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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3-1편] 현재에 집중하라 | 영원한 현재만 산다.(28:15)
(p.28)
< ①진정한 '존재' 상태란 어떤 것인가요?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자리합니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지만 모든 생명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②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
③생각이 정지되었을 때만 그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 충만하고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의 헤아림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④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 * * * * *
(00:01~05:00)
톨레의 책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보겠습니다.
28페이지 보겠습니다.
① < 진정한 존재 상태란 어떤 것인가요?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자리합니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지만 모든 생명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 - 톨레 -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나는 누구냐?' 할 때
'작은 나'는 뭐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인데
'큰 나'는 생명이다 이거죠.
생명이 지금 우리한테 깃들어 있는데
실제로 누가 살아가는가? 할 때,
우리들은 '내'가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거는 생각이고
실제로는 '생명'이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눈 뜨는 게 마음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이 '생명'은 나 개체 하나가 나고 죽는다고 해서
이 생명이 영향받지는 않는 거죠.
그러니까 이 생명은 일종에~
예전에 생명과학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 생명과학 하시는 분이 부르기를 '온생명'이라고
생명에는 '온생명'이 있고 '낱생명'이 있다고
그렇게 비유를 했어요.
그래서 '온생명'은 '본질'이죠.
'낱생명'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하나의 커다란 생명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낱생명'들을 태어나고 죽게 함으로써
- 그 사이클을 계속 이어감으로써
'온생명' 자체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을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누구냐?' 할 때
동시에 두 개의 '나'가 있다고 할 수 있죠.
'낱생명'으로서의 '나'가 있고
또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온생명'으로서의 '나'가 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은 '낱생명'의 '나'만 알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통해서 '온생명'을 안다.
불교에서도 이 '온생명'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톨레도 지금 '영원한 생명'이라고 따옴표 해놨잖아요.
'영원한'이란 말은 '무량'(無量) 양을 잴 수 없다.
생명이란 말을 목숨 수자를 써서 무량수(無量壽).
무량수, 인도 말이 아미타.
그니까 영원한 생명을 불교에서는 아미타,
기독교에서는 성령이라 그럽니까?
영원한 생명,
그렇게 해서 무량수, 아미타불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죠.
이것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게 하나의 신비예요
신비다 이 말은
나는 낱생명이면서 동시에 온생명이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의 파도 같은 건데
이 파도가 파도이면서 동시에 물이잖아요.
이 물은 나눌 수가 없는 바다 전체가 물이다 이거죠.
그 거대한 바다에 수많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모습하고 같다고
가장 많이 들은 비유가 그거예요.
그러니까
파도는 '낱생명'이고 이 바다는 '온생명'이다.
항상 우리는 그렇게 입체적으로 자기를 봐야 돼요.
그래서 뭐 가끔 소개드립니다만
그 어느 절에 가는데 절 벽에다가
"지금 이 순간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는 거지만
동시에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다.
그런 걸 자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훨씬 더 큰 존재하고 맞닿아 있다.
우주 전체 생명하고 맞닿아 있다.
이런 말 나올 때마다 써야 되지요.
"Now, Life is living you!
이렇게 어느 절 벽에다가 이렇게 써 놨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한순간 그걸 보고 이렇게 느끼라고~
(05:01~10:00)
'Now' 지금 이 순간,
'Life is living you!' 생명이 당신을 통해서 살고 있는 거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개체로서의 온갖 문제가
어느 순간 '온생명 입장에서는 꿈과 같은 거죠.
그래서 순간적으로 우리가 의식이 확장되면서
아, 나는 낱생명으로서만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온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는 걸 자각을 하게 되면,
낱생명의 문제는 훨씬 더 무게가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이제 동시에 어떤 사명이 생기느냐면,
만약에 지금 이 순간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사는 거라면
그 생명은 나를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나고 싶을까?
다시!
온생명이 수많은 낱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데
근데 그걸 자각을 못하면
낱생명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면 살 거 아니에요.
근데 이걸 자각하게 되면
온생명이 지금 이 순간
나를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나고 싶을까 하는
그런 약간의 뭐라 그럴까~
부모 자식 같으면 자식이
부모가 나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으면 좋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그런 식의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어서
지금 이 순간에 이 나라고 하는 낱생명을 통해서
온생명은 무슨 일을 하고 싶을까.
지금 저 같으면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같이 이 말을 나누는 것이
지금 톨레 교재를 통해서 온생명을 생각을 하고
온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통로로서의 나.
그러면 내가 일으키는 한 개 마음이
온생명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이 될 거 아닙니까 그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제가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입을 열어서 말하는 이것이
개인이 말하는 게 아니고
온생명이 저를 통해서
하나의 지혜로서 나오고 있는 요 저의 마음,
저의 마음을 통해서 온생명이 나오니까
지금 저한테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이 문수보살이라는 거죠.
문수보살이 따로 어디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한 생각 지혜를 일으키면
그 지혜의 마음이 문수보살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또 지금 여러분하고 함께 있으니까 좋네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 우리가 마음 하나 일으키는 것이 보살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이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에 따라서
관세음보살이 출연할 때는 이 세계가 자비의 세계가 되고
문수보살이 나를 통해서 출연할 때는 이 세계가 지혜의 세계가 되고
한 생각,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악한 세상이 되고
한 생각, 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바른 세상이 됩니다.
안 그런가요?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찰나 밖에 없잖아요.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잖아요.
이 순간 내가 일으키는 마음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 이거예요.
지금 굉장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런 자각이 우리한테서 일어나면
순간순간이 내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살고 있는,
그니까 어마어마한 존재죠.
그리고 이 세상을
관세음보살이 일으켜 가지고 관세음보살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문수보살이 일으키면 문수보살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그것이 누구한테 달렸는가?
지금 이 순간 나한테 달렸다.
책 제목 보셔요. The Power of Now!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에 따라서
세계가 결정되는 거죠.
그러니까 참 알고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니까 이렇게 온생명을 모르고 살 때는
그 겨우 낱생명이 자기 이익에 따라서
자기 탐진치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 밖에 없는데,
한 인간이 각성을 일으키고
그 각성을 통해서 온생명을 자각을 하게 되면
나를 통해서 온생명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순간에도.
그러면 내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가에 따라서
그 마음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거죠.
매순간 매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보살이에요.
(10:01~15:00)
우리들은 이 세상에 보살을 나투게 하는 그 주체니까.
내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할 때 알고 보면
영원한 생명,
아미타, 무량수, 영원한 생명.
이 영원한 생명이 한 생각,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게 관세음보살이니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항상 우리가 일으키고 있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딜 가든
내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평화가 있느냐, 전쟁이 있느냐 이게 결정되니까.
우리가 매 순간 세계를 창조하면서 살고 있다.
어떻게?
한 마음을 일으키는 거에 따라서~
그러니까 그런 영원한 우리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 *
돌아와서 텍스트에서
② <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 - 톨레 -
그러니까 지금 지금 당장, 여러분!
온 생명이 항상 같이 있어요.
우리한테는 이 무량수, 아미타불이, 온 생명이 항상 같이 있어요.
언제나 같이 있어요.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깨어 있으면!
방법은 정말 간단한 거죠.
깨어 있으면!
깨어 있다.
왜냐, 왜냐?
생명의 본질은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생명하고 의식은 완전히 같은 말이에요.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의식이 있고,
또 의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어요.
여러분!
지금 요 몸둥아리가 의식 나가면 생명 나간 거예요.
그렇죠.
의식 나가면 생명 나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의식이 생명이라서 항상 이렇게 있어.
그러면, 내가 나의 생명이 온전히 발휘하게 하려면
내가 지금 이 순간 의식적이냐?
의식을 놓치면 무의식적이냐?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차이는 뭐냐 하면
안팎으로 안은 내 마음, 밖은 이 세계(라 할 때)
안에서 생각, 감정 같은 그런 것이 일어날 때
'의식적이다.' 이 말은 그거를 알아채고 있다는 거지.
일어난 것을 보여집니다. 의식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보고 알아챈다 이거야.
보고 안다. 보고 안다.
그리고, '밖에서도 지금 비가 오는구나,'
'지금 아침이구나.' 이런, '지금 법회 시간이구나.' 이런 걸,
우리가 보고 안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 보고 아는 작용이 의식의 작용이니까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다, 내가 의식적이다
이 말은 안팎으로 보고 알고 있다.
보고 알면
보고 아는 일어나는 현상과, 보고 아는 본질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거리가 생겨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자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근데 지금은 보통 사람들은 어떤 상태인가?
안팎으로 생각, 감정이 일어나면 그걸 보고 알아야 되는데,
보고 알려면 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보통 사람들은 지금 거리가 없어서 거의 붙어가지고
생각, 감정이 일어나자마자 같이 휩쓸려버리는~
그냥 떠내려가 버리는~
생각은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그 생각에 거의 휩쓸려서 살고 있는~
그 생각은 반드시 또 몸에다가
생각이 몸에 일으키는 에너지가 감정이거든요.
그러니까 생각은 또 감정을 일으키니까
생각, 감정에 거의 휩쓸려 가는~
그래서 고통의 세계를~
우리 의식의 흐름, 생각의 흐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홍수 난 것처럼 격류를 이루고
흐르고 있는 거죠.
보통 사람은 그런 상태라서 마음이 시끄러운 거죠.
그러니까 마음 잘 날이 없는 그런 상태를 무의식 상태라면
그런 상태를 살 수밖에 없다.
의식 상태에서는 그것을,
그 격류를 내가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죠.
의식 상태에서~.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깨어 있느냐, 깨어 있지 못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의식 상태냐, 무의식 상태냐?
불교적으로 말하면 의식이 곧 광명이거든요.
불교에서는 의식을 광명이라 그래요.
(15:01~20:00)
의식에 대한 정확한 이름이, 여러분 해인사 가시면,
해인사 본당 이름이 뭐냐면
해인사 본당에는 부처님이 수인을 요렇게요
요렇게 딱 하고 계세요.
『 *수인4 [手印] (다음사전)
[불교] 제불 보살(諸佛菩薩)과 제천선신(諸天善神)이
그 깨달음의 내용을 두 손으로 나타내는 모양.
8만 4천 가지가 있어 각각 깨달음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다.
사찰에 모신 부처가 누구인가는 대체로 수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요게 비로자나불이라고 해서 법신불의 모양이에요.
'하나다.' 이거예요. '손 두 개가 하나다.' 이거예요.
그니까 법신불은 항상 불이(不二) 상태, 연기, 중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계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계신 분이 비로자나 법신불인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이런 식으로 표현하죠.
근데 그분이 이름이 대적광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본질을 대적광! 그래서 그 전각의 이름이 대적광전이에요.
해인사 본당의 이름이 대적광전(大寂光殿).
그러면 그 부처님의 이름이 대적광이다.
"대"는 크다, 모양이 없다, 크기가 없다, 그런 뜻의 '크다', '마하'죠.
"적"은 고요할 적자죠. 이때 "적"이라는 말은 생각이 고요하다.
이거 의식의 이름이 "대적광"
의식은 항상 빛이에요.
"대적광", 크고 고요한 빛!
여러분,
크고 고요한 빛이 지금 우리들의 깨어 있는 이것.
이걸 가장 그냥 흔히 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 대적광
그러니까 의식 자체를 의인화한 것이 법신불이다.
지금도 이 순간 여러분이 보시는 것은
여러분의 의식의 빛을 보는 거예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보자마자 그려내는
우리의 의식한 이미지를 보고 있는 거예요.
아 지금 과학적으로 제 말이 맞는 거예요.
이 세상은 다 입자예요.
근데 이 입자를 입자 모양으로 보는 게 현미경으로 보는 입자예요.
근데 우리가 지금 입자를 입자로 보는 게 아니고
지금 다 칼러가 다르고 질감도 다르고 다 다르게 보이잖아요.
그거는 벌써 우리 안에 있는 이 본질인 의식인 아미타불이
이렇게 이렇게 그려 가지고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걸 찬란하게 그려 버리죠.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진,
우리 안에는 어마어마한 부처가 지금 앉아서
이 모든 것을 보자마자 이렇게 그려내는,
얼마나 아름답나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죠,
얘가(책상 위에 작은 화초를 가리키며) 또 묵향이 향이 또 있거든요 .
그럼 그 향의 입자는 정말 미립자일 텐데
이거를 그런 향으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맡잖아요.
그 모든 것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부처가
우리 안에 있는 자성 부처가 이걸 하고 있는데
그걸 까마득히 우리는 모르고 그냥 넋 놓고 산다 이거예요.
홀린 듯이 자기 이익에 따라서
탐진치 대로 그냥 흘러가는 삶이다.
여기에 각성이 일어나면 이것이 깨어나고
우리들의 본질이 깨어나고,
깨어나면 자기가 자기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 낱생명이 아니고 온생명이고
이 온 생명은 언제나 영원히 현재에서만 존재해요.
그니까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것은 영원한 현재밖에 없어요.
근데 지금 우리가 분별심을 일으켜서
과거를 기억해 내고 미래를 상상해서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을 창조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분별심이 또 매트릭스 세계를 만들어 놓고
지금 거기에 빠져서 사는 거죠.
실제로는 영원한 현재밖에 없는데
그 실제 온생명한테는 영원한 현재밖에 없는데
우리가 지금 하여튼 언젠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거 아니에요?
언젠지는 모르지만 이 분별심한테 사로잡혀 가지고
분별심이 그려내는 매트릭스 세계에 우리는 빠져서 살고 있다라고
또 비유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매트릭스가 꿈과 같다는 거예요.
거기서 깨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꿈에서 깬다.' 이런 말들은 우리 분별심으로 그려놓은 세계
그니까 이 분별심을 다른 말로 하면 '분리감'이에요.
지금 공부의 가장 핵심은 분리감의 극복이에요.
( 20:01~25:00 )
그래서 지금 여러분께서
‘나’와 ‘남’이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있으면,
그런 분리감이 있으면,
그거는 지금 분리감의 세계에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공부가 익어서 계합이 된다.’ 이 말은
결국 공부는 계합이 되어서 완성이 되는데,
‘계합’, 이거는 다른 게 아니라,
이 세계가 한 덩어리로 다 원상복구를 한다. 이거죠.
실제로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고,
실제로 있는 공간은 지금 여기밖에 없고.
제가 말하는 지금 여기는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의식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그것밖에 없는데,
우리가 지금 자기도 모르는 분리감에 빠져서,
분리감이 일으키는 생각이 만들어낸 세계,
생각은 또 언어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실제 세계를 사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언어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걸 매트릭스라고,
영화의 모티브가 매트릭스인 거든요.
사람들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깨어나는, 실제 세계로 깨어나는,
그게 지금 우리들의 공부고,
그 모든 것의 핵심은 뭐냐?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는 이 자각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하고,
우리의 이 의식이 분별심에 속아서 분별의 세계로 떨어져 있던 것을
돌이켜서 지금 이 순간으로만 가지고 오면,
지금 이 순간에는
생각, 그리고 생각의 배경인 분리감이 따라 들어올 수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 현재의 자각,
현재의 자각을 현존이라고 톨레는 부르는데,
이 각성, 혹은 의식, 혹은 현존, 자각,
그러니까 요 상태,
요 상태의 핵심은 뭐냐 하면,
현재라고 하는, 지금 거기에 달려 있어서,
우리가 어떤 명상을 하든 현재로만 돌아오는 것이
그게 명상이에요.
명상이 뭐냐 그러면,
현재에서 나가서 분별 속에 떨어진 의식이 현재로 돌아오는 게
명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현재로 돌이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느냐 하는 방법은 다양하죠.
호흡에 집중한다, 뭐 여러 가지.
뭐, 왜냐하면 호흡에 집중하는 것도 훌륭한 명상인 이유는
호흡은 항상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그래서
생각에서 벗어나서 현재로 돌아오기.
요게 지금 모든 명상의 근본이어서,
여러분께서 그 원칙 하나만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시작하면
인생은 변하는 거예요.
제일 중요한 것은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톨레 이 책의 어느 대목을 봐도
방금 제가 한 그 말의 반복이에요.
‘현재로 돌아와서 깨어 있자,’ 그거의 반복이에요.
관건은 뭐냐? 하느냐, 안 하느냐!
근데 우리들의 지금 머리는 무엇이 점령하고 있어요.
보통 사람들의 머리는.
그래서 ‘무엇이 점령한다’ 이 말은 뭐냐면 빨리 까먹게 해요.
무의식 상태, 이거는 까먹은 상태.
그러니까 잠시 깨어 있어도
습관적으로 다시 무의식 상태로 빠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우리 정신의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래서 하여튼 자주자주
무의식 상태에서 벗어나서 깨어 있는 시간을 가지기.
* * *
언제 본질을 만나느냐?
③ <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고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 > - 톨레 -
지금 이 말 이해되세요?
그런데 이것이 내 의지적으로 잘 안되죠.
의도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게 강렬하게 깨어서 집중하는 게
잘 안 되죠?
그렇지 않나요? 잘 안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어떤 장치를 통해서 계속 몰아 집중을 계속 몰아가서
정말로 오로지 집중될 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도인’ 이런 말 하잖아요
그 ‘도(道)’라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정신이 온전히 집중되었을 때
이 본질이 드러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거예요.
스포츠 선수들이 ‘존에 들어간다!’ 그러잖아요.
‘존에 들어간다!’ ‘그분이 오셨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도’다 이거예요.
(25:01~28:15 끝)
모든 것이 순수한 집중을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이 집중을 반복해서 내가 터득해 놓느냐!
그럼 한번 터득하면 무슨 일이든
그 집중을 접목시킬 수가 있다.
그러니까 도(道)는,
하나에 도통한 사람은 모든 일에도 도통할 수가 있다,
뭘 하더라도.
결국에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 다 통일된다.
그러니까 지금 톨레 같은 경우는
우리가 지금 궁도 배우고 뭐도 배우고 할 수가 없으니까,
일상에서 현재에 깨어서
현재에 자각하는 힘을 자꾸 집중함으로써
결국에는 이 '도'를 이룰 수 있다.
그게 이 책의 내용이에요.
* * *
④ < 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톨레 -
오로지 '있다' 이것은 현재에 있는 거예요, 현재에 있다.
현재에 있다, 있음, 영어로 Be.
있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러분,
존재가 Be잖아요, Be 동사, 존재하다.
Be 동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지금 내기 있음의 상태에 딱 집중해 깨어 있으면
요 깨어 있는 있음은 계속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하는데,
요 있음의 자각이라고 하는, Be라고 하는 것만은 안 변해요.
그래서 요 Be는 계속 자기 동일성이 유지돼.
그러니까 지금도 지금이고, 지금이고, 지금이고,
그래서 Be는 언제나 ing 상태다.
그래서 존재를 영어에서는 'Being'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ing가 붙는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Being이라고,
진실되어서 여여하다, 변하지 않는다.
항상 이 현재는 영원한 현재예요.
요게 참 재미있잖아요?
현재는 찰나(刹那)인데,
문제는 그 찰나가 영원한 찰나다 이거예요.
계속 계속 그거다 이거예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이 존재, Being.
그러니까 요기 요 상태에 우리가 깨어 있는 거.
그리고 요 상태에 익숙해지는 거.
Being 상태에서는 나는 없지요? 생각이 없으니까.
Being 상태에서 나는 없다.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없다, 무아(無我)다.
그러면 무엇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온생명이 나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거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신이 '나'라는 'Be'를 통해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 Being의 느낌,
그 느낌에 내가 머무르는 것이 깨달음의 상태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 앎에
내가 지금 생각에 빠져 있으면 현재에 있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생각 속은 항상 과거 아니면 미래니까.
생각에서 벗어나서
현재에 또렷하게 이렇게 딱 깨어 있는 고 상태,
그걸 자각하면서 그 깨어 있음이 유지되는 상태,
그게 깨달음의 밝은 깨달음의 상태다.
요 말이 저한테는 뭐라고 들리느냐 하면
요게 진화두(眞話頭)예요, 진화두, 진짜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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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깨달았다는 인간은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 앞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
[ 지도사제 10.01.19. 18:30
하느님에 대한 "앎"은 끝이 없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오직 겸손된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에 귀기울일 때
당신의 신비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십니다. ]
아멘, 아멘, 아멘!
하느님에 대한 앎만이 참된 분별심의 참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참 겸손이라고 느껴집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관건은 뭐냐? 하느냐, 안 하느냐!"
결국은 가르침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모든 사제와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온생명'은 '본질'이죠.
'낱생명'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나는 낱생명이면서 동시에 온생명이다.
파도는 '낱생명'이고 이 바다는 '온생명'이다.
항상 우리는 그렇게 입체적으로 자기를 봐야 해요. >
사랑하는 아버지,
내가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내가 어떤 능력과 성향을 지닌 사람인지,
다양하게 만들어 놓은 허상을 나인양 자만하고 자책하며
잘난 척, 겸손한 척, 일어나고, 찌그러지며,
껍데기 만들기에 열심인 삶이었습니다.
저를 창조하시고 저를 사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 나니,
그토록 집착했던 모든 것이 실체없는 신기루임을 깨닫습니다.
생멸하는 현상과 형체없는 생각에 붙잡혀
영원을 구가하고 있었으니,
늘 부재에 대한 불안감과 공허감에 시달릴 수 밖에요.
거내영을 통해
온생명이신 저의 모든 것의 본질,
영원성과 무한성인 성령, 아버지의 사랑인
사랑받고 사랑하는 귀하디 귀한 저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파도와 물이 분리되지 않는 바다에 잠겨
물이 되기도 하고 파도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저 역시 아버지의 생명이 되어
일어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이끄심대로의 일상으로 이끌립니다.
< 지금 이 순간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살고 있다.
그 생명은 나를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나고 싶을까? >
생명이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지금 이 순간 저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여쭙니다.
오늘 아침 명동사무실 출근을 앞두고
오늘의 모든 것을 함께 하실 아버지께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쭈니
사무실을 거내영의 장미꽃밭으로 가꾸라 하십니다.
작은 발걸음이, 작은 숨결이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이 되기를
작은 장미로 피어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사무실을 가득 채우기를 소망하니
집을 나서는 작은 발걸음과 정류장의 눈덮인 소나무조차
생명이 창조해 가시는 거룩한 곳,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온생명이 낱생명을 온전히 사시는 거룩한 시공이 됩니다.
오늘 출근길엔 아버지께서 엔젤의 언어로
장미꽃 피워낼 시공을 많이도 축복해 주시네요.
< 한 생각,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악한 세상이 되고
한 생각, 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이 세계가 바른 세상이 됩니다.
< 이 순간 내가 일으키는 마음이 이 세계를 창조해요.
내가 이 세계를 창조하며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입니다. >
아멘!!!
아멘!!!
맞습니다. 아버지,
거내영을 통하여 환골탈태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세계를 창조하며 사는 어마어마한 존재임을
온전한 내맡김과 아버지기도를 살며 몸으로 체득해 갑니다.
아버지의 지혜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한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조금씩 때론 왕창 변모되어 갑니다..
아버지 뜻에 온전히 이끌리는
저의 사명이
저를 창조하신 목적이 실현되어 갑니다.
저를 온전히 드리오니
모래그림판의 화가 되시어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아버지의 손길 따라
성이 되기도 하고, 종탑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하고, 길가의 똥덩이가 되기도 하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 인간이 각성을 일으키고
그 각성을 통해서 온생명을 자각을 하게 되면
나를 통해서 온생명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랑하는 아버지,
너무나 부족하고 죄 많은 제가
내 뜻 안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 세상을 살면서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망극하여
가슴 벅찬 감사함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내 뜻이 죽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사시면
지금 여기에서 즉시 새하늘 새땅이 펼쳐지거늘
자신의 뜻 안에서 아버지의 나라를 구현하려 헛고생하는 이들을 보면
예전의 저를 보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 안에 살아 계신 아버지를
끊임없는 화살기도 안에 매순간 각성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여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저희들은
정말 아버지의 특은을 입은 찐복자들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저를 사시고 이끌고 계시니
저 또한 작은 사랑이 되어갑니다.
부족한 저를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드리오니
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