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전원과 향수의 시적 접맥 그 진실
--묵헌 서석철 시집 『말의 사원(寺院)』
김 송 배
(시인. 『한국시원』 발행인)
‘말’과 ‘시어’에 대한 몇 가지 성찰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소리들은 ‘말’을 의미한다. 이 소리들 중에는 참말과 거짓말 그리고 빈말과 금언(金言)이 있다. 일찍이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말은 배열을 달리하면 딴 의미를 갖게 되고 의미는 배열을 달리하면 딴 효과를 갖게 된다.’는 말로 말의 중요성을 설파한 바가 있다.
이처럼 말(언어)이 생활화한 일상적인 말로 허언(虛言)이나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진언(眞言)으로 삶들을 참삶으로 유로하는 등의 언어 행태를 잘 알고 있다.
묵언 서석철 시집 『말의 사원(寺院)』을 일별하면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튀어서 흩어진 말들이 허전해서 / 너절하게 뻗어나간 촉수를 거두며 / 빈말이 빠져나간 숭숭한 자리에 / 가식 없는 참말로 채우고 싶은(「빈말」 중에서)’이라는 간절한 소망의 한 구절을 간과(看過)할 수 없는데 이는 그가 ‘말’에 대한 중요성을 얼마나 천착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계절이 꺾어지는 굽이마다
들려오는 저 소리
뻐꾸기, 개구리, 뀌뚜리
미물의 소리는 쉽게 구별이 되는데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소리는
분간하기 어렵다
무슨 말을 하고 살았는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꽃이 피고
단풍 들 듯
오고간 세월을 짊어지고
한철 살아가는 똑 같은 생명
사람소리 같지 않은
쏟아지는 말 속에
철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아
달빛에 실려 오는 개 짖는 소리는
얼마나 공명하던가
--「사람 소리」 전문
우리가 듣는 소리 중에서 ‘뻐꾸기, 개구리, 뀌뚜리’의 소리와 ‘달빛에 실려 오는 개 짖는 소리’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비해 ‘사람의 소리’는 ‘사람소리 같지 않은 / 쏟아지는 말’로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고 살았는지 /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삶이나 생명에의 성찰로 현현되고 있다.
우리는 ‘오고간 세월을 짊어지고 / 한철 살아가는 똑 같은 생명’들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어서 그 ‘공명’의 폭은 협소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도 일언천금(一言千金-한 마디 말이 천금의 가치 있음)이니 이언취인(以言取人-말만 듣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함) 등의 말들이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장마철 우물가 수위가 높을 때
물맛을 기억하는 이 있을까
이 꽃 저 꽃 넘쳐나는 꽃에 눈길 멈출까
이것저것 버물린 음식은 어떤 맛이랴
이 말 저 말 형용에 형용을 더한
더부룩한 시어(詩語)에 감흥이 일어날까
고의적삼 걷어 올리고 가뭄에 밭일 마치고 돌아와
땅 속 깊숙이 내려간 가물가물한 우물에서 퍼올린
두레박채로 입을 담가 마시던 샘물
벌컥벌컥 울대가 솟아오르던 그 맛이 물맛이지
그립고 허전함을 핑계로 길어내고 품어낸
밑바닥까지 훤한 가슴에
눈물처럼 고인 한 줄의 시를 기다렸다가 달게 마시리
목구멍을 타고 내려 창자까지 시원한 말(言)의 사(寺)
--「말의 사원(寺院)」 전문
서석철 시인은 이러한 언어에서 심각하게 접근한 것은 시(詩)에 대한 집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사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말 저 말 형용에 형용을 더한 / 더부룩한 시어(詩語)에 감흥이 일어날까’라는 통념에서 출발한다. 이 詩는 잘 아는 바와 같이 말씀 언(言) 변에 절 사(寺)와 합성어이다. 절에서 쓰는 말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의 말이라면 스님들의 강론이나 말씀들이 바로 시라는 것인지, 아니면 불경(佛經)에서 가르치는 경전이 시인지를 명징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으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 창자까지 시원한 말(言)의 사(寺)’가 시이다. 시는 고요한 명상의 경지를 형상화하고 산문은 왁자찌끌한 백화점 바겐세일이나 남대문시장의 풍경 같은 요란한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절에서의 깊은 명상이 바로 시임을 암시하고 있다.
공자도 아들 백어(伯魚)에게 ‘不學詩無以言’이라 하여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일상어에서 탐색하는 말의 의미보다는 시의 언어에는 더욱 인생의 심오한 맛이 가미되어 있어서 말과 시어로서 생명성이나 인생의 성찰을 탐구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말과 불성(佛性)이 상관하는 작품으로는 「탈피와 변태」 「미친 듯 웃고 다닌다」 「서까래 기둥보살」 「사월 초파일」 「맹물공양」 등에서 읽을 수 있으며 「부도탑」에서는 ‘인연 따라 살다간 해탈의 껍질 / 회색빛 돌이끼로 장삼을 두른 채 / 팔월 한낮 뙤약볕 아래 서 있다 // 고즈넉한 산사 / 풀벌레 소리처럼 풀어 놓았을 /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전은 / 바람에 실려 가고 // 말매미가 대신한 스님의 독경소리 / 인적 드문 여름산 아래 가득하다’는 ‘시원한 말(言)의 사(寺)’를 심도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리움’의 진원지를 찾는다
서석철 시인의 뇌리(腦裏)에 깊게 흐르고 있는 의식은 아직도 삭이지 못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생(生)에서 발현된 추억이나 궤적(軌跡)이 아니고 일생을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심중(心中)의 사무침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리움을 시간(혹은 세월)과 동행하면서 인생길에 묻어놓고 온 허전한 심리적인 상념이 동반한다.
대체로 그리움이라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떠나간 옛 사랑 등 사랑과 연관을 짓는 것이 통념이었으나 여기 서석철 시인의 그리움은 좀더 고차원의 사유(思惟)를 적시하고 있다.
라일락 향기 진하게
가슴으로 번져오면
푸르던 날 함께 했던
세월에 묽어진
그리움 불러온다
허전한 심연에 돌을 던져
둥글게 그려지는 파문
혼자서 피었다가
꽃잎처럼 떨어져가는
저승 같은 이승
--「그리움」 전문
여기에는 심오한 인생론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푸르던 날 함께 했던 / 세월에 묽어진 / 그리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나온 삶의 여백에 잔재(殘在)하는 진정한 애환(哀歡)이 도출(導出)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허전한 심연’과 ‘혼자서 피었다가 / 꽃잎처럼 떨어져가는 / 저승 같은 이승’이라는 어조로 그리움이 우리 인생의 영혼에서 간구(懇求)하는 원망(願望) 같은 것이 물씬 스며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말 몸뚱이 하나
길 위를 지나간다
뜨거운 길을 걷는 게 힘들어 남은 길을 바라보면
길의 끝은 점점 구부러지며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가슴 밭을 지나며 다 태우지 못한 쌓인 외로움
한 발 한 발 버리며 가는 길이 조금씩 줄어들면
이제 그리움 같은 것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더욱 단단하고 끝없는 고독의 길을 만들어 가볍게
걸어가야지
--「길 위에서」 전문
이제 그는 심려(心慮)로 흔들리는 단순한 심적 요동에는 침착하게 이미지를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그리움 같은 것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 더욱 단단하고 끝없는 고독의 길을 만들어 가볍게 / 걸어가야지’라는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다 태우지 못한 외로움’이나 지나간 아쉬움들을 ‘한 발 한 발 버리며 가는 길’에서 단정한 사유의 원류로 흐르고 있다.
김남조 시인도 ‘깎아세운 돌기둥에 비스듬히 기운 연지빛 노을의 / 그와 같은 그리움’이라고 작품 「연가」에서 읊은 것처럼 과거의 잡다한 고뇌와 갈등 등에서 빚어진 한생의 그리움이 숭엄(崇嚴)한 정서로 정제하여 이제라도 ‘끝없는 고독의 길을 만들어 가볍게 / 걸어가야지’라는 어조로 자신을 성찰하면서 인생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서석철 시인은 이처럼 그리움의 이미지를 적극 창출하여 형상화하는 시법을 잘 활용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현현되고 있다.
- 봄부터 / 다람쥐처럼 산속에 / 그리움 한 톨씩 묻어 놓고 왔습니다(「산길 나그네」 중에서) - 외로운 꽃대 하나 짚고 서서 / 푸른 하늘에 마음을 비우고 온 / 산들바람에 맑은 얼굴 비 비고 가는 / 아름다운 그리움(「상사초-꽃무릇」 중에서)
- 산모퉁이 돌아들면 / 그리운 이 있으려나 / 고(苦)와 낙(樂)이 번갈아 오듯 / 왔다가 가는 것이라면 / 갔다가도 오시려나 (「겨울 산길」 중에서)
- 가슴 허전한 사람들의 수많은 그리움 / 눈이 되어 내린다 / 누군가의 머리 위로 헤진 가슴 으로 / 쌓인 그리움 밟고 지나가는 저 행인도 / 따뜻한 사랑 찾아가는 그리움의 길 (「눈이 오면 그리워진다」 중에서)
그렇다. 그는 ‘아지랑이 같은 행복도 / 잠시 춘몽 같은 인연도’ 지금은 ‘긴 세월 노송 가지에 / 허전한 마음 걸어두고’ 세상과 인생을 세월과 더불어 음미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그리움의 원천(源泉)이며 본류(本流)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고향의 소리’에서 듣는 애향가
서석철 시인은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는 애향가(愛鄕歌)를 높이 부르고 있다. 지난 번 시집 『바람의 손』에서도 귀향의식과 고향 농촌의 애환을 교감하는 작품을 많이 보여주어서 그의 향수는 지금도 우리들의 귀를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가 동경하면서 귀향의 그리움을 시적으로 발현하는 시법은 고향을 농촌에 두었거나 거기에서 성장한 삶의 궤적이 항상 시적 모태로 심중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설에서 이미 필자가 적시한 바가 있는데 이러한 그의 애향의 일념은 영원한 불변의 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봄이 오면
밭일 나갔던 엄마가 돌아오고
익은 살구가 툭툭 떨어지면
여름이 오는 줄 알았다
박하사탕 입에 문 하~한 젊은 날
그리움 기다리던 편지가 오고
능소화 늘어진 김약국네 담장을 돌아
예배당 길 따라 종소리도 들려왔다
싸리 빗자루로 싹싹 쓸어 놓은 마당에
저 먼 하늘에서조차 소복한 눈이 왔는데
세상에 오는 모든 것 중 모르는 것 하나
오지 않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
힘든 삶 살다 가신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다 원망하지 말아라”했지만
무른 가슴에 옹이로 박혀 흔적으로 남았다
--「온다는 것」 전문
특히 ‘힘든 삶 살다 가신 우리 어머니’에 대한 모정이 향수의 원류를 이루면서 시적발상에는 ‘밭일 나갔던 엄마’와 ‘능소화 늘어진 김약국네 담장’, ‘저 먼 하늘에서조차 소복한 눈’ 등의 회상공간의 설정으로 외적인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그리움 기다리던 편지’라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어머니’를 통한 향수를 더욱 진하게 현현하고 있다.
그가 회억(回憶)하는 고향은 어머니를 비롯한 당시의 삶의 형태가 클로즈업되면서 훈훈한 그의 정서가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확대시키고 있다. 작품 「고향 막걸리」에서도 ‘일자 나무 의자에 앉아 마시던 / 고향의 옥수수 막걸리 / 40년 흐른 지금까지 / 발효가 중지된 채로 남아있다’거나 작품 「고추농사」에서도 ‘맷돌에 둘둘 갈린 양념고추 한 바가지 / 어느새 식어버린 맹물 같은 사랑도 / 매콤한 얼갈이김치, 새콤한 열무김치를 만든다’는 등의 어조로 향수 의식을 고조(高調)시키고 있다.
어머님 무덤가 고요를 전해주는
한 맺혀 서러운 아리랑 가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는 이야기인가
들어보면 아려오는 두 글자로 된 시(詩)
풀섶 같던 둥지에서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푸른 환청으로 들려오는
아릿한 전설이 담긴 고향의 소리
--「뻐꾸기 소리」 중에서
보라. 그에게서 오매불망(寤寐不忘)의 ‘고향의 소리’는 ‘모내기 마친 무논’이나 ‘산기슭 밭둑’ 그리고 ‘고추밭 두 고랑’ 뿐만아니라, ‘어머니 무덤가 고요를 전해주는 ’ 시(詩)이다. 저기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와 더불어 ‘한 맺혀 서러운 아리랑 가사’가 바로 그가 적시하는 ‘아릿한 전설이 담긴 고향의 소리’이다.
그의 내면에 오래 간직된 동경(憧憬)의 대상에는 들녘에 솟아나는 오월의 사랑이 있고 푸르게 돋아난 초여름, 초록빛 동산 그리고 버들피리의 환청 등이 모두가 그에게서는 추억이면서 시적 소재와 주제의 발상지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식전에 마실 구경하듯 / 금세 갑자를 한 바퀴 돌고 와서 / 부모님 빼닮은 모습으로 / 다시 마주친 어릴 적 동무(「닮아간다」 중에서)’, ‘영자 누나 지나간 자리 / 분 냄새 뒤따르던 / 여름밤 은하수를 머리에 이고 / 양떼구름 몰려오던 가을 저녁 골목길 / 상주군 공성면 안동네 길(「골목길」 중에서)’ 그리고 ‘풋보리 바람에 부들거리며 고향내음 실려가고 / 누런 나락이 익어가는 철이 되면 한줌씩 담아갔던 / 뭉게구름처럼 부풀려진 고향의 추억을 짊어지고 / 봄 가을 한 해 두 번씩 만나길 36년(「고향마을 불알친구」 중에서)’ 등의 어조와 같이 고향과 동행한 애환은 한 편의 좋은 시로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향가를 들을 수 있는 작품은 「당쟁이」 「핏줄이 당기듯」 「숨을 쉬며」 「골가실 취은고택 담장」 등등에서 확연하게 명시되고 있어서 우리들도 함께 고향의 소리를 들으면서 애향가를 높이 부르게 하고 있다.
4. 사계절 시산성에서 탐색하는 서정
서석철 시인은 자연풍광을 탐닉(耽溺)하는 자연 서정시인이다. 도처(到處)에서 만나 음미하는 대자연은 그에게 인생 정취의 만끽(滿喫)을 제공하는 서정성의 보고(寶庫)이다. 그가 이처럼 친자연적인 정서의 정착은 그가 지향하는 인생적 혹은 시적 향방이 농촌 전원이나 고향의 오랜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서 생활화했다는 요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간 사람은 가고 아니 올지라도
해마다 새봄은 잊지 않고 온답니다
아픔도 그리움도 잊혀진 곳으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 때엔
꽃피우던 한때가 생각납니다
올해도 복사꽃잎 피우는 날엔
애절한 인연이 그립기도 하겠지요
천지만물 어루며 오는 풀빛 손길에
목련꽃 허공에 벙그는 봄날이 오면
--「봄날이 오면 」 전문
그는 자연에서도 계절적인 만상(萬象)의 변화에서 탐구하는 이미지가 바로 그의 서정적 시점(視點)과 관점(觀點)을 동시에 수용하는 그의 발상을 이해하게 한다. 우선 봄에 관한 그의 의식의 흐름은 잔잔한 새싹길을 걸어가듯 ‘아픔도 그리움도 잊혀진 곳’이라는 안온의 정서가 ‘풀빛 손길’처럼 생성하고 있다.
대체로 봄에 관한 이미지나 상징은 새 생명의 탄생으로 분화한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천지만물’이 소생하는 만화방창(萬化方暢) 호시절(好時節)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바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활력을 제공하는 좋은 계절이다. 이처럼 ‘푸른 혈관을 타고 파발마처럼 달려갔던 / 사랑의 감정들이 퇴적되어 굳은살이 된 지금 / 늘어진 실핏줄에 희미한 맥박으로 전해오는 봄날의 연정(「입춘」 중에서)’으로 형상화하는 시법을 대할 수가 있다.
가슴으로 뚫린
컴컴한 터널 속으로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
마른 장작 한 다발 가져다
낭창낭창한 버들가지로 묶어
불을 붙이세
휑한 감나무 끝에 홍시 하나
밤늦도록 호롱불 삼아
불을 밝히세
서럭서럭 가을비 뿌리는 밤
사무치는 노래 한 자락도
실려 보내세
--「단풍 둘렀네」 중에서
다음으로 선호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어쩐지 봄에 비해서 서늘한 정감의 이미지가 앞선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라서 모두가 풍년가를 높이 부르며 우리들의 의식은 환희에 가득차 있으나 여기서는 약간의 우수(憂愁)가 깃들인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이나 ‘휑한 감나무 끝에 홍시 하나’가 다시 ‘서럭서럭 가을비 뿌리는 밤’에 전해주는 이미지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현상은 결실 후에 생명을 다한 나뭇잎이 낙엽으로 비 맞은 채 뒹구는 정경은 더욱 스산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 타는 남자도 / 긴 동면을 위해 / 따뜻한 체온을 부둥켜안고 / 한 토막 남은 계절 앞에 / 쓰러지고 싶은 것이다(「가을타는 남자」 중에서)’.
요령 없이 서 있는 저 나무도 세찬 바람 부대끼며 겨울을 버티면 푸르게 여름 산을 덮어 수많은 생명을 품어내며 계절의 바통을 받을 것처럼 눈밭에 바람을 등지고 구부려 있는 저 마른 풀들도 이른 봄 가장 먼저 푸릇한 모습으로 봄을 전하리
-- 「겨울산에서」 중에서
이 ‘겨울산에서’도 동일한 시간성에 대한 감응을 지속한다. 결국 봄=새 생명, 여름=청춘, 가을=결실의 풍요, 겨울=한 해의 마무리, 이러한 순환의 계절적 의미에서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는 인간의 연약성은 겨울 동면(冬眠)을 지나면 다시 새로운 자연세계를 맞이하고 향유할 수 있다는 세월과의 융화 혹은 화합의 인간생활을 절실하게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묵헌 서석철 시집 『말의 사원』에 대한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가 인생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지향하면서 성취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의 근원을 추척해 보았다. 그는 그리움의 시인이며, 사랑의 시인이며, 서정시인이다. 더구나 만유의 사물과 착목(着目)하면서 교감하고 동화(同化)하거나 투사(投射)하는 서정시법은 그의 안온한 인간미가 넘치는 성격과도 무관치 않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서석철 시인의 ‘말의 사원’이 어쩌면 이 철학의 논리와 유사한 인식의 단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 속에서 시의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의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 된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의 원칙이 된다는 요지를 그의 글 「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에 적시하고 있어서 우리 후학들이 규범으로 삼는 유명한 명언이다.
우리의 조지훈 시인도 시란 지(知) 정(情) 의(意)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언지도 명심할 필요가 있으리라. 제3시집에서는 더욱 활달한 기개가 넘치면서도 지적인 주제가 궁극적으로 창출되는 작품들을 기대한다.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