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다도의 길-1
차 한 잔속에 선(禪)이 스며있다
가을이 저물어간다. 가을이 저물어가면서 아름답게 물들었던 단풍은 낙엽으로 변하고, 나무들은 겨울을 날 채비를 한다.
알몸이 된 나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그런데 한반도의 최남단 해남 땅은 아직도 늦가을의 정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올 마지막 단풍을 만나러 해남으로 떠난다. 드넓은 나주들판과 영산강, 그리고 낮은 산줄기가 가져다주는 부드러운 풍경은
영암 월출산을 만나면서 강렬한 분위기로 바뀐다. 불꽃처럼 솟아오른 월출산의 빼어난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오늘은 낮게 깔린 안개 위에 아기자기한 바위봉우리들이 얹혀 환상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해남읍을 지나면 들판 왼쪽 산자락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이 있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갓집으로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집으로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삼산벌을 뒤에 두고 두륜산 자락으로 빠져든다. 매표소에서 대흥사로 이어지는 깊은 골짜기는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운치 있는 곳이다.
대흥사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지만 우리는 매표소에서부터 걷기로 했다. 매표소를 막 지나면 ‘두륜산 대둔사’라 쓰인 일주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둔사는 대흥사의 옛 이름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도로를 따라 걷게 되고, 매표소 옆으로 산책로가 나있다.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하고 호젓한 이 숲길을 ‘장춘(長春)숲길’이라 불렀다. 봄이 유난히 길어서 장춘(長春)이라 했다.
아홉구비를 흘러내린다 해서 구곡유수(九曲流水)라고도 했다.
통행하는 차량만 없다면 도로를 따라 걷는 운치도 만만치 않은데, 우리는 자동차 때문에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굴참나무·소나무·편백나무·동백나무·느티나무 등 다양한 나무로 이뤄진 숲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가을 가뭄에 적은 수량의 물이 속삭이듯 흘러가고, 물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그림을 그려놓았다.
짙푸른 동백나무 잎과 붉은 단풍이 서로의 색깔을 돋보이게 한다.
계곡에 떨어진 낙엽은 단풍이 투명한 물위에 수채화를 그리도록 한쪽에 떠 있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오솔길은 가끔 도로를 만나는데, 늦가을 단풍과 어울린 곡선도로가 우아한 멋을 자랑한다.
동백숲길과 편백숲길, 단풍길을 번갈아 걸으며 늦가을 운치에 푹 빠져든다. 대흥사주차장에서 대흥사까지 가는 길목에는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계곡에서는 화사한 단풍이 물위로 가지를 내밀었다.
단풍은 계곡의 검은 바위와 흐르는 물까지 붉은색으로 바꿔버렸다. 햇살에 비췬 단풍은 찬란한 광채를 띤다.
나뭇잎이 낼 수 있는 가장 예쁜 색을 보여주고 미련없이 떠나는 단풍에는 달관의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나는 단풍을 볼 때마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을 생각한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꾸준히 공부하고 수행하는 삶,
탐욕을 버리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 속에서 형성될 것이다. 단풍길을 걸으며 ‘우아한 황혼’을 떠올린다.
주차장에서 대흥사로 통하는 길 주변에서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을단풍은 단풍나무에만 물드는 게 아니다. 느티나무도, 참나무도 우아하게 물들어 대흥사로 향하는 중생들을 인도한다.
고목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이 휘날리면서 얼굴에 부딪친다.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저무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낙엽은 미련없이 버리는 것이다. 자신과 동고동락해 왔던 나무와 이별하는 것이다. 이별은 언제나 아쉽고 허전하다.
나무와 나뭇잎의 이별은 일정기간 여백을 갖고 나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낙엽을 통해서 아름다운 이별을 생각한다.
운치있는 한옥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선여관은 내부수리 중이다. 전통한옥 유선여관은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나는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유선여관에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물소리 고요하게 들려오고,
울창한 숲 향기를 맡으며 한옥 온돌방에서의 하룻밤은 참 행복했었다.
단풍으로 뒤덮인 고즈넉한 길을 따라 또 다른 일주문을 지나자 부도밭이 맞이한다. 서산대사 이후 대흥사를 거쳐 간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의 사리를 모신 부도들이다. 느티나무 고목도,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은 아름드리 노송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단풍도 옛 스님들의 부도와 함께 대흥사의 맥을 잇고 있다.
해탈문에 들어서자 두륜산과 대흥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 정상을 이루고 있는 바위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에 대흥사 절집들이 포근하게 둥지를 틀었다. 대흥사 가람배치는 일반 절과는 다르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건물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선열당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는 먼저 대웅전이 있는 북원으로 향한다.
범종루를 지나 북원으로 가는 금당천 주변에도 노랗고 빨간 단풍이 은은하게 물들었다.
단풍나무에 뒤질세라 은행나무도 노랗게 채색하여 늦가을 정취를 고조시킨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쓰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쳐다보며 추사와 얽힌 이야기를 생각한다.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던 추사는 원교 이광사 글씨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고 하였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글씨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제주도에서 7년 3개월의 귀양생활 동안 추사는 외로움을 달래며 열심히 글씨를 쓰고 또 써서 소위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대흥사를 들른 추사는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도록 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원숙한 인품을 이룩해낸 추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흥사에서는 추사와 원교를 비롯해 창암 이삼만, 정조 등 당대 명필들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다.
대웅보전 입구 침계루(枕溪樓) 편액은 원교 이광사, 가허루(駕虛樓) 편액은 창암 이삼만, 표충사(表忠祠) 편액은 정조의 글씨이다.
개천 남쪽에 해당되는 남원 구역에는 천불전이 있다.
천불전으로 가는 언덕위에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게 서 있다.
느티나무 두 그루는 오랜 세월 사랑을 나눈 끝에 뿌리가 이어져 연리근(連理根)이 되었다.
오랜 세월 금슬 좋게 살아온 부부의 모습이 이런 것이리라.
천불전으로 들어가는데, 출입문인 가허루의 멍에처럼 둥글게 휘어진 문턱이 인상적이다.
꽃무늬로 장식된 천불전 문살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불전에 모셔진 천불상은 경주 불석산 옥돌로 6년에 걸쳐 만든 것이다.
1817년 세 척의 배에 나눠 싣고 오던 도중 한 척의 배가 부산앞바다에서 표류한 끝에 일본 규슈로 잘못 가서 이듬해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됐다.
나말여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흥사가 대사찰로 변신하기까지는 서산대사의 유언이 있었다.
1605년 1월 어느 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하였다. 두 제자가 그 이유를 물은 즉, 두륜산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라고 대답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은 유언대로 가사와 발우를 대흥사에 모셨다. 이리하여 서산대사의 법맥은 대흥사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대흥사에는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두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스님의 화상을 함께 봉안한 표충사가 있다.
표충사는 사찰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 형식의 사당이다. 대흥사는 지난 2018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첫댓글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그치면 추워진대요.
참 좋은 날에 예쁜 마지막 단풍을 맘껏 즐겼어요.
사진으로 보니 더 고운길, 비단길입니당.
덕분입니당~~~ 고맙습니다^^
올 해 마지막 단풍이 저물어가는 가을을 붙잡아두고 있네요.
즐거운 하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