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의외로 호전이 빨랐다. 팔과 다리엔 여전히 붕대가 감겨있지만. 목발을 짚으면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사실에 후안과 브리는 안도했고, 아네트는 실망했다. 조금 더 다리가
아파서 몇 달은 더 병자로 남아있고 싶었다. 그러면 후안이 감히 임신을 한 브리의 곁을
더 오래 떠나있을 수 있을 태니까.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으니. 더 이상 봐드리는 거 없습니다.”
사무실이었다. 언제나처럼 지루하게 서류들을 넘기던 후안에게 반 루앙이 말했다. 그도 언제나
처럼 후안이 도장을 찍은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꼭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
스럽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무슨 소리야?”
“아네트 양 말입니다. 너무 정신을 놓으시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 그랬나?”
서류 속의 작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후안이 멈췄다. 턱을 괸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긴, 요 몇 주 아네트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별안간 제 방에서 투신했다. 가느다란 팔이 부러지고, 다리에 금이 갔다.
예쁜 얼굴도 많은 상처가 생기고 나뭇가지에 긁힌 종아리는 살이 벌어져 밤마다 고름이
터져 나오기 일쑤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왜 자신의 몸을 그렇게 함부로 다뤘는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후안은 알 수 있었다. 꼭 여러 번 동침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알기 쉬운 이유였다.
힘든 과거를 보내고, 이미 두 아이를 잃은 그녀는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후안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어 보이거나. 후안의 일에 대해 툭툭 한마디를 내뱉을 때나
선잠이 든 그를 소중히 쓸어 내릴 때는 후안보다 몇 달 생일이 늦은 아네트가 오히려 그보다
더 연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상처를 받았다. 그녀가 다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던 후안의 잘못이었다.
귀띔이라도 해주고, 하다 못해 편지라도 써줬어야 하는 거였는데. 브리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아네트와의 사랑이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하는 그 생각.
어떻게 아네트 말고 다른 것에 정신을 쏟을 수가 있었겠는가
“공주님께서 배가 많이 나오셨습니다. 내년 초면 몸을 푸실 탠데, 잘 해 드리세요.”
반 루앙에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밤에 브리의 곁을 지킨
날이 손에 꼽는다. 아네트가 투신한 뒤로 말이다.
만약, 예전의 후안이었다면 브리 걱정 따윈 하지 않았겠지만 그녀와 동침하고. 그녀가 임신을
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많이 친해진 지금은 도저히 그녀를 무시할 수 없다.
슬슬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아네트에게 며칠
가있었다고 브리가 화가 나있을게 뻔한데. 과연, 임산부의 히스테리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날 저녁.
조금 더 브리에게 신경 쓰자고 다짐을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아직까진 아픈
사람 이었기에- 아네트의 방을 먼저 들렀으나 그녀는 이미 자고 있었다. 얼굴을 보면 더
있고 싶어 질 것 같아. 서둘러 1층으로 돌아온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휑한 방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썰렁함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분명 화장대나
침대 위에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붉은 바탕에 금실 자수가 놓인 겉옷을
벗고 드레스 룸으로 향한 후안. 코가 막힐 정도로 답답한 장미향과 함께 브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드레스 룸엔 답답한 장미향과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 건너 단정하게 걸린
두 사람의 옷만 자리하고 있었다.
어딜 갔을까?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후안은 방으로 향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상쾌한 바람과 함께 또다시 썰렁한 방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드레스 룸의 문을 닫고
아무도 없는 쥐 죽은듯한 그 방을 걷는 후안. 그러다 브리가 좋아하는 책들만 가득한 책장을
향했다. 한 권 꺼내는 그. 몇 장 넘기다 쿡 웃어버린다. 유치한 사랑에 대한 말들만 주륵 늘어
놓는 주인공들이 즐비한 책이었다. 그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둥, 그대가 내 전부
라는 둥, 도저히 느끼하고 유치해서 더 이상 보기 힘든 책.
‘이런 거 잘도 보내..’
몇 장 뒤적이다 덮어버린 후안이 다시 책을 꽂으려 했다. 그러나 곧 행동을 멈추고 다시 그
책을 펼쳤다. 모든 것을 넘겨버리고 맨 뒤. 결말만 바라보는 후안. 역시, 해피엔딩이다.
하긴 해피엔딩이니까 브리가 책장에 까지 꽂아 놓는 거겠지.. 후안은 책을 제 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러다 문득 이와 비슷한 제목의 책들이 꽤 많은 것을 바라보곤 멈칫했다.
분명 이 책처럼 사랑에 대한 달콤한 것들을 늘어놓을 책들. 결과는 언제나 해피엔딩이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그런 책들.
책장 앞에 서있던 후안이 뒤를 돌았다. 역시 방안은 횅했다.
이런 책들을 보면서 이 횅한 방에서 브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랑 없이 생긴 아기와
함께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후안의 발소리만 울렸다. 곧 넓은 침대에 풀썩
하고 앉은 후안. 혼자 있기에 이 방은 너무나도 넓다.
“… 후안?”
브리다.
급하게 고개를 돌린 후안은 브리를 바라봤다. 자주 보지 못한 사이에 배가 더욱 커져있었다.
걷기 힘겨운 듯 허리를 짚은 브리의 뒤엔 제제부인도 함께했다. 반가움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또 다른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제제부인이 날카롭게 후안을 노려본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브리의 뒤에서 입을 벙긋거리는 그녀.
[잘 해주지 않으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요.]
나가 보라는 듯 눈치를 주는 후안. 못미더운 듯 후안을 바라보던 제제부인은 브리가 방안에
한걸음 발을 들이자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여워 보였다. 겨우 후안의 어깨에 닿는 작은 키에, 뼈대부터가 워낙
얇아 가녀린 그녀의 배가 불쑥 튀어나와있다. 지탱하고, 걷는 것이 힘든 게 당연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후안은 브리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부축해주는 그.
어디에 갔었는지, 왜 방에 없었는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쉬이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아네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연어 알이 먹고 싶어서. 제제부인을 불러 식당에 갔었어.”
“.. 응?”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길래.”
쿡 하고 웃어 보인 브리는 후안이 인도한대로 침대에 앉았다. 멋쩍어 머리를 긁적인 후안은
그녀의 곁에 털썩 앉았다.
아무 말 없이 두 부부가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후안으로써는 브리가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바랬는데 브리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배에 손을 얹고 가만히 어떤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미안함이 들지 않게 친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안한 건 속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기가 생긴 게 후회되는 건 아니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2층에 있는 그 방에 아기와 브리가 같이 있을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으니까.
“오늘이 11월의 마지막 날인 거 알아..?”
“..벌써?”
“곧 있으면 우리 아기도 벌써 7개월이 돼. 처음엔 갖기 싫다고 난리였는데, 벌써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까지 지나서 슬슬 겨울이 와.”
“시간 진짜 빨리 간다.”
그 뒤로 브리는 잠시 후안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브리의 집요한 시선에 후안이 흠칫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던 판. 다시 브리가 입을 열었다.
“으휴, 정말 무신경하긴. 벌써 우리 아기가 7개월이 되어간다고!”
“그래, 7개월. 잘 알고 있어.”
“후.. 뭐 궁금해 지는 거 없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는 수 없단 듯 한숨을 내쉰 브리는
갑자기 후안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쿡 웃고 부푼 배 위. 아기가 있는 곳에 후안의 손을
얹어두었다.
“지금까지 태동이 없잖아. 우리 아기.”
“태동…?”
“그래. 7개월이 되어가는데 태동이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태동이라면 그 뱃속에서 움직이는 그런 느낌, 발차기나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건가?
갑자기 후안의 표정에 걱정이 역력했다. 혹시 배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러나 웃음을 참지 못해 웃는 얼굴인 브리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혹시.
“뭐야, 나한테 말 안 했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했어.”
“?”
“남편이 옆에 없어서.”
브리의 말에 잠시 멈칫한 후안이 끝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 말을 하려고 저렇게 운을
띄웠단 말인가. 그래도 너무했다. 두 사람의 아이인데 아기가 발차기를 한다고 어떤 말도
해주지 않다니. 자기에게 신경을 더 써달라는 그녀의 말을 뒤로한 채 아네트에게 더욱
신경을 쏟긴 했지만 겨우 며칠이고, 또 아네트는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그렇지만 잘못은 잘못인지라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후안은 약간 자세를 낮춰 브리의
배를 바라봤다.
“야, 움직여봐.”
배를 보고 하는 소리다. 지금이라도 느껴야겠는지 브리의 배 위에 손을 얹고 뭐라 뭐라
아이에게 말을 거는 후안. 그런데, 말을 건다고 대답을 할 아기가 아니다.
후안의 그 모습이 쿡 웃어버린 브리. 그러자 더욱 애가 탄다. 이젠 귀를 가까이 대고 말하는
후안.
“아빠야~ 야, 아빠라니까?”
애처로울 정도로 말을 걸지만 아기에겐 통 반응이 없다. 후안의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해버린
브리.
“그런다고 반응하면 우리 애기 천재게? 포기하고 묵묵히 기다려봐.”
브리의 말을 들었으나, 아쉬움이 남은 후안은 한번 더 도전을 했다. 그러나 아기는 여전이 묵묵
부답.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 어쩌면 이 아이가 사내아이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사내아이니까 제 엄마를 더 챙기는 거라고.
그 생각에 쿡 웃어버린 후안.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기에게
익숙해지고. 이젠 더 이상 이 녀석이 부담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빨리 태어나길 바라는 건 아니
었지만.
“시간 꽤 됐어. 난 이제 잘래.”
“정말. 열 한시네.”
역시 시간이 늦었다. 후안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달랑달랑 켜있던 촛불을 후- 하고 분 후안.
어둠이 가득한 방안. 잠시 서있던 그는 이제 어둠이 익숙해 지자 침대로 향했다.
신발을 벗은 후 넓은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자려고 눈을 감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랑 더 친해져 버린 아기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역시, 브리가 걸렸다.
“미안.”
편하게 몸을 옆으로 뉘고 눈을 감았던 브리가. 다시 눈을 떴다. 예상치도 못했던 후안의 말에
브리가 잠시 돌처럼 굳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피식 웃어버린 그녀.
이상했다. 분명 후안을 보기 전까진 아네트에 대한 생각에 우울했는데 후안을 보자 그
우울함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기의 태동을 듣고 싶어 애를 쓰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니었다. 정말 그 어떤 이유도 없이 후안을 보자마자 그 서러운 마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괜찮아.”
“..정말? 속상하지 않았어?”
“응. 사실, 속상했는데… 정말 괜찮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만 울렸다. 브리의 말을 끝으로 다시 방안엔 어둠만이 가득했다.
후안은 다시 눈을 감았고.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한 브리.
‘나랑 아기에게 다시 와줬잖아. 그걸로 됐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몇 번이고 되뇌다. 눈을 감은 그녀는 곧 아기와 함께 잠이 들었다.
58
조용한 아침이었다.
여덟 시. 평소보다 늦은 아침식사. 겨울이 다가오자 따뜻한 붉은 색으로 옷을 갈아 입은 식탁
위,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의 김과 함께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오늘 아침식사는 브리가 가장
좋아하는 연어였다.
분홍빛으로 잘 구워져 노란 소스가 올려진 연어 곁에 브로콜리가 장식되어있는 접시는 한눈에
보아도 먹음직했지만 며칠 몸이 좋지 않아 겨우 수프로만 세끼를 때우는 브리가 먹기엔
무리였다. 사랑이 배제되어 있든,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게 사실인지 브리처럼 며칠 음식이
입에 받지 않는 후안도 깨작깨작 거릴뿐이다.
아니, 어쩌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의 상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인지 식사에 나오지 않은 아버지 덕분에 넓은 이 식탁에 후안과 헤렌 부인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군침이 도는 맛있고, 접시에 놓은 그 자체가 예술인 음식들이 자리한 아침에
말이다. 눈썹을 구긴 후안은 빨리 집어넣고 나가자는 심산인지 꾸역꾸역 연어를 잘라 입에
넣고 있었고. 헤렌부인은 여전히 우아하게 썰어 먹고 있었다. 물론, 그 표정도 상당히
딱딱했지만 지금 이 분위기가 싫은 후안과는 원인이 틀렸다.
디에고가 의식을 놓았다.
그래도 그제까지는 헤렌이 무슨 얘기를 하면 은은하게 미소를 짓던지, 아니면 슬쩍 눈썹을
구기 던지 하는 의사표현을 했는데 어제는 예외였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을 귀를 대어보니 콩, 콩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코에 티슈를 대어보니 미세하게 흔들렸다. 급한 마음에 의사를 데려오니, 어떤 치료도 하지
않는 그 의사는 그저 마음의 준비만 하라 말했다.
포크를 내려둔 헤렌부인이 후안을 바라봤다. 상아빛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려 묶은 녀석은
아무래도 헤렌부인과 둘만의 식사가 불쾌한지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다. 그런 저 녀석의 모습이
꽤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디에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디에고가 어떤 상태인지
더 이상 숨기기도 힘들고, 숨겨서는 안 된다.
“…후안.”
“당신 같은 사람이 부르라고 지어진 이름이 아니거든?”
헤렌부인이 테이블보를 힘줘 쥐는 바람에 그녀의 접시가 조금 흔들렸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한숨을 다시 내 쉬고 그래도, 디에고의 아들이라며 다시 마음을
다잡은 채 입을 열었다.
“식사 중이야. 말 시키지마. 당신 내가 토하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후안이 더 빨랐다. 부들부들 떠는 헤렌부인을 보고 피식 웃어 보인 후안. 몇 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다 안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드르륵ㅡ,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뚜벅
뚜벅 걸어가는 후안의 뒷모습이 보인다. 부들부들 손을 떠는 헤렌부인. 일어나면서 꼭 쥐던
테이블이 쓸려 내려오고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접시가 깨진다.
“너.. 후회할 거야.”
헤렌부인이 말했다. 등돌린 후안의 한쪽 입 꼬리가 싱긋이 올라갔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머, 이제 잘 드시네요?”
“내가 좋아하는 연어니까♥”
“저번엔 드시지 않으셨으면서..”
“그랬었나? 아-, 너무 맛있어♥”
최고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브리는 침대에 앉은 채 연어수프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것이었는데 마음껏 먹지를 못했다. 입덧이 있는 경우, 처음 몇 달 입덧을 하고 끝내는
산모와 아예 임신기간 내내 달고 다니는 산모가 있다더니 바로 브리가 그 후자였는지 그녀는
좋아하는 음식조차 입에 넘기지를 못했다.
그런데 12월의 첫날. 오늘은 무슨 일인지 브리가 음식을 잘 넘겼다. 생긋생긋 웃기도 하고 아마
어제 후안과 오랜만에 같은 침대를 써서 그런 듯 싶다.
신경 쓰지 않는다, 않는다고 해도 특히 임신을 한 브리에겐 많은 스트레스 였던 것이다. 아기가
생기고 겨우 잡아놨다 싶었는데, 금새 또다시 돌아가버린 꼴이니.
그래서 어젯밤 후안이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온 것에 음식을 넘길 만큼 그녀는 기뻐했다.
그 모습에 따뜻하게 웃어 보인 제제부인은 얇은 잠옷만 입은 브리의 어깨 위에 두터운 가디건을
걸쳐주었다.
“이제 겨울이에요. 아무리 집안이라고 하지만 따뜻하게 입고 계셔야 해요. 알겠죠?”
수프한입을 입에 넘기며 빙그레 웃어 보인 브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온화하게 웃어 보인 제제부인이지만 한 켠으로는 무척 슬펐다. 브리는 자꾸 떠올리게
한다. 후안의 어머니인 리엔을.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어여쁜 외모는 물론, 행동거지까지 비슷하다. 가끔 철없다가도 어쩔 땐
의외다 싶을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럽다. 그러다가도 또 폭탄처럼 변덕을 부려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고, 너무너무 미워지다가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웃어버리면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처럼 순진하여 항상 웃고 살 줄만 아는 천상 공주.
그게 리엔이었고. 그게 브리다. 너무 닮아서 즐겁기도 하면서 너무 닮아서 슬픈 두 사람.
브리는 자꾸 리엔을 떠올리게 한다. 솔직히 그건 즐겁지가 않다. 왜냐하면 리엔은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브리도, 그리 될라 두렵다.
브리가 리엔을 닮았다면 후안도 소름 끼칠 정도로 제 아비를 닮았다. 물론 외형적인 면은 모두
어머니인 리엔을 닮았지만, 성격하며 뇌 구조하며 모두 디에고다. 심지어 계집질을 하며 부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과 그토록 일에 매달리는 것 까지도.
제 아비와 같은 후안이 제 아비가 리엔에게 주었던 상처를 주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고, 리엔과
닮은 브리가 리엔과 같은 상처를 받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브리를 리엔처럼 잃는다. 그건 너무 끔찍하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벌서 수프를 다 비운 브리가 숟가락을 입에 문채 물었다. 아무래도 제제부인이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기 한 모양이다. 온화하게 웃어 보인 제제부인은 브리의
쟁반을 챙겼다.
“좀 더 드릴까요?”
“..아니.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을 것 같아.”
“그럼 곧 저녁이니 그때..”
“저기.. 제제부인. 나 말야 부탁이 있는데..”
말을 마치고 잠시 고민을 하는 브리.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제부인이 바라보자 약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녁식사에 아네트를 초대하고 싶어..”
◆
화려한 붉은색의 긴 드레스를 입고 역시 붉은색의 팔꿈치까지 가릴 정도의 짧은 양털망토를
걸친 아네트는 왼쪽으로 동글게 말아 올린 머리에 예전, 헤렌부인이 선물했던 금빛 장미장식을
장식했다.
거울 속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아네트는 자넷의 부축을 받으며 목발을
짚었다. 절룩절룩. 사고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진 목발을 짚고 걸어야 하는 아네트는 역시
자넷의 부축을 받으며 3층에서 겨우 1층 공작부부의 방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부부의 문 앞. 목발을 쥔 손에 꾸욱, 힘을 준 아네트는 자넷을 뒤로 물리고 다른 하녀를 시켜
문을 열게 했다. 문을 열면서 나리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하더니 곧 군침이 도는 쇠고기
스테이크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자, 이쪽으로..”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의, 겨울이 되자 두터운 긴팔의 군청색 드레스를 입은 제제부인이
아네트를 인도했다. 어떤 낯짝으로 이곳에 올 수 있냐는 듯 그녀는 표정으로 아네트에게
뻔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후안의 취향은 아닌, 100% 브리의 취향으로 이루어진 이 방은 역겨울 정도로 꼴 사
나왔다. 후안이 꽤 고생을 하겠다며 피식 웃어 보인 아네트.
“오랜만 이에요.”
넓은 방의 한켠. 긴 테이블 위에 은색 촛대에 촛불이 호롱 거렸다. 아네트의 코를 자극했던
쇠고기 스테이크가 당근과 브로콜리와 함께 장식되어 접시에 올려져 있었고. 우아한
레드와인이 그 곁에 함께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있던 브리가 아네트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보자마자 쿡 웃어
버린 아네트.
오랜만이라며 약간 불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브리의 배는 꽤 많이 나와있었다. 비쩍 마르고
작은 몸에 배만 불쑥 나와 힘겨워 하는 저 모습이 우습기만 할 뿐이다. 아네트의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단 듯 제제부인을 바라본 브리. 제제부인은 모르겠단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는데도 기어코 아네트와 함께 식사를 하는 브리에게 단단히 삐친 모양인지
행여 아네트가 브리를 해할까 방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멀찍이 하녀들과 자리했다.
“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웃음이 나왔어요.”
“이해해요. 사실 제 꼴이 많이 웃기죠? 배가 엄청 나와서 걷기가 힘들 정도랍니다.”
“알아요. 산달이 가까워지면 산모가 많이 힘들어지죠.”
우스울 정도로 일상적인 대화였다. 언제부터 서로 그렇게 친했던 사이였는지, 서로 웃으며
대화를 하는 두 여자를 후안이 봤다면 기가 차고도 남았을 것이다.
브리가 앉은 바로 앞 자리에 앉은 아네트는 목발을 곁에 두고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브리를
바라봤다. 식사를 하려던 브리도 그런 아네트의 눈빛에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두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네트에게 말했다.
“알아요.. 무슨 얘길 하려는지..”
“그럼 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쿡. 왜요, 내가 죽으려고 뛰어 내렸다니까 가엾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이유가 뭐에요? 절룩거리는 내 꼴을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비꼬지 말아요.”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보기만해도 당장 손을 뻗고 싶은 군침이 도는 음식들 앞에서 두
여자는 침묵을 지켰다.
서로 하고 싶은 말들이 루엥의 인구보다 훨씬 많았다. 아네트는 아네트대로, 브리는 브리대로
서로에게 불만이 많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지 않았다. 조소와 비소를
짓는 그녀들.
“아네트도 알겠지만 곧 우리 아이가 태어나요.”
우리.. 우리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아마 억지로 브리는 우리라는 표현을 썻을
것이다. 아네트에게 후안과 나 사이에 당신이 모르는, 당신이 없는 우리만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 알려주기 위해.
그랬기에 아네트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래서, 꺼져달라. 이 말을 하고 싶어요?”
“아녜요.”
“..그럼 뭐에요? 아이가 태어나서 뭐 어쨌다는 건데요?”
“나,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친해지고 싶다. 아네트는 또다시 쿡, 웃더니 이젠 하하거리며 박장대소를 해버렸다. 그 모습에
제제부인과 다른 하녀들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브리와 아네트를 바라 봤다.
주절 ♡
슬슬 귀차니스트로 변모하는 히제이입니다-_-;
그래도 2편 묶어져 있으니까 보시기 편하시죠? ;; 막이래 ㅋㅋ
오늘도
병원을 다녀왔는데 으악. 꼬맨부분이 완전
징그러워요;; 정말 여러분들도 참치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진짜 앞으로 참치못먹겠다는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으윽! 아네트는 걸림돌이야 ㅠ, 이쁜 쌍둥이가 태어나길 바래요 ㅠㅠㅠ
그래도 둘 사이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사랑이 (응?) 보이지 않습니까?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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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 강동원때문에 겁나 좋아했는데 이젠 쳐다보기도 싫어요 흑. 많은? 분들이 쌍둥이를 원하시네요 -_-* 연어 그게 피부에 그렇게 좋데요. 다크써클도 없어지고 어쩌고저쩌고 암튼-_-*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돌아오면 남는 것은 리턴뿐 - 밀린 리턴은 추후 차근차근 하겠습니다. 인소닷에서 좋은하루 되시길. + 빨리 완치하길 빕니다. 수술 무서워요 -_ㅠ
매번 다시느라 힘드시겠어요 운영이 더 강해졌나보네요 ㅎㅎ 리에님도 수고하세요~`
왜 갑자기 착한 척이야??ㅇㅅㅇ ㅋㅋㅋㅋ아네트야 나가 죽어주렴ㅎㅎ 작가님 진짜 소설 잘 쓰시네요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소설에 빠져서 욕까지 하고 편들고 그러잔하요..진짜 이소설 짱 조아욧>_<
아이렌님 ㅠㅠㅠ 저 감동먹었어요!!! 오늘 공부문제로 너무 우울햇는데 님 코멘보니까 우울한거 싹가시고 막 행복해지네요 ㅠㅠㅠ 감사합니다 아이렌님 앞으로도 더더더 좋은글 쓸수있도록 노력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