容雨)’로 바뀐 적이 있었다. 더러운 왜놈들과 친일 조선인(朝鮮人) 관리들의 강요로 종중(宗中)에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창씨개명이었다.
여기에다 일제는 조선의 지도적 여성들을 전쟁도구로 삼기도 했다. 중일전쟁(中日戰爭 ; 支那事變) 이후 일제는 조선의 저명한 여성인사들을 동원해 ‘총후(銃後 : 전쟁의 후방) 애국’을 외치며, 온갖 여성 친일조직을 만들었다. 이른바 ‘애국부인(愛國婦人)’ 조직이었다.
이들 조직의 일이란 전쟁에 소용(所用)될 각종 물자를 총독부에 갖다 바치고, 위문품(慰問品)을 보내며, 방공훈련과 각종 정신전력교육을 받는 데 조선인 여성을 강제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朝鮮人)들의 아들·딸들을 전쟁터나 공장 그리고 각종 노역장(勞役場)에 보내는 데 앞장설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친일(親日) 여성조직으로는 ‘경성중등여학교 동창회연맹’·‘애국자녀단’·‘여성단체연합회’·‘조선부인문제 연구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에 가장 열성적(熱誠的)으로 앞장 선 여성이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과 UNESCO 총회 한국대표, 그리고 군사정부에 의해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던 모윤숙(毛允淑)이다.
그녀는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들어가 반미(反美)에 관한 내용과 학병(學兵)을 격려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여성도 전사(戰士)다.
새 세기를 창조하는 우리 여성은 과거 몇 십 년부터 살아오던 여성들보다 확실히 행복의 절정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영예(榮譽)를 가진 우리가 생활전선(生活前線)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하면 완전한 승리는 차지할 수 없다.
미·영(美·英)을 격멸할 자는 아세아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요, 국가의 뒤에서 밀고 나가는 원동력(原動力)은 아내요 어머니이다.
우리 여성 중에 한 사람의 ‘잔다크’나 ‘나이팅겔’을 요구하는 바가 아니라, 1천5백만 여성의 총력을 요구하는 때다.”라며 열변(熱辯)을 토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말하는 승리(勝利)란 우리나라 독립군(獨立軍)과 연합군(聯合軍)과의 전투에서 일제(日帝)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금속류 공출과 여성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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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는 방공훈련을 실시한다고 서울 주민들을 들볶기도 했었다.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라’, ‘방화수를 준비하라’, ‘불때리개(자루가 달린 물걸레)와 양동이, 모래주머니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방공훈련(防空訓練)을 실시했다.
일본군에게 보낼 위문품 준비중인 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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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회 어깨띠가 보인다)
남정네들이야 직장(職場)을 핑계로 이리저리 빠져나가 훈련(訓練)의 몫은 언제나 노인과 여성들이었다. ‘몸뻬’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줄을 서서 부지런히 물을 담은 ‘양동이’로 ‘릴레이’를 해야 했다.
그나마 양반촌은 체통(體統)을 지킨다고 말을 잘 듣지 않아 빈민촌(貧民村)에서 집중 실시되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양반가(兩班家) 부녀들이 일제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상것 여편네’와 줄을 서 물양동이를 날라야 했으니,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방공훈련 실시(1940년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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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훈련 중 물을 담은 양동이를 운반하는 여성들
앞서 소개한 대로 일제는 1938년부터 일반인(一般人)을 대상으로 ‘근로보국대’를, 학생층은 ‘학도근로보국대’를 조직해 각종 부역(賦役)에 강제 동원했다.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도 모자라 일제는 모집· 알선 등의 명목으로 조선사람을 노무동원(勞務動員)하던 것을 1944년부터는 아예 ‘국민징용령’을 실시해 조선인을 강제로 국내외의 군수산업(軍需産業) 지대에 동원했다.
이렇게 일제(日帝)의 강요로 동원된 조선 사람의 수효는 국내 약 400∼500 만명, 해외 300만 명으로 모두 750여 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8년 ‘근로보국대’가 만들어진 후 일제(日帝)는 1943년부터 조선의 모든 촌락(村落)마다 남녀별로 ‘근로보국대’ 조직을 완성해 노동력(勞動力)을 수탈했다.
근로보국대(여학생) 노동력 징발(193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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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 획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인을 일본인(日本人) 노예로 만들어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제정한 후 ‘지원병’ 숫자가 턱없이 모자라자, 1943년부터는 전문대학생(專門大學生) 이상을 대상으로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말이 ‘지원병’이지 이를 거부하면 학교를 강제를 휴학해야 했고, 부모 또한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갖은 박해(迫害)를 당해야 했다.
일본군에게 보낼 위분대를 포장하는 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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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학도지원병제’를 선전하기 위하여 ‘지원병’에게 출정의 깃발을 들고 허리띠를 한 채 거리를 한 바퀴 돌게 했다. 이 깃발을 당시의 조선 청년들은 ‘청춘 만장(輓章)’이라고 불렀다.
아낙네들은 동네에서 누가 징집(徵集)되면 강제로 끌려 나가 환송회를 해야 했다. 학병징집자(學兵徵集者)들은 1943년 12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운동장에서 훈련을 받고 이듬해 1944년 2월 일제히 전쟁터로 향했다. 한편 지원병훈련소는 지금의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었다.
강제로 소집된 지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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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봉이’라는 청년이 징집되면서 고향집의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전선(戰線)에 끌려 나가지 않았다. 사진 찍은 지
세 시간이 채 못되어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이 울려 나왔기 때문이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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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대’ 얘기로 한 번 더 돌아간다. 일본본토(日本本土) 광산의 경우 허리를 구부려 끌고 다니는 선로(線路) 수레인 ‘치테구루마’로 흙 나르는 일은 가히 고문(拷問)에 다름없었고, 갱이 무너져 흙 속에 파묻혀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초인적(超人的)인 중노동(重勞動)을 하면서도 변변한 밥조차 얻어먹지를 못해 영양실조(營養失調)와 질병으로 매일 같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일본본토 광산에서 강제노역하는 조선인 보국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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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田縣 花岡광산에서 銅鑛石을 나르는 조선인 광부들)
밥이라야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콩깻묵’을 ‘주먹밥’처럼 이겨서 한 덩어리씩 주는 것이 전부였고, 이나마 저울에 달아가며 배급량(配給量)을 줄이기만 했다.
‘보국대(報國隊)’원들이 도주할까봐 사육(飼育)하는 왜놈들의 ‘개새끼’들에게는 쌀밥에 멸치 찌꺼기를 주면서 중노동(重勞動)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보국대원(報國隊員)들에게는 ‘콩깻묵’과 ‘단무지’가 전부였다.
하긴 지금의 우리나라에도 한 달에 10여만 원의 생계보조비(生計補助費)로 겨우 연명하다가 영양실조(營養失調)로 죽어가는 외톨이 노인들이 수두룩하게 있는가 하면, 한 달에 수십, 수백만 원씩의 의식주(衣食住)와 진료비(診療費)로 호화생활을 누리는 애완견 ‘개새끼’(기독교 성경에서는 ‘개’를 ‘마귀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있다)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으니 당시의 ‘왜놈’들이 저들의 ‘개새끼’에게 쌀밥을 줬든, 생선을 줬든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남양지역(南洋地域)으로 징용당해 남태평양(南太平洋)의 ‘파푸아 뉴기니’ 등지에서 군사시설의 신설과 보수에 동원된 보국대원(報國隊員)들의 경우는 미군(美軍)들로부터 폭격을 당해 쑥대밭이 된 비행장(飛行場)을 밤낮없이 수리하는 고역을 치렀다.
‘조센징’이라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아 원주민(原住民)들이 밭에 심은 고구마 잎을 따다 바닷물에 담가 국을 끓여 먹으면서 연명(延命)하기도 했다.
남양군도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 보국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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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일제(日帝)가 지나전쟁(支那戰爭 ;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부터는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공출(供出) 당하고, 농사지을 가장까지 ‘보국대(報國隊)’로 끌려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일본(日本)사람 집이나 부유층 친일분자(親日分子)의 집에 가서 일을 하거나, 아이를 봐 주면서 식량(食糧)을 얻어 겨우 연명하였다.
그 노릇도 할 수 없는 가정에서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과년한 딸이든, 철부지 어린 딸이든 정신대(挺身隊)로 내보내 제 ‘입 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했었지만, 금수(禽獸)보다 못한 왜놈들이 더러운 ‘몽둥이’로 짓찧을 줄은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왜놈들은 지금도 우리나라 아가씨들이 자원(自願)해서 저들의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가 되었다고 뒤집어씌우고 있다.
저들의 딸년들도 배가 고프면 침략군(侵略軍)의 위안부(慰安婦)로 자원할 수 있다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어린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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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왜놈을 따라가고 있다)
어쨌든 순박하고 어리석은 우리나라 부모들은 정신대(挺身隊)에 가면 호의호식(好衣好食)에 월급까지 준다는 면사무소 조선인 노무계(勞務係) 서기와 친일분자인 동네 구장(區長)의 거짓말에 속아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피붙이들을 왜놈들의 ‘노리개’로 헌납(獻納)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상(生活相)과 ‘보국대’에 끌려간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딸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그리고 있는 이원수의 ‘개나리 꽃’을 감상한다.
‘보국대’에 끌려간 아빠가 빨리 돌아오시지 않으면, 언니를 따라 정신대(挺身隊)라도 가야할 어린 소녀의 운명(運命)이 너무나 아프게 그려져 있다.
개나리 꽃
이원수
개나리꽃 들여다보면 눈이 부시네
노란 빛이 햇볕처럼 눈이 부시네
잔등이 후꾼후꾼, 땀이 배인다
아가 아가 내려라, 꽃 따 주께
아빠가 가실 적엔 눈이 왔는데
보국대, 보국대, 언제 마치나
오늘은 오시는가 기다리면서
정거장 울타리의 꽃만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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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되새겨본다. ‘개나리 꽃’은 눈부신 ‘발견(發見)’으로부터 서두(序頭)를 시작하고 있다. ‘노오란 개나리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부신 햇빛을 보는 것처럼 그 노란 빛이 눈에 부시다는 감탄사(感歎詞)가 앞장을 서고 있다.
시(詩)는 이어서 잔등에 땀이 차는 것으로 봄날의 따뜻함을 전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눈 오는 겨울과 대비되어, ‘보국대(報國隊)’란 식민지 현실의 상처를 드러내다가 다시금 꽃으로 전이(轉移)되어 기다림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제의 압제(壓制)와 살인행위적 탄압(彈壓)에 초죽음이 된 이 나라 서민가정과 소박했던 그 들의 희망을 그린 민족적 절규(絶叫)라고 할 수 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의 여자 정신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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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당시의 왜놈들은 신문(新聞)마다 버젓이 위안부(慰安婦) 모집공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고(廣告)는 형식에 불과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4년에 미친 여자가 아니면, 우리나라 댕기머리 처녀(處女)들 중에서 왜놈들에게 몸을 바치기 위해 제몸을 팔 처녀가 있었겠는가.
모집광고(募集廣告)만 내놓고, 실제 로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회유하고 끌고 가서 충원(充員)하였을 뿐이다
위안부 모집 광고문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82F4B4D4ADDEC24)
그리고 그 시절 왜놈들과 간도 쓸개도 없던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은 페달을 밟으며(ペダルを踏んで)라는 가요(歌謠)를 만들어 전체 여성들이 부르도록 강요(强要)하기도 했었다.
이 가요는 1944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당시 일본의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고, 국민총동원령과 함께 발매된 전시가요(戰時歌謠)다. 즉 전쟁물자 생산에 남성들이 모자라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가요다.
작사 橫掘恒子, 작곡 定方雄吉, 노래 橫山郁子로 되어 있으며, 쇼와(昭和) 18년(1944) 1월에 富士音盤에서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왜놈말과 우리 말 가사를 함께 소개한다.
일본어 가사 |
우리 말 가사 |
ペダルを踏んで
町のそよ風、優しい風に
今日も元氣でペダルを踏んで
職場通いの軍國娘
花も笑顔も晴れゞしてる
銃は執ねど皇國の護り
女ながらもペダルを踏んで
行けば樂し心と心
燃ゆる瞳に朝陽も光る
職場々は違っていても
目指す心にペダルを踏んで
仰ぐ希望の朝、燒け空に
雲も輝く素敵じゃないか
朝のそよ風、明るい風に
今日も確りペダルを踏んで
行よ行きませう輝く道を
みんな東亞の乙女じゃないか
|
페달을 밟으며
거리의 바람, 다정한 바람에
오늘도 원기왕성하게 페달을 밟는다
직장 그대로 군국(軍國)의 여성들
꽃도 웃는 얼굴도 활짝 핀다
총은 잡으면 황국(皇國)의 수호자
여자라 해도 페달을 밟는다
가면 즐거운 마음과 마음
불타는 눈동자에 아침 햇살도 빛난다
직장들은 달라도
목표로 하는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다
우러러보는 희망의 아침, 불타는 하늘에
구름도 빛나니 근사하지 않은가
아침의 바람, 밝은 바람에
오늘도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가고 가서 빛나는 길을
모두 동아(東亞)의 여자들(乙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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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필자의 큰 외숙부님께서 일제의 보국대(報國隊)로 징집(徵集)되셨던 사연을 소개하면서 한 서린 파일을 덮고자 한다. 더 이상 계속 쓰면 글이 너무 길어 아무도 읽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필자의 큰 외숙부님께서는 소화 19년(1944년)에 외갓집 마을 구장(區長)이 “보국대에 가야한다”며 작은 외숙부님을 강제로 끌어가자 동생을 구해내기 위해 대신 ‘보국대’를 자원하셨다.
일제(日帝)의 앞잡이였던 당시의 구장(區長)들은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눈에 벗어나면 가차 없이 누명(陋名)을 씌워 주재소(駐在所)나 경찰서(警察署)에 연행되게 하여 전기고문을 시키거나 뭇매를 맞게 했고, 평소에 비협조적(非協調的)인 인사들은 징용 1순위자로 분류하여 전선으로 끌려가도록 농간을 부렸다.
필자의 외갓집의 경우도 큰 외숙(外叔)은 그런대로 구장(區長)에게 협조적이었지만, 작은 외숙은 사사건건 구장과 대립하다가 마침 보국대원(報國隊員) 차출명령이 내려지자 1순위로 잡혀 간 것이다.
그러나 큰 외숙께서 동생 대신 자기가 ‘보국대’에 가겠다며 구장(區長)을 졸라 작은 외숙은 2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시고, 큰 외숙은 일본본토(日本本土)로 인도되어 ‘미사까’ ‘오끼미’ ‘덴노’ 등지를 전전하며 노역을 하셨다.
외숙께서도 가장 힘든 일이 배고픈 것이라고 하셨다. 식당(食堂)에서 밥풀이라도 하나 더 얻어먹으려고 한꺼번에 몰려가다 넘어져 다치는 경우도 많았고, 나중에는 주식(主食)인 ‘콩깻묵’도 없어 산에서 칡뿌리를 캐어 연명했다고 한다.
토목공사(土木工事)를 하다 죽는 징용자도 숱하게 봤다고 했다. 외숙 자신도 흙더미에 묻혀 죽을 번 하다가 겨우 구출(救出)되기도 했는데, 그 때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일생동안 허리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도록 노역(勞役)에 시달렸고,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몽둥이찜질이 다반사였다. 계약(契約)은 고용이라 했지만, 받은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어차피 사기극(詐欺劇)이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특별히 마음 상할 일도 없었고, 살아서 돌아온 것만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한 일이라고 하셨다.
당시 계약된 월급(月給)이 10원이었는데 2년 넘게 죽도록 일만 했는데도 한 푼도 못 받았다고 하셨다.
해방(解放) 직전까지 2년 동안 시멘트공장에서 벽돌 찍는 일을 했는데도 월급을 한 푼도 못 받고 돌아온 장정(壯丁)들도 있었고, 월급을 집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철석(鐵石)같이 믿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거짓말이기도 했다.
‘저승사자’와도 같았던 그때의 일제 앞잡이 면서기(面書記)와 ‘구장(區長)’이 다시는 이 땅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그 시절 일본군과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과 총칼을 맞대고 싸우던 독립군의 노래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대가(隊歌)를 음미한다.
광복군(光復軍)과 독립군을 토벌하던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이 일본천황(日本天皇)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부르던 일본군가(日本軍歌) “덴니 가와리데 후기오 우쓰”(하늘을 대신해서 불의를 친다)와 “성전(聖戰)을 위해서 싸우러 나가자” 대신 유일한 우리나라 군가(軍歌)였던 광복군노래를 게재하여 더러운 일제의 때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가 무슨 부대였는지를 모르시는 회원들이 많을 것 같아 해설(解說)을 포함시켰다.
광복군 제3지대가
장호광 작사.작곡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
태극기 밑에서 뭉쳐진 우리
독립의 만세를 높이 부르며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첩첩한 산악이 앞을 가리고
망망한 대양이 길을 막아도
무엇에 굴할소냐. 주저할소냐.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굳세게 싸우자 피를 흘리며
총칼이 부셔져도 열과 힘으로
원수의 무리를 소멸시키려
나가자 광복군 제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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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앞세우고 독립군을 향해 돌진하던 '왜놈'들의
앞잡이들은 한결같이 '장군'이 되고 '장관'이 되었지만,
'태극기' 앞세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싸워 온
광복군은 오히려 죄인취급 받으며 철저하게 매장되었고
그들의 자식들도 모두들 거렁뱅이와 무지렁이가 되었다.
위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지하공작대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BD7354D5D2006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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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하소설입니다. 보국 보고서입니다. 저도 보국대 얘기는 맣이 들었지만...이렇게 자세하게는 몰랐습니다. 정말 중요한 자료와 역사적인 얘기를 하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또 보고...전파하고 그래야겠네요.
좀퍼 갑니다.
일본!!!!!!!!!!!!!!!!!!!!!!!!!!!!!!!!!!!!!!언젠가는 !!!!!!!!!!!!!!!!!!!!!!!!!!!!
선배님 새배부터 먼저 올립니다, 자주 못들어와서 송구 합니다,저는 짬짬이 들어와서 아직 다 못읽엇지만, 엄청난 자료에 그놈들의 만행이 느껴지고, 제가 실제 부역도 해 봣지요,..우선 감동한 마음을 먼저 전하옵니다, 더 많이 읽혀지고 전파가 되어서 젊은이들이 대오각성 해야 된다고 봅니다,..선배님 항상 건강하시고 축복받는 나날 되시길 기원 합니다,
카페 출입은 여전하군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과찬의 말씀이고, 요즘 사위양반은 ‘아테나’에 출연하시더군요. 잘보고 있습니다. 신회장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사업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