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하나의 학문적 영역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영역과 유사한 것과 다른 것을 서로 비교하며 검토해 보는 것이다. 검은색 바탕위에 흰점은 흰 바탕위에 하얀 점보다 그 본래의 흰점이 더 돋보이게 보인다. 이와 같이 오순절 신학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배경적 차원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같이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한국 보수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사상이고 오순절 신학과 많은 유사점도 있지만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차이점도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여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단편적으로 비교 나열하는 것으로 끝이지 않고 현 합동신학원 명예총장이자 한국 개혁주의에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신복윤 교수의 글1)을 하나 선택하여 오순절 신학의 입장과 비교 정리해보고자 한다.「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라는 그의 글 중에서 그는 개혁주의의 특징들을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과 성격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진다. 이에 그에 글에서 언급했던 개혁주의 신학의 네 가지 특징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그 주제에 상응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불어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 사이에서 크게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중생과 성령세례에 대해 알아보고 서로의 신학적 견해를 정리하면서 비교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정의
A. 오순절 신학(Pentecostal Theology)
현대 오순절 신학은 20세기의 여명이 밝아 오면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오순절 성령운동은 초대교회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성령이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2:1-4)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2) 이러한 초대교회의 오순절적인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오순절파 교회들은 현대에서 목회적 사역에서 더욱 더 빛을 발휘하고 있다. 1990년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다섯 교회들은 모두 오순절파 교회들이다.3) 이처럼 오순절 성령 운동은 현대 교회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최근에 와서는 이 오순절 성령운동을 단지 하나의 교회적 신앙 부흥운동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특성을 가진 체계적 학문으로도 정립해 보고자 하는 신학적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이 내재하고 있었던 신학적 요소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새롭게 확장된 의미로써 신학적 개념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조직화, 체계화 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오순절 신학의 다섯 가지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체험 중심의 신학 ②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는 성령세례를 강조 ③ 전인 구원신학에 나타난 신유를 강조 ④ 하나님의 대한 기존 신관의 변화로 좋으신 하나님을 강조 ⑤ 성령님에 대한 인격성 강조
요약해서 오순절 신학을 정의해 보면 성령의 인격성과 현재성, 그리고 성령의 선교적 능력을 강조하며,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별된 체험으로 인식하고, 성령세례의 첫 번째 증거를 방언으로 보는 신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오순절 신학은 신학적 체계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지 못하다. 아마 그러한 이유가 오순절 신학이 이론적 체계 보다는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더 강조하는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데서 기인하지 않았다 본다. 사실 오순절 신학의 태동 역시 어떤 한 사람의 탁월한 이론가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예언된 성령의 역사적 현현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앞으로 계속하여 오순절 신학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을 강조하는 살아있는 신학으로, 또한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고루 갖춘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참된 신학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B. 개혁주의 신학 (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는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 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 보다 몇 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5) 이 사상들은 조직적으로 조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때로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6)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일명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되는 기독교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은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된 공적 신앙고백들7)과 칼빈을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8)의 고전적 저서들을 통해서 발달되었다. 특별히 교회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건은 화란에서 일어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들간의 신학적 논쟁이다. 이 논쟁은 결과적으로 1619년 도르트 대회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안한 5대 조항에 반대하여 작성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① 인간의 전적부패 ②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③ 제한된 구속 ④ 불가항력적 은혜 ⑤ 성도의 견인(궁극적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9)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10)
Ⅲ. 개혁주의 사상의 네 가지 특성에 대한 오순절 신학의 입장
A-1. 개혁주의의 성경관11)
개혁주의에 기본적인 가장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12)
개혁주의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한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 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신적 권위가 있으며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無誤한 冊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3:16,17).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위해 주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13)
한편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에 의존할 필요 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명백성과 충족성(완전성)을 주장한다. 성경은 일반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기록되었으며 구원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A-2. 오순절 신학의 입장
오순절주의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을 받은 기록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임을 믿는다.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축자적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정확 무오하여 신앙과 행위에 절대적 권위가 있는 법칙으로 믿는다.14) 대표적인 한국 오순절주의자인 조용기 목사(이하 영산) 역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영산의 성서 영감설은 기계적 영감설(=축자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인다.15)
또한 오순절주의는 성경의 완전 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지지한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의미하는데, 성경기록자들의 사용언어와 자료, 사상과 개년까지도 성령께서 주장하시고 간섭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여 년간 미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을 역임했던 윌리엄스(Ernest Swing Williams)는 완전한 영감이란 충만하게(full), 온전하게(entire), 완전하게(complete), 그리고 절대적으로(absolute) 영감된 것을 말한다고 한다.16) 또한 오순절주의는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은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무오성이란 성경의 원본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기록된 원어상에는 전혀 틀림이 없다.17) 오순절주의와 개혁주의의 성경관은 거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나 개혁주의는 대부분 성경관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은 체험된 그룹의 공통된 정서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굳건히 믿고 둘째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두며 셋째로,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 삶과 역사 가운데 실제적으로 역사한다는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 신학이 성서에서 이탈한 신학이 아니라 어느 신학보다도 성서에 전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18) 오순절 신학의 준거는 성경이다. 그리고 오순절 신학은 성경을 기록된 문자로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성경의 말씀들은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이자 우리 현실의 삶에서 성령님을 통해 실제적으로 체험되고 경험할 수 있는 실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말씀은 영원한 현재이다(히13:8). 오순절 신학은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성경되게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위축되고 생동감 없는 영적 공동체 속으로 전달해주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
오순절 신학을 비난하는 자들 중에는 오순절 신학이 인간의 체험을 근거로 한다고 잘못 오해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체험은 신앙의 근거로써의 체험이 아니라 말씀을 온전하게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인한 체험이다. 오순절 신학은 성경 구절구절 하나를 죽어있는 문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영적 실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인 성경 주석학과 성경 해석학은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신학으로부터 통찰(insight)을 얻을 수 있다. 기존 이성 일변도의 성경 해석학에서 이제는 성령론적 시각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학 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요하네스 블라워(Johannes Blauw)는 “모든 참된 신학은 신학적으로 사변화하며 추상화하며 이론화하는 것과 싸우며 철학적인 변형에 의해 참된 성서적 동기를 대신하려고 하는 시도와 싸운다고 했다”19) 오순절 신학은 이성만 추구하는 관념적 신학이 아니라 영적 실재와 함께 삶의 현장에서 인격적 만남을 갖는 관계지향적인 신학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순절 체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서있다.20)
B-1. 하나님의 주권 사상21)
개혁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하나님 사상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이나 칭의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심리,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B-2. 오순절 신학의 입장
하나님의 주권은 조직신학 분야에서 신론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편히 상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22) 오늘날의 신론에 대한 논의는 삼위일체적이다.23) 오순절 신학의 하나님 이해는 삼위일체이다.24)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자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계획 가운데 섭리하고 계신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분성과 관계성, 독립성과 협력성은 통해 알 수 있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와 성경의 계시를 통한 특별계시와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25)
기독교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유사 종교와 다른 점은 기독론에서 갈린다. 기독론은 다분히 구원관과 연관되며 기독교가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기독론은 전통적 교리26)와 길을 같이 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오순절 신학의 기독론 이해는 성령론적 기독론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성령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였다면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론적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있다. 기독론적 성령론은 성령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의 사역을 돕는 다는 차원에서 성령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령론적 기독론에 있어서 성령의 이해는 구원 사역의 주체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모습이 강조된다. 또한 창조의 주체로서의 성령의 역할도 확장 되어진다. 그리고 기독론에 대한 인식도 좀 더 폭넓어질 수 있다. 그러 의미에서 성령론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이해를 체험적 습득의 차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본다.27) 이러한 기독론적 성령론이나 성령론적 기독론은 분리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28)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혁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신론(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강조점의 차이인 데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신학적으로 강하게 부각된 반면 오순절 신학은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권 사상에 관해 두 사상을 비교해 보면 개혁주의의 하나님 주권사상은 만물을 움직이는 주체 즉 주인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그 만물을 실제적으로 다스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이 될 수 있게 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이 자연계뿐만 아니라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시지만 그 법칙과 질서를 유지하게 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제적으로 주관하며 이 땅 가운데에서 현실화 시켜주시는 분은 성령님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 이해는 삼위일체를 강조하는 신 인식이어야 한다.
특별히 한 가지 첨가하여 언급한다면 영산에 대한 신 인식이다. 영산의 하나님 이해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의 좋으신 하나님의 이해는 기존의 심판적인 하나님의 이미지에 일대 변화를 주었다. 이 변화는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까지 파급되었다. 좋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신앙생활에 있어 참된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직신학적 차원에서도 대단한 변화이다. 신 인식에 대한 변화는 광범위하다. 그 중에서 구원관과 교회관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바로 서 있는 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구원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순복은 신학의 5대 신앙 중에 하나인 축복의 개념이 샤머니즘적이고 기복적인 물질로의 전향이 아닌 성서적이고 회개를 강조한 전인 구원적인 개념으로 확대된 것은 희망적 신학의 전개를 위한 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C-1. 불가항력적 은혜29)
개혁주의의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며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칼빈주의 5대 강령도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6:5, 렘17:9, 시51:5, 롬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子)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彼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1:21, 요10:14, 행20:28). 제한속죄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C-2. 오순절 신학의 입장
오순절 신학은 개혁주의와 같이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인간의 삼분설을 주장한다.30) 개혁주의 인간론에 대한 이해를 오순절 신학은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31) 한국 오순절자인 영산은 인간 이해를 인간의 영, 혼, 육의 전인적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본성을 영, 혼, 육으로 구조적으로 분할하지 않고 영, 혼, 육이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는 가운데 서로 통합된다고 한다.32) 즉 기능적 삼분설33)을 주장한다. 이러한 영산의 인간이해는 그의 전인적 구원관에 영향을 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을 통하여 성취된다고 본다. 즉 칼빈주의는 구원을 하나님의 사역에 의존하고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에 의존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은사의 일부로 간주하나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34) 오순절 신학은 인간 구원의 조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35)
오순절 신학의 구원관은 정통 교리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다시 말해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영적 차원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유(Divine Healing)가 강조되는 신학이다. 서양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인간구원을 영적 구원만으로 좁게 해 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영, 혼, 육을 가진 존재임으로 전인구원 혹은 넓은 구원이 필요하다. 오순절주의를 탄생시킨 오순절 운동의 초기에서부터 신적 치유에 관한 교리는 순복음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했으며 순복음의 기본적 진리 중의 하나로 그 위치를 굳혀 왔다.36) 오순절주의자들은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가운데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속 사역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는 자들의 특권이라는 인식하에서 신유를 선포하고 행해왔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인간의 영적 필요를 보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고(막 1:14-15), 정신적인 필요를 보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23-25절), 그리고 육체적 필요를 보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다(26절).
오순절 신학의 전인적 구원은 생태계 회복도 포함시킬 수 있다. 생태계 역시 인간 타락 이전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태계가 같이 저주 받았던 것에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인간의 저주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생태계도 성령님을 통한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오순절 신학은 성령론적 사역을 통한 인간의 영, 혼, 육 뿐만 아니라 지구의 회복에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오순절 신학은 자신과 사회, 그리고 자연세계를 다루는 전인신학이다.
D-1.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37)
개혁주의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나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 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결 귀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개혁주의자는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D-2. 오순절 신학의 입장
교회관에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으며 교회의 사회 참여의 방법과 수위에 관계되어 있다. 세상의 문화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개혁주의의 실천적 노력은 성령의 현실적 임재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과 몇 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을 갖는다. 유사점은 교회의 현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말씀에 의하여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경향은 신자의 문화적,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를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현실의 세상에서도 이루고자 했던 개혁주의의 신학적 사고는 오순절 신학이 강조하는 말씀의 현실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신학적 사고와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신학적 차이점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에 이루고자 하는 방법적 차이이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의 모든 요소에 구석구석 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개혁주의에 있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를 위해 개인적 부분보다는 사회적 부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회적 참여는 세상과의 영적인 분리가 전제되고 있다. 교회의 어원적인 뜻에서도 알 수 있다.38) 참다운 사회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혁자로서 먼저 세상과 분리되고(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개인적 신앙체험을 하고)나서 사회적 참여를 강조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신학은 개인구원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순절 교회들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묵묵히 사회적 구원을 이루고 있다.39) 역사적으로 오순절 운동은 많은 소외 받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오순절 교회는 처음부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성장하였다.40)
이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비판받는 정치적 사회적 참여의 신학적 부재는 약간의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부족한 점은 차차 보안하면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순절 신학은 진정한 사회적 참여를 할 수 있는 신학적 기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개혁주의는 변화의 힘을 말씀으로만 국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 사회 변혁의 힘은 성령께 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함으로(행2:1-4) 진정한 신약 교회가 형성된 것처럼 성령의 능력이 사회변혁의 원동력인 것이다(행1:8). 오순절 신학은 그 원천과 함께 늘 대화하며 동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Ⅳ. 성령의 역사와 성령세례
여기에서는 개혁주의와 확연히 틀리는 신학적 견해를 다루고자 한다. 즉 성령의 사역 중에 중생과 성령세례의 신학적 차이가 그것이다.41) 오순절 신학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특성중의 하나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구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개인적이고도 획기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 개인들은 파격적인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성결 주의에 뿌리를 둔 오순절주의자들은 이것을 성령님의 성화의 역사(sanctification)로 본다. 반면에 성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오순절 교회들은 이를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로 본다.42)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두 주류 기독교 그룹인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복음주의와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가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회심과 구별되고 뒤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는 오순절적 입장은 성령세례를 개종 또는 거듭남의 일부로 보는 복음주의의 이해와는 중대하게 다르다. 43)이러한 복음주의와의 신학적 차이는 최근에 제임스 던(James Dunn)의 저술로 집약되었다.44) 반면에 세계교회를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그룹과의 신학적 차이는 훨씬 더 분명한 듯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넓혀 일반화한 경우인데,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압제받는 자들과 불공평하게 취급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이루고 있는, 또 성취해야하는 모든 일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45) 이들의 성령이해는 신학적 무지의 소산이며 성령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왜곡하는 견해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비성서적이며 기독론 부재의 성령이해일 뿐이다. 기독교의 성령은 일반종교의 잡신들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일한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중생하도록 하며 한편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성경에 기초한 성령은 기독론과 함께 간다.
오순절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때 가능하다. 중생이 새 생명을 얻어 변화된 신분의 단계라고 한다면 성령세례는 중생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받는 체험이다. 즉, 중생의 역사에 첨가되어 일어나는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역사이다. 중생(born again)과 성령세례(the baptism of Holy Spirit)에 대한 개혁주의와 오순절 입장을 비교하면 아래의 표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46)
생략
오늘날 신학적 논의의 중심은 성령님이다. 이것은 오순절 신학이 세계 신학계에 끼친 커다란 공헌이기도 하다. 20세기 여명이 떠오르기 까지 세계 기독교계의 신학적 논의는 거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불러 일으켰다. 오순절주의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의 사고 개념이 아니라 곧 임재와 권능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주의의 사고방식은 초자연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이는 신자의 현재적 삶 가운데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 성경적 세계관이자 믿음이다. 오순절의 성령론적 신학은, 첫째 섬김을 위한 능력 부여로서 성령세례의 필요성과, 둘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높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83)과 같은 두 가지 주요 성서적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 그 까닭은 오순절의 가장 큰 특징인 성령 세례에서 강조된 ‘권능’이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목적은 사역에 있으며 성령세례의 가장 큰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핵심은 바로 성령의 능력과 인격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질문한 것은 ‘너희가 성령을 믿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로 바울은 믿음의 위치가 아닌 성령 안에서의 삶과 체험을 말한 것이다. 이는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성도를 새롭게 하고 소생케 하며 풍부하고 다양한 신앙 체험을 주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순절 신학은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성령의 인격을 말하고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떠나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인격성(personality)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내재성(immanence)만을 강조한다.47) 특별히 영산의 신학에 있어서 성령은 인격체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그의 목회를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적 성령의 사역의 장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오순절이 오순절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은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 개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 사역의 확장,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인한 목회적 사역의 풍성함, 성도개인의 윤택한 삶, 그리고 성령을 통한 인간 회복 등이 그것이다. 오순절 신학의 과제는 성령 세례에 대한 좀더 폭 넓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외적 증거라고 본다.48) 니콜(John Thomas Nichol)도 “오순절단체의 유일무이한 것은 성령을 받은 견해는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에 의해 표시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순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역사적 기독교 교인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는 원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도날드 기(Donald Gee)도 오순절교회의 특징적 교리는 성령세례의 첫 증거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9) 일부에서는 아직도 꼭 방언이 성령 세례 받은 증거라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성령세례 후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세우는 것이 시급히 요청되어진다.50) 앞으로 오순절 신학의 성령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성령이 왜 오셨는가에 대한 실천적 답변에 힘을 기우려야 할 것으로 본다.
Ⅴ.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과 오순절 신학의 네 가지 유사한 신학적 특징들과 한 가지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오순절 신학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신학적 제반영역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는 서로의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주지하였던 바이다.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비교하여 평가한다면 신학적으로 큰 뿌리와 줄기는 같이 공유 할 수 있겠으나 가지와 꽃 봉우리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는 서로의 모습을 지켜야 할 것으로 본다. 바울신학과 누가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종합할 수 있는 거시적 신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학적 논의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성경은 한 가지 이론으로 모든 성경의 내용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의 통일적인 이성적 체계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의 신학적 의도와 여러 복합적인 역사적 정황들을 포함하고 있는 성령의 의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독특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성경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하시면서 또한 동시에 그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신다. 성경은 역사적인 책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면만 강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영적 신비적인 면만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천사와 다르게 육체를 가지고 있고 동물과 다르게 영혼을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영적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알 수도 있겠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성경이 이성으로 이해되어져서 한 가지 체계로 묽어 질 수 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성경이 아니다. 인간 이성에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은 사라지고 인간에 의해 밝혀진 이성적 하나님만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성경 자체가 누가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성서의 통일성 문제도 사상적 혹은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먼저 성경 문헌들의 참된 저자인 성령께 의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경 기록의 영감을 각 저자들에게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필자가 깨달은 바는 신학적으로 어느 한쪽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학적 관점과 특징을 이해하고 서로의 신학적 약점을 보완하는 차원으로 신학이 발전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 통합의 시도를 게을리 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신학적 연합을 위해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각자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서로를 견제하며 하나님이 밝혀주시는 부분까지 서로 겸손하게 신학적 논의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학을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 사고를 들어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겸허한 자세를 늘 견지해야겠다. 신학은 겸손한 도(道)가 필요한 것이다. 오순절 조직신학도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신학을 더욱 개발하고 발전시켜 성령의 임재가 있는 학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리인 성령을 모신자만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각주
1) 이 글은 신 복윤 교수가 몇 년 전에 두란노 서원에서 출판한「목회와 신학」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이다. 그 글에서 신복윤 교수는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을 4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잡지가 출간한 해를 필자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서 인터넷 검색(http://www.naver.com)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싸이트
(http://www.heedae2.pe.kr/data/26.hwp)에서 원문과 같은 글이 4, 5항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 오순절 성령 운동의 역사적 개관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하기 바람: 국제신학연구원 저,『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Ⅰ』(서울: 서울서적, 1993). pp. 142-164; 현대 오순절주의에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책을 참조바람: 빈슨 아이난 저, 『세계오순절 성결운동의 역사』 이영훈․박명수 역 (서울: 서울서적, 2000).
3) 빈슨 사이난, 『20세기 성령 운동의 현주소』국제신학연구원 역 (서울: 예인, 1995). pp. 39-40.
4) 특히 한국에선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인 조용기 목사의 신학(영산신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5) 신복윤, p. 75.
6)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5), p. 29.
7)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그 수가 30을 넘지만 신조적 권위를 가지고 널리 채용된 것을 보면 ① 제2 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1564년 볼링거(Bullinger)가 기안하여 스위스, 폴란드, 헝가리,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개혁파 교회들이 신조로 채용 ②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는 1562년 울씨누스(Ursinus)와 울레비아누스(Olevianus)가 작성하여 도르트 대회(The Synod of Dordt, 1618-1619)에서 동의를 얻고 독일, 화란, 미국의 개혁파 교회들이 교리 표준서로 채용 ③ 그 외에 영국교회의 39개조 신조, 개혁파 교회 세계대회인 도르트 대회에서 채택한 도르트 신경(The Canons of Dordt)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회의(1644-1647)에서 작성한 "웨스트민스터신 앙고백과 그 대소요리 문답" 등이 있다. 도르트 신경(信經)은 알미니안 논쟁으로 인하여 작성되어 개혁파 교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신앙고백의 보충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신앙고백서는 못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알미니안 논쟁이후 널리 채용된 유일한 개혁주의 신조이다. 이것은 개혁파 교회들의 일치를 과시하기 위해서 세계교회적 목적과 범위를 가진 것으로 "개혁주의 교리 체계의 가장 완숙한 신조적 진술이다.
8)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칼빈 이후로 볼링거(Bullinger), 울씨누스(Ursinus), 쟌키우스(Zanchius), 플라누스(Polanus) 등이며 그 후 아메시우스(Amesius), 보에티우스(Voetius), 오웬(John Owen), 호우(John Howe),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을 들 수 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핫지(Charles Hodge),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워필드(B.B. Warfield), 헾(Heinrich Heppe), 반틸(C. Van Til), 벌카우어(G.C. Berkouwer), 벌코프(Louis Berkhof) 등을 말할 수 있다.
9) D. 스틸/C. 토머스 공저,『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김남식 역 (서울: 엠마오, 1986). pp. 15-23.
10) H. Henry Meeter, p. 30.
11) 신복윤, pp. 75-77.
12) Fred H. Klooster, 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 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 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13) 신전통주의자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 하는 것이요 형체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14)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오순절 교의학』(서울: 엘림, 2003). pp. 27-46.
15) 영산의 성경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서울 신대 신약학 교수인 김희성 박사가 2004년 한세대 오순절 학술 세미나에서 행한 발제물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람.
16) Ernest Swing Williams, Systematic Theology Vol. 1 (Michigan: Gospel Publishing House, 1953), p. 76.
17)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 41.
18) 한국의 대표적인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출판국에서 편찬한『오순절 교의학』에 보면 오순절 신학의 성경관을 잘 알 수 있다: 기하성 총회출판국 편, p. 27.
19) 이재범, 『성령과 선교』 (서울: 보이스사, 1985), p. 88.
20) Ibid., p. 98.
21) 신복윤, pp. 77-78.
22) 성령님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는 중생과 성령세례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3) 신문철 교수의 강의안「삼위일체적 성령론」중에서
24) 한국 오순절 최대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헌법 제7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를 하고 있다. 이 정의는 기본적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1) 용어의 정의: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성경 전반에 걸쳐서 본체이신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三位)일체(一體)로서 존재하심을 밝히고 있음을 믿고 이것이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것을 믿는다(창1:1, 26; 마28:19; 고후13:13; 요14:16,17). 2) 삼위일체 안에서 구분과 관계성: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품격의 구분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특수한 용어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구분과 관계성은 성경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으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눅1:35; 고전1:24; 마11:15-17, 28:19; 요일1:3,4).
25)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 82.
26) 전통교리에 대해서는 신문철 교수의 제 2강의록을 참고하기 바람.
27)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인간의 모습 속에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적 사역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8) 신문철, 『신교수의 신학이야기』 (서울: 엠-애드, 2003), p. 261.
29) 신복윤, pp. 78-79.
30)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55-161.
31) Ibid., pp. 161-178.
32) 국제신학연구원 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Ⅰ』(서울: 서울서적, 1993). p. 182.
33) 기능적 삼분설은 인간성을 구조적으로 분할하는 영, 혼, 육의 분리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로로서 영, 혼, 육이 각각 그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
34)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90-191.
35) 이 문제는 많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하성총회출판국에서 펴낸 『오순절 교의학』(pp. 190-198)을 보면 인간 구원의 조건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오순절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다. 구원을 이루는 조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말하며 중생과 회개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믿음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하고 있지 않다; 신문철 교수님의 제9강의록(p. 5)을 참조해 보면 구원은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사역에 달려있다고 하며 삼중축복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서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인 16개의 신조에 대한 해설이 담긴 넬슨(P.C. Nelson)의『성경의 교리』라는 책을 보면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할은 단지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다분히 칼빈주의적이다(국제신학연구원 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Ⅱ』, p. 62)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기는 오순절주의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령이 역사하지만 그것을 인간이 거부하는 모습이 성경에 나온다(마22:1-14).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찌하든 간에 인간이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함으로 구원의 조건이 인간의 믿음의 선택에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36) 신유의 복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책을 참조하기 바람: 영산연구원 저, 『오중복음과 삼중구원의 축복』(서울: 서울서적, 1991), pp. 75-90;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359-377.
37) 신복윤, pp. 79-80.
38)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ekklesia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이것은 그리스어의 동사 kaleo(부르다), 그것의 복합어인 ekkaleo (소집하다;call out)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ekklesia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정당하게 소환된 혹은 소집된 사람들의 모임이란 것을 의미한다: E.G. 제이, 『교회론의 변천사』주재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18.
39) 오순절 교단처럼 사회적 봉사를 많이 하는 교회들도 드물다. 원래부터 가난자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목회적 돌봄이 많이 있어왔다. 한 예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오순절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의 사회적 돌봄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참조하기 바람: 배현성, “영산의 신학지평과 희망이해,”『2004 영산국제신학 심포지움』영산신학연구소 편 (서울: 한세대학교출판부, 2004), p. 230.
40) 마원석,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성화』국제신학연구원 편 (서울: 국제신학연구원, 1998), p. 187.
41) 배현성, 『젓가락과 신학의 만남』(서울: 한세대학교출판부, 2002), p. 120.
42) 마원석, p. 181.
43) 크게 성령세례와 중생을 다른 별다른 체험으로 보는 오순절 견해와 중생과 성령세례를 나누지 않고 같이 보는 복음주의적 견해가 그것이다. 오순절 입자의 학자들은 R. A. Torrey, J. E. Cumming, Stanley M. Horton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자들이 중생은 하였으나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행1:5, 8:12, 19:1-2)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중생과 성령세례를 확연히 구분하고 있다. 둘째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육체적 증거로서 방언을 들고 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2:4)과 고넬료의 집(10:45-46), 그리고 에베소에서의 성령의역사(행19:6)를 통한 증거는 확실히 방언이었다. 셋째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세례는 반복되며 오늘도 교회 안에서 체험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넷째 성령세례는 거듭난 신자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헌신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권능의 사건이다(행1:8).
이에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비오순절 학자들 혹은 복음주의자들이다. Richard Gaffin, John R. Stott, James Dunn등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Gaffin: 첫째,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되면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누린다. 셋째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완성된 구원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반복적이지 않다. Stott :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이 받았다고 주장함. Dunn은 오순절 성령사건을 구약시대의 구원과 신약시대의 구원의 분수령을 삼고 오순절 성령강림일 날로부터 신약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본다(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으로 새 시대와 새 언약에 들어간 것처럼). 그러나 던은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성령세례의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
44) 이 분야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hiladelphia: Westminster; London: SCM, 1970)이다. 그의 주장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반발을 받는다. 예를 들면,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ntness: The Spirit in Luke-Acts,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Supplement Series 6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1).
45) 마원석, p. 182.
46) 박정렬 저,『오순절 신학』(서울: 순신대학교출판부, 1996), pp. 159-161.
47) 신정통주의자들에게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교리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들은 성령의 구별된 인격을 부인하며 다만 유니테리안적인 의미로 성령은 ‘신의 현현’이라는 뜻으로만 신성을 긍정할 뿐이다. 바르트와 부룬너를 제외하고는 신전통주의자들의 저서들은 대부분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들의 기본적 관심은 성령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역사하시느냐는 것이다: 기하성총회출판국 편, pp. 134-136.
48) Ibid., p. 259.
49) 이재범, p. 123.
50) Ibid.,, p. 101.
- 퍼온 글 -
첫댓글 귀한 글들 올려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글쓴이도 밝혀주시면 더 좋겠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글쓴이가 없이 올려진 글이어서 그대로 퍼왔습니다....^&^....
하하하......그래도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