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
- <포항문학> 올해의 시인 수상자 김현욱, 최 빈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이동호(시인)
1.
공교롭게도 두 시인의 시를 감상해야 하는 이 시점이 참 시끄러운 세상이다. 그러므로 시를 말하기에 앞서 시국(時局)을 잠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딱딱한 정치가 있다. 너무 딱딱하기에 이제 정치도 누군가의 시처럼 말랑해져야 한다. 민중의 눈물과 자연스럽게 섞여 말랑말랑해져서 ‘위대한 반죽’이 되어야 한다.
민중이 일어선 것은 일용할 ‘양식’ 때문이다. 김현욱이 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세상은 이미 딱딱하게 굳은 정형(定型)들로 가득 찬 피도 눈물도 없는 오후 네 시의 궁전”같아서,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촛불을 켜들고 주변으로 주린 정신을 끌고 나선 것이다. “정형(定型) 이전의 모든 것, 세상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말랑말랑한 반죽”으로 좋은 빵을 만들어 그 이전의 것들로 허기진 자신과 가족들의 공복을 조금이나마 채우고자 함이다. 그렇다고 썩은 고기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를 주고 아홉을 얻은 들, 그 한 가지가 우리가 일용할 양식(정신)과 관련 있는 것이라면, 나머지 아홉이 다 무슨 소용인가!
대선이 끝난 지 겨우 며칠 째인가? 민중의 심리를 포용하지 않은 정치권의 과도한 의욕은 고래로 종종 말썽이 잦았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최 빈이 자신의 시에서 말한 것처럼 이른바 늘 ‘처음을 앓’았었다. 오천만 민중들이 ‘느껴야할 슬픔이 처음의 밑바닥에 깜깜하게 붙어 있다는 걸 보게 된 날도’ 우리는 늘 ‘처음이었다.’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처음’들에게 배신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를 배반한 그 ‘처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그 숱한 처음들을 모두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밥도 없다. 나도, 우리도 없다. 처음이 있어야 중간과 끝이 있다.
정치도, 삶도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정치인도 민중 중에서 대표로 선출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것은 사람답게 대화로 풀 일이다. 민중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고, 정치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다. 최 빈의 시에서처럼 그것들은 서로가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버려지지도 않을 것을 억지로 버리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김현욱은 요즘의 젊은 시인 군(群)답지 않게 담백한 시를 쓴다. 말을 장황하게 꾸민다거나 대상을 일부러 비틀어 왜곡하지 않는다. 굳이 낯설게 표현하지 않아도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삶의 진정성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로 소외된 계층이거나 약자이다. 한때 그들에겐 ‘쌀 것 같았지만’, 마음껏 ‘쌀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 시절이 지나고 ‘뿜빠뿜빠 마음껏 쌀 수 있는 시절 온’ 것이다. 그러나 시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전히 세상은 ‘매스게임 연습하던 중3때’처럼 힘들다. 매스게임 하듯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고층 건물처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올라있다. 고분양가, 고세금, 고유가 등 현실은 여전히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런 현실을 견뎌내야 사는 서민들의 ‘거시기와 괄약근은 아직도 쓸만한가’ 모르겠다. 지금은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고 있다.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버려져선 안 될 것들이 한쪽으로 자꾸 버려질 때의 찝찝함과 어색함이 위화감을 넘어 ‘경악’으로 다가서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국체전 개막행사에 선보일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중 3때, 나는 하마터면 똥을 쌀 뻔 했지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던 체육부장의 입에서 10분 휴식, 이라는 말이 나오려던 찰라, 순시 나온 장학관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맹렬히 움직여야 했지 쌀 것 같았지만 쌀 수 없던 시절이었고 찔끔찔끔 지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뿐이었지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그 많은 중학생들의 거시기와 괄약근은 아직도 쓸만한가 몰라
경악, AV 500명 단체! 저 화면 속 여자들의 매스게임은 인류 대대로 내재되어온 동작들, 따로 연습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만 얼마나 일사불란 한가 쌀 것 같았지만 쌀 수 없던 시절이 지나고 뿜빠뿜빠 마음껏 쌀 수 있는 시절이 온 거지 어쩌면, 정말 경악스러웠던 것은 우리의 매스게임이 아닌가 화면 속 여자들이 퇴장 한 후, 베란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오오, 저 장관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밤의 매스게임들
―「거대한 밤의 매스게임들」전문
‘비유’가 형식이라면, ‘진정성’이란 내용이다. 촛불문화제를 주도하는 것은 운동권이 아니다. 일반 민중들이 촛불을 켜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생계가 심각하게 위협받기 때문이다. 김현욱이 자신의 시에서 많은 은유를 걷어낸 것은 결국 시가 촛불인 까닭이다. 작금의 시가 다시 리얼리티를 살려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적 필연이다. 다시 리얼리티를 말할 수 있다니 그의 표현처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지만, 이것은 역시 걷어내야 할 것이 많은 이 시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시대가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중앙이다. 특히 현 정권은 (자신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지방이 느끼기에는) 철저히 지방을 배제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지방은 버려졌지만, 특히 현 정권은 지방에, 주변에, 가난에, 노동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위정자들이여, 지방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 촛불을 켜고 궐기해야할 자들이 ‘학연혈연지연 없어도 / 긴 세월 더불어 살아 온 인연(因緣)으로 / 텅 빈 대천리 꼿꼿하게 지키고 섰’는 어르신들이지만, ‘농번기’라 그들에겐 아직 촛불을 켜 들고 거리로 나설 시간이 없어 보인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대천리 과수나무로 살아온 지
수십 년이나 되었지만
마을 앞 대형버스
대천리 어르신들 단체로
원가계도 아니고 장가계도 아니고
청도 경찰서 수사계로 관광 가는데
관광버스 속으로 주렁주렁 딸려 들어가는
어르신들 바라보고 있자니
말로만 듣던 사람 잡는 과수나무
있기는 있는가봅니다
농사군은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고
무슨 열매 과순가 싶어 덜컥
받아 심은 것이었겠지만 한평생
과수농사로 살아온 깜냥에도
날벼락 같은 신품종 선거사범
줄줄이 열릴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버스가 떠나자
수군거리는 과수나무들
한 눈 팔아 서운해도 해거리는 안 된다며
학연혈연지연 없어도
긴 세월 더불어 살아 온 인연(因緣)으로
텅 빈 대천리 꼿꼿하게 지키고 섰습니다
―「과수원 통신」전문
그는 이 시에서 최소한의 비유만으로 시대의 촛불을 환하게 켜놓고 있다. 얼마 전 대선이 있었다. 대천리 어르신들께서 후보자들의 참모들에게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대천리 과수나무로 살아온 지 수십 년이나 되’신 분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한 평생 과수농사로 살아오신 깜냥’밖에 없는 분들 아닌가. ‘농사군은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고’ 아무 것도 모르고 ‘부정(不正)’이 아니라 그 ‘마음’을 ‘덜컥 받아 심은 것’ 뿐이다. 한 평생 땅을 지키며 사신 분들이라 관광버스를 타고 즐겁게 관광을 다녀오셔도 모자랄 분들이, 선거사범으로 경찰서로 줄줄이 ‘관광’을 가셨다니,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이 분들 역시 촛불을 들고 거리를 활보해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천리 어르신들은 촛불을 켜고 최소한의 항거조차 할 여유가 없다. ‘한 눈 팔아 서운해도 해거리는 안 된다.’ 어르신들께 ‘해거리’는 법보다도 두렵고, 빚보다도 무섭다. 어르신들이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과수나무들이다. 어르신들께 터전이란 운명이다. 그래서 선거사범으로 줄줄이 경찰서를 가는 것조차 ‘관광’인 것이다. 비록 현대 도시 문명의 변두리에 자의든 타의든 버려져 있지만, 잠시 다녀와서 또 ‘텅 빈 대천리’를 ‘꼿꼿하게 지켜’나가실 어르신들이야 말로 세상의 중심이 돼야할 분들이시다. 더더구나 버려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분들이시다.
여기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닌 것이 또 있다. ‘세상에 별의별 반죽 다 있지만’,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반죽이다.(「아버지 반죽」), 한때 그는 극단 ‘가족’의 대표로 ‘건전한 가정극을 공연해 오며 / 딸아이의 첫 생리를 축복하거나 / 결혼기념일을 꼬박꼬박 챙기는 가장역을 오랫동안 했었지만’ 지금은 ‘혜화동 지하도 바닥에 엎드려’ ‘1인극’을 공연하기도 하고(「1인극 전성시대」), ‘한 달 째 철탑 꼭대기에서 / 신대륙을 찾아 /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끝을’ 잘 허락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바다’를 헤쳐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철탑위의 콜럼버스」)
어려운 시대를 겨우겨우 견디고 있는 민중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말랑말랑한 것’이거나, ‘희망’이거나, ‘정규직’이거나 ‘사랑’이거나 ‘영양제’이다. 그런데 누가 ‘고로쇠나무가 그토록 연모하던 / 산목련을 겁탈했’나?, 누가 ‘제노비스’의 ‘웃옷을 찢고’, ‘꽃무늬 팬티를’ 벗기고, 끝내 ‘죽음에 가닿’게 했나?(「제노비스의 뮤지컬」)
정치가 지나간 자리에 ‘죽음만 무성’해서는 안 된다. 정치도 사람이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게 ‘촛불’을 주어야 한다. ‘촛불’을 주지 않기에 스스로 초를 찾아 불을 밝힌 것이다. 지금 민중이 촛불을 켜 든 것은 위정자들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 / 세상을 향한 분노와 광기를 가르쳐 준’ 것들을 ‘한 없이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다.(「산불」) 우리 민중은 아는 것이다. 정치 또한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김현욱은 젊다. 그런 그가 소소한 것이나 이상적인 것이거나 화려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가난’으로 ‘소외되고 버려진 작고 소박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이는 그가 문단의 최전방에 서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것은 중앙에서 버려진 지방에 사는 문인으로서 느끼는 기대심리이거나 동병상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지방에서 분연히 일어나 치열하게 다져온 시력을 무기로 언젠가 중앙을 ‘무장해제’시킬 날을 기다려 본다.
역시 지방문단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김현욱과 같은 단단한 시인들이 시를 촛불처럼 켜들고 앞으로 또 앞으로 자꾸만 진군하는 것만 봐도 안다.
3.
여기 중심을 향해 진군하는 또 한 명의 전사가 있다. 최 빈이다. 그 또한 촛불 대신 시를 꺼내들었다. 그에게 시는 장난감이 아니라 무기다. ‘지구의 둥근 자전이 끊임없이’ 그를 ‘처음으로 옮겨놓’는다. 그래서 믿음직하다. 그는 절대로 초심을 잃지 않을 테니까. 그는 지금 치열하게 ‘처음을 앓’고 있다. ‘처음’이 없이는 끝이 없다.
처음이라는 말이
오래된 신발처럼 좋았다
맨질맨질 바닥이 다 닳을 때까지
처음이라고 고집 부린 적 있다
천 명의 아이들이 느낄 법한 슬픔이*
처음의 밑바닥에 깜깜하게 붙어 있다는 걸
보게 된 날도 나는
처음이었다
지구의 둥근 자전이 끊임없이 나를
처음으로 옮겨 놓았다
언젠가는 정말 처음일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깍 끊어지는 전화소리를 들을 때나
돌아서기도 전에 철컥 대문이
잠기는 소리 들을 때면 그랬다
처음을 의심하는 건 못된 습관이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 준 이후로 나는
날마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슬픔을 맛볼 즈음엔
또 다른 사랑이 처음으로 왔다
한 처음을 생각하는 지금,
그 숱한 처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을 앓는 여자-알츠하이머」전문
‘천 명의 아이들이 느낄 법한 슬픔이 / 처음의 밑바닥에 깜깜하게 붙어있다’. 그러나 이 ‘처음’을 앓아야 단단해지는 것이 있다. 최 빈은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그것이 오직 그것뿐이겠는가.
우리는 너무 결과에만 목매다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을 자꾸 의심하게 된다. 여튼 ‘처음을 의심하는 것은 못된 버릇이다.’ 우리가 그동안 만나왔던 ‘그 숱한 처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뻔한 질문이다. ‘처음’에 대한 이 시행착오가 오늘의 이 현실을 만들어 왔다. 그렇듯이 현실에 대한 고민들이 ‘처음’이 되어 다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민중들이 촛불을 켜든 것은 보다 나은 ‘처음’을 위해서다. 미래를 위해서는 역시 지금이 ‘처음’이어야 한다. 나라가 시끄러운 것은 ‘처음’이 ‘처음’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음’이 지난 후에는 또 다른 ‘처음’이 오기 마련이다. 오직 ‘처음’이야 말로 진리요, 영원하다. 이 처음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도저히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죽음 또한 새로운 ‘처음’이라 말하겠는가. 이 ‘처음’이 있기에 ‘버려진 것이 저토록 편안히 웃을 수 있’다.
버려진 것이 저토록 편안히 웃을 수 있다니요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사람만이 아닌가 봐요
내 어깨 위에선 수녀님 두건처럼 반듯하던 옷이
헌옷 사이에선 맨발에 슬리퍼 끌고 가는 아줌마의 뒷모습
딱, 그거예요
무엇이든 포기한 다음 날은 편안해지나 봐요
저 옷도 한 때는
스카프 두른 아침이 되거나
근사하게 커피 마시는 저녁이 되고 싶었던 적 있었을 텐데요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저도 알까요
내가 버리려했던 것이
나였다는 걸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걸까요
버려진 것이 저토록 편안히 웃을 수 있다니요
―「나는 어제 헌옷을 버렸다」전문
다시 말하지만, ‘버려진 것이 저토록 편안히 웃을 수 있’는 것은 ‘처음’이 있기 때문이다. ‘맨발에 슬리퍼 끌고 가는 아줌마의 뒷모습’도 ‘처음’에는 ‘앞모습’이었다. ‘앞모습’과 ‘뒷모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느 한쪽 없이는 존재 가치가 없다. ‘내가 버리려고 했던 것이 / 나였’듯이 우리가 버리려고 했던 작금의 ‘현실’ 또한 우리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이 앞모습이라면, 우린 ‘뒷모습’이기 때문이다. ‘포기’란 ‘양보’와 닮은 얼굴이다.
어떻게 하면, ‘버려진 것이 저토록 편안히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위의 시속에 정답이 있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면 된다. 촛불과 열정이 닮은꼴이 듯이 국가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는 사람과 ‘동전의 양면’이다.
집단행동도 그 양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축제 같다. 이름도 정감 넘치는 ‘촛불문화제’다. 어떤 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소풍 가듯 참석하고, 또 다른 이들은 유모차를 앞세우고, 웃음을 앞세운다. 우리는 그저 ‘웃는다’. 웃음의 정체가 해학이든 풍자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제 ‘저항’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606호에’서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더라도(「그들은 모두 우수아이로 갔다」), ‘죽음이 살에 닿는 순간’(「죽음은 따뜻했을까」이 올지라도, ‘온전한’ 희망 ‘한 송이 피우’기 위해(「소양증」), ‘고단함’과 ‘권태’와 ‘흐느낌/ 그 아래에서’ 이 웃음은 끊임없이 ‘확산’될 것이다.(「정상인을 위한 휠체어」). 최 빈이 ‘죽음조차 따뜻’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의문문이 아니다. 비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으로 떠돌지라도 목적한 바를 이루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웃음은 버려진 것들을 중심으로 모으는 힘이 있다. 웃음은 버려진 것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웃음이 가려질까봐 촛불을 들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함께 모여 웃으니 놀랍게도 중심이 이동했다. 이전까지 나라의 중심이었던 대통령은 허겁지겁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최 빈의 말처럼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질수록 더 웃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버리려고 하는 그들이 우습지 않은가 말이다. 사필귀정이다. 웃다 보면 어느새 세상은 웃음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떤 젊은 시절을 최 빈은 보내온 것일까? 살아오면서 그가 터득한 ‘웃음’은 현실에 대한 달관 같기도 하지만, 다채로운 감정이 섞여있는 복합적인 웃음이다. 그러나 버려진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그의 웃음도 좀 더 뚜렷해 질 거라는 것을 믿는다.
4.
중앙에 의해 많은 것이 버려진 포항 문단이지만,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김현욱, 최 빈 두 시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김현욱은 시의 껍데기를 걷어내고 그 알맹이만으로도 시가 나아갈 방향을 잘 찾아 제대로 걸아가고 있었고, 최 빈은 바쁘고 다채로운 현실 속에서도, 또 독자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시가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임을 증명했다. 화려한 시들이 많겠지만, 어떤 질료와 색채에도 동화되지 않고 꿋꿋하게 촛불을 켜들고 한길로 걸어 나가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시인에게 있어 시는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숙명이 현실 속에서 버거울지라도 웃을 수 있는, 올해의 시인을 넘어 영원의 시인이 되길 바란다. 비로소 포항문단이 시로 중무장한 젊은 두 시인을 문화 전쟁터의 최전선으로 보내나니, 이제 한국문단이 이 두 전사들에 의해 개편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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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 경북 김천 출생, 2004년 [매일신문]에 시로, 2008년 [부산일보]에 동시로 등단했다. 2007년 제 7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고, 현재 부산 신라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메일은 ychang235@hanmail.net이다.
첫댓글 시인에게 있어 시는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숙명이 현실 속에서 버거울지라도 웃을 수 있는, 올해의 시인을 넘어 영원의 시인이 되길 바란다. 밑줄 긋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