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노래 '나그네 설움' 을 부르다 보니 괜시리 센티해지고, 신산(辛酸)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최희준의 노랫말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인 것도 같고, 나그네 설움의 초반부 가사와 같이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러나 난리(安史亂) 중 집안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십여년을 사방천지를 헤맸던 두보나, 평생을 나그네 신세로 떠돌았던 김삿갓의 시편을 떠올리고는 괜히 무색해집니다.
안록산의 난이 한참이던 756년. 부주(鄜州, 陝西省)에서 작은 벼슬살이를 하던 두보(杜甫, 712~770, 盛唐)가 숙종이 외지(靈武)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신으로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안록산의 군대에 잡혀 장안으로 압송됩니다. 폐허가 된 장안에서 비감한 마음에 많은 시를 짓게 되지요.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나라는 망가졌어도 산하는 남아,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지고)로 시작되는 절창 春望도 이 즈음에 쓰여집니다. 아래 시 '달밤(月夜)'는 그해 가을 부인과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지은 거랍니다.
今夜鄜州月(금야부주월) 오늘 밤
부주(鄜州)에 떠 있을 저 달을,
閨中只獨看(규중지독간) 아내는 방안에서 홀로 보고 있으리.
遙憐小兒女(요련소아녀)멀리서 어린자식들을 그리워하나니,
未解憶長安(미해억장안) 장안의 애비를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中略)
何時倚虛幌(하시의허황) 언제나
안방 휘장에 기대어,
雙照淚痕乾(쌍조누흔건) 달빛에 비친 두볼 눈물자욱 지울까?
그 후 10여년이 지난 767년,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에 병든 몸을 이끌고 높은 곳에 올라 본 감회를 쓴 시(登高)는 처절하기조차 합니다. 아직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한 시인은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야겠다고 읊조리네요.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바람은 세차고 하늘은 높고 원숭이 울음소리 애달픈데,
渚淸沙白鳥飛廻(저청사백조비회)
강가는 맑고 모래는 하얗고 새들은 선회하며 나는구나.
無邊落木蕭蕭下(무변낙목소하)
끝없는 숲에는 낙엽이 우우수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부진장강곤곤래)
다함없는 長江(양자강)은 도도히 흐른다.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만 리 타향 슬픈 가을 언제나 나그네 된 몸,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평생 병많은 몸으로 홀로 누대에 오른다.
艱難苦恨繁霜鬢(간난고한번상빈)
가난에 시달림도 한스러운데 귀밑머리엔 서리가 성하니,
潦倒新亭濁酒杯(요도신정탁주배)
쇠약해져 새로 탁주 마신 걸 멈추네.
*요도(潦倒) : 초라하게 되다 또는 零落하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건강이 나빠졌다는 의미
두보와 거의 동년배인 고적(高適, 707~765)의 '제야에 읊다(除夜吟)'는 나그네의 서글픈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의 지근인 환관(李輔國)의 미움을 사서 장안에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평생을 미관말직으로 변방을 떠돌았다고 합니다.
旅館寒燈獨不眠(여관한등독불면) 여관 차가운 등불에 홀로 잠 못 이루는,
客心何事轉凄然(객심하사전처연) 나그네 마음 어이 이리 처연해 지는가?
故鄕今夜思千里(고향금야사천리) 고향에서도 오늘밤 천리 밖 날 생각하겠지.
霜鬢明朝又一年(상빈명조우일년) 서리 내린 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해가..
신비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 812~858)도 관운이 좋지 못해 외지를 떠돌았습니다. 아래 시는 四川 지방 파산(巴山)에서 비오는 밤 아내에게 부치는 시(夜雨寄北)입니다.
君問歸期未有期(군문귀기미유기) 그대는 언제 올지 묻건만 돌아갈 기약 없네.
巴山夜雨漲秋池(파산야우창추지) 파산(巴山)에 밤비는 가을 연못에 넘치는데..
何當共剪西窗燭(하당공전서창촉) 언제쯤 안방에서 등불 심지를 함께 자르며,
却話巴山夜雨時(각화파산야우시) 파산에서 밤비 내리던 때를 얘길 해보나.
당나라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던 말기, 평생을 파촉(巴蜀), 오초(吳楚), 하남(河南) 등지를 벼슬살이로 떠돌던 최도(崔塗, 854~?)가 파산으로 가는 도중 제야를 맞으며 회한(巴山道中除夜有懷)을 읊습니다.
迢遞三巴路(초체삼파로) 멀리 험난한 삼파(三巴)의 길을 가는,
羈危萬里身(기위만리신) 위태한 나그네는 만리 밖 몸이라네.
亂山殘雪夜(난산잔설야) 험준한 산속 잔설이 남아있는 밤,
孤獨異鄕春(고독이향춘) 이것이 고독한 이의 타향의 봄이런가.
*삼파(三巴) : 지금의 四川省 동부를 3으로 나눠 巴東, 巴西, 巴郡이라 하며 삼협(三峽) 부근
漸與骨肉遠(점여골육원) 점점 가족골육과는 멀어지고,
轉於僮僕親(전어동복친) 도리어 대소의 종들과 친해졌구나.
那堪正飄泊(나감정표박) 어찌 감당하랴! 정녕 이 떠돌이 생활을,
明日歲華新(명일세화신) 내일이면 한 해가 또 다가오는 것을..
평생동안 팔도를 방랑하며 수많은 일화와 詩를 뿌렸던 김삿갓(金笠, 1809~1863). 죽기 전에 남겼다는 긴 절명시 중 일부만 뽑아 보았습니다.
鳥巢獸巢皆有居(조소수소개유거) 날짐승도 들짐승도 다 제 집이 있건만,
顧我平生獨自傷(고아평생독자상) 내 평생 돌아보니 홀로 서글프도다.
芒鞋竹杖路千里(망혜죽장로천리) 짚신에 대지팡이 끌고 천리길 떠돌며,
水性雲心家中方(수성운심가중방)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中略)
南州從古過客多(남주종고과객다) 남쪽 지방은 예로부터 과객이 많은데,
轉蓬浮萍經幾霜(전봉부평경기상) 들쑥 부평초처럼 떠돌기 몇 해런가?
搖頭行勢豈本習(요두행세기본습)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요?
設口圖生性所長(설구도생성소장) 먹고 살기 위해 그리 된 것을..
(後略)
끝으로 많은 벗님들에게 익숙할 법한 시 한수 붙입니다
今行此足不定處(행장차족부정처)
歷程跡跡淚落滿(역정적적루락만)
艙前船笛思故人(창전선적사고인)
流浪客路終無限(유랑객로종무한)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이 한이 없어라.
'나그네 설움'의 앞 부분을 필자가 한번 한시로 옮겨 봤습니다. 운(韻)은 2, 4째 구 마지막 자 만(滿)과 한(限)으로 했는데, 평측(平仄)에는 자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