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세계에 있어야 빛에 대하여 말을 한다 / 칠통 조규일
" 불교 서적을 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요. 칠통님께서 말씀하신 관법은 오정심관(五停心觀) 중의 하나인 수식관법(數息觀法)이었습니다. 우선 잠시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안반수의법(安般守意法)은 흔히 수식법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으나 수식법이라는 용어는 안반수의의 본래 뜻을 나타내는 것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흔히 옛부터 수식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내용상 다를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안반수의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안반수의법은 수를 세면서 호흡을 고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이 방법은 원어로 아나파나사티(anapanasiti)라고 하는데, 한문 번역에서 안반수의라고 하는 통칭으로 이 말을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아나(ana)는 들숨을 가리키고, 아파나(apana)는 날숨, 그리고 사티(sati)는 의식의 집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집중하여 관한다는 뜻이 되는가 봅니다. 소승선 수행법은 오정심관과 사념처관으로 나뉘는데, 오정심관은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계분별관(界分別觀), 수식관(數息觀)으로 분류되고 사념처관은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는 오정심관 중의 하나인 수식관을 수행하고 있었어야 하는데, 수식관과는 전혀 다른 사념처관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쩐지 이게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위빠나나 선원의 스님께서는 호흡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호흡시에 일어나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저는 배에 살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호흡시 배의 움직임이 별로 없어 관찰이 잘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 경행 수련을 통해서도 수행의 진보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지난번부터 관법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 나름대로 좀 더 이해를 바로 하고 수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위빠싸나 선원의 문을 두드리고 공부를 해왔던 것인데, 사념처관을 수식관인 줄 알고 착각하며 수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관법이면 대부분 다 같은 관법인 줄 알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수식관법에 전념해야겠습니다. 어쩐지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게 더 잘되더라구요. 진작부터 이것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여하튼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어 이렇게 부랴부랴 말씀을 드립니다. 해주실 이야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소승선 수행법을 오정심관과 사념처관으로 나뉘었던가? 저는 그대에게 처음 듣는 것이라 잘 모르겠으나 전에 사념처란 말도 그러했지요. 그리고 관법에 있어 수식관과 사념처관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위빠나나 선원의 스님께서 호흡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호흡 시에 일어나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고 말씀하셨다 하셨는데 이 또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라 한 것은 의식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그래서 안정된 수행을 할 수 있도록....상기되지 않도록....단전의 축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념처를 설명할 때 호흡을 관하며 수행 정진이 있고 수행 정진이 있는 가운데 생각이 일어난다 했는데 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수행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그 단계적으로 생각이 일어나 정리되는 것이 사념처일 것이며 그러면서 이르게 되는 것이 사념처일 것입니다.
제가 그대에게 오래 전부터 생각하라 했던 것 하늘, 땅 , 말을 할진데,... 과연 말은 어떻게 나오는가?
말의 실체를 찾는 것 그리고 나로 돌아와 나의 육체가 4대로 이루어 진 것 그리고 영혼을 잡는 것....... 등등이..
결국은 호흡을 관하는 가운데 수행 정진이 있어 일어나는 생각을 정리해 가는 수행 중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미리 알려주어 그 생각들을 정리하라 한 것입니다.
사념처도 배보다는 호흡을 관하며 호흡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념처에서도 계속 호흡을 관하지요. 호흡을 관하며 무념 무상 속 일어나는 생각을 좇아 정리하고 호흡을 통하여 본성의 빛을 더욱 밝히고 빛의 세계, 법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 중요한 것은 호흡을 관하되 들숨과 날숨 때 늘 호흡은 단전까지 왔다가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행이 진척되어 하단전이 완성되면 중단전 내지 상단전 이때는 하단전과 중단전이 동시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 동시에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단전까지 호흡을 관하다 보면 하단전을 관하는 것이 배도 관하게 되고 하단전이 충만해 지면 자연 호흡은 몸으로 퍼져 호흡을 관하는 것이 하단전에서 중단전까지를 관하게 되고 중단전이 충만하면 호흡을 상단전까지 이르러 이때는 호흡을 관하는 것이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을 관하게 되고 그리고는 온 몸으로 관하게 됩니다. 호흡을 관하는 것이 온몸을 관할 때 피부 호흡을 하게 되고 호흡이 안팎 없이 비대해 지고 그래도 자신의 테두리는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주와 함께 호흡하게 되고 호흡의 길이는 깊고도 크게 하게되며 그러다 익을 대로 익으면 우주와 공명현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우주와 자기 자신과의 공명현상으로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테두리가 깨지는 부서지는.... 이때가 바로 한 소식의 순간입니다.
한 소식 했으니. 법념처에 있을 것이고 진리를 알고 법을 알지만 그냥 그대로 여여하지만 이런 가운데 티끌이 낄까? 먼지가 앉을까? 무념 무상 속 계속 호흡을 관하다 보면 호흡을 관하는 수행 정진이 있으면 생각이 일어나는데 이때 일어나는 생각이 본성의 빛입니다.
물론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수행을 하지 않고 여여한 것이 법이라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가 법이라 생각하고 법에 머문다는 생각도 법이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여여하게 산다면 본성의 빛까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생각하겠지만 본성의 빛 자체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며 본성의 빛에 이르러 본성의 빛을 더욱 밝게 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도 무념 무상 속 호흡을 관하는 수행 정진이 있으며 본성의 빛을 생각하고 본성의 빛에 드는가 하면 본성의 빛을 더욱 밝히는 것입니다. 본성의 빛에 드는 것을 법성에 든다 또는 빛의 세계에 든다. 이때 본성의 빛을 밝혀 사방을 밝히는 빛이 도량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도량을 이야기하면 어떤 단체를 형성하고 가르침을 펴는 또는 충만된 기운이 퍼지는 테두리를 이야기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나 본인이 도량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성의 빛이 밝히는 테두리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에게는 대광념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대광념처에 이르러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도 어려운데 대광념처를 말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어떤 수행자가 그러더군요. 부처님도 빛의 세계에 대하여 말을 했다고 그 말이 금강경에 나와 있다며....그러면서 질문하기를 "부처님이 빛의 세계를 알았을까요? 빛의 세계에 계셨을까요?" 그래서 대답하기를 제자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부처님께서 빛의 세계를 이야기하신 것은 그 분이 이미 빛의 세계에 계셨기 때문에 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부처님의 경전이 부처님께서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쓴 것인 만큼 과장된 부분이 있으나 수행 부분과 어떤 세계를 설명한 것은 믿어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들 중에 경전을 공부 내지 연구하시는 스님이겠지만.... 10대 제자들이 경전을 쓰면서 10대 제자 자기 자신들까지 위상을 높여 놓았다며 경전에 의구심을 갖는 스님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요즈음 어떤 스님은 현존하는 수행단체를 이끄는 누구를 더욱 숭상시 하는.... 그 사람을 책으로 엮어 펴내기까지 한다며 말하더군요. 스님이면서...부처님 제자이면서.....그래서 말법시대이니. 그러한 것이다고 대답했지요.
수행을 하다가 잘 안되면 생각하고 되뇌이세요. 그럼 한결 잘 될 것입니다.
고양이가 쥐잡듯이 (찾는 것을 찾아 잡을 것이며) 목마른 이 물 마시듯 (날숨과 날숨을 할 것이며) 배고픈 이 밥 먹듯이 (천지의 기운을 흡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