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우리가 물질이라면 어찌 물질에 없는 지성과 감성과
예술적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밝은 지성, 높은 도덕성
아름다운 감성을 물질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원래로 물질에는 사고능력이 없다. 없는 사고능력을 물
질은 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우리는 육체로 사는듯 하지만 실로는 육체의 힘으
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육체를 넘어선 어떤 위대한
존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묘한 법성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바로 무한 진리의 표현이고, 우리의 생명은 물질을 살고
육체를 살고 환경조건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의 실존은 바로 법성(法性)
이며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무한과 영원을 생각하고 행복과 평화를 생각하며 성취와
자재와 무한을 추구한다. 우리들 자신이 진리 생명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은 육체만을 보거나 육체를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환경조건만을 보고 그에 마음을 빼
앗겨서는 아니된다. 마땅히 육체를 믿지 말고 환경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기 생명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이 법성 무한공덕의 표현임을 볼 때 우리의 능
력은 무한대로 확대되고 온갖 장애를 극복하여 위대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육체와 물질은 유한이지만 법
성진리는 무한인 것이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걱정하고 때로는 절망
한다. 그것은 어렵게 문제성을 받아 들이고 그것에 압
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실망
에 빠진다. 걱정과 불안이, 생명의 위대한 진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무한 성취 진리의 통로를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때는 모름지기 모든 생각 다 놓는것이 좋을 것
이다. 참된 자기 생명의 무한력을 신뢰하고 큰 희망을
부풀려야 한다. 내 힘으로 힘써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
지 말자. 진리의 무한성이 우리를 움직여 우리가 노력
하고 길을 열어가는 것임을 알자.
불안, 초조 온갖 집착을 말끔히 포기할 때 진리의 밝
은 달은 우리 생명 전면에 그 빛을 가득히 펴 오는 것
이다. 새로운 지혜, 성공의 물줄기는 거기서 흘러 나온
다. 실로 진리의 위신력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어려
울 것 없고 두려울 게 없는 것이다. 나의 생명 깊숙이
간직된 위대한 위신력을 우리의 아집이나 공포심으로
가로 막지 말자.
생명을 꽃 피우고 국토를 성취하는 위대한 힘이 우리
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한눈을 팔고 있지 아니한가. 현상에 사로 잡히
고 경계에 집착하고 감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전면
에 어두운 구름을 망각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육체의 힘, 환경요건에 매달려 일희일우(一喜一憂)하고
있지는 않는가. 모름지기 자성 태양 무한공덕인 반야
바라밀을 염하여 법성 무애 위신력에 귀의하여야 하겠
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과 환경과 국토 위에 무한한
창조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빛의 목소리]중에서
우리는 흔히 몸은 육체이고 물질의 공급이나 환경 조건의
조절로 살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육
체인가 물질인가 묻는다면 분명 육체가 내가 아니고 물질
이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게 된다. '나'라고 하는 나는 육
체를 움직이고 물질을 사용하며 환경에 적응하고 또한 적
응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이다. 육체가 나라면 오척단구
백년 미만의 육체가 어찌 영원을 생각하고 무한을 꿈 꾸
겠는가. 분명 육체로 사는 나는, 영원과 무한으로 사는
자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