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비 대장군
양양과 무한을 거점으로 호북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대 군벌(大軍閥)의 범 같은 장수 악비, 송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금나라 오랑캐를 맞이해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마든 대단한 인물이다.
금나라 병사들에게는 수라(修羅)의 화신인 듯 두려움의 대상인 악비였지만 봄이 다가올수록 그의 안색에는 점차 수심이 깊어 갔다. 봄이 되면 수라도제가 무림인들을 이끌고 북진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무림인들이 지닌 가공할 만한 힘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지만, 집단 전투에 취약한 무림인들만으로는 금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주기는 힘들다고 악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접전에 능한 장졸들이 그들과 합류한다면 금나라 오랑캐를 멸망시킨다는 게 가능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제로부터 절대 북진을 불허한다는 칙명이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유약한 황제였지만 칙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한참을 고민하던 악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 내가 직접 가서 재상과 담판을 짓는 수밖에.”
화평을 주장하는 재상 진회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움직일 수 있기에 내린 결론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유광세 상장군이 반발을 하며 나섰다.
“그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놈입니다. 대장군.”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지 않는냐? 칙령을 철회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군을 움직였다가는 최악의 경우 반역죄에 걸릴 수 있음이야.”
“어떤 놈이 감히 대장군을 잡아 금의위의 지하 감옥에 집어넣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놈이 있다면 소장이 직접 목을 베어 버릴 테니, 대장군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물론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본관이 반역죄를 뒤집어쓴 이상. 장졸들이 본관의 말에 따르겠는가?”
유광세 상장군은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악비를 바라보았다.
“대장군, 본관을 비롯한 모든 병졸들은 언제든 대장군의 명에만 따를 것입니다. 설사 목을 내 놓으라고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마음 든든한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악비는 환하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자네의 충성심은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해 주는구먼. 좋아, 귀관의 말대로 본관의 부하들은 모두 충성을 다할 거라고 믿네.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다른 군벌들은 본관의 요청에 응해 주겠는가?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있는 본관의 요청에 말이야.”
“그, 그건......”
유광세 상장군은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악비의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상과의 협의가 필요한 걸세. 알겠는가?”
“정히 그러시다면...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내일 새벽에 출발할까 생각하고 있네. 어느 정도 급한 일은 대부분 다 마무리 지어 놓은 상태니, 본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거야.”
“알겠습니다, 대장군. 호위대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러자 악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황도에 들어가는 것이니 호위병이 많을 필요 없네. 놈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판국에 쓸데없이 병사를 뺄 수는 없지 않겠나?”
“백 명 정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좀 더 줄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유광세 상장군의 단호한 눈빛을 보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양양성에서 황도인 남경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몇 날 며칠 동안 행군을 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 만큼, 혹시라도 적의 기습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송을 지탱하는 거목인 악비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철저히 대비하고 싶었던 유광세 상장군에게 있어. 호위병 백 명만 해도 최대한 양보한 숫자였던 것이다
팽가에서 팽선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묵향은 요즘 막힌 속이 뻥 뚫린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일을 마무리 지어버렸으니 더 이상 문서를 뒤지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런 그의 유쾌한 기분은 진팔과의 비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팔의 무공을 높일 필요는 있지만 전처럼 비무를 가장한 구타를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초식을 운용할 때의 주의점을 말해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줬던 것이다.
물론 그런 묵향의 호의를 진팔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팽가와의 사건이 있은 뒤 묵향이 신경 쓰고 있다는 천지문에, 그리고 진팔에 쏟아지는 눈길은 엄청났다. 서문세가와 무림맹, 개방, 무영문 할 것 없이 무림에서 정보 조직을 운영하는 어지간한 문파의 시선들이 천지문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이제 묵향과 진팔의 묘한 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철면피에 악독한 묵향이지만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전처럼 심하게 굴리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 요즘 갑자기 편해진 비무에 대한 진팔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멍이 든 곳을 또 맞으면 아프기는 하기에 비무만 하면 진팔은 몸서리를 쳐야 했다. 진팔과 비무를 끝낸 뒤 묵향은 느긋한 걸음으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오랜만에 같이 음률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밤에 찾아갔지만, 오늘은 일이 있었기에 낮에 그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도중에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있는 유광세 상장군을 만났다. 유광세 상장군은 묵향을 보자마자 다가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입니다. 묵 대인.”
“오, 유 상장군이셨구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길이시오?”
“서문 대인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서문? 수라도제 말씀이오?”
“아니요. 그 아드님 말입니다.”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cos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비의 최측근인 유광세 상장군이 이렇게 바삐 서문세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묵향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혹, 놈들의 움직임이라도 포착되었소?”
“그게 아니라 대장군께서 황도에 가시겠다고 하셔서 호위무사를 청하려고 말입니다. 황도까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대장군의 지시에 의해 호위병을 백 명으로 제한받자, 유광세 상장군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서문세가에 부탁하여 무예가 뛰어난 무사들로 하여금 외곽 호위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듣고 “오, 그러쇼? 그럼, 잘해보쇼”하고 느긋하게 대꾸해줄 묵향이 아니다. 심기가 좋지 않은 듯 묵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단일 세력으로 친다면 무림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마교 교주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서문세가 따위에게 경호를 요청하겠다고 하니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짐짓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렇다면 구태여 거기까지 가서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소. 본좌의 수하들을 내드리지. 서문세가의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보탬이 될 거요.”
사실 유광세 상장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파니 샆니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구분이었다. 근처에 잇Sms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마기를 풀풀 풍기는 원(?) 무사들을 보지않은 그였기에 흑풍단의 무사나 정파 소속의 무사나 별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경호를 요청한다고 해서 서문세가에서 흔쾌히 그걸 받아들여 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관지에게 말해 일정에 맞춰 호위 무사들을 보내 주겠소. 확실하게 경호해야 할 테니, 천인대 하나 정도 보내 드리면 되겠소?”
천인대를 보내 준다는 말에 유광세 상장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포권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묵 대인.”
“뭘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대장군에게 황도에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 주시구려.”
묵향이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급히 유광세 상장군이 불렀다.
“저, 묵 대인.”
“왜 그러시오? 다른 용건이 또 있으시오?”
“깜빡 잊었는데... 대장군께서는 많은 수의 호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만큼, 천인대는 가급적 대장군의 눈에 띄지 않는 원거리에서 호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지시해 두리다.”
묵향은 유광세 상장군과 헤어진 후, 곧바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만통음제는 아직 완벽하게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하루하루 몸조리에 힘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묵향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만통음제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어서 오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그말에 만통음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묵향의 말이 싫지는 않은 듯 곧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허허,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묵향은 주위를 쓱 둘러보다 불쑥 물었다.
“그런데 지련는 어디 갔습니까?”
만통음제는 짐짓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폭풍검을 만나러 갔지.”
“폭풍검이요?”
그가 누군지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멈춘 묵향은 곧 패력검제의 아들인 서량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그 녀석을 설취가 만나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놈을 왜 만나요?”
“요즘 몸도 찌뿌드드할 텐데 한판 뜨자고 놈이 취아를 꼬셨거든.”
만통음제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니. 그놈이 질녀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였단 말씀이십니까? 내 그놈의 주둥아리를 확 찢어 놔야......”
씨근거리며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는 묵향의 손을 만통음제가 급히 붙잡았다.
“허, 사람 성질하고는. 녀석이 한 말은 좀더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옆에서 내가 들어보니 대충 그런 뜯이었다는 말일세.”
묵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흐음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놈이 질녀와 대련을 해 주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요?”
묵향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설취보다 그놈이 훨씬 더 윗줄에 놓이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배울 것도 없는데 왜 자신보다 하수와 수고스럽게 대련을 해 준단 말인가? 뭔가 흑심이라도 품고 있지 않고서야.
만통음제는 음흉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챋니, 자네도 참 둔감하기 이를 데 없구먼. 내가 보니, 오래전부터 놈이 취아를 살펴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었거든.”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뭐가 그렇다면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뻘 짓만 하다 끝날게 뻔하거든. 첫째 놈도 취아를 마음에 두고 그렇게 공를 들였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하물며 취아보다 훨씬 더 어린 녀석이 까불어 봐야 그 아이가 눈썹 하나 까딱하겠나?”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질녀의 취향이 연하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보니 그 녀석 꽤 괜찮은 놈인 것 같던데......”
“흠,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겠지. 첫째 놈이야 상심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일찍 왔군. 나는 동생이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올 줄 알았는데 말일세.”
묵향은 요즘 저녁쯤에 문병을 핑계로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함께 가볍게 한잔 마시고, 만통음제의 금에 맞춰 피리로 합주(合奏)를 즐기는 것이 요 며칠간 그들이 해 온 저녁 일과였다.
“아, 형님하고 함께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요즘 방에만 계셔서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실 거 아닙니까? 그런대로 몸도 쾌차하신 것 같은데. 저하고 같이 바람이나 쐬러 나가시죠.”
만통음제는 묵향의 제안이 솔깃한 모양이다.
“그럴까?”
마음이 동한 만통음제는 금(琴)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객잔 문을 나선 그가 어딘가로 가려고 하자 묵향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끌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저하고 바람 쐬러 가자니까요.”
“갈 때 가더라도 추이ㅏ에게 말해 놓고 가야 할 거 아닌가?”
설취에게 행선지를 얘기하고 오겠다는 말에 묵향은 한심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아니,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면서 제자한테 그런 보고까지 올려야 합니까?”
묵향이 ‘보고를 한다’는 식으로 비꼬자, 만통음제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텐데......”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라구요. 그래야 사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생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라져서 언제 돌아오겠다” 이렇게 말해 놓으면 “해방이다!” 하면서 열심히 놀 게 당연하죠. 안 그래요?”
“흠,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조금 억지스런 주장임에도 만통음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괜히 쓸데없는 것으로 입씨름 해 봤자 입만 아프다. 사실 묵향이 한 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이기려고 들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우기는 것이 언제나 보면 별 볼일 없는 사안이었기에 그냥 져 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화도 여자랍니다
제령문도들이 묵고 있는 장원은 양양성의 동문 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10여 필에 달하는 말과 수십 명에 달하는 제령문 식솔들이 지내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더군다나 장원에는 무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작은 연무장까지 달려 있었다.
연무장에서 치열한 비무를 하고 있는 남녀. 바로 서량과 설취다. 서량은 폭풍검이라는 명호답게 마치 폭풍과도 같은 사나운 검세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에 대적하는 설취는 구름 사이로 꽃잎이 날아다니듯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검으로 맞서고 있다.
나이는 설취가 일곱 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검술은 서량 쪽이 훨씬 더 깊이 있게 깨닫고 있는 상태다. 설취의 경우 서량과 달리 문파의 대를 이을 필요가 없는 만큼, 만통음제가 그녀의 수련을 심하게 닦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격차였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설취도 대사형인 냉파천처럼 뼈를 깎는 수련을 시켰다면 서량에게 그리 심하게 뒤처지지는 않았으리라.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스니다.”
그렇게 말한 서량은 재빨리 옆쪽으로 달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수건을 가져다가 설취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서 공자.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정말 기분 좋네요.”
“시원한 거라도 가져오라고 이를까요?”
그걸 마시면서 잠시 담소라도 나주자는 말이다. 하지만 설취는 살짝 하늘을 살펴본 뒤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이만 가 봐야겠어요. 사부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테고, 더 이상 서 공자의 시간을 뺏는다는 것도 염치 없는 짓이니 말이예요.”
서량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손을 저었다.
“시간을 뺏는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설 소저.”
“패력검제 대협께서 출타하신 후, 서 공자께서 문파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신다고 듣었는걸요, 그걸 잘 알면서도......”
“전혀 패가 되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참, 오랜만에 오셨는데, 조 소저와 얘기라도 나누고 가시죠. 요즘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꽤 적적해 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조 소저의 말벗이요?”
설취의 반문에 서량은 아차 싶었다. 설취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말을 돌리다 보니 실수를 한 것이다.
근래 조령은 패력검제로부터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패력검제는 조령과 사제지간을 맺지 않았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무공만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별 볼일 없는 무공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패력검제가 조령을 자신의 정식 제자로 삼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융는 그녀의 정체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량은 조령과 사형제지간이 아닌 그냥 아버지의 손님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조령의 나이 스물 둘. 일반적인 여성의 나일 봤을 때는 꽤나 나이 먹은 축에 들어가겠지만, 이곳 무림에서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웬만한 명가의 여식들이라면 무공수련을 끝내고 출도할 때의 나이가 가볍게 서른을 넘겨 버리니 말이다.
더군다나 설취의 경우 제자까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제자인 송화의 나이가 조령과 엇비슷할 정도니, 설취에게 조령의 말벗이나 해 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 실례되는 부탁일 수도 있다. 일단 말을 꺼내 놓은 상태에서 그걸 깨달은 서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저,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조 소저가 여기 와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또 지금 아버지도 안 계신 만큼 뭔가 조언을 청할 상대도 없고, 그래서 설 소저께서 조 소저를 젲처럼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안맞는 횡설수설이다. 하지만 상대가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이해하짐 못할 설취가 아니다 그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서 공자께서 조 소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군요. 패력검제 대협께서 안 계신 동안이라도 제가 신경 써드릴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조 소저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요?”
서량은 부랴부랴 아랫사람을 불러 조 소저가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에게 알아본 결과 두 시진쯤 전에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서량은 그녀의 행방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제법 실력 있는 호위 무사가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이리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조령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계속 아랫사람을 불렀던 것은 조금이라도 설취와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조령의 행방을 알 수 없자 설취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무 늦어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조 소저하고는 다음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볼게요.”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대로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지, 설취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량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염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게 말하며 사부의 방문을 열었지만, 설취의 예상과 달리 만통음제는 방 안에 없었다.
“어디에 가셨지?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네.”
그녀는 급히 물을 끓였다. 몸이 불편한 사부에게 향긋한 차를 올리기 위해서. 하지만 뜨겁게 끓인 물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기다려도 사부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이리저리 객잔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만통음제의 모습은 객잔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셨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 갔다. 비록 상처를 입어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천하에 자신의 사부를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설취였다. 그랬기에 사부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을 하지 않고, 잠시 밖으로 산보를 나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고 있는데도 만통음제가 돌아오지 않자 설취의 미간에 근심의 기색이 살짝 떠올랐다. 밤이 되면 묵향 사숙이 매일처럼 그래왔듯이 술병을 들고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만큼 사부는 어딘가 볼일이 있어 나갔다고 해도 밤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옆에서 보면 샘이 날 정도로 묵향에 대한 만통음제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설취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초조한 모습으로 방 안을 서성거리던 설취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가 저물어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사부는 물론이고 매일처럼 모습을 드러내던 묵향 사숙마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설취는 숙소를 나와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자신의 사부가 묵향 사숙이 있는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사부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사부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장인걸에게 워낙 호되게 당했었기에 상처가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의생이 만통음제의 몸에서 잘라낸 썩은 살덩이만 해도 한 근은 족히 되었을 정도였으니, 그런 치명상을 당하고도 목숨을 건진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었다.
마교의 무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설취는 사부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마화를 찾았다. 양양성에서 하루 이틀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모시는 분들끼리 서로 호형호제를 하다 보니 그녀들도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설취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화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점차 잊혀져 가던 자신의 첫사랑이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중년의 나이라고는 해도 아직 누군가와 사랑의 감정을 공유해 보지 못했던 설취로서는 조금씩 되살아나는 예전의 감정을 당혹스런 마음으로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묵향에 대한 마화의 짝사랑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정 때문인지. 설취는 그런 마화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마화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간 설취는 그녀를 보자 반갑게 안사했다.
“저 왔어요, 언니.”
“어, 왔니? 어서 와.”
하지만 말과 달리 마화의 안색은 썩 밝지 못해따. 어떻게 보면 “꼴 보기 싫은 데 너 왜 왔니?”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설취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평상시에는 몰랐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마화가 아주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저... 시간을 잘못 택해 온 것 같네요. 저는 그만 가 볼께요. 별로 다른 볼일은 없었고... 지나가다가 언니 얼굴이나 볼까 해서 온것뿐이예요.”
허둥지둥 밖으로 다시 나가려는 설취와 옷섶음 꽉 잡아당기며 마화가 급히 말했다.
“기왕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저... 그렇지만 언니 기분도 별로 안좋으신거 같고......”
“내가?”
그제야 마화는 아차 싶은 모양이다. 무심결에 설취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기왕에 찾아온 손님을 이대로 보낼 수e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년는 될 수 있으면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털털하게 말했다.
“내가 성격이 좀 그래서 그래. 방금 전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든. 너 때문에 그런거 아니니까 들어와서 차나 한잔하고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잖아. 응?”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그럴까요?”
설취는 마화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이곳으로 온 용건부터 슬며시 꺼냈다.
“언니, 혹시 사부님께서 여기 오시지 않으셨어요?”
“글세. 잘 모르겠는......”
여기까지 말하던 마화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눈치 챘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생각 한 바를 설취에게 말했다.
“아마 교주님하고 같이 계실 거야. 교주님께서 말을 두 필 끌고 나가셨거든.”
평상시 묵향은 말을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을 타고 이동해 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 두 필을 끌고 나갔다는 것은. 곧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교주... 사숙님하고요? 사숙께서는 어디에 가셨는데요?”
마화는 설취가 마실 차를 끓이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상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옥화무제를 만나러 만현으로 가셨어.”
설취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만현에요? 아주 급한 볼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지금까지 사부님께서 어딜 가실 때면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곤 했는데, 이번엔 저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가신 걸 보면......”
설취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는 마화의 목소리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급한 볼일이라기보다는 그건 교주님께서 흔히 쓰시는 방법이야. 교주님께서는 자신의 행선지나, 행동할 예정을 수하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시거든. 상관의 움직임을 부하들이 정확하게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부하들이 게을러진다는 게 그분의 지론이시지.”
별 해괴한 지론을 다 들어 본다고 생각하며, 설취는 되물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걸 아는거 하고, 게을러지는 게 무슨 연관이 있죠?”
“상관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부하들이 마음 놓지 못하고 계속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지, 아마.”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설취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마화는 콧방귀를 뀌며 툴툴거렸다.
“흥! 일리가 있기는 뭐가 있어? 그분이 그런 짓 안 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해. 그리고 그분도 그걸 잘 알고 있고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건. 교주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얄팍한 잔꾀라구.”
오랜만에 성깔을 드러내고 있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마화는 차가 끓자 설취에게 따라줬다. 그런 다음 어디선가 술병 하나를 가져온 뒤 자신의 잔에는 차 대신 술을 가득 따르는 것이었다.
“미안, 나는 차보다는 이게 좋아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던 설취는, 한 번에 쭉 들이켠 다음 또다시 찻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마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렇게 기밀을 요하는 일은 아니냐. 그냥 황도에 갈 일이 생겼는데, 모두들 서로 가겠다고 경쟁이 붙어서 말이지.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화가 왜 저기압인지 알 수 있었다.
“황도에 가지 못하게 되셔서 그런 거군요?”
마화는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정당하게 경쟁에서 졌다면 내가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아, 글쎄 나는 부대주니까 제비를 뽑을 자격이 없다고 하잖아. 쪼잔한 놈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만 제비를 뽑더라구. 하는 짓이 너무 치사하지 않아?”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녀와 가장 친한 임충(任充)이었다. 임충은 이 임무는 천인장이 할 일인 만큼, 부대주인 마화는 빠져 달라고 냉담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때의 뻔뻔하기 그지 없었던 임충의 낯짝을 생각하면 너무 분해서 절로 이빨이 뽀드득 갈리는 마화였다.
설취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황도에 무척 가고 싶으셨던 모양이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무 일도 없고 너무 심심하잖아. 얼마 전에 한바탕 벌어졌던 것도 교주님 혼자서 쓱싹 끝내 버렸고 말이야. 모두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황도에 가면 그러니까... 시장에서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으면 사기도 하고......”
마화의 얘기를 듣는 순간, 설취는 곧바로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화가 내심 묵향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설취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아마 그 때문에 황도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는 제대로 된 장신구 하나 구입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죠. 사실 여기는 너무 물건이 없잖아요? 거기 가면 예쁜 속옷도 많을 텐데......”
미끼는 던져졌고, 마화는 아무 생각 없이 덥석 그 미끼를 물었다.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맨날 산간벽지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에휴!”
아무리 선머슴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도 여자다. 그것도 사모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묵향 앞에서라면 언제까지라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마화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가시는 분께 예쁜 거 좀 사 오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마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 그놈도 숙맥이라서 그런 가게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더군다나 창피하게 속옷을 사다 달라고 어떻게 부탁해. 에휴, 내 팔자야.”
설취는 이런 마화의 털털한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마화가 투덜거리는 모습을 환히 웃으면서 바라보던 설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좀 드릴까요? 비단으로 된 건데. 감촉이 아주 좋아요.”
“정말? 그런데 동생도 입어야 하잖아?”
반색을 하며 좋아라하다 곧 고개를 흔드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그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예전에 서역에서 온 상인에게 한 번에 많이 산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 입을 거 많아요.”
“그럼 좀 부탁해도 될까?”
마화가 좋아하는 모습에 미소 짓던 설취가 뭔가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
“근데 사숙께서는 언제 돌아오실 것 같아요?”
갑작스런 설취의 질문에 마화는 난처한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세, 워낙 대중없이 움직이시는 분이시라서...... 짧으면 3일, 길게 잡으면......”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네. 몇 달 후, 아니 어쩌면 몇 년 후라도 불쑥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라서 말이야. 가장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셨던 기록은 24년 3개월이야. 모두들 돌아가신 줄 알았지.”
그 말에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요?”
“정말이야. 그동안 뭐 하셨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야. 그런 부분은 통 말씀을 안 하시거든.”
“사숙께서 속마음을 드러내시지 않아서 섭섭하신가 봐요.”
설취는 이제 비어 버린 자신의 찻잔 가득 술을 따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저도 오랜만에 한잔해도 되죠? 돌아가 봐야 객잔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에요.”
“큭큭. 좋지!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마셔 볼까?”
마화는 설취가 내민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양양성을 떠난 묵향과 만통음제는 관도를 타라 의창(宜昌)까지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 장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강삼협(長江三峽)의 장관이다. 경치만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배라도 한 척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유람이 되겠지만, 묵향은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옥화무제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에 시간 내에 만현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창에서 만현까지 육로를 이용해 달려갔다. 그 길은 절벽의 중간을 뚫어 내놓은 것이었기에 경치는 멋있을지 몰라도, 담이 작다면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한 가닥 길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벌벽이요. 그 반대편은 천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 싯누런 흙탕물이 마치 황룡이 용트림이라도 하듯 웅장한 기세로 흘러간다. 절벽 위쪽에서 작은 돌 조각이라도 아래로 떨어지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운 것이 사실이지ㅣ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한순간에 잊혀질 정도로 황홀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습니까, 형님 꽤 근사하죠?”
풍류를 즐기는 만통음제인 만큼 중원 곳곳에 경치가 좋다는 곳치고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물론 여기도 몇 번씩이나 와 봤었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지만 묵향의 표정을 바라보니 그는 이곳에 처음 와 본 듯했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 만통음제는 마치 이곳에 처음 와 본 듯 장단을 맞춰 줬다.
“호오, 정말 아름다운 곳이로구먼. 그런데 동생은 이런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나?”
경치를 둘러보면 흡족해하는 만통음제의 모습에 묵향도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마교의 정보 조직도 때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하 놈들 보고 양양성 근처에 경치가 괜찮은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여기를 권하더군요. 관지 녀석의 말로는 처음 시작하는 경치가 그러니까 뭐라더라? 하여튼 그런 게 있는데, 세가지 경치가 순서대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라 어떤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대로 시간내서 구경해 볼 만은 하죠?”
묵향다운 말에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 지으며 절경을 감삼했다. 사실 지금 지나가고 있는곳이 서릉협(西陵峽)의 절경이고, 계속 해서 무협(巫峽)과 구당협(瞿塘峽)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인들이 붙여 놓은 그런 명칭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위의 경치에 반응하여 가슴 가득 솟구쳐 오르는 이 진한 감동이 더욱 중요한 것이거늘.
더군다나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자신을 위해 마교의 정보 조직까지 움직인 것 같아 그 마음 씀씀이에 만통음제의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다.
“세 가지 경치면 어떻고, 여섯 가지 경치면 어떤가? 이 아름다운 경치보다 훨씬 좋은 동생이 있는데 말일세.”
말을 잠시 멈춘 만통음제는 품속에 손을 넣어 술병을 꺼내며 환히 웃었다.
“허허, 그리고 여기 술이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
“물론입니다, 형님.”
두 의형제는 호탕하게 웃음과 술, 그리고 서로 간의 추억을 나누며 만현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점쟁이와 사이비 도사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민심이 워낙 흉흉한 데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사이비 도사나 점쟁이에 의지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금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여 약탈을 벌이는 바람에 크나큰 공욕을 치른 하남성의 대도시들 중 하나인 낙양(洛陽).
과거에 일어섰던 대 제국들의 황도였던 낙양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하고 화려했다. 그런 낙양의 뒷골목에는 수십, 아니 수백 군데가 넘는 점을 쳐 주는 점집이나 도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 바로 태을복술원(太乙卜術院)이다.
태을복술원을 운영하는 태을진인(太乙眞人)은 화산에서 수십년 동안 도를 닦아 천기를 읽고, 인생의 길흉화복을 빤히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낙양의 고위 관료들도 점을 치기 위해 줄을 설 정도라는 그는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점괘를 뽑지 않는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태을복술원에 들어가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손님들이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은 넓은 방에 앉아 향긋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계집종이 다가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태을진인의 방에 들어가면 방 한쪽을 가득 베울 정도로 거대한 원시천존의 족자가 걸려 있고, 한 속에는 불잔을 든 태을진인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주역과 산통이 놓여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산통 옆에 지필묵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을진인이 말을 건네자 손님으로 들어온 중년 부인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일반 점집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이다. 형형색색 무서운 귀신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도배된 벽에 위압적인 모습으로 지성을 보이라는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도를 닦아서인지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을을 훔쳐보며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낀 중년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땅아이에게 맞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궁합이 어떤지......”
태을진인은 붓에 먹물을 듬뿍 찍으며 다시 물었다.
“상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태을진인은 선이 들어온 상대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각은 물론이고 상대가 거주하는 주소까지 꼼꼼하게 계속 질문하며 기록해 나갔다. 어느 정도 질문이 끝나자 기록된 종이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따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길일을 택해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점괘를 뽑아야 하기에 10일 정도 후에야 점괘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년 부인은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반 점집은 방울 몇 번 흔들고, 정성부터 보이라며 돈을 요구하는 게 관례인데 태을진인은 뭔가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딸아이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길일까지 택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점을 치겠다니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저, 복채는 얼마나 드려야 할지......”
불잔을 흔들며 눈을 감고 있던 태을진인이 그 말에 가만히 눈을 떳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허, 도를 깨쳐 부귀영화가 한줌의 티끌처럼 보이는 빈도에게 복채라는 말을 하시다니...... 속되고도, 속되도다. 무량수불.”
그 말에 황급히 중년 부인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 좁은 여인네의 말인지라 새겨듣지 마시고, 진인님의 도력에 감복하여 저의 정성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그때서야 태을진인의 찌푸려졌던 안색이 조금 펴졌다.
“무량수불, 부인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밖으로 나가시면 총관이 있으니 그에게 말씀하시지요.”
중년 부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중년 부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태을진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방금 전에 기록한 봉투를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고 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자리에 걸터앉은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점 한 번 보는 데 얼마라고 말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수작이다. 점집이나 도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군데를 다녔겠는가. 첫 봐서 돈 푼 꽤나 있게 생긴 사람들은 적당히 그럴듯한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 물론 날로 그냥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밖의 총관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방금 나간 중년 부인은 앞으로 자주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태을진인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다음 손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호화로운 복장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인이 자리에 앉자 태을진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왕 대인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점괘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차, 얼마 전에 친 점괘를 받으러 오셨군요.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자리 옆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수백 통이 넘는 봉서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태을진인은 빠르게 봉서들을 뒤져 왕대인의 것을 찾아냈다. 물론 왕대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여진 서랍 안이었다.
“허허, 점괘가 아자 잘 나왔습니다. 왕대인의 운이 이제야 상승세를 타는가 봅니다. 무량수불.”
점괘가 잘 나왔다는 말에 왕대인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봉서를 받아 든 왕대인은 말없이 품속에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낙양 인근에서 가장 신용도가 뛰어나다라는 낙양전장에서 발행한 은자 50냥짜리 전표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허허, 뭘 이런 것을......”
“태을진인께서 애써 점괘를 잘 뽑아 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점잖게 사양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태을진인은 어느샌가 탁자위에 놓인 전표를 집어 품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봉서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 점을 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태을진인은 봉서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본 후,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 경우는 길일이 언제일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일단 오늘 밤 천기를 지어 본 후, 점괙 나오면 그때 댁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복채(卜債)는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허허, 이 바닥의 가격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점괘가 잘 맞늗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그 말에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전표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점괘의 선금 은자 천 냥이오. 점괘가 흡족하게 잘 나온다면 잔금으로 은자 천 냥을 더 드리겠소.”
은자 천 냥이면 동전으로 따졌을 때 무려 19만 2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태을진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왕대인이 바로 앞에 앉아 있기에 그 정도 감정 표현에 그쳤던 것이다.
“호오, 잘 알겠습니다. 왕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확실하게 점괘가 나오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용건이 다 끝나자 왕대인은 지체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태을진인은 봉성에 왕 대인의 이름을 기록한 후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큰 건이 걸렸기에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밖을 향해 다음 손님을 모시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며 새파랗게 질린 시종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왠 손님께서 진인을 뵙겠다며 막무가내로, 큭!”
이때, 왠 커다란 손이 나타나 시종의 머리통을 붙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우당탕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한의 얼굴을 본 태을진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재빨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총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게. 오늘 영업은 끝이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태을진인은 문빡으로 나가 나뒹굴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곧 차를 내오고, 총관에게 말해 주위에 사람이 얼씬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을 하라 전하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은 태을진인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후다닥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예, 나으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태을진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장한은 거대한 도(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라도제 대협.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왕립하셨는지......?”
질문을 던지는 태을진인의 목소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기로 수라도제는 양양성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있는 수라도제는 또 누구란 말인가?
무엇보다 중원 무림을 움직이는 거물과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을진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낙양에 들렀을 때, 무영문에서 파견 나와 있던 인물이 혹시 연락할 사항이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된다고 했기에 찾아왔네.”
“아, 예. 그렇다면 무슨 점을 치시... 죄송합니다.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태을복술원은 무영문이 정보를 사고팔기 위해 천하에 깔아 둔 지부 중 하나였다. 물론 점을 치는 시늉을 하며 점괘를 뽑아 주는 것도 무영문의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해 주는 것이다.
“노부는 소림사 내부의 정확한 건물 배치도를 원하네. 그리고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들어갈 수 있는 침입로도 알려 주면 고맙겠군.”
여기까지 말한 수라도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을진인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래 이 정도를 알아보려면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수라도제의 짓궂은 질문에 태을진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참회동까지 들어가기 위한 침입로라니...... 설마 소림사의 담이라도 넘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점쟁이를 상대로 하니 확실히 말하기 편하군. 내 의중을 그렇게 빨리 알아채는 것을 보니 말일세. 그래, 언제까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는데.”
그 말을 듣자 뭘 떠올렸는지 태을진인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직접... 가실겁니까?”
“물론.”
“월담하지 않으셔도 대협의 신분이시라면 충분히......”
전에 월담을 했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그런 조언은 해 줄 필요가 없네.“
덤덤한 수라도제의 말에 태을진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천하의 수라도제가 소림사의 담을 넘었다가 붙잡혔다니 누가 그걸 정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태도였다. 이렇게까지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아무리 소림사라고 하지만, 대협께서 월담하시는 것을 알아채다니...... 정말 놀랍군요.”
수라도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세. 방장실 근처를 통과하는 침입로를 택한 노부의 멍청함 때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장실 근처가 소림사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니 말이다.
태을진인은 잠시 망설였다. 정보를 제공해야 하나? 아니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나? 만약 소림사 내의 침입로를 자신이 가르쳐 줬다는 것을 소림사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천하 무학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와 적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수라도제가 어떤 의도로 소림사의 담을 넘느냐 하는 것이다. 좋게 끝날 일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피를 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영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을진인은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의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의자 뚜껑 안에다가 머리통을 집어넣기라도 할 듯 가까이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이봐! 소림사 내부 배치도 한 장 올려 보내 줘. 대충 그려 놓은 걸로 말이야.”
그러자 놀랍게도 의자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부 배치도는 뭐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려 보내!”
잠시 후, 의자 안쪽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이 뛰어 올라왔다. 아마 의자 밑의 구멍을 통해 지하 밑쪽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태을진인은 그 종이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쭉 펼쳤다. 소림사내의 건물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배치도였다. 태을진인은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어떤 방향으로 침입하면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갈 수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워나던 것을 얻었기 때문인지 수라도제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지도를 잘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을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신신당부했다.
“한 가지 꼭 지켜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드린 정보가 무영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발설치 말아 주십시오.”
“염려하지 말게. 노부도 그 정도는 잘 아니까. 그나저나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는가?”
태을진인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소림사 건물 배치도 한 장을 나눠 준 것이 그렇게 큰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원본도 아니고 사본 한 장인데, 뭐가 그리 소중하겠는가. 이런 거물을 상대로 어설프게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빛으로 만들어 두는 게 훨씬 좋겠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해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고맙게 받겠네. 선물에 대한 보답은 다음에 꼭 하도록 하지.”
용건이 끝나자 수라도제는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수라도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태을진인은 긴장감이 풀리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튕기듯 일어난 태을진인은 의자 뚜껑을 열어젖히고 밑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봐, 문주님께 전할 특급 정보다.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
“뭐? 수라도제가 소림사에는 왜?”
“나도 몰라. 월담을 한 대.”
“......!”
더 이상 밑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수선해진 실내를 치운 시종이 문짝을 새 걸로 다시 바꿔 달았다. 태을진인은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는 정보를 급하게 무영문 총단으로 보낸 뒤 차분히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흠, 양양성을 책임져야 할 수라도제가 왜 이곳에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넘는 침투로를 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나라와의 일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은 낙양에 있는 자신도 아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수라도제가 누구인가. 양양성에 운집한 정파인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타 넘는 방법을 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수라도제와 마교 교주가 부딪칠 뻔했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저 서로 노려보다 끝나긴 했지만 그 뒤로 수라도제가 칩거에 들어갔다는 정보였었따. 서문세가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탓인지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분면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갑자기 태을진인이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어쩌면 그때 치열한 기 싸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범이이 상상하기도 힘든 경지를 개척한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수라도제는 그때의 싸움에서 큰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칩거에 들어간 것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함이고, 소림ㅅ의 담을 타 넘으려 하는 것은 영약으로 유명한 대환단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맞다. 대환단!”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리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소림사에서 그 귀한 대환단을 순순히 내줄 리 없다. 그러니 그는 담을 넘어가 대환단을 훔치려는 속셈인 모양이다.
“젠장. 괜히 지도를 준 것 같군. 그걸 들고 대환단을 훔친 게 밝혀지면 나는 끝장이잖아.”
태을진인은 거칠게 의자 뚜껑을 열고 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양양성의 서문세가에 대한 최근 정보들 좀 올려 보내!”
와장창.
그때 갑자기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의자 뚜껑에 머리를 박고 소리치던 태을진인은 흠칫 굳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새하얗게 굳었다. 또 한 명의 거물이 출현한 것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패력검제 대협.”
“흠, 여기에 오면 노부가 알고 싶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패력검제는 뭔가 근심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초췌했다. 현천검제와 헤어져 근방의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신수(神獸)에 정통한 학자들을 탐문해 보았지만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따. 그렇기에 중원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낙양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패력검제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괴이지(怪異誌)에 정통한 학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게.”
“괴, 괴이지요?”
천하에 산재한 신기하고 괴기로운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괴이지다. 잡학으로 치부되다 보니 괴이지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학자는 없다. 더군다나 화경급 고수가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를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태을진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학자를 왜 찾으십니까? 어느 정도 내용을 알아야 그에 알맞은 정보를 드릴 것이 아닙니까?”
잠시 주저하던 패력검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든 이무기든 신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필요한 걸세. 그 이유는......”
여기까지 말하던 패려검제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괜히 황금색 괴물을 만났다는 말을 꺼냈다가 미친놈 취급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유는... 더 이상 묻지 말게.”
아르티어스를 만난 이후, 패력검제의 내심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설로만 치부되던 용을 직접 목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청룡이니, 백호니, 주작이니, 현무니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뭔지느 모르겠지만 진짜로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괴물이 사람으르 변신하기도 하고,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한순간에 살려 내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 왔던 관념의 룰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니 태상도군이니 하는 것도 사실일 수 있지 않을까? 패력검제는 전설로 내려오는 것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무예의 끝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쪽으로 정통한 학자를 찾아 자문을 구하려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패력검제를 본 태을진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뚜껑을 열었다.
“이봐! 지금 당장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들을 찾아 명단을 올려줘!”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별걸 다 찾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좋이 한 장이 튀어 올라왔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든 패력검제는 태을진인을 보며 물었다.
“정보료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태을진인이 패력검제를 힐끗 보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달라고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한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하겠는가.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태을진인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흠. 자네 제법 마음에 드는군. 자주 찾아오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신형을 날린 패력검제는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태을진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디만 좀 전에 훔쳐본 패력검제의 싸늘한 눈빛에 그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군. 갑자기 이런 거물들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이 부서진 문짝을 치우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놔두게. 또 어떤 놈이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야.”
거칠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태을진인은 문득 자신의 신상에 뭔가 변화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두 거물이 연달아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이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젠장,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가서 점이라도 쳐 볼까?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명대로 살기 힘들 것 같은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태을진인의 머릿속은 벌써 낙양에서 소문난 점집을 찾아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곤륜파를 끌어들여라
만현에 도착한 묵향은 만통음제를 데리고 그곳에서 가장 좋은 객잔으로 들어갔다. 만통음제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3일에 걸친 유람이 조금 힘들었던지 만통음제는 운기조식을 끝낸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묵향은 점소이를 불러 술상을 봐 오라고 이른 후, 달을 벗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탁자 위에는 술잔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세 번째 술병이 비워져 갈 무렵, 옥화무제가 우아한 몸놀림으로 밤하늘을 가르며 객잔 담을 넘어왔다. 그녀는 도착함과 동시에 묵향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새침한 어조로 따지기 시작했다. 등뒤로는 긴장으로 인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 그녀는 더욱 새침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낮에도 시간은 충분한데, 꼭 밤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묵향은 그녀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며 딴청을 부렸다.
“만나자마자 그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자 한 잔 하라구.”
“당신에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죠? 하지만 나 아주 바쁜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이런 산골짜기로 불러내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아아, 덕분에 구경 잘하면서 왔을 텐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바쁘게 일만 하다 보면 일다 잘 풀리지 않고, 성질만 더러워이잖아. 그래서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라고 이쪽으로 불렀지. 어때, 내 배려에 감사하지 않않아?”
‘헉! 뭔가 분위기가 수상쩍은데......’
상대가 평상시와 달리 너무 능글맞게 나왔기에 옥화무제는 간이 콩알만 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너무 다른 상대의 행동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일부러 이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래, 시험이 분명해!’
그렇게 마음을 정한 옥화무제는 최대한 평상시 그를 대하던 것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음의 불안 때문이었는지 평상시보다는 많이 퉁명스러웠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를 부른 용건이나 어서 말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를 직접 봐야겠다고 요청한 거냐 이 말이예요?”
“허, 미인의 입에서 이런 쌀쌀맞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이렇게 감성이 메말랐을 줄이야. 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라구 얼마나 아름다워? 은은한 달빛에......”
하지만 묵향의 말은 옥화무제의 신경질적인 어조에 가로 막혔다.
“정말 계속 흰소리만 할 거예요? 댁한테 그딴 감성 없다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이런, 그대야 말로 나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군. 나는 그렇게 메마른 사람이 아니야. 삶이 나를 그렇게 보이게 했을 뿐이지.”
묵향은 품속에서 피리를 꺼낸 다음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옥화무제는 이 인간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저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싸늘한 표정도 잠시, 묵향이 피리를 불기 시작하자 싸늘함은 놀라움으로, 놀라움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피리 소리에 빨려 들어간 듯 몽롱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
그녀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녀가 묵향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기억을 잃은 현경급 고수가 옥영진 대장군과 함께 청성루에 왔다는 총관의 보고에 그녀는 다급히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었다. 그때 그녀는 그곳에서 처음 묵향의 탄금을 들었다. 어지간한 예인(藝人)은 감히 연주를 하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청성루였다. 하지만 그때 들은 묵향의 탄금 실력은 청성루에서도 특급으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다.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날카로웠던 그녀의 마음도 평상시와 같아졌고.
“음공(音攻)을 익혔나요?”
잠시 피리 소리가 멈췄을 때 옥화무제가 별 생각 없이 건넨 질문이었는데, 그게 묵향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묵향은 피리를 품속에 신경질적으로 집어넣으며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겨우 사람 하나 죽이자고 음(音)을 이 정도까지 익히는 사람을 봤나? 그런 말은 나나 형님에게 모욕이라구.”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말을 끊고 싸늘한 눈길로 옥화무제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묵향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아주 사무적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방금 전의 불쾌함도,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느낀 뻔뻔함을 가장한 다정함도 없었다.
“장인걸의 정확한 위치, 그리고 그놈에게 위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 놈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모든 전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 정보를 언제까지 제공해야 하죠?”
“놈이 죽을 때까지.”
옥화무제는 상대의 제안을 생각해 보는 척하면서 묵향의 안색을 살폈다. 왜 갑작스럽게 이렇게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일까? 처음부터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불쾌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처음에 친한 척 다정하게 말했던 것은 또 무슨 수작이었던 것일까?
워낙 생각이 많은 그녀였기에 태연을 가장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는데, 그와 상관없는 별의별 잡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잡념을 쫓듯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꽤나 힘든 의뢰로군요. 좋아요. 서로 협정도 맺은 사이니 싸게 해 드리죠. 매월 황금 백 냥이에요.”
황금 백 냥이면 은자로 치면 2천 냥이다.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오랜 세월 정보 장사를 해 온 그녀였는지라 그녀의 입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시불이 아니라 매월이라면 엄청난 금액이로군.”
“이쪽도 땅 파 먹고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그만한 값어치는 한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오랫동안 시간만 끌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담이 갈 금액도 아니잖아요?”
“좋아. 양양성에 들어가면 매월 은자 2천 냥씩 그쪽에 지급하라고 명령해 두지. 그리고 또 한가지, 요 근래 무영문에 요청했던 자료들 말인데......”
그말이 나오자 옥화무제는 내심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 근래 행해졌던 작전에 대해 될 수 있으면 마교와 팽가간의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지시 하에 정보를 조금 왜곡해서 보냈었다. 그걸 묵향이 눈치 챈 것일까?
옥화무제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반문했다.
“본문에 요청한 자료라구요?”
“그래.”
“그런 게 있었나요?”
옥화무제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맹한 어조로 되물었기에 묵향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중요한 자료인데, 저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이봐, 본교에서 요청한 자료인데, 어떻게 모르고 있을 수가......”
“그쪽은 현역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딸한테 문주 자리를 물려주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라구요. 내가 꼭 알고 싶어하는 정보가 아닌 한, 모든 것은 딸아이가 처리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다면 모르고 있었나?”
“물론이예요 그런데 뭐가 불만이라는 거죠? 당신이 뭔가를 원한다는 공문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답신이 안 왔다는 거예요? 아니면 이쪽에서 보내 준 정보의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예요?”
‘그 일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묵향은 옥화무제의 눈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결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순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묵향은 옥화무제에 대한 혐의를 풀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이 원한 정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옥화무제가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묵향은 다른 의미에서 그녀가 전해 준 정보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만큼 이 일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묵향에게 전해 주는 정보를 약간이라도 왜곡해놨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흐음, 받기는 했는데 너무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이라......”
옥화무제를 빤히 바라보던 묵향은 소연이 중상을 당했던 그 작전에 대해 무영문이 확보해 놓은 모든 자료를 워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대로 총관을 불러 지시해 놓겠어요. 이쪽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해 주라고 말이예요.”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호오, 정보의 여왕이라는 그대가 나한테 물어볼 일이 있다니 놀랍군. 그래, 뭐야?”
비꼬는 상대의 어조에 그만 둘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중원 각지에서 혈겁이 벌어지고 있어요. 혹시 그쪽의 작품이가요?”
자신이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게 불쾌한 모양인지 묵향의 어조는 퉁명스러웠다.
“나는 금시초문이야.”
“그렇게 믿겠어요.”
둘의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옥화무제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놈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이 평정되자, 평상시와 같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묵향의 행동이 아주 불쾌했다. 꼭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가만히 눈치를 보니 묵향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술만 들이켜고 있을 뿐, 더 이상 자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처음에는 은근슬쩍 다정하게 대하는 척하더니 이쪽에서 조금 튕겼다고 그걸로 끝이다.
‘속 좁은 인간 같으니라구......’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 쪽에서 분위기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홀가분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 봐야겠군요. 나도 바빠서 말이예요.”
“좋을대로, 하는 일 잘되기를 바래.”
그녀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덕담을 해 준 보답으로 한 가지 알려 드리죠.”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묵향의 시선이 옥화무제에게로 옮겨갔다.
“무림맹에서 곤륜파로 사람을 보앴어요.”
묵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꽤나 대단한 정보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하나 보냈다고 하니 황당했던 것이다.
“맹에서 곤륜파에 사람을 보낸 게 나한테 생색을 낼 만큼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묵향의 반응에 옥화무제는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항변했다.
“물론 문파에 심부름꾼 하나 보내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누굴 보냈으냐 하는 게 문제겠죠.”
그 말에 묵향은 아차 싶었다.
“그래, 누굴 심부름꾼으로 보냈는데?”
옥화무제의 눈이 야비하게 반짝 빛났다. 이 순간을 위해 서두를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무료 봉사는 여기까지. 방금 전에도 말했죠? 한 가지만 알려준다구요. 나머지를 알고 싶으면 돈을 지불하든지, 아니면 직접 알아보세요.”
화사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 거였지만, 그걸 듣고 있는 묵향의 속은 그녀의 의도대로 확 뒤집혀 버렸다. 무영문이라는 단체 자체가 정보를 사고파는 것이 주업인 만큼, 돈 내라는 것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약 올리듯 하는 말투와 그녀의 표정이 그의 심사를 뒤집어 놨다고 해야 할까?
“젠장, 알았어. 직접 알아보지.”
“어머머, 그게 생각대로 잘될까 모르겠네~ 어쨋건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볼일은 없는 것 같으니 그만 가 볼게요.”
마지막 한마디까지 비꼬아 준 뒤 옥화무제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작은 복수를 할 수 있었기에 무지하게 통쾌했으리라. 어쩌면 그런 식으로밖에 분풀이를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통했을지도 모르지만......
옥화무제가 돌아간 뒤, 묵향은 그녀가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골치만 아파질뿐......
묵향은 양양성에 돌아가는 대로 군사에게 연락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에 대한 해답을 만통음제로부터 얻어 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만통음제는 운기조식을 한 후, 묵향과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슬쩍 물어봤다.
“무림맹에서 곤륜파로 꽤나 거물을 판견한 모양이던데, 무슨 일이라고 형님은 생각하십니까?”
“거물이라... 무림맹 장로급 정도의 핵심을 말하는 건가?”
“예. 대충 그 정도인 모양입니다.”
묵향의 대답에 만통음제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다른 문파라면 몰라도 곤륜파에 그 정도 거물을 파견한 게 사실이라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 도 있겠군.”
“어떤 일 말입니까?”
“곤륜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림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 말일세.”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십니까? 곤륜파야 오랜 옛날부터 무림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강인한 문파였느데요.”
만통음제는 손까지 내저으며 묵향의 말을 부인했다.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전혀 그렇지 않아. 곤륜파는 그 규모와 전력에 비해,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 그 이유가 뭐겠나?”
그건 묵향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인 제공을 한 게 다름 아닌 그가 몸담고 있는 마교였으니까. 십만대산에서 가장 가까운 정파의 거대문파가 곤륜파다. 그렇다보니 곤륜파와 마교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마교가 무림일통을 외치며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당하는 문파 역시 곤륜파였다.
물론 잃는 것이 큰 만큼, 없는 것 또한 많다. 곤륜파만큼 마교의 무공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문파도 없었고, 고수들 간의 실전 경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곤륜의 도사들은 마교도들과 싸우며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쭉정이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형국이다 보니, 곤륜파는 살아남는 데 급급해서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무당파에 버금가는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도 9파1방에 끼지도 못했을까.
“그야 당연히 본교 때문이죠. 맨날 우리한테 줘 터진다고 다른데 한눈 팔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걸세. 그래서 그런지 곤륜파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지. 다른 문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일 뿐더러, 그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안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곤륜파는 오래전에 멸문당했겠지. 문도들의 평균 수명이 곤륜파만큼 낮은 문파도 없으니 말이야.”
묵향은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끈질기기가 바퀴벌레보다 더한 놈들이죠. 본교에게 그토록 오랜 세월 짓밟히고도 살아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곤륜파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그 이유를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본교에서 건드리지 않으니까 힘이 남아도나요?”
되는대로 말한 거였지만,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만통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이토록 흥미를 보이며 경청하자 설명해 줄 맛이 났던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요 근래 수십 년 동안 마교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냈고, 그 덕분에 소모전을 한 번도 치루지 않은 곤륜으로서는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 버린 거지.”
“흐음...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곤륜파가 남아도는 힘을 바탕으로 중원으로 그 세력을 넓혀 올 거다. 이 말씀이로군요.”
“그렇지! 동생 말이 맞아. 하지만 곤륜은 정도를 걷는 것으로 알려진 문파가 아닌가? 그런 만큼 생각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겠지. 다른 문파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파고들어가자면 아무래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우리는 댁들의 영역을 침범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이런 명분을 무림맹이 제공해 준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호오, 얘기가 그렇게 연결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곤륜에 사람을 보냈다는 게 바로 곤륜이 밖으로 나올 명분을 제공한다는 거로군요.”
“이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구먼. 물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정확하게 드러나겠지만 말일세.”
“흠, 곤륜파라......”
예정에도 없던 곤륜이라는 거대 문파의 개입이 현 전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묵향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말없이 생각에 waru 있는 묵향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