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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발굴! 일본군 보병 14연대 진중일지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106 15.06.18 1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스페셜

2편 발굴! 일본군 보병 14연대 진중일지

 

 

▶ 진중일지는 문서이기 때문에 최대한 문서의 기록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이미지를 많이 삽입하였습니다. 이미지를 누르시면 커질겁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2년 뒤 일제는 대한제국의 초대황제인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해산 마저 도모하게 되죠. 이런 배경 속에서 마침내 일본군 보병 제14연대가 한국에 파병됩니다. 이들은 부대 업무 일지인 진중일지를 남겼습니다. 얼마 전 이 기록이 세상에 공개됐는데요, 역사스페셜 오늘은 한국의병토벌에 나섰던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이들이 남긴 진중일지를 통해서 잊혀진 우리 의병들의 전쟁을 복원합니다.

 

 

토지주택박물관 수장고. 최근 공개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기록물 원본이 보관되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측은 이 원본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상자 안에 구한말 대한의병들의 항일투쟁사를 다시 쓰게 할 기록물이 들어 있다. 토지박물관측이 우여곡절을 거쳐 입수한 기록물.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陳中日誌. 부대활동사항을 그날그날 직접 기록한 업무일지다. 진중일지는 모두 142천여쪽의 방대한 기록물. 일본군 보병이 남긴 기록물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을까.

 

김경도 토지주택박물관 관장

"일본경매시장에 나왔던 책이었는데 그걸 구입했던 사람이 저희가 매년 유물을 구입하고 있어요. 작년에 유물 구입할 때 저희한데 매각을 해서 저희가 구입해서 지금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진중일지를 남긴 부대는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명치40(1907)723일부터 명치42(1909)619일까 2년간의 기록입니다."

 

 

 

일지는 14연대가 일본에서 출병하기 직전부터 귀환하기까지 2년동안의 활동사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대의 출발자금은 6만엔, 식량의 3분의 1은 각지방 조변 즉 양민수탈을 지시하고 있다. 부대편제도 그대로 기록돼 있다. 장교들의 명단과 직책, 그리고 연대장 기쿠치 대좌의 이름도 또렷히 기록돼 있다.

 

김성갑 토지주택박물관 학예사

"지금까지 봐온 자료들은 여러 가지 편집되고 걸러진 그런 자료들이 많았는데 이건 현장에서 직접 작성한 거 같이 눈 앞에 보이는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일본군 보병 제14연대는 1907725일 오후 6시 정각 일본 모지항을 출발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6일 아침 640분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27일 부대원은 각자 맡은 수지지역으로 배치완료 됐다. 일본군 제14연대 그들은 정규군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한국에 파견됐던 것일까. 19077월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퇴위 시킨 다음 한국 군대 해산까지 기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군 보병 14연대가 파견됐다. 이들이 한국에 상륙한 닷새 뒤 190781일 한국군은 강제 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중일지엔 제14연대 출병 목적이 기록돼 있다. 지휘관의 훈시는 한국의 소요 사태에 대비하라고 돼있다.

 

김상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훈시 내용에 뭐라고 돼 있나면 한국 소요의 사태에 대비하여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말하는 한국소요라고 하는 것은 바로 며칠 후에 있게 될 군대해산 이후 직후에 있게 될지도 모를 소요 그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보병 14연대는 81일날 군대해산을 시킨 직후에 전국적으로 진위대를 해산시키는데 한국진위대를 해산시키는 주력으로써 바로 14연대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4연대는 즉각 전국 각지로 분산 배치됐다. 14연대는 서울의 용산을 비롯 영등포, 대구, 광주 등 한국 이남 전 지역에 비치됐다. 곧이어 전투도 치뤘다. 14연대 첫 전투는 1907810일 강화도 진위대 진압작전이었다. 진위대는 1895년 지방의 질서유지와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한국의 근대적 지방 군대였다. 첫 전투는 강화 진위대의 승리였다. 일본군 14연대는 5명 전사, 5명 중상에 피해를 입었다. 첫 전투 이후 진중일지엔 2년 동안의 수많은 전투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한국의병과 치룬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

 

 

 

모두 25매의 칼라판 전투 상세도도 남아 있다. 전투도는 현장을 목격하듯 생생하다. 낯익은 의병장의 이름도 나온다. 수괴 신돌석. 수괴 이강년. 적괴 전해산. 수괴 고광순. 그들에게 한국의병장은 도적대의 우두머리였다. 14연대와 맞섰던 한국의병들. 그들의 활동범위를 알아볼 수 있는 기록도 나온다. 의병들은 일제의 전신주를 파괴했다. 일본군의 통신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거문도 손죽도 등 도서지방까지 의병들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들 도서지역은 일본군 통신상의 요충지. 일본군은 통신선로 보호에 안간힘을 썼다.

 

 

 

한국의병들은 일본군의 통신망까지도 교란시키는 등 폭넓은 항일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진중일지에는 일본군이 단위 전투에서 소모한 실탄의 수량도 기록돼 있다. 이에 맞선 한국의병이 일본 보병총과 기병 총으로 무장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의병토벌을 위해 파병된 일본군 14연대. 결과적으로 그들의 파병목적은 이루어진다.

 

김경도 토지투택박물관 관장

"일본의 보병 그 14연대 이 사람을 위해서 여기 한국의 의병들을 진압하는 과정을 아주 소상하게 그리고 아주 내용이 생생하게 아마 들어 있습니다. 저도 여태까지 그런 자료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아마 독립운동사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최초로 발굴한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그들에겐 해외 파병 승전의 기록이지만 우리에겐 뼈아픈 의병탄압사의 기록이다.

 

제가 보고 있는 바로 이것이 모두 14책으로 돼 있는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입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2년간의 한국주둔기록을 담고 있는데요, 이 진중일지에는 일본군 14연대의 모든 활동사항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습니다. 한국군강제해산 이후 우리 의병들과 치렀던 각종 전투는 물론이고 당시 한국의 모든 정황들이 빠짐없이 분 단위로 보고돼 있습니다. 때문에 진중일지에는 수많은 우리의 의병들이 등장을 하는데요, 철저하게 일본군에 시각에서 바라본 우리 의병들의 활동사항을 담고 있는 것이죠. 이들 의병들 가운데는 일본군 14연대와 싸우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순국한 부자의병장도 있었습니다.

 

 

 

경북 영천. 이곳엔 진중일지에 나오는 특별한 의병활동의 흔적이 있다. 1907년 당시 영천, 포항, 영일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의병들이 있었다. 그들을 기리는 산남의진비. 산남은 문경새재 남쪽의 영남지방을 일컫는 말이고 의진은 의병진영을 말한다. 바로 이 산남의진의 핵심인물이 진중일지에 나온다. 의병장 정환직. 정환직 부대는 정중군, 영천당이라고도 불렸다. 일본군은 정환직을 폭도 중 최고 강경 그리고 백발노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최고 강경했던 백발노인 정환직.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충효제(忠孝濟)는 원래 그가 살았던 집이다. 정환직 부자의 충절을 기려 충효제라 부른다. 산남의진 창의를 모의했던 이곳 숱한 현판들이 의병장 정환직과 산남의진을 기리고 있다. 격전을 벌였던 전투현장들과 전투에 참가한 의병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조인호 영천전자고등학교 교장

원래 이곳에 동래 이름이 금단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지명 동래 이름도 정식으로 충효리도 바꿔져 있습니다. 지금은 충효리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정환직은 1843년 경북영천에서 태어났다. 의술을 배워 태의원 전의가 됐고 산남겸찰사 겸 토포사를 거쳐 중추원 의관이 됐다. 이후 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황제의 시종이 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정환직에게 짐망화천지수 즉 고종 자신은 화천의 물을 원한다고 했다. 그것은 고종의 비밀지령이었다.

 

권대웅 대경대 교수

이 화천지수라라 하는 말을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견공이 주변 제후들의 공략을 받아서 위기에 처합니다. 도망을 치게 되는데 이 때 봉축부라 하는 장군이 견공의 옷을 대신 입고 수레를 타고(도망가면서) 제나라 견공을 돌아보면서 화천의 물을 떠가지고 오너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견공이 물을 뜨러 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고종은 나라의 위기가 처해 있으니 정환직에게 의병을 일으켜 위기를 타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고종은 거사자금 5만냥까지 하사했다. 정환직은 그 뜻을 받들었다.

 

 

 

먼저 의병의 기치를 든 것은 정환직의 큰 아들 정용기였다. 이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산남의병들은 치열한 항일 투쟁에 나섰다. 정환직의 큰 아들 의병장 정용기의 순국 현장을 찾았다. 포항시 죽장면 입암마을. 이 산에서 정용기는 순국했다. 진중일지에 정용기 의병과의 전투기록. 1907107일 일본군은 입암동에서 숙영했다. 그날 밤 930분 정용기의 화적 150명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고 돼 있다. 그리고 벌어진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 19명의 의병을 사살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정용기 사살 이후에도 의병과의 대치전은 계속됐다.

 

권대웅 교수

이 입안마을의 전면에 있는 여기 산등성이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가 전투지였고 여기에서 정용기를 비롯한 그 참모들이 전사를 하는 것으로 기록에는 전하고 있습니다.”

 

 

 

아들 정용기가 순국하자 정환직이 전면에 나섰다. 진중일지는 정환직이 의병장이 된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큰 아들의 전사비보, 십수개 이상의 총상. 정환직은 아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의병장이 됐다고 14연대 진중일지는 보고하고 있다. 정환직 의병은 일본군 14연대와 접전을 벌여 나갔다. 190710월부터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와 의흥분파소를 습격 청송, 의성 등지에서도 교전했다. 일본군 14연대는 정환직 의병의 활동 반경에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정환직을 검거, 포획하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환직의 근거지는 고천 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 일대였다. 진중일지는 정환직에 대한 추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3명의 일본인 척후가 정환직 부대를 추적했다. 가택수색에 나서자 한국인들이 산 위로 도주했다. 우척후는 고천의 서남쪽으로 추적했다. 정환직은 큰 바위 옆에 잠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전 840분 정환직을 생포했다고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9071211일 산남의진 의병장 정환직은 고천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정환직이 체포됐던 곳 지금은 수목원이 조성된 깊은 산골이다.

 

권대웅 교수

이곳이 각전이라 하는 곳입니다. 일명 뿔밭이라고도 하죠. 산남 창의제에 의하면 정환직 대장은 이 각전에서 체포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정환직은 사방으로부터 조여 오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일본군은 정환직을 청하로 호송했다. 그를 신문했지만 자백하지 않았다고 돼있다. 그리고 대구로 호송하던 도중 정환직이 도주를 기도하는 바람에 그를 사살했다고 돼있다. 도주기도와 사살. 이것이 사실일까.

 

김상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정환직 선생이 당시에 65세였다. 또 고관을 지낸 사대부 양반이고 또 체포된 다음에 신문조서를 보면 아주 자세한 심경이 나와 있고 유서와 같은 시까지 남기고 있다. 그러한 분이 도주를 기도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얘기고 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영천에서 총살형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환직 의병장이 총살당한 곳.

 

조인호 영천전자고등학교 교장

지금 청하 쪽이 동쪽이거든요. 청하에서 체포되셔서 대구로 가려면 이쪽 길로 따라가야 되거든요. 영천을 거치는 도중에 이 부근에서 정환직 선생님이 순국하신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들어 산남의진을 창의. 아들의 뒤를 이어 65세의 나이로 일본군에 총살당한 전 고종황제시종관 정환직. 그의 절명시 한편이 일본군 진중일지에 남아 있다.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 2년간의 한국의병토벌 기록은 섬뜩할 만큼 자세합니다. 때문에 우린 이 기록에 대해서 더욱 더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간 우리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 왔습니다만 이 진중일지에는 우리가 그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과연 이 진중일지엔 어떤 기록들이 들어 있었던 걸까요.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 이 기록 속에 담긴 충격적인 사실들입니다.

 

진중일지는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 지금은 대략적인 내용만을 검토하고 있다. 해제 작업을 맡고 있는 김상기 소장. 그 역시 진중일지를 처음 대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김상기 소장

의병들이 전투에서 죽고 죽고 아무리 죽어도 다음 날 다시 전투를 하고 감행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의병의 전투는 참 비장한 각오를 하고서 임하는 전투다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고 ~~~ 정말로 이름도 없는 시체도 못 찾는 그 수많은 의병들을 생각을 할 때 이 의병전쟁이야말로 참 슬픈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4연대 진중일지가 기록한 사상자 현황표.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 경찰과 민간인 사상자와 함께 의병들의 피해사항도 보고하고 있다. 의병 부상자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의병 사망자는 13445. 10개월간의 집계였다. 진중일지엔 새로운 사실도 많았다. 무엇보다 김상기 소장이 받은 충격은 의병학살에 관한 것이었다. 사살(射殺), 총살(銃殺), 신문 중 도주기도 이런 기록이 의외로 많았다.

 

 

양민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25세 김용출 위 사람은 양민의 풍모를 가지고서 폭도에게 조력하고 아군의 상황을 정찰하여 탐지함으로써 한일 양 국민에게 위해를 가해 체포를 하여 신문하였는데 그 가운데 도주를 기도하여 오후 4시경 그를 사살함.”

 

그것은 양민학살이었다.

 

김상기 소장

진중일지에서는 체포한 의병들을 도주를 기도해서 사살했다라고 한결같이 써놓고 있습니다. 그러한 곳을 본 곳 만해도 4, 50군데가 나오는데 똑같이 도주를 기도하매 사살이라고 공식적으로 그렇게 써놓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병들이 도주를 기도해서 사살 당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도 발견됐다. 의병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일본군뿐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한국인 통역을 동원했다. 그리고 의병들을 정탐하기 위해 이른바 간첩을 심어두고 있었다.

 

밀정으로서 참여하는 사람들. 통역이라든가 또는 의병 일본군 편제를 보면 편제 속에 간첩이라고 하는 직함도 있습니다.”

 

 

 

한인 정탐원은 약 400. 이들은 제 살을 베어서 제 배를 채우는 자들이라고 대한매일신보는 비판하고 있다. 의병들은 외국인을 통해 총기 밀수입까지 시도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의병에게 총기를 제공하려 한다는 진중일지의 기록. 일본군은 미국인 포인이 모제르총 5만정을 한국에 밀수출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실제로 모제르총 5만정이라고 하는 숫자가 의병한테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인데 어째든 포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필리핀의 의군들한테도 무기를 제공했던 사람으로 그러니까 대비를 철저히 하라고 하는 통감부의 보고를 직접 14연대에서 받았습니다.”

 

 

 

무기수입은 좌절됐다. 의병들은 낡고 초라한 무기로 일본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의 숨겨진 일화도 많이 기록돼 있다. 박재근은 잡히게 되자 자결을 기도 스스로 목을 찔렸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말을 못하는 바람에 일본인은 그를 신문하지 못했다. 호남의병장 심남일은 남평군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가 그 마을이 너무 가난한 것을 보고 군자금 천냥을 마을에 기부했다.

 

 

일본군은 무자비했다. 민가와 사찰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촌락 소기, 가옥 방화, 소사(燒死) 그것은 만행이었다. 지리산 피아골. 이곳엔 당시에 모조리 불타버린 사찰이 하나 있다. 지금은 복원된 유서 깊은 사찰 연곡사. 이곳에도 의병 관련 비석이 있다.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는 비석.

 

여기에 보면 일본군이 이곳에 쳐들어 와서 적소사신즉 왜적이 절을 모두 불태웠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인 1896년부터 의병활동을 했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이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고광순(高光洵)은 의병을 창의 10년 이상 의병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

근거지로 계책을 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기 오셔서 의병부대를 출범시키면서 불원복(不遠復)이라고 머지않아 회복할 것이다는 깃발을 세웠다고 합니다. 결국 당시 의병은 무장력이 약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장기항전의 기지를 건설한 셈입니다.”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 태극기엔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불원복.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의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일본군의 탄압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중일지에도 고광순의 최후가 나온다. 일본군은 의병 백여명과 충돌, 연곡사를 모두 불태웠다. 연곡사 전투에서 의병장 고광순과 14명의 의병이 순국했다. 고광순의 나이 예순살이었다.

 

진중일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의병과 의병장들의 이름도 등장한다. 삼도도원수 윤영수 그리고 박동의, 이학노, 김성산, 이경행, 김세순 등 숱한 의병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상기 교수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의병장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이 나오기 때문에 앞으로 후기 의병연구에 정말로 새로운 연구가 좀 필요하다. 그리고 포로로서 체포된 또는 전투과정에서 전사한 의병장들 그러한 그분들의 이름들이 다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향후에 이러한 분들을 별도로 조사를 한다고 하면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충분한 근거가 진중일지에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군 제14연대 진중일지. 철저하게 일본군 입장에서 기록된 한국의병토벌사. 우리에겐 피어린 항일투쟁의 증거인 것이다.

 

의병, 도대체 의병이란 무엇일까요. 박은식 선생의 그의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의병이란 민군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한 적개심에 불타는 사람들이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스스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해 일어난 민군. 즉 백성들이 조직한 군대가 바로 의병인데요, 그래서 의병은 신분계층, 지역, 나이를 뛰어 넘어 조직됩니다. 이 정의에 아주 꼭 맞는 특별한 의병장이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에 등장하는데 바로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입니다.

 

 

의병장 안규홍은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보성군 득량면에 파청승첩비. 안규홍 부대의 첫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

원래 이제 이곳은 보성하고 낙안하고 수비대에서 둘이 연락을 상호하는 그런 헌병부대들끼리의 연락루트였다고 봅니다. 안규홍 부대에서는 그 연락루트와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가 여기서 요격을 합니다. 저 산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쭉 이어지는 고개가 비둘기재라고 합니다. 여기 비둘기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해서 결국에는 일본 헌병 2명을 죽이고 그리고 한명의 중상을 입히는 굉장히 큰 성과를 거둔 셈입니다.”

 

 

첫 전투에서 거둔 첫 승리. 안규홍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안규홍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1907년 당시 안규홍은 이 마을(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안규홍이 20여 년 간 담살이 즉 머슴살이를 했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을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규모 있는 집. 이 집안사람들은 아직도 안규홍의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안대장(안규홍)이 몇 살 때나 여기 오셨어요?”

그거 사실 정확하게 모르는데... 어려서임필요 할머니(93)

어려서요?”

. 말하자면 가난해. 안씨들이

가난했어?”

가난하니까 말하자면 할머니가 고모라서 고모집이라고 데려왔는 가봐. 밥 먹고 살게 없어 왔어.”

 

홍형기 교수

친척집이어서 이 집에서 거두어 준거죠. 그래서 자기 어머니하고 여기 와가지고 어려서는 거둬먹였을 거고 10살 무렵부터는 꼬마 머슴이 된 셈이죠.”

 

 

 

19083. 안규홍은 이곳 동소산에서 창의 의병장이 됐다. 그의 부대는 담살이 부대라고 불렸다. 담살이란 머슴살이 즉 머슴이 의병장으로 있는 부대란 뜻이었다. 안규홍과 그의 부장들에 대한 행적을 후세인들이 엮은 담산실기. 안규홍 부대와 편제와 활동이 잘 기록돼 있다. 안규홍 부대는 파청승전 이후 또 다시 큰 승전을 거뒀다. 법화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진산마을. 바로 진산전투 현장이다. 진중일지에도 안규홍 부대와 일본군 14연대 접전이 기록돼 있다. 1908824일에 진산전투가 그것이다. 진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전투는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됐다. 공방은 치열했다. 안규홍 부대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전투였다.

 

홍영기 교수

보성지역 전체가 안규홍 부대의 근거지거나 활동부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일본군 수비대라든가 순사대 이런 경우에는 계속 안규홍 부대를 추격을 하고 또 14연대의 경우에도 그런 과정에서 마주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굉장히 공방전이 켰던 것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진중일지는 전투 전상황부터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70여명의 안규홍 부대가 숙영하고 곳을 감지했다. 일본군은 즉각 추격에 나섰다. 1908823일부터 24일까지의 추격전. 일본군은 진산방향으로 담살이 부대를 쫓아왔다. 전투는 824일 오전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시기는 오전 620분부터 일본군은 진산을 포위?수색했다. 2시기는 오전 840분부터 50분 동안 진행됐다. 3시기는 본격적인 전투였다. 일본군은 마을을 불태우며 안규홍 부대를 쫓았다. 안규홍 부대는 오히려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승전을 거뒀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은 아직도 안규홍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안규홍을 안진사(安進士), 안심(安心), 안진(安進)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안규홍 부대와 일본군 14연대와 접전은 계속됐다. 190810월에 우산전투. 전투결과 적괴 안규홍(안진사) 사망. 일본군은 안규홍을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군은 포로신문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적괴 안규홍이 화승총을 수리중이라는 것이다. 안규홍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규홍은 보성군 해창을 공격했다. 경악한 일본군은 안규홍의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안규홍은 신출귀몰, 일본군은 수괴 안규홍의 일파 100여명을 추적했지만 얻은 것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머슴출신 의병장 안규홍은 더욱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19095. 보성군 복내장에 안규홍가 나타나 일본군 헌병대를 공격했다. 대낮에 과감한 공세작전을 펼친 것이다.

 

홍영기 교수

“19095월에 있었던 사건인데요, 그 당시에 일본군 헌병대라든가 수비대가 복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부식물 같은 것을 조달하는 것은 시장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정보를 입수한 안규홍 부대는 약 30명 정도가 동원이 돼서 시장에 잠입해 있다가 그 부식을 조달하던 헌병 두명을 죽이고 그리고 통역원 1명이 중상을 입는 그런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일본군은 당황했다. 특히 한국 민간인들의 의병에 대한 협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복내장 인근 주민들이 의병이 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머슴출신 안규홍이 의병을 이끌고 있는데 민간인에겐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홍영기 교수

처음에는 이들이 의병을 일으킨다고 했을 때 양반유생들이 전혀 협조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일투쟁이 굉장히 인정을 받게 되니까 양반유생들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고 합류해서 신분적 차이를 극복해가지고 어떻게 보면 가장 대표적인 신분적 차이를 극복한 의병부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의병은 일본군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이자 난적이었다. 대표적 거괴 전해산, 심남일, 안계홍(안규홍). 그 중심에 안규홍이 있었다. 1909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일본군의 파상공격이 펼쳐지자 안규홍은 일단 의병해산을 명령했다. 그는 머슴살이하던 이 집의 마구간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여기가 옛날 마구간 자리입니까? 여기서 숨어 계시다가 잡히셨다고요?”

 

 

어머니를 만나려 왔던 길이었다. 안규홍은 광주를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191155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머슴출신으로 의병장인 된 안규홍. 항일의병투쟁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서시1)

 

191155,

대구 감영 뒤뜰 형틀에 묶여

마지막 죽음을 기다리던 한 청년

태연하게 서 있던 늠름한 그 모습

나이는 서른두 살!

 

본적은 전라도 보성군 우산리 택촌

이름은 죽산 안씨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죄명은 반도의 질서위반

민심교란 황군살상 폭도죄

 

내 나라 내 땅을 지키러 일어난 의병장

마침내

남의 손 남의 칼에 죽어 가는 날이었다

 

문병란 <동소산의 머슴새>중에서

 

 

문병란 시인이 머슴출신 의병장 안규홍을 기리며 쓴 서사시 <동소산의 머슴새> 첫부분입니다. 이처럼 1907년부터 전국각지에서 다시 일어난 한국 의병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에 의해 그 세력이 급격하게 꺾이고 맙니다.

 

 

지난 1987년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논문집. 그 속에 들어있는 일제의 남한폭도 대토벌 기념사진첩.

 

홍영기 교수

이 사진첩의 표지거든요. 표지에 보면 여기에는 태극기로 장식돼 있고 반대편에 일장기로 장식돼 있지요. 가운데는 일본 우산으로 묶어 놓은 것으로 돼 있는데 밑에 보면 이 사진첩을 간행했던 주체인 임시한국파견대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부대가 그 당시에 군사작전을 주도했던 부대입니다. 그러니까 전라도에 와서 의병을 탄압했던 주체가 이것을 동경에 돌아가서 1910년에 간행한 것입니다.”

 

 

사진첩 첫 장은 임시한국파견대 사령관 와타나베. 다음 장부터는 의병대토벌에 참가했던 일본군 장교들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체포한 의병들. 멍석위에 앉혀 놓고 찍은 의병장 단체 사진도 수록돼 있다. 호남지역에서 활약하다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으로 체포된 16명의 의병장. 한결같이 수형표를 달고 있다. 이 사진 속에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도 보인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을 위해 일본군 임시한국파견대 사령부가 제작한 지도(1909). 일본군의 작전은 치밀했다. 19097. 일본군 2개 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곧바로 목포와 군산에 분산 배치됐다. 그리고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호남의병들이 일본군의 목표였다.

 

“190991일부터 10월까지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명명된 군사작전이 이루어지는데 주로 군사작전이 이루어지는 범위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되어집니다. 그 당시 전라남도의 의병이 가장 강성했습니다. 그 강력한 전라도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서 가장 큰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시행했던 셈이죠.”

 

 

토벌작전은 3기에 걸쳐 진행됐다. 원래는 40일로 예정했던 일본군의 작전은 55일로 연장됐다. 일본군은 잔인했다. 그들은 이른바 교환적 방법 즉 소용돌이 전술을 썼다.

 

여기서부터 시작을 할 때 주요지점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포위작전 펼치는데 하루의 진행속도가 4km라는 것입니다. 4km이기 때문에 굉장히 천천히 나가는 것이죠. 4km을 나가면서 그대로 앞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의심나면 뒤로 돌아갑니다. 그게 교환적 방법입니다. 그래서 한 마을에 최소 두 차례 어떤 때는 수십 차례를 그 마을을 수색을 하는 것이죠. ~~~ 의병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봉쇄되어 버린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체로는 바다로 나오려고 해도 바다의 경우에는 해양봉쇄를 해서 목포의 경비선이 5, 여수에 5척해서 10척이 해안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서지역으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여러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데 명문당에서 출판된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 그냥 올렸습니다. 매천야록은 아무 번역본을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매천야록>엔 황현의 목격담이 전한다.

 

동으로는 진주 하동, 남으로는 목포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그물을 펼치듯이 포위하였다.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집집마다 뒤지다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의병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삼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수 없었다. 강한 자들은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한 자들은 기어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강진 해남 땅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 죽은 자가 수 천 명이나 되었다.” <매천야록>중에서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 그것은 무자비한 호남의병 대학살이었다. 420명의 호남 의병이 전사했고 3100여명의 의병이 체포됐다. 일제는 체포된 의병들을 동원 도로건설에 착수했다. 하동에서 목포를 잇는 지금의 국도 2호선이 이때 만들어졌다.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았다. 안규홍의 행적을 기록한 담산실기 초고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한권의 책이 눈길을 끈다.

 

 

대구반장시부의록(大邱返葬2)時賦儀錄). 안규홍이 대구 감영에서 순국하자 고향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바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 이 대구반장시부의록인 것이다.

 

안병진 안규홍 후손

종연씨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이런 일에 어두운 분인데... 그렇게 세밀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참 과감하신 양반이에요.”

아무래도 이런 일 하면 피해를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렇죠

 

 

그의 시신을 모셔오기 위해선 비용이 필요했다. 고향사람들이 나서서 십시일반 비용을 거뒀다.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모두 250여명. 그들의 명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구 감영에서 교수형을 당한지 12년 후 이렇게 해서 안규홍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머슴출신의 의병장. 20여 차례 이상의 전투를 이끈 의병장.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병대장 그가 바로 담산 안규홍이었다.

 

1909년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이 끝난 뒤 급기야 한일 강제 병합은 이루어지고 맙니다. 한국의병 토벌은 한국 침략을 위한 일제의 마지막 군사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안규홍을 비롯한 103명의 의병장과 숱한 의병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을 당합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와 만주도 근거지를 옮겨가며 끈질긴 독립전쟁을 이어갑니다. 의열단과 광복군 같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숱한 독립지사들의 뿌리는 바로 이들 의병이었던 것입니다. 이 독립지사들의 끈질긴 항일운동은 마침내 1945년 조국의 광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올해 우리가 1907년 한국의병들의 잊혀진 전쟁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본 내용의 저작권은 한국방송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이미지가 너무 많아서 축소해서 올리겠습니다. 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지를 누르시면 커질 겁

니다.

 

1) 문병란 시인의 <동소산의 머슴새> 서시 전문을 옮김니다. 읽어보시고 감상해보시고 안규홍 의병장을 마음으로 느껴봅니다.

 

<동소산의 머슴새>

 

서시

 

 

1911년 5월 5일

대구 감영 뒤뜰 형틀에 묶여

마지막 죽음을 기다리던 한 청년

태연하게 서 있던 늠름한 그 모습

나이는 서른두 살

본적은 전라도 보성군 우산리 택촌

이름은 죽산 안씨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죄명은 반도의 질서위반 민심교란 황군살상 폭도죄

내 나라 내 땅을 지키려 일어난 의병장

마침내 남의 손 남의 칼에 죽어가는 날이었다

 

같은 날 전라도 보성군 동소산 밑

오랜 전통 속에 찾아온 단오날 맞아

동네 처녀애들 창포물에 머리 감고

내동리 들판 위로 봄놀이 나아갈 때

동소산 핏빛 영마루 넘어

파아란 하늘 끝에서

홀연히 들려오는

이상한 새 울음소리

줄지어 피어났던 진달래꽃들이

피 뱉고 뚝뚝 떨어져 갈때

떡갈잎에 얼굴 가리고 숨어 우는

수상한 새 울음소리

뻐꾸기인가, 머슴새인가,

못다 살고 죽은 한 많은 넋들이 와서

왼 종일 설리설리 울고 있었다.

 

70년 후 같은 날

지리산 피아골에서, 광주 무등산에서

또, 저리 섧게 울어 예는

이상한 새 울음소리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아득한 시간을 넘어

머나먼 저승의 어둠을 넘어

전라도 보성 땅 다시 찾아와

그날의 한 많은 새, 피를 토한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울다가

나중엔 두 마리 세마리

종당엔 수십 마리 수백 마리가 되어

억세게 억세게 울어주는 저 소리

이라 ??

이라 ??

동틀 때 일어나라 울고

해질녘 돌아가자 울고

소모는 소리로

밭가는 소리로

오늘도 그날의 울음을 운다.

이라 ??

이라 ??

그 소리 속에 섞여 두견새 소리

귀촉도

더 멀리서 우는 뻐꾸기 소리

뻐꾸욱

뻐꾸욱

그날의 못다한 마음

한 많은 새가 되어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해라

피아골 단풍나무 가지에서

무등산 세인봉 골짜기에서

동소산 핏빛 영마루에서

그날의 노래 다시 들려온다.

 

올해도,

진달래꽃은 무리져 피어나는 데

핏빛 영마루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저리 하늘은 미치게 푸르기만 한데

그날의 피 뿌린 자국마다

찔레꽃 피는 계곡을 따라 돌며

다시 찾아온 땅 위에

피눈물 뿌리며 우는

저 새 울음소리

해질녘

정자나무 고목에 기대어

피토해 우는 마음

한 많은 머슴새의 사연을 듣는다

 

그 옛날

쇠고랑에 묶여 끌려가고

다시 못 온 사람들의 젊은 원혼이 와서

오늘도 못다한 노래.

슬픈 육자배기에 목이 메이며

너를 따라 우는 내 마음

올해도 개땅쇠가 사는 마을에 와서

개땅쇠, 개땅쇠,

한 많은 전라도 사투리로 울고 있는가,

 

짚세기 속에서

발가락이 빠지던 문둥이도 넘어 갔고,

관군에 쫓기던 동학군도 넘어 갔고

도시로 팔려간 갑순이도 울고 넘었고

한양으로 끌려간 에미소도 울고 넘었고,

일본군에 묶여간 그날의 안담살이

피 묻은 짚신 자국마다

원통한 통곡을 묻으며 넘어 갔던 뜨거운 눈물의

고개, 고개.

그날의 서러운 전라도 땅에 와서

올해도,

피토해 설리 울어 예는 머슴새 소리

또 하나의 갑오년을 통곡하는가

또 하나의 경술년을 통곡하는가.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지라산 뻐꾸기와 함께

1980년 5월,

광주 무등산 뻐꾸기와 함께

이라 ??

이라 ??

소를 모는 소리로

밭을 가는 소리로

소리만 남고 보이지 않는 새

아득한 시간을 넘어

머나먼 저승의 어둠을 넘어

백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천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그 날에도 울고 남을 울음을

올해도 울고 남을 울음을

전라도 뻐꾸기만 피를 토한다

동소산 머슴새만 통곡을 한다,

 

그날에 끌려간

억만이도 팔만이도 돌아오지 않는데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땅,

황토빛 무덤만 늘어가는 땅에서

쑥대만 어우러져 키가 크는 땅에서

몇 백년 울던 새가 지금도 운다

 

아득한 시간을 넘어

머나먼 저승을 넘어

죽어서 소리만 남은 새

그날의 못다한 마음 다시 찾아와

보성땅 동소산 영마루에서

지리산 피아골, 광주 무등산에서

오늘도 떡갈잎으로 얼굴가리우고

피 묻은 꽃잎으로 눈물 닦으며

총 맞아 죽은 넋

굶어 죽은 넋

쑥이파리를 씹으며

씀바귀 씹어 목을 축이며

잠들지 말라

잠들지 말라

우리들의 귓가에 속삭인다

 

백년을 울고도 못다한 노래여

천년을 울고도 못다한 노래여

오 서러운 전라도여 조선이여,

 

 

시인 문병란

 

2)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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