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파편들의 파편이다. 일어나고 말해진 것 중 아주 작은 부분 만이 쓰여지고, 쓰여진 것 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 만이 남게 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21쪽
문장수집가인 저는 이번 책을 준비하면서 문학과 시에 대한 명언을 신나게 줍줍했습니다. 크크. 키틀러의 저 문장은 제가 인터뷰 글쓰기에서 느끼는 아쉬움을 말해주는 것 같았죠. 본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는 원고가 얼마나 많게요. 주옥 같은 사유와 말들. 그래서 <크게 그린 사람>에서는 인터뷰 후기를 남겼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는 일인 당 원고 분량이 80매 정도라서 지면 제약이 덜했지만, 전체 이야기 톤과 맞지 않아 빠진 몹시도 아까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틈 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볼게요.
한영번역가 새벽. 오감도의 시인 이상의 번역가입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길이적당하오)’ 그 엄청난 시를 영어로 번역한 거 맞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나와요. 아무튼, 새벽이 열세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인구 수 4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어학 과정도 없이 7학년에 들어갔고, 영어가 부족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학교에서 대책 마련으로 침례교회에서 자원봉사로 ESL교사 에이프릴 아주머니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분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제 운이 바뀌었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걸 경험했어요. 제가 너무 똑똑하다고 칭찬을 자꾸 해주시고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영어를 하냐 so brave하다고 해주시고. 한국에서는 계속 문제아였고(학교와 학원을 빠지는 얘기는 책에 있음) 구박만 받고 선생님들한테 자로 맞고 그러다가 칭찬을 받으니까 갑자기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분이 저한테 영어로 더 말을 시키려고 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하셨었는데요. 한국에서 가져온 <조선 왕조 실록>같은 학습만화를 읽으면서 번역을 해드렸어요. 그게 저의 첫 번역 경험이에요. 그러면서 입이 트이기 시작했거든요.”
새벽은 하버드대 영문학과에 들어가는데, 그때 하필 영문학과 미션이 바뀝니다. “스티븐 그린블랫 (Stephen Greenblatt) 같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소설은 잘 읽는데 시를 너무 안 읽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은 시에 집중을 하겠다고 선언했죠. 모든 수업이 시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새벽은 시에 빠지게 되고 또 귀인을 만납니다. 하버드의 데이비드 맥캔 교수. 그는 김소월을 번역한 연구자. 새벽에게 캐나다에서 주최하는 번역 워크숍에 같이 가보자고 합니다. 그 워크숍이 이상 연구자 서울대 권영민 교수와 데이비드 맥캔 교수가 주최하는 자리였고요. “저는 이상이 한국 문학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감을 못 잡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서울대에서 오신 분들은 ‘도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 이상 시를 번역을 한 대?’ 라고 생각을 한 거죠. 일단 대학원생이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학부 2학년생이 아직 어린 애가 나타나니까 이게 뭐야 했다,라는…(웃음)”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새벽은 한국으로 들어와서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해요. 근데 공부법이 미국대학과 달라서 혼란을 겪습니다. 어떤 차이냐고 물었죠.
“하버드에서는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북돋아주고 만약 못하면 그냥 침묵해요. 근데 서울대는 잘하는 거 못하는 거 차이 없이 다 침묵, 침묵. 침묵뿐만 아니라 강한 비판이 꽤 있었는데 그게 처음에는 너무 적응이 안 돼서 잠시 쉬었어요.”
인생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 그래서 새벽 인터뷰의 등장인물들에게 제가 다 고마웠어요. 어린 새벽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에이프릴 아주머니가 제일 감사했고, 시를 읽자고 한 스티븐 그린블랫, 워크샵에 가자고 한 데이비드 맥캔, 방향을 제시하고 격려해주는 책에 나오는 다른 멋진 교수들… 미국이 옳고 한국이 별로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길러내는 정서적 문화사회적 토양이 우리와는 달랐고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문학은 결국 살리는 일, 북돋워주는 언어가 문학적이구나. 어리다고 재단 말고 기회를 나누자, 그런 소소하나 실행이 어려운 것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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