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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영지기행
9. 한국 산신 신앙의 메카 설악산 봉정암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 사람은 이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지점에서 두 갈래로 선택이 갈린다. 한쪽은 자살하고, 다른 한쪽은 기도(祈禱)를 시도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기도를 해 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깊이가 있다. 문제는 어떤 장소에서 기도를 하느냐이다. 장소에 따라 기도발(祈禱發)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도는 기도를 하는 사람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영험한 장소의 결합 정도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평소에 기도발 잘 받는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도 삶의 지혜다.
우리나라 한민족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세 가지 종류의 기도노선이 있었다. 그 세 가지 노선은 산신(山神)기도, 용왕(龍王)기도, 칠성(七星)기도였다. 나는 한민족의 기도발 3대 원형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삼신(三神)신앙이다. 이 삼신 신앙의 한참 선배가 도깨비와 민화를 연구한 고(故) 조자용 선생인데, <삼신민고>(三神民考)라는 책을 내면서 우리 민족의 ‘삼신’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당신의 관점을 피력한 바 있다.
산신, 용왕, 칠성은 한민족의 3대 종교적 원형이다. 한민족은 수천 년간 삶의 덫에 걸리면 여기에 대고 빌었다. 수천 년간 그 신앙이 이어져 온 것은 영험이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사람의 기질에 따라, 그리고 그 기도자의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산신기도가 효험이 있을 수 있고, 용왕이나, 칠성이 더 영험을 지닐 수 있다.
▲ 봉정암 주변은 엄청난 골산으로 이뤄져 강력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필자의 어머니는 평생 새벽마다 부엌에서 대접에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칠성기도를 드렸다. 칠성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은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기도를 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해, ‘과연 저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가?’, 마지막에는 ‘인간이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변한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북두칠성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시계이다. 우주의 시계가 북두칠성으로 생각했다. 북두칠성은 매일 시간대마다 6번째와 7번째 별의 방향이 바뀐다. 시계바늘처럼 회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밤 10시쯤 하늘에 걸린 ‘두병’(斗柄,북두칠성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대강 ‘몇 시쯤 되겠구나’를 짐작했다.
칠성을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의 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사람, 시간이 다 된 사람은 이 칠성신에게 빌었다. ‘나에게 시간을 더 주십시오. 시간을 늘려주십시오’라는 부탁이었다. 즉 수명이 짧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칠성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군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칠성판(七星板) 위에 누인다. 마지막 죽을 때는 칠성판에 눕게 되는 셈이다.
산신·용왕·칠성은 한민족 3대 기도 원형
왜 칠성판인가? 북두칠성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이다. 이제 시계태엽이 다 풀어졌으니 북두칠성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태엽을 감고 인간세계에 돌아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어디로 가셨다는 뜻인가? ‘칠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존재의 시간은 칠성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시간이 끝나면 처음 출발했던 장소인 칠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으리라 본다.
▲ 봉정암에서 기도객들이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찰에 있는 칠성각(七星閣)은 이 칠성기도를 드리는 장소였다. 자식이 무병장수해서 명 길어지라고 어머니들이 드렸던 기도가 칠성기도이다. 용왕기도는 바다의 신에게 드리는 기도이다. 배를 타고 바다에 많이 나갔던 어부나, 무역상인, 바다에서 싸우는 해군(海軍)이 주로 드렸던 기도가 용왕기도이다.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 용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 토속적인 용왕기도는 해수관음(海水觀音) 기도로 변했다. 불교에서 용왕을 포섭한 셈이다.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바다의 꿈틀거리는 커다란 용의 등에 올라타 서 있는 모습의 그림이 해수관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동해안에는 낙산사 홍련암, 서해안에는 석모도의 보문사, 남해안에는 남해도의 보리암, 여수의 향일암 같은 곳이 한국의 대표적인 관음기도 성지에 해당한다. 그 관음기도의 밑바닥에는 수천 년 동안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용왕기도가 깔려 있다. 용왕은 무엇인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수기(水氣)이다. 수기가 인체에 들어오면 미묘한 작용을 일으킨다. 미묘한 작용이란 무엇이겠는가. 종교적 영험으로 귀결된다. 칠성, 용왕보다 더 한민족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이 산신기도이다. 한민족의 무의식 저 밑바닥에는 산신신앙이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이 산신신앙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단군(檀君)이 바로 산신이다. 고대 상고사를 보면 역대 단군들은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
설악산 봉정암은 한국 산신 신앙의 메카이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봉정암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도처이다. 전국에 수많은 산신 기도처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첫손가락에 꼽는 기도도량이다. 물론 지금은 불교신앙의 성지로 바뀌었지만, 원래 밑바닥에는 토속적인 산신 신앙이 깔려 있었다는 말이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은 불교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그 종교적 영성의 가장 밑바탕에는 한민족 고유의 산신이 자리 잡고 있다. 종교는 시대에 따라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본다. 옷만 갈아입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산신이면 어떻고, 하느님이면 어떻고, 부처면 어떻고, 여호와면 어떻고, 알라신이면 어떤가. 이름 따라 뭐가 달라지는 것인가? 문제는 바위에 있다. 바위에서 영험이 나오고, 영험 때문에 여러 이름이 생겼다고 봐야 한다. 종교적 영성의 비밀은 바위에서 제조되는 것이다.
▲ 봉정암 5층 석탑 앞에서 기도객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봉정암은 내설악 최고의 기암괴석군이라 할 수 있는 용아장성(龍牙長城)의 바위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용 이빨같이 날카로운 바위군(群)에 있다. 해발 1,244m에 이른다. 굉장히 높은 위치라 여름에도 시원하다. 겨울에는 엄청 춥다. 설악산이 어떤 산인가. 5월에도 설화(雪花)가 피는 산이다. 적어도 1년에 6개월 이상 눈이 덮여 있는 산이 설악산이다. 그래서 이름도 눈 설(雪)자가 들어간다.
홍련암·보문사·보리암은 용왕기도처가 변해
봉정암은 설악산 기운의 정수(精髓)에 해당한다. 먹을 것도 귀하고, 땔감도 귀했던 조선시대에는 접근하기 힘들었던 기도터가 봉정암이었다. 일반인은 쉽게 올 수 없었고, 올 생각도 못 했다. 그만큼 소수의 승려들과, 약초 캐던 심마니들이나 올 수 있었던 암자였다. 1년에 반절은 눈이 쌓여 있어서 오기 어려웠던 것이다. 먹을 것도 없고 말이다. 접근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신성한 도량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지는 아무래도 접근하기 어렵다는 데서 오는 신성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다가 산 전체가 거의 바위산이다. 엄청난 골산(骨山)에 해당한다. 골산은 뼈만 있다는 뜻 아닌가. 살이 없는 것이다.
살이 많은 육산의 전형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육덕이 좋은, 살집이 많이 붙어 있는 넉넉한 산이라면, 골산인 설악산은 뼈만 있는 강건한 산이다. 성질 날카로운 사람은 일단 지리산에 가서 노기(怒氣)를 풀어야 한다. 노기를 풀어내려면 최소한 3년은 그 산에 살아보아야 한다. 반대로 세상살이 하느라고 기가 빠져 배터리가 방전된 사람은 설악산에 먼저 가서 살아보는 게 효과가 빠르다. 온통 바위산인 설악에서 살다 보면 천지가 다 기운이다.
높이도 중요하다. 1,000m가 넘는 해발의 기도터는 초심자가 오래 머물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초심자는 해발 500m 미만의 위치에 거주하는 것이 무난하다. 고단자가 되어야만 800m 이상의 고지대에 머무를 수 있다. 800m 이상 되면 우선 지상과의 온도 차이가 5~6℃의 차이가 있고, 기압도 다르고 산소 함유량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고단자는 몸의 경락이 한 군데도 막혀 있지 않고 거의 열려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기압차이나, 온도 차이에도 크게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순환이 잘 되므로 심장의 기능도 우수하다. 그래서 800m 이상에 살아도 부담이 없고, 고지대에 살수록 하늘의 천기(天氣)를 호흡하는 데에 유리해진다.
봉정암이 해발 1,244m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여러 가지이다. 기압이나 온도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암자인 것이다. 고승이나 도사들을 보면 공부가 높아질수록 머무르는 암자도 해발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어떤 도인이 해발이 높은 데서 10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뭐가 있어도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봉정암은 고단자가 머무를 수 있으면 좋은 터이다. 봉황의 정수리라는 봉정(鳳頂) 아닌가.
▲ 내설악 최고의 기암괴석군인 용아장성의 바위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봉정암은 설악산 기운의 정수에 해당한다.
필자도 2006년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서 봉정암에 1주일 정도 머무르며 기도를 해본 적이 있었다. 봉정암에 있어 보니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쩔쩔 끓는 느낌을 주었다. 강력한 지자기(地磁氣)의 체험이었다. 하루는 암자의 주지스님이 배려해 주셔서 주지스님 처소에서 자 본 적이 있었는데, 약간 과장하면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운이 강하게 들어왔다. 잠을 잘 때에 머리를 어떤 방향에 두느냐 하는 것도 관건이다. 머리는 기운이 강하게 들어오는 쪽을 향해야 한다. 바위 절벽 쪽이 기운이 들어오는 방향이다. 기운은 일단 머리부터 먼저 들어와서 발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필자처럼 머리를 많이 쓰는 직업.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창출해야 하는 직업은 바위가 많은 곳에서 1주일에 하루는 자야 한다. 그래야 충전된다. 뇌세포를 혹사하는 직업들은 바위산에서 정기적으로 숙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위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뇌세포를 활성화시켜 준다.
평일에도 하루 천여 명 이상 기도객 몰려
봉정암은 그 터도 대단한 자기장(磁氣場)이 형성된 볼텍스(vortex)이지만, 봉정암까지 올라오는 길도 굉장히 파워풀하다. 백담사에서 출발해 봉정암까지 오는 등산로는 통상 6시간 정도 걸린다. 이 6시간의 산길이 참 묘하다. 거의 계곡을 끼고 올라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계곡을 끼고 올라오다 보면 계곡에서 흐르는 물의 수기를 받을 수 있다. 바위의 화기와 계곡물의 수기가 합쳐지면서 그동안 쌓여 있었던 탁기를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 물로 씻어내고, 불로 충전시킨다. 물과 불이 모두 필요하다. 인간의 건강은 결국 파고 들어가면 물과 불의 문제이다. 6시간의 계곡 산행길은 물대포와 불대포를 모두 맞을 수 있는 천혜의 힐링로드인 셈이다. 수화쌍포(水火雙砲)가 설치된 곳이 또한 영지이다.
봉정암은 평일에도 1,000명 이상씩 기도객이 몰려드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도터이다. 조그만 암자에 주말이면 수천 명이 몰려드니까 어디 발 디딜 틈도 없다. 방 하나에 수십 명이 자야 되는 상황이므로 무릎을 세운 채로 칼잠을 잔다. 먹고 씻는 것도 불편하다. 식사는 미역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이다. 이것이 ‘봉정암 정식’이다. 수천 명을 동시에 먹이려다 보니 어쩔 수 없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기도객들이 몰려와서 한 숨도 안 자고 법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까닭은 영험 때문이다. 영발 앞에서 가방끈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발’ 중에는 영발이 최고이다. 영발이 있으니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6~7시간을 올라가서 기도 드리는 것 아니겠는가. 자기 앞에 떨어진 불똥은 끄고 봐야 한다. 자기 인생에 절벽이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봉정암에서 3일만 죽기 살기로 한번 기도해 보기를 권한다. 한국 산신기도의 수천 년 전통이 어려 있는 영지가 봉정암이다.
10. 영남알프스 '북극성' 터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 자장암
삼보(三寶) 사찰이라 하면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가리킨다. 불보(佛寶)는 통도사이고, 법보(法寶)는 해인사, 승보(僧寶)는 송광사이다. 세 군데 모두 한국에서 규모가 큰 사찰에 해당한다. 이런 이야기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므로, 책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이다. 책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 독자가 즐겁다.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느낌과 체험이다.
해인사는 절의 느낌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깨끗한 기운이 있다.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 같으면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 느낌도 들고, 가야산이 1,000m가 넘는 날카로운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가야산은 오행으로 보면 화체(火體)의 산이다. 불꽃이 이글거린다. 정신이 번쩍 나는 산이다. 반대로 송광사는 아주 부드럽다. 넉넉하고 편안한 감을 주는 절이다. 조계산이 흙이 많이 덮여 있는 육산이라서 산세가 부드럽다. 그래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해인사에서 3년 살면 주먹이 되고, 송광사에서 3년 살면 새색시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주먹이 된다는 것은 돌산인 가야산의 정기를 받으면 그만큼 강건한 기운으로 충만해진다는 말이다. 강건한 기운이 있어야 화두를 뚫을 것 아닌가! 송광사는 새색시처럼 유순한 기운이므로 포용하는 덕이 있다. 포용이 어디 쉬운가?
▲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북두칠성이고, 그중 북극성에 해당하는 영축산 중심에 자장암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통도사이다. 필자가 보기에 통도사는 해인사와 송광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분위기이다. 뒷산인 영축산(靈鷲山)이 1,000m가 넘는 높은 바위산이다. 낮은 산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축산이 병풍처럼 통도사를 한 바퀴 둘러싸고 있다. 날카롭게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대나무 소쿠리처럼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점이 묘미이다. 바위산의 강건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소쿠리처럼 포용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강건함과 폭넓은 포용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산이 영축산이고, 통도사의 가풍이지 않나 싶다.
영축산은 그 이름대로 풀어보면 신령스런 독수리를 가리킨다. 독수리 ‘취’(鷲)자를 쓴다. 때로는 ‘취’를 ‘축’이라고도 발음한다. 산이나 지명 가운데 조류과의 이름이 4종류가 있다. 닭, 기러기, 봉황, 독수리이다. 닭 이름이 들어가는 명당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이 있다. 경북 풍기(豊基)에 가면 금계포란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산의 모습은 둥그런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는 형국이다. 둥그런 봉우리는 닭의 머리로 본다. 봉황이 들어가는 지명은 둥그런 봉우리인데, 닭머리보다는 그 봉우리 크기가 더 큰 경우이다.
진주에 가면 시내 남쪽에 대봉산(大鳳山)이 있다. 기러기는 닭보다 더 작은 봉우리가 가운데에 하나 있고, 그 좌우 옆으로 2~3개쯤 둥그런 봉우리들이 포진해 있는 형국을 가리킨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전북의 칠보면에 가 보면 이런 산 모습이 보인다. 독수리는 기러기보다 봉우리의 사이즈가 더 큰 경우이다. 기러기보다 큰 형국을 독수리로 보는데, 영축산이 바로 그런 형국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이 독수리 축(鷲)자를 써서 영축산이라고 이름 붙였지 않나 싶다. 물론 인도에 가면 영취산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름 자체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유래했겠지만 풍수의 물형론(物形論)으로 볼 때도 이 산은 독수리 같다.
울주칠봉은 북두칠성, 그게 영남알프스
영축산은 영남알프스 가운데 하나다. 어떤 이는 영남알프스의 7개 산을 가리켜 ‘울주칠봉’(蔚州七峰)이라고도 부른다. 1,000m급의 고산이 연달아 포진해 있는 이 7개의 봉우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언젠가 경주의 어떤 도사를 만나 경주의 지세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도사는 신라통일 이후에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 이유는 경주가 북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극성이 옮기는 것 봤냐?” “그렇다면 북두칠성은 어디 있냐?”고 필자가 물었더니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가 그 칠성이다”는 대답을 했다. 일리가 있다. 북극성에 해당하는 경주를 싸고 있는 7개의 칠성이 바로 영남알프스라는 이야기다.
영축산은 그 7개 봉우리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이다. 북두칠성의 제일 첫 번째 별 이름이 추성(樞星)이고, 두 번째 별이름이 기성(機星)이다. 추성은 국자 모양의 제일 앞부분이다. 칠성이 매일 한 바퀴씩 하늘에서 회전하는데, 이 추성이 가운데 중심이 된다. 영축산은 추성으로 볼 수 있다. 약간 과대 포장하자면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의 중심이 영축산이다.
▲ 자장암의 돌계단 위로 올라가면 마치 용이 승천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통도사는 왜 이름이 통도사인가? ‘통만법(通萬法) 도중생(度重生)’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만법을 통해서 도를 깨달은 다음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종가라고 부른다. 불지종가(佛之宗家)인 것이다. 통도사 경내에는 본사 외에도 12~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 하나 하나의 크기도 어지간한 사찰의 규모에 해당한다. 대찰이다. 통도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절이다.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통도사는 유자들로부터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견제는 종이와 차를 왕실에 바치라는 공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통도사 승려들이 종이 만들고, 찻잎 따서 차를 만들어 올리느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하도 징글징글해서 경내에 있는 차나무와 종이 만드는 닥나무를 모두 갈아엎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불지종가’인 통도사를 처음 개창한 인물은 자장율사(慈藏律師)이다. 그는 원효보다 한 세대 위이다. 원효 선배세대라고 보아야 한다. 통도사와 그리고 통도사 내에 있는 암자인 자장암은 그의 안목으로 잡은 터이다. 터를 보면 안목의 정도를 안다. 자장암은 어떤 터인가.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643년에 신라에 귀국했으니까 자장암은 643년 이후에 세워진 암자로 추정된다. 이미 그는 당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종남산(終南山)을 비롯해 여러 유명 사찰들을 둘러보고 난 다음이었으므로 안목이 국제화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를 해서 몸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열리고, 정신세계가 확장되면 산세를 보는 안목이 범인과는 다르게 된다. 반경 30리 안에서 일어나는 산천의 기운작용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산봉우리만 보지만, 인천안목(人天眼目)을 갖춘 도인은 주변 30리까지 그 산천의 기운이 뻗치는 모습을 보는 법이다. 통도사를 건립하기 전에 자장율사는 처음 이 자장암 터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현재 자장암에서 보면 영축산이 빙 둘러싸고 있다. 자장암 정면에도 산이 둘러싸고 있다. 트여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자장율사보다 한참 뒤인 9세기 무렵의 도선국사가 잡은 터도 앞이 트여 있지 않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막혀 있는 곳을 도선국사도 선호했는데, 자장암도 보면 이와 같다. 앞이 가로막혀 있지 않고 터지면 기운이 빠지는 것으로 본 듯하다. 앞이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잘 막혀 있는 곳을 ‘관쇄’(關鎖)가 잘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백운산 자락의 옥룡사(玉龍寺) 터도 관쇄가 잘 되어 있고, 속리산의 복천암(福泉庵)도 관쇄가 잘 되어 있는 암자 터로 기억된다. 관쇄가 잘 되어 있으면 기운이 빠지지 않고 저장되는 작용을 한다. 공부가 완전히 끝난 고단자에게는 암자 터의 관쇄 여부와 상관없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쇄가 잘 된 곳이 무난하고 좋은 것이다.
▲ 법당을 지을 때도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지은 자장암. 암자 바로 앞에 마애석불이 있다.
북극성 영축산이 자장암 둘러싸고 있어
앞산이 너무 높으면 답답한 느낌을 준다. 감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앞산이 너무 높아도 기피한다. 적당한 높이가 좋다. 마루에 서서 눈으로 쳐다보았을 때 눈높이 정도의 산 높이가 좋다. 자장암 터는 영축산이 용(龍)처럼 한 바퀴 휙 둘렀다가 다시 그 시작 부분을 되돌아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를 회룡고조(回龍顧祖)라고도 한다. 용이 고개를 돌려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의 조산(祖山)을 쳐다본다는 의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영축산은 독수리가 아니라 한 마리 커다란 용(龍)으로 볼 수 있다. 용의 품안에 통도사와 열두세 개의 암자가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거시적인 국세가 이렇다면 미시적인 지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자장암에는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현재 법당 마루에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거북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라 한다. 법당을 지을 때도 일부러 이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려두고 지었던 것이다. 법당은 거북바위의 몸통에 눌러 앉아 있는 형국이다. 거북이 머리는 법당 뒤로 나와 있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법당 뒤에는 호랑이 바위도 있다. 자장암에 전해지는 옛날 스님들의 유촉 (遺囑)에 의하면 법당을 혹시 개축할 때에도 법당 뒤의 호랑이바위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그런 부탁을 특별히 남겼을까? 바위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다. 바위를 제거하면 땅에 흐르는 에너지 흐름에 이상이 온다. 이상이 온다는 것은 맥이 빠진다는 의미이다. 맥이 빠지면 도인이 안 나온다. 그래서 법당을 지을 때도 거동하기에 불편은 하겠지만 바위를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당부를 남겼다고 보인다. 땅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런 유촉을 그저 전설의 고향으로만 받아들이는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일 것이다.
그 옛날 자장율사가 처음 거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점이 현재 자장암 암주(庵主) 스님의 거처이다. 필자도 작년에 차를 한잔 마시느라고 이 거처에 몇 시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차를 마시면서 몇 시간 이야기를 해도 피곤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자리였다. 엉덩이 부근에서 기가 들어오더니만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기미가 느껴졌다. 이런 자리에서 글을 쓰면 오랜 시간 작업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파트와 이런 명당 터는 확실하게 기운이 다르다.
▲ 양산 통도사엔 13개의 암자가 있다. 이 암자들이 다른 절 같으면 독립 절에 해당할 정도로 크다.
자장율사가 용을 제압하고 절 창건
자장암에는 금와보살 이야기가 있다. 금개구리가 산다는 것이다. 법당 뒤의 바위에는 어른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바위 구멍 속에 금개구리가 산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고, 그 뒤로부터 금개구리가 이 구멍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장암 방문객들은 이 금개구리를 보려고 몇 시간씩 그 바위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가끔 그 개구리가 나타나기도 하면 사람들은 금와보살을 보았다고 좋아한다.
필자는 2011년 가을에 자장 암주 스님의 배려로 3일간 스님 처소 옆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약 1,400년 전에 자장율사가 공부했던 그 터에서 잠을 자 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유리창문 앞으로 200~300년은 되었을 성 싶은 적송들이 암자 터를 둘러싸고 있다. 높고 장엄하면서도 매우 점잖은 영축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자동차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곳이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자동차 소음이 들리면 별로다. 그곳에 바위맥이 내려와 터를 받치고 있는데, 금상첨화로 노송들 수십 그루가 터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람이 불면 저 앞산의 녹색 숲들이 흔들리고, 창문 앞의 낙락장송의 가지가 흔들거린다. 푸른 하늘과 청산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린 궁합이다. 게다가 신라불교의 틀을 정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장율사가 머물렀다는 역사적인 암자 아닌가. 한국에서 1,400년의 역사를 지닌 건축지(趾)가 불교 절 말고는 어디에 있겠는가.
몇 년 전에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 사장 부부가 자장암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장암의 이러한 풍광을 보더니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에 한 번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하룻밤만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가서 1,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수도원의 특별한 방에 잠 좀 재워 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재워 줄까? 아마 안 재워 줄 것이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가서 여러 명산을 참배했다.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기도했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1벌과 사리 100과(果)를 주었다. “이걸 가지고 너희 나라에 가라. 너희 나라에 독룡(毒龍)이 사는 영취서산(靈鷲栖山)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거기에 가사와 사리를 봉안하거라. 그러면 부처님의 진리가 오래 머물며 하늘의 용이 그곳을 보호하리라”는 가피(加被)를 받았다. 그 가피를 받고 자장율사가 세운 절이 오늘날 통도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도사 금강계단 앞의 법당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독룡이 살던 터 임을 암시해 주는 연못이다. 통도사 터는 원래 용이 살던 연못과 늪지대였고, 자장율사가 돌아와 그 용들을 제압해 절을 세운 것이다. 통도사의 출발점이 바로 자장암이었다고 보면 된다. 자장암은 자장율사의 스케일과 안목을 읽을 수 있는 영지이다.
11. 보조국사가 수도한 ‘청학동’ 터 쌍계사 불일암
우리나라에는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중국에서는 신선이 살 만한 이상적인 명당을 동천(洞天), 복지(福地)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십승지라고 부른다. 10여 군데의 뛰어난 장소를 꼽아본다면, 지리산 운봉, 봉화군 춘양, 공주 유구·마곡, 예천 금당실, 충북 영춘면 의풍리, 상주 우복동, 풍기 금계동, 무주군 무풍면, 변산 호암(壺岩), 경기 가평 설악면, 단양군 단성면 적성면 등이다.
십승지는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골이다. 산골이기는 하되 최소한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는 곳이다. 십승지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난세에 피난할 수 있는 피난지라고 한다면, 평화 시에 도를 통할 수 있는 이상적인 땅이 또 있다. 그게 바로 청학동(靑鶴洞)이다. 청학동은 십승지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을 떠나 도를 통하고 해탈할 수 있는 신령한 땅이 청학동인 것이다. 가히 신선들이 사는 이상세계가 바로 청학동이다. 이 청학동이 어디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과 주장이 있었다. 각종 풍수지리 비결서(秘訣書)에 보면 ‘여기가 청학동이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일단 청학동은 지리산 어디인가에 있다고 되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청학동으로는 악양이 거론된다.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한 천혜의 지역이 악양이다. 뒷산에서 산나물과 각종 약초, 과일을 채취할 수 있고, 섬진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거기에다 섬진강은 흘러가는 방향도 서출동류(西出東流) 아닌가!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인 섬진강은 명당수이다. 서출동류는 햇빛 일조량을 가장 많이 함유한다. 그래서 명당수라고 한다.
▲ 불일암 암자의 전경.
악양·세석평전·환학대 등이 청학동으로 거론
악양에는 들판도 넓어 농사가 충분하다. 현재도 전국에서 귀촌하고 싶은 첫 번째 선호지역이 악양이라고 한다. 악양에 가보면 삼면을 1,000m가 넘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앞을 섬진강이 감아 돌면서 남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으니 가히 ‘서민 청학동’이라 할 만 한다. 서민들이 살 만한 이상적인 땅이라는 의미에서 ‘서민’자를 넣어 보았다.
‘중산층 청학동’은 지리산의 ‘세석평전’이 아닌가 싶다. 세석평전은 1,500m가 넘는다. 서민이 살기에는 높은 고지이다. 어느 정도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산층’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중산층 청학동’을 지나면 한풀선사가 말 타고 다니던 청학동이 있다. 푸른색의 학(鶴)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이곳은 ‘도사 청학동’이라고나 할까.
쌍계사 뒤로 1시간쯤 올라가면 1만 평 규모의 평전이 하나 나타난다. 그게 ‘불일평전’이다. 여기도 청학동이다. 쌍계사에서 불일평전 올라가는 중간쯤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환학대’(喚鶴臺)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바위언덕이 있다. ‘학을 부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기의 최치원이 여기에서 학을 불렀다고 한다. 최치원이 환학대에서 학을 불러 타고 가야산 홍류동으로 날아가곤 했다는 전설이다.
▲ 불일암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 오른쪽은 백학봉, 앞으로는 섬진강에서 올라온 하얀 순백색의 띠가 백운산을 감싸며 불일암을 둘러싸고 있다. 이 터가 바로 신선이 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쌍계사에는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비문이 있다. 최치원이 직접 글을 쓴 4개의 고승 비문인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인 진감선사비가 쌍계사에 있다. 이 진감선사비문을 작성할 당시 최치원이 이 환학대에 자주 머물면서 비문의 내용을 구상했다고 전해져 온다. 진감국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중국불교계에서 고승으로 인정받고 신라에 귀국한 인물이다. 최치원도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다. 진감선사나 최치원이나 당나라에서 인정받고 성공하여 귀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진감국사(禪師)의 출신 성분이다. 당시 당나라 유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귀족집안 자제들이나 유학 갈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진감은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비문에 보면 진감은 배의 노를 젓는 ‘노꾼’으로 당나라 가는 배를 탔다고 되어 있다. 당시 외국 가는 배를 탈 때는 각 파트별로 임무가 정해져 있는데 그는 노 젓는 뱃사공으로 나왔다. 진감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출신이었는데, ‘노’를 잘 저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뱃사공으로 채용되어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래부터 유학생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내리고 보니까 ‘나도 공부해야겠다. 출가해서 도 닦자’는 결심을 굳히고 중국의 사찰로 들어갔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서독에 광부나 간호원으로 갔다가 박사학위 따서 교수된 사례와 비슷하다.
최치원도 구 백제 지역인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이다. 옥구군에는 최치원 관련 유적과 전설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옥구군과 금마면은 같은 전북지역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다. 어떻게 보면 최치원에게 진감국사는 같은 고향 사람이자 당나라 유학 선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진감국사가 신라에 돌아와 터를 잡고 머무르던 지리산 쌍계사에 최치원은 특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환학대를 비롯하여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최치원 관련 전설과 유적은 이러한 맥락에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험준한 계곡 사이에 있는 불일폭포. 그 밑에는 바위 절벽 속에 호룡대라는 도를 닦기 좋은 터가 있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 일이 잘 안 풀리면서도 자연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인물들은 입산한다. 좌절한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에 대한 깊은 향수가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갈리는 셈이다. 둘레가 800리에 해당되는 지리산은 세상사에 좌절한 낭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좋은 최적의 산이었다. 현재까지도 지리산은 낭인과(浪人科)의 해방구다. 그 낭인과의 대부가 최치원이라고 보아도 좋다.
청학이 사는 청학동은 한국인의 유토피아였다. 고통 없는 세상이 청학동이다. 그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했다. 옛 선인들은 지리산을 날아다니는 학(鶴)으로 여겼다. 왜 학으로 생각했을까. 학은 크기가 큰 새다. 보통 새는 아니다. 사람이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생각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시초다. 학술적으로는 신조(神鳥) 토템이라고 한다. 원시 시대에 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생각이 신선설화의 기본이 되었다. 그만큼 큰 새는 자유와 초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지긋 지긋한 전쟁과 질병,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이 세상을 시원하게 떠나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새처럼 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학은 색깔도 희다. 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런데 청학은 백학보다 더 특별한 학이다. 산을 우리는 청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청산’(靑山)에는 ‘청학’(靑鶴)이라야 궁합이 맞는 것인가. 우리 선인들은 지리산을 두 마리의 학으로 비유했다. ‘남비청학쌍계사(南飛靑鶴雙溪寺), 북래백학실상사(北來白鶴實相寺)’가 그것이다. “남쪽으로 날아간 청학은 쌍계사가 되었고, 북으로 날아온 백학은 실상사가 되었구나.” 지리산의 남쪽을 대표하는 사찰이 쌍계사이고, 북쪽을 대표하는 사찰이 실상사이다. 쌍계사와 실상사는 두 마리의 학이 날아가서 된 사찰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불일암 좌로는 청학봉·우로는 백학봉이 감싸
쌍계사 뒤로 올라가서 환학대를 거쳐 불일평전에 다다르고, 불일평전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5분 정도 더 바위절벽 옆을 가면 불일암이 나온다. 불일암에서 300m만 더 가면 불일폭포다. 그 터는 나이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내가 20대 후반 불일암 터에 왔을 때는 하나도 좋은 줄 몰랐다. 그러나 이제 50대가 되어 불일암에 올라와보니 왜 진작에 이 터에 자주 오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된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 불일폭포 가는 길에도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물론 옛날에는 불일암에 터만 있었지, 암자는 없었다. 근래에 암자를 복원한 것이다. 불일암 마당에서 보면 오른쪽에 바가지처럼 둥그런 바위 봉우리가 하나 서 있다. 왼쪽을 보니 역시 바위 봉우리가 하나 뭉쳐서 터를 받쳐 주고 있다. 암자 스님에게 물으니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靑鶴峰)이고, 오른쪽의 봉우리는 백학봉(白鶴峰)이라고 한다. 암자를 좌우로 청학봉과 백학봉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좌청학, 우백학인 셈이다.
암자의 마당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광양의 백운산 자락이다. 1,000m가 넘는 백운산의 봉우리들이 멀리서 이 터를 받쳐 주고 있다. 마침 불일암에 청곡(靑谷) 선생이 기도하러 와 있어서 풍수를 이야기하다 보니, 저 멀리 보이는 백운산은 나는 비학(飛鶴)이라고 설명한다. 청학, 백학, 비학이 모두 이 터를 옹위하고 있는 것이다. 청곡의 주장에 의하면 불일평전과 불일암이야말로 원조 청학동이라고 한다.
청곡은 김제에서 학성강당(學聖講堂)을 운영하고 있는 유학자다. 선대부터 유학을 연마해 온 기호 유림의 뼈대 있는 집안 후손이다. 유교의 사서삼경은 물론 풍수와 한의학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 10대 후반부터 전국을 걸어 다니면서 기인달사들을 만나며 주유천하를 경험한 그는 정신세계의 미묘한 도리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다. 그가 25년 전쯤인 20대 중반에 불일암 터에서 텐트를 치고 유교경전을 읽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경전을 읽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환청을 체험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비몽사몽간에 사방 천지에서 수많은 귀신들이 나타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청곡은 칼을 뽑아 달려드는 귀신들의 목을 쳤다. 수많은 귀신들을 잡아 족치던 중에 마지막 남은 1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린 승려 귀신이 나타났다. 청곡이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하자 책상 밑으로 들어가면서 “한번만 살려 주세요! 저를 살려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하면서 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살려 주었다고 한다.
▲ 불일암 대웅전도 암자 뒤에 있다.
이런 정신세계의 체험이 있은 뒤에 신통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뒤로 산을 보면 ‘어디에 기운이 뭉쳐 있는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혈(伏虎穴)인지, 와룡혈(臥龍穴)인지’ 눈으로 훤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풍수에 개안하게 된 셈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터가 있다. 특히 자기에게 정신세계의 체험을 하게 해준 터는 특별한 영지(靈地)인 것이다. 청곡에게 있어서 불일암 터는 특별한 곳이다.
그가 이후로 학성강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25년 만에 다시 불일암 터에 와서 머무르던 중에 필자와 만나게 되었다. 하룻밤 자면서 청곡과 우리나라 도맥과 명당, 그리고 신비체험, 난치병을 치료하게 된 이야기 등등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업 이야기, 정치 이야기보다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곳곳에 포진해 있는 명당과 그 명당에 얽힌 사연, 그리고 도사들의 기행이적(奇行異蹟)에 관한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불일암에서 청곡을 만나 도담의 재미를 만끽했다.
원래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쌍계사를 짓기 전에 수도하던 암자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그만큼 혼자서 도를 닦는 터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불일’(佛日)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계기는 고려 후기의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수도한 인연 때문이라 한다.
불일암 스님의 배려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옆의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밤새도록 들리는 게 아닌가. 낮에 들리는 물소리와 밤에 들리는 물소리의 느낌이 달랐다. 경전에 보면 꿈에서도 물소리를 들어야 번뇌가 사라진다고 되어 있다. 꿈에서 그 물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 물소리를 듣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화두가 잡아진다고 되어 있다.
▲ 조용헌 박사(오른쪽)가 암자에서 불일암과 그 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불일폭포 밑 호룡대는 道 닦기 좋은 터
불일암 자체도 깎아지른 절벽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 절벽 밑에 내려가면 그 계곡이 아주 험하다고 한다. 칠선계곡보다 더 험준하다는 것이다. 한번 급경사의 계곡으로 내려가면 오도 가도 못하는 수가 있다.
지리산의 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일폭포 밑에는 호룡대(虎龍臺)라는 터가 있는데, 바위 절벽 속에 있어서 도를 닦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반야봉 밑에 있는 금강대(金剛臺)는 개운조사가 공부했다는 전설이 있고, 영신대(靈神臺)는 기도하기에 아주 좋은 터라고 한다. 호룡대는 험한 바위 절벽 속에 숨어 있어 일반인의 눈에 전혀 안 뜨이는 지점이므로 숨어서 신선공부하기에 좋은 터라고 전해진다.
불일암에서 자고 아침 7시쯤 일어나 백운산 쪽을 바라보니 그 밑으로 하얀 백색의 띠 같은 모양의 안개가 산 밑을 감싸고 있다. 섬진강에서 올라온 것이다. 섬진강의 새벽 안개를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바라보니 순백색의 띠처럼 보인다. 마치 섬진강에 사는 만년 된 신령스런 두꺼비가 품어낸 진액(津液)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섬진강 백룡이 품어낸 안개일까. 백운산 밑을 띠처럼 두른 순백색의 아침 운무를 보니 이 불일암 터가 신선이 사는 터임을 알겠다.
12. ‘조선의 숨은 왕’ 송구봉이 거처한 파주 심학산 - 옛 구봉산
조선의 숨은 왕이 살았던 구봉산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이 맡았으면 사흘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끝냈으리라.”
▲ 1 구봉산 정상 바위 위에 정자가 있어 주변 형세를 살피기 좋다.
구한말 강증산의 어록을 정리해 놓은 ‘대순전경’에 나오는 말이다. 최풍헌은 도가의 인물이고, 진묵대사는 불가의 인물이고, 송구봉은 유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되어 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도·불·유의 도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는 강증산의 독자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구한말에 식자층들 사이에서 전해 오던 내용이 아닌가 싶다.
포인트는 송구봉이다. 그는 유가를 대표하는 도인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이다. 송구봉은 <삼국지>의 제갈공명에까지 비유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지략이 깊고,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이다. 근래에 ‘정여립 모반사건’을 연구한 역사학계의 분석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도록 멀리서 조종한 서인(西人)의 장자방이 바로 송구봉이라는 것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서인을 위협하던 동인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특히 호남 출신으로서 당시 동인의 좌장이었던 이발과 그리고 나주의 퇴계 선생으로 존경 받던 정개청 같은 인물들이 장살 당했다. 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송구봉은 원수 같은 인물이지만, 서인 쪽에서는 제갈공명급으로 존중 받았다. 비록 출신 성분 때문에 벼슬을 못 하고 재야에서 머물렀지만, 당대의 천재 율곡보다 한 수 위의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송구봉의 구봉(龜峰)은 호다. 이름은 익필(翼弼,1534~1599)이다. 왜 구봉으로 호를 지었는가? 그는 20대 중반부터 반대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경기도 파주의 구봉산(龜峰山) 자락에서 살았고, 이 구봉산 이름을 따서 구봉으로 호를 지었다. 이 구봉산이 지금의 파주 출판단지 뒷산인 심학산(尋鶴山)이다. 구봉산에서 ‘학을 찾았다’는 뜻의 심학산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 숙종 때라고 한다. 숙종 때 대궐에서 기르던 학이 날아갔는데, 구봉산에서 그 학을 찾았다고 해서 찾을 심(尋)자를 써서 심학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파주시 교하읍 서남단의 한강변에 위치하고, 높이는 194m밖에 안 된다. 체육공원 시설이 되어 있다.
이 구봉산(심학산)을 답사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숨은 왕>(이한우 著)을 읽고 나서다. 서인의 장자방인 송구봉이 이 산자락에서 살았고, 그 근처에 율곡과 우계 성혼이 살고 있어서 세 사람이 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저자 이한우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정치의 주류계보가 형성된 장소와 인물을 바로 이 구봉산과 송구봉으로 보고 있다. 율곡은 벼슬하느라 바빠서 제자를 양성할 시간이 없었고, 노론의 주류 인물들은 대부분 송구봉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그 학맥이라는 것이다. 노론 300년 장기집권을 하게 만든 인조반정(1623)도 직간접으로 송구봉의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노론 독재 300년은 송구봉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그래서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주장이다.
도봉산 기운 뭉쳐 강으로 가는 형국
‘조선의 숨은 왕’이 살았던 구봉산의 형세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하는데, 그 산의 기운과 형세를 보면 거기에 살았던 인물의 사이즈가 나온다. 대개 비례한다. 기운이 강건한 바위산에 살면 강건한 기질의 인물이 나오고, 평야지대에 살면 포용하는 품이 넉넉한 인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 2 북한·도봉산의 기운이 흐르다 뭉친 곳인 구봉산 정상 주변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바로 앞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명당이 심학산(옛 구봉산)이다.
당나라 유우석이 쓴 ‘누실명’이라는 글에서 ‘산부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有仙則名)’이라고 설파했다. 산이 높다고 전부가 아니다. 낮아도 기운이 뭉쳐 있으면 명산이다. 심학산(구봉산)이 그랬다. 높이는 200m가 채 안 되지만 산 뒤로는 바위 봉우리로 뭉친 북한·도봉산이 조산(祖山)으로 받쳐 주고 있었다. 구봉산의 할아버지는 도봉산이었다. 조손(祖孫) 간에는 서로 닮기 마련이다. 할애비를 보면 손자를 볼 수 있다. 도봉산의 손자가 구봉산이라는 이야기는, 도봉산의 강건한 바위 기운이 손자대에 와서 그 끝에 뭉쳐 있다는 말이다. 호박이 가지의 끝에 열리듯이, 산의 기운도 그 끝자락에 뭉친다. 그래서 명당은 산의 중심부에 있는 게 아니라 바깥의 끝자락에 만들어진다.
이걸 ‘결국(結局)’이라 부른다. 구봉산은 도봉산의 결국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왜 이름에 거북 구(龜)자가 들어갔는지 의문이었다. 우선 산을 멀리서 보면 거북이 형세로 보인다. 산의 모습이 거북이 등처럼 둥그스름하다. 뾰족하거나 각이 진 형상이 아니다. 정상 부근에 올라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런 바위는 유심히 보아야 한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을 상징하는 바위였다.
거북이는 물이 필요하다. 여기는 교하(交河)읍 아닌가? 물이 교차한다는 곳이다. 굽이굽이 흘러온 한강 물이 임진강 물과 만나는 곳이다.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해져서 흐르다가 강화도 쪽에 가서는 다시 예성강 물과 합해진다. 풍수에서 보는 물은 재물과 물류, 인심의 흐름을 상징한다. 물이 합해지면 돈도 합해지고, 인심도 합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교하’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자유로가 만들어져서 한강물을 차단하는 제방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유로가 만들어지기 전인 1950~ 1960년대만 해도 교하는 한강물이 깊숙하게 읍내로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곳곳에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가 있었던 것이다. 도봉산에서 잉태된 구봉산의 거북이는 바로 이러한 한강물이 둘러싼 지역에 살고 있다고나 할까. 굳이 구봉산에 이름을 붙여 보자면 ‘영구입수(靈龜入水)’ 형세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구봉산 정상에서 강물을 바라 보니 한강물이 이 산을 활처럼 둘러싸고 흐른다. 활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그 산을 감아 흐르면 아주 좋게 본다. 이걸 금성수(金星水)라 부른다. 구례 사성암(四聖庵)을 섬진강이 둥그런 원을 그리면서 감아 흐르듯이, 이 구봉산도 한강물이 활처럼 감아 흐른다.
한강·임진강·예성강 합쳐 재물·인심 넘쳐
옛날에는 서울 마포나 노량진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하의 촌로들 이야기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도 젊었을 때 구봉산의 송구봉을 찾아와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기록은 없고 구전이기는 하지만, 이순신이 1545년생이니까 11년 연상인 송구봉을 찾아와 배웠을 가능성은 높다. 동시대를 근처에서 살았던 것이다. 율곡도 송구봉의 천재성을 공공연하게 인정했으니까 송구봉의 이름은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었다. 신분이 미천해서 벼슬은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서울 변두리에서 책 보고 제자양성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도 그 명성을 듣고 구봉산에 찾아 왔을 것이다.
▲ 구봉산은 신령스런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영구입수의 형세다. 정상에서 보면 한강물이 산을 활처럼 둘러싸고 흐른다.
교통수단은 배였다. 마포나 노량진에서 배를 타면 아마 1시간 정도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걸어서 오면 꼬박 하루 걸리는 길이었겠지만 한강의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오면 멀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다면 송구봉은 서울 밖으로 정적들을 피해서 거처를 옮기기는 했지만, 교통편으로 보면 그리 먼 거리에 살았던 것은 아닌 셈이다.
송구봉이 구봉산 시절에 키웠던 대표적인 제자를 한 사람 꼽는다면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는 이율곡을 통해서 송구봉을 알게 되었다. 율곡으로부터 송구봉의 학문이 깊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계휘는 13세 먹은 어린 김장생을 구봉산의 송구봉 집에 맡긴다. 이런 게 역자지교(易子之敎)이다. 자기 자식은 자기가 교육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을 때가 되면 친구나 또는 믿을 만한 선생에게 자식을 맡겨서 교육시켰다. 자식을 바꿔서 가르치는 풍습이 조선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합리적이다. 10대 중반이 되면 사춘기가 되고, 사춘기에는 부모 곁을 떠나 다른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른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13세의 김장생은 송구봉 밑에서 훈도를 받는다. 이 훈도라는 것이 매일 교과과정 체크를 받는 방법이 아니다. 송구봉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때 물어 보거라”하고 평소에는 세세하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자기가 의문을 품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법이다. 의문도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주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송구봉을 연구한 이한우에 따르면 이 시절에 구봉이 제자인 김장생에게 가르친 핵심 사상은 ‘예’(禮)와 ‘직’(直) 이었다고 한다. <논어>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옹야’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인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이 그것이다. 사람은 곧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와 ‘직’ 사상은 김장생을 거쳐, 김장생의 수제자인 송시열에게 전수된다. 우암이 화양동 계곡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공부하면서 바위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 새겨 놓고 ‘예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조사부(祖師傅)인 송구봉의 철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숙종 때였고, 그 주제가 다름 아닌 예를 논하는 ‘예송논쟁’이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하필 ‘예’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벌어지는 발단도 어떻게 보면 송구봉의 구봉산 시절에 배태된 셈이다.
인조반정 핵심공신들이 송구봉 학맥
후일 노론 300년 집권의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불과 거사 3일 후에 반정의 주역들은 김장생을 사헌부 장령에 제수했다. 왕에게 정치와 학문을 자문해 주는 명예직이었지만, 반정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사부인 김장생을 정권의 정신적인 지주로 여겼던 것이다.
▲ 1 구봉산의 기운은 북한·도봉산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멀리 북한·도봉산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2 구봉산 정상엔 나무데크가 놓여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한다
반정의 1등 공신 9명 가운데 대부분이 송구봉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가 핵심 공신인 9명이다. 김류, 신경진은 직접 송구봉으로부터 배운 제자이고, 구굉과 최명길은 김장생의 제자이니까 송구봉의 손자 제자인 셈이고, 김자점은 송구봉의 친구인 호원에게서 배웠으니 조카제자에 해당하고, 심기원은 송구봉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평생 동지였던 정철의 제자인 권필의 제자이니까 심기원도 역시 손자제자이다. 심명세도 또한 송구봉의 동지였던 심의겸의 손자이니 송구봉의 제자나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인조반정 핵심공신들의 대부분은 송구봉의 학맥인 것이다. 송구봉의 ‘직’과 ‘예’가 현실정치에 투영되었을 때는 인조반정이라는 정변으로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그 기초작업이 모두 교하의 구봉산 자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일의 시작은 불가에서 말하는 ‘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한 생각’이 시작된 장소가 구봉산이니, 조선후기 300년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장소라고 어찌 아니할 수 있겠는가. 물로 들어가려는 신령스런 거북이(靈龜入水)가 알을 낳았으니,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인물이 송구봉인가?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참 어렵다. 수백 년 시간이 지났다고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구봉산이 있는 교하(交河)는 근래에 풍수학자인 최창조에 의해서 주목받은 장소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를 교하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 최창조의 주장이다. 교하는 서울과 강화도 개성을 사정 거리권에 둘 수 있는 입지다. 최고의 장점은 물이 교차한다는 점이다. 물류와 생태에 유리한 점이다. 고대부터 도읍지는 강물이 닿는 곳에 자리 잡았다. 배를 띄워야 화물이 운반되니까 말이다.
저녁 석양이 지는 5시 무렵에 구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랐다. 이 팔각정이 좋은 이유는 멀리 임진강이 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라는 점이다. 두 개의 강물이 합수되는 지점을 본다는 것은 장엄한 광경이다. 두 개의 강물은 두 개의 세계를 뜻한다. 둘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목격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인 것이다.
둘이 하나로 합쳐져야만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창조와 잉태가 그것 아닐까.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져서 서쪽의 강화도로 흐른다. 강화(江華)는 글자 그대로 ‘강의 꽃’ 아닌가. 서해로 흐르는 세 개의 강물, 즉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물이 이곳에서 합쳐지기 때문에 강화라고 했던 것이다.
흔히 명당을 ‘삼산양수’(三山兩水)라고 표현한다. 봉우리 3개가 연달아 내려오는 지점을 양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만나서 흐르면, 그곳은 명당이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양수리가 작은 양수리라면 교하는 큰 양수리에 해당한다. 현대 대도시는 수기(水氣)를 필요로 한다. 문명이 불(火)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균형이 된다. 생태적으로 좋지 않은 것이다. 교하는 물이 풍부한 곳이다. 앞으로 크게 열릴 지역이 아닌가 싶다.
13. 정감록 십승지 중 한 곳 백범이 숨었던 마곡사
고대로부터 인간세상의 큰 재앙은 세 가지로 꼽았다. 전쟁, 기근, 전염병이다. 전쟁이 나면 칼과 창에 찔려서 죽고, 기근이 들면 굶어 죽는다. 전염병이 한번 돌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 가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어디 없는가? 그 고민 끝에 우리 조상들이 찾아낸 곳이 바로 ‘정감록’에 나오는 10군데의 십승지(十勝地)다.
그런데 이 십승지를 뜯어보면 특이점이 하나 발견된다. 이북지역에는 이 십승지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모두 이남에 몰려 있다. 왜 그럴까? 정감록은 하루아침에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내용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다듬어서 내놓은 집단창작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편견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책인 것이다.
▲ 대광보전 뒤에 대웅전이 있는 공주 마곡사는 이중 대웅전이 아니었다면 그 명당터에 유생들의 묏자리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란 추측이다. / 사진 조선일보DB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 무렵부터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엄청난 불안을 느낀 조선의 민초들은 십승지를 찾아 헤맸고, 특히 이북에서 정감록을 신봉하던 비결파(秘訣派)들은 이남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비결파’는 풍수지리를 절대적 신념체계로 신봉하던 방외지사(方外之士)를 말한다. 전국 어디에 명당이 있다는 수십 종류의 비결서(秘訣書)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전국의 명당을 찾아 떠돌던 아웃사이더 집단이 있었고, 이들을 가리켜 통상 비결파라고 필자는 부른다. 돈 떨어지고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던 소외된 지식인 그룹과, 머리 깎은 승려들, 그리고 도사가 되고 싶었던 체제 부적응자들이 이 비결파의 주요 멤버였다.
더군다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북은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이남 체제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이북 출신들은 고위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이남은 이북지역을 은근히 위험지역으로 간주하고 인재등용을 꺼렸던 것이다.
차별에 반발한 이북 중산층, 사주명리학 대가들 많아
여기에 반발한 이북의 식자층과 중산층들 가운데 상당수는 풍수와 사주, 그리고 한의학과 같은 실용학문에 집중을 했다. 풍수, 사주, 한의학의 대가들은 이북에서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상체질의 창시자이자 ‘동의수세보원’의 저자인 이제마도 이북 출신이고, 사주명리학계의 명저로 꼽히는 ‘사주첩경’을 쓴 이석영도 이북이고,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로서 수준 높은 음양오행서(陰陽五行書)인 ‘우주변화의 원리’를 쓴 한동석도 이북이다. 모두 이북사람들이다. 6·25 때 부산으로 피란 와 영도다리 밑에서 좌판 깔고 사주와 묏자리 봐주던 술사들의 대부분이 이북사람들이었다. 정감록도 같은 맥락이다. 이남보다 이북 사람들이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체제로부터 소외받고 차별받은 한을 이쪽에 대고 풀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마곡사 연못의 돌거북이가 마곡사를 지키는 듯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사진 마곡사 제공
마곡사 일대만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유구와 마곡사 일대는 산으로 첩첩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강원도에 가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데, 유구와 마곡사 일대는 강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산골 같은 감이 온다. 구절양장(九折羊腸) 같기도 하다. 충청도인데도 말이다.
깊은 산골의 지형을 가진 유구와 마곡사는 그래서 십승지에 포함된 것 같다. 일단 첩첩 산중이어야 난리에 숨기 좋은 것 아닌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과 미국에 대항해 끝까지 유격전을 펼치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험악한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동유럽의 유고도 산악지형이고, 한반도가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나라의 70%가 산악지형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본다. 충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산이 많지 않고, 농지가 많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유구, 마곡사 일대는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점이 독특하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2년 뒤인 1896년에 명성왕후가 일본 자객집단에 의해 살해된다. 이에 의분을 느낀 백범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 장교를 죽여 버린다.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다. 추적대가 따라올 수 없는 곳, 인적이 드물고 깊이 숨을 수 있는 산골은 어디인가? 백범은 마곡사로 숨었다.
▲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본 마곡사 전경. 산지에 둘러싸인 지형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사진 마곡사 제공
마곡사에서 눈여겨 볼 만한 풍수적인 요소는 물이다. 냇물이 대광보전을 활처럼 감아서 돈다. 물살이 너무 세면 좋지 않은데, 물살도 느긋하고 완만하게 돈다. 자세히 물길을 보면 마곡사 전체를 S자 형국으로 감아 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이상적인 물길의 형태는 S자다. 태극모양인 것이다.
대광보전 뒤 대웅전 없었다면 뫼로 채워졌을 수도
물이 태극모양이나 S자로 흐르는 곳은 거의 명당이다. 태극모양이면 물이 느리게 흐르면서 주변에 수기(水氣)를 충분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물이 없으면 그 터의 기운이 오래가지 못한다. 물이 있어야 불에서 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저장해 준다. 물로 기운 저장을 못 하면 속발(速發)했다가 속패(速敗)한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는 마곡사에 갈 때마다 이 냇물의 흐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고 감탄한다. 교과서적인 명당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에는 이 마곡사 경내에다가 유생들이 치고 들어와 자기들 조상 묏자리를 많이 썼다고 전해진다. 사찰 경내에 개인의 묘를 쓴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불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유교의 시대에는 그러한 불경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곡사는 냇물이 아름답게 감아 도는 대광보전(大光寶殿) 뒤로 또 대웅전이 있다. 이중(二重) 대웅전이다. 아마 이 대광보전 뒤로 대웅전이 없었더라면 유생들의 묏자리로 이 터가 가득 메워 졌을 것이다. 그만큼 풍수가에서 탐냈던 명당 터가 이 대광보전 뒷부분이다.
▲ 마곡사 대웅보전의 웅장한 모습. / 사진 조선일보DB
백범이 만약 마곡사에서 계속 승려로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를 통하여 고승이 되지 않았을까? 안전하고 재정적으로 풍족했던 절인 마곡사에서 고승으로 한평생을 보내는 것과, 임시정부에서 항일 투쟁의 험난한 삶을 사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인생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 인생의 길인지 단언할 수 없다. 자기 업보대로, 자기 팔자대로 길을 택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는 그 사람의 업보와 팔자가 선택하는 것 같다.
임시정부에서 수많은 고생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한 백범은 국내에 들어오자 마곡사부터 찾았다. 거의 50년 만의 방문이었으니 감회가 얼마나 깊었을까. 깊은 감회에 젖은 백범은 대광보전 앞에서 대중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대광보전 앞에 50년 만에 죽지 않고 다시 선 백범은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라는 구절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머리 깎고 승려가 된 20대 초반에도 아마 이 구절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는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어찌 혈기 방장한 스무 살짜리 청년이 ‘몽중사’(夢中事)를 알았겠는가. 그러나 50년의 만고풍상을 겪고 70세가 되어 다시 그 대광보전 앞에 서니 이 구절이 가슴을 강타했을 것이다. ‘그렇구나! 몽중사로구나!’
▲ 부자인 듯한 방문객이 대웅보전 아래에 앉아서 마곡사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 사진 마곡사 제공
필자는 2011년 가을에 마곡사 법당에서 7일간 수불(修弗) 스님의 인도 하에 화두를 잡고 간화선 수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저녁 공양 후에는 백범이 머리를 깎은 삭발처의 냇물 줄기를 따라서 산책하곤 했다. 산세가 부드럽고 경내 전체를 냇물이 태극모양으로 감아 도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산세가 부드럽다는 것은 뾰족뾰족한 바위 절벽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위가 많은 강건하고, 육산으로 이루어지면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수기(水氣)가 풍부해서 상기되는 기운을 잡아 준다. 신경을 많이 써서 머리가 상기되고 복잡해진 사람은 마곡사에 와서 머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절 뒤쪽으로는 일반인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다.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산세와 분위기를 지닌 곳이 공주 마곡사이다.
14. 미륵신앙 창시자 진표율사 생가 터 추정, 비산비야의 학성강당
‘영’(靈)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 우선 무당의 ‘무’(巫)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무’는 하늘(一)과 땅(一)을 세로로(I) 연결하는 사람(人)을 가리킨다. 무당을 간단히 볼 게 아니다. 이 무당이 입(口)으로 중얼 중얼 주문을 외우며 간절하게 빈다. 그러면 하늘에서 비(雨)가 내린다. 따지고 보면 가뭄에 비 내리게 하는 것이 영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비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 들어서 다 굶어 죽는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가뭄이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영지(靈地)의 어원적 의미는 비를 내리게 해주는 장소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있지만 우리 몸 안에서 내리는 비도 있다. 신장(腎臟)에서 품어 올려 주는 수기(水氣)가 그것이다. 근심걱정을 너무 많이 하고, 매일 신경 써야 먹고 살고, 운동부족이고, 화가 치솟을 일만 많아지면 결국 수기가 고갈된다. 그러면 심장병, 우울증, 뇌졸중, 공황장애가 오는 것 아니겠는가. 수기를 회복시켜 주는 곳이 어디인가?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 영지다. 그러자면 고전을 공부하는 것도 방법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치유방법이다. 너무 새로운 것만 좇다 보면 긴장이 뒤따른다. 조상들이 공부했던 방법으로 돌아가면 안정감이 든다.
전북 김제에 가면 한옥으로 지은 학성강당(學聖講堂)이 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당’이라는 뜻이다. 필자가 보기에 영지는 산 위에도 있지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강당에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유학의 경전들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배우는 곳이다. 수업료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 미륵신앙의 창시자인 진표율사의 생가 터로 추정되는 학성강당에도 눈이 내려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성강당의 강주(講主)인 청곡(靑谷) 김종회(50) 선생. 중키 정도의 신장에 단단한 체격이다. 얼굴은 수더분하게 생겼다. 시골사람 같은 인상을 풍기면서도 포용력과 함께 내면에는 자기 신념이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청곡은 ‘수업료를 받으면 훈장이 되고, 수업료를 안 받으면 선생이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다. 수강생은 고등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한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고전을 공부하러 온다. 몇 년을 하는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형편상 주말에만 와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학성강당 자리는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비산비야’다. 이런 터에 대명당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내가 보기에는 미륵신앙의 창시자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태어난 생가 터가 아닌가 싶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현재 김제의 만경현 대정(大井) 출신으로 되어 있다. 학성강당 터의 원래 이름이 대석정(大石井)이었다. 왜정 때 대석(大石)으로 지명이 변화되었고, 현재는 성덕면 대석리(大石里)로 되어 있다. ‘구글어쓰’로 성덕면을 보면 사람 형상이고, 학성강당 자리가 그중에서도 배꼽자리에 해당된다. 대석리에서는 이 자리가 가장 기운이 뭉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진표 같은 인물도 이 학성강당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 학성강당의 함덕정 전경.
▲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무료로 가르치는 학성강당의 전경.
기운이 뭉쳐 있는 성덕면의 배꼽 자리 해당
내가 보기에 청곡 선생은 풍수의 대가다. 풍수이론과 땅의 기운을 보는 영안(靈眼)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개 이론에 능하면 영안이 열리지 못했고, 영안이 있는 사람은 이론과 경전 공부에 약하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기는 쉽지 않다. 청곡은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인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 선생이 호남의 손꼽히는 유학자이다. 기호학파의 마지막 장문인인 간재(艮齋) 선생의 학맥을 이은 계승자이며, 전북 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현존 인물인 것이다. 학성강당은 그의 부친인 화석 선생이 운영하던 서당을 아들인 청곡이 계승 발전시킨 셈이다. 가학(家學)을 계승했다.
유학(儒學)을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풍수다. 유학과 풍수는 동전의 앞뒷면, 또는 음과 양의 관계다. 유학에서 언급하지 않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죽은 부모에 대한 효(孝), 명당에 산소를 쓰면 후손이 발복(發福)한다는 주술적 측면. 이 3가지가 모두 풍수에 담겨 있다.
청곡은 어려서부터 집안에 출입하던 수많은 지관(地官)들을 보며 자랐다. 만경은 모악산과 금산사가 지척에 있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걸쳐 전국의 수많은 도사와 술사들이 운집했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라는 사실을 참고해야 한다. 김제 모악산 일대는 후천개벽의 성지였던 것이다. 다양한 수준의 지관들은 청곡 집에서 몇 년씩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청곡은 풍수에 관한 전설과 설화들을 들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부친을 포함해 집안어른들 모두가 풍수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학과 풍수는 동전의 앞뒷면, 음과 양의 관계
집안에는 성백운(成白雲)이라는 이름의 전속 지관도 같이 살았다. 청곡이 어렸을 때 박광오(朴廣悟)라는 80대 노인도 옆집에 살았는데, 평생 동안 전국의 명당을 보러 돌아다닌 프로페셔널 지관이었다. 박광오는 그 유명한 강증산을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은 세대였고, 강증산을 신처럼 모신 인물이었다. “증산이 주문을 외우면 진흙땅도 얼어붙는다. 겨울에 수박을 먹고 싶으면 수박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를 어린 청곡에게 들려주었다. 지금 들으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어린 청곡은 초월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크게 키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좀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스케일이 커진다.
청곡이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 안 한다고 부친으로부터 회초리도 많이 맞았지만, 이후로는 취직해라, 성공해라, 좋은 대학 가라는 이야기는 듣지 않고 컸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사춘기 반항심도 작용한 나머지 수시로 집을 나와 전국을 걸어서 돌아 다녔다. 차를 타지 않고 대부분 걸어 다닌 점이 이색적이다. 생과 사는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도를 통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녔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전국의 민족종교 종단을 찾아 다녔다. 많은 도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차비는 별로 들지 않으니까 먹는 것이 문제였다. 시골동네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암자에서도 자고, 허름한 시골집 창고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쳤다. 지방에서 4년제 대학도 마쳤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기약도 없고 목표도 없는 주유천하가 계속되었다.
▲ 학성강당의 명인정사 현판 밑에 김종호씨가 앉아 있다.
▲ 학성강당의 명인정사 건물.
25년 전 쌍계사 불일암서 신비체험
그러다가 그가 25세 때 여름 하동 쌍계사 위의 불일암(佛日庵) 터에서 신비체험이 있었다. 지금부터 25년 전이다. 그때는 암자건물이 없었고 빈 터였다. 이 터는 좌우에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이 싸고 있는 명당 터였다. 텐트를 치고 사서(四書)를 소리 내어 읽고 있는데, 공중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3~4일간 이러한 글 읽는 소리가 청곡의 귀에 계속 들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꿈을 꿨다. 주변 사방에서 귀신들이 청곡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청곡이 칼을 뽑아들고 귀신들을 물리치다 보니까 맨 나중에 어떤 동자승이 하나 남았다. 이 동자승 귀신마저 칼로 치려는 순간에 그 동자승이 책상 밑으로 숨으면서 제발 목숨만 달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를 살려주면 훗날에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살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 집에서 꿈을 꾸는데 이 동자승이 나타났다. 대문이 크게 서 있는 궁궐 같은 집으로 청곡을 안내하는 게 아닌가! 대문을 3개나 열고 들어가니까 마지막에는 금관을 쓴 지장보살이 앉아 있었다. 청곡은 놀랐다. ‘내가 집안 대대로 유학만 신봉하는 사람인데, 어찌 불교의 지장보살이 나타나나?’ 금관을 쓴 지장보살이 밥상만 한 크기의 네모진 종이를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지장인(地藏印)이 찍혀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하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 체험이 있은 뒤부터 청곡은 산의 기운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기에 복호혈(伏虎穴)이 있구나, 저쪽 산모퉁이에 와우혈(臥牛穴)이 있구나’하는 감식안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리(地理)에 대한 영안이 열리게 된 계기가 이렇다. 학성강당 자리가 진표율사 생가 터라고 주장할 만한 자격이 있다.
“나는 생사 문제가 아직 해결 안 되었다. 죽음이 두렵다.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보고 정리가 되었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오행이 나와 만물을 형성한 것 아닌가. 문제는 최초의 출발인 태극이다. 태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에 나는 어디 있었는가? 불가의 화두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다. 부모미생전은 무극(無極)이다. 아침, 저녁으로 태극도설을 외운다. 이걸 외우면 생사에서부터 세상사의 복잡다단한 일이 다 이치로 환원되는 것 같다. 태극도설을 외우고 정좌(靜坐)하고 앉아 있으면 나의 내장 모습이 보인다.”
“접신(接神)과 보호령의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난자와 정자가 합쳐져서 잉태되면 그 순간에 보호령이 붙는다. 만약 이 보호령이 몸속에 들어가면 접신이다. 보호령은 그 사람이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부지불식간에 보호령이 그 사람의 행보를 이끈다. 서양에서는 수호천사라고 부른다. 접신은 몸속에 들어가 몸주(主)가 되는 것이다. 접신이 되면 자유의지가 없어진다. 보호령과 접신은 다른 것이다.”
“동양에서 혼(魂)과 백(魄)을 이야기한다. 혼과 백은 어떤 개념인가?”
“혼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기운이고, 백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운이다. 두 기운이 만나면 태극이 형성된다. 흔히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한다. 삼혼은 천·지·인의 기운을 가리킨다. 천은 검정색, 지는 노란색, 인은 파란색의 기운이다. 칠백은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다. 사람이 죽어서 뼈가 보존되면 백이 보존된다. 백이 보존되면 삼혼이 의지하는 의지처 역할도 한다. 혼과 백이 합쳐져야 묘용이 생긴다. 명당에 묘를 쓰면 백이 오랫동안 보존된다. 묘용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의 혼백은 음이다. 살아 있는 후손은 양이다. 음과 양이 만나야 묘용이 생긴다. 인간의 병도 삼혼과 칠백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온다.”
“수(水)의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동안은 화(火)의 시대였다. 모든 에너지와 문명의 원천이 불이다. 그러나 이제 물의 시대가 도래했다. 물이 중요하다. 중국은 수의 시대가 도래하면 민족, 이념, 경제 문제로 5개국 아니면 10개국으로 나눠질 수 있다. 돈은 상해, 권력은 북경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수의 시대가 되었으니까 이제 돈과 권력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수의 시대가 되면 동북아시아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블록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서로 싸우면 곤란해진다. 물이 서로 섞여야 한다. 동북아공동체는 한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자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미 한국, 일본에도 뿌리를 내렸다. 서양도 알파벳을 공통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한자는 동북아의 알파벳이다.”
“한국의 정세는 어떻게 보는가?”
“박정희 시대가 창업의 시대였다. 불의 시대였다. 경제발전, 산림녹화, 치산, 경제행복이다. 그러나 이제 수의 시대다. 수성(守城)을 해야 한다. 인문학, 분배, 치수(治水)가 수성에 해당한다. 베트남전 파병과 서독 광부, 중동노무자 파견은 한국발전의 요인이었다. 여기에는 유교의 가족주의가 공이 컸다고 본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도 좋다며 자식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이제 분배와 문화의 시대가 왔다. 사욕(私慾)은 억제하고 공욕(公慾)은 장려해야 한다. ‘자식을 낳지 않는다.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 젊어서는 내가 즐기고 늙으면 요양원 간다. 자식 필요 없다. 강아지 키우면 된다.’ 이런 것은 사욕이다. 유교적 공욕으로 가정과 가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본다.”
“유교적 수양방법이 무엇인가?”
“수신(修身)과 치인(治人)이다. 정치를 하려면 수신이 근본이다. 수신은 경전을 읽는 간경과 하루 1시간씩 정좌를 하는 것이 방법이다.”
한국이 좁은 것 같아도 골짜기마다 기인(奇人) 이사(異士)가 있다. 인물이 있는 것이다. 들판도 아니고 산도 아닌 만경의 성덕면에 인물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전국을 주유천하하고 도력을 갖추었으며 이제 서당을 열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지에는 인물이 나기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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