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스님
(서울 구기동 운문사 주지)
연화어린이합창단 등 설립, 어린이 포교 선두
1000여곡 작사하며 바른 불교전하기 수행 삼아
서울 종로구 구기동 비봉로 5길, 가파른 언덕길의 끄트머리에 ‘삼각산 운문사’ ‘한국불교음악역사관’이라는 두 개의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현판이 아니면 주변의 가정집들과 구별이 안 되는 외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에 모셔진 천불단이 절임을 알게 한다.
4층은 법당이고 3층이 운문스님(雲門, 85)의 공간이다. 속세 나이 85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스님은 혼자 살면서 매우 규칙적인 일상을 보낸다. 새벽에 잠이 깨면 예불로 하루를 시작, 참회문과 <불설천불인연경>을 독송하고 절을 한다. 식사는 꼭 정해진 시간에 소식을 하고 피곤하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신다.
“스님의 서원을 듣고 싶어 찾아 왔습니다.”기자의 말이 떨어지자 눈을 한 참 감았다가 뜨더니, 어느새 시간을 1955년으로 돌려놓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1955년, 해인사 선방에서 참선 하던 젊은 스님은 목포 정혜사로 갔다. 출가 한 지 11년 된 선객이 도시 절의 주지를 맡은 것인데, 큰 절에서 생각한 불교와 마을에서 만나는 불교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뭣고?’ 화두를 목에 걸고 정진하던 젊은 수좌가 만난 불자들은 부처님 앞에 복 빌러 오는 것이지 깨달음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막막했지만 현실은 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어요.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어린이들이었지. 이미 나이든 불자들의 기복신앙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아이들에게는 바른 불교를 가르치고 싶었거든. 그러나 불교를 어렵게 느끼는 아이들과 소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 어느 날 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는 느낌을 받았어.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다 보니, 내가 부르지 않아도 아이들이 무리지어 우르르 계단을 따라 절까지 올라오기도 했지.”
그런 가운데 스님이 주목한 것은 아이들의 노래였다. 노래는 함께 어울러져 놀 때 서로 친하게 하는 힘도 있지만 생각을 공유하는 기능도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쳤다. ‘그래, 노래로 포교를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터져 나온 자신감은 운문 스님의 서원이 싹을 트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법당으로 모이게 하여 법회를 했다.
어려운 의식이나 복잡한 격식을 차리지 않고, 부처님 전생담을 들려주고 함께 노래 부르는 법회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했다. 매일 같은 노래만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좋은데 법당에서 동요나 학교교가 등을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궁리 끝에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의 곡은 그대로 하고 가사를 불교의 이야기나 교리로 바꾸어 불렀다. 나름 재미있었다.
그러나 가사와 곡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완전한 노래는 아닌 법.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는 노랫말이 필요했다. 운문 스님은 작사를 하기로 했다. 한 번도 음악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스님이지만, 노랫말을 만드는 일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며칠 고민 해 만든 가사를 들고 목포 시내 학교의 음악 교사인 김제민 선생님을 찾아 갔다. 스님의 사정을 이해한 음악교사는 기꺼이 작곡을 했고 운문 스님의 첫 찬불동요 ‘경배하세’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운문 스님은 서원을 더욱 다잡았다.
“그때,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어. ‘부처님! 음악을 통한 포교, 찬불가 보급 운동을 한 30년 쯤 하겠습니다’ 라고. 뭐 그 서원이 어쩌다가 평생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허허허.”
은사인 인곡 스님은 “출가 했으면 참선이나 염불에 매진해 도를 이룰 것이지 노래는 무슨 노래냐?”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절인연의 흐름을 거역하기도 비켜 가기도 싫었다. 바른 법을 전하는 것도 수행자로서의 근본에 충실 하는 길이 아닌가?
1950년대는 누구에게나 혼란이었다. 전쟁을 치른 직후였으므로 나라는 가난했고 국민의 정신은 허했다. 모든 게 어수선한 가운데, 불교계는 비구 대처 간의 분쟁이 격화되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외래 종교는 무섭게 교세를 확장해 가고 불교계의 포교의지는 점점 희미해지는 형국에서 운문 스님의 서원은 작은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뒤 운문 스님은 진주 연화사 포교당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 법회는 물론 청년 법회까지 꾸리고 찬불가 부르기를 지속했다. ‘학교 종이 땡 땡 땡~’으로 시작하는 동요를 ‘우리절 종이 땡땡땡~’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스님이 직접 노랫말을 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원에서 경전을 본 것을 토대로 경전의 일화나 게송 등을 찬불가의 노랫말로 바꾸니 아주 효과적이었다. 원력을 잃지 않아서였을까? 글을 읽을 때나 풍경을 감상할 때면 순간순간 노랫말들이 생각났다. 미술 전람회에서 그림을 보고 작사를 하기도 했다.
대구 관음사에서는 작곡가 추월성 선생을 만나 많은 곡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때가 1957년이었는데, 거의 매일 한 곡씩 노랫말을 만들었다. 추월성 선생이 미처 작곡을 다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노래들이 지금 다 불리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골목에서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도 찬불가를 부르며 율동을 맞추기도 했다. 운문 스님은 골목에서 아이들을 찬불가 부르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스스로 세운 서원을 실천하며 스스로 즐거워지는 것을 희열(喜悅)이라 하던가?
스님은 대구에서 김기우 선생과 정민섭 선생을 만나면서 더 많은 찬불가들을 만들었고 포교 현장에 활용했다. 정민섭 선생의 경우 운문스님과의 인연으로 경희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에도 운문 스님과 함께 많은 찬불동요를 만들었다.
지방 도시의 골목에서 촛불로 밝혀진 운문 스님이 서원은 서울의 한 복판에서 몇 만 촉광(燭光) 전깃불로 확산됐다. 1962년 조계사 주지를 맡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지방에서 찬불가 포교의 경험을 충분히 쌓았던 운문 스님은 불교1번지 조계사에 ‘연화어린이합창단’을 구성했다. 찬불가 자체가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성인 합창단도 거의 없을 무렵에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었으므로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운문 스님의 확신과 서원은 변함없었다. 음악 없이는 포교도 안 된다는 확신, 보다 많은 찬불가를 만들어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정법으로 포교하리라는 서원. 운문 스님은 전문가들에게 합창단을 맡기면서 질적 향상을 꾀했다. 당시 합창단 노래지도는 이찬우 선생이, 지휘는 김기영 선생이 맡았다. 이찬우 선생은 정민섭 선생의 후배이며 김기영 선생은 당시 소년한국일보사 합창단 지휘자였다.
스님과 합창단장 그리고 지휘자의 노력은 2년 뒤 4월 꽃을 피웠다. 동국대학교에서 ‘어린이 찬불가 발표회’를 가진 것. 반응은? KBS가 운문 스님을 소개할 정도였다. 선뜻 오르간을 기증한 어느 불자는 겨울이 되어 연습실이 추워지자 자신의 반지를 팔아 난로를 사주기도 했다. 2년 뒤에는 한 불자가 당시로는 무척이나 귀한 피아노를 두 대나 기증했다. 이때 운문 스님은 ‘나의 서원은 나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대중이 함께 이루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애들이 절에 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나는 그때 아이들이 많이 올수록 불교에 장래가 있다는 생각이었거든. 지금 봐. 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불교와 음악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야. 근자에 들어 산사음악회가 많이 열리는데 반응이 좋잖아? 그런 법석이 30년만 먼저 시작됐어도 세상이 많이 달라졌을 거야.”
노래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는 것일까? 이 무렵부터 사찰에 중 고등학생 법회가 생기기 시작했고 법회에서는 찬불가가 불리었다. 물론 운문 스님이 주지를 맡은 조계사에도 대한불교 중고등학생회가 생겼는데 1978년 조계사 학생회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다. 운문 스님은 안병호 선생의 도움으로 청소년연합회를 결성해 사찰 학생회의 외연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안병호 선생과 서울 시내에 20개의 불교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자는 서원을 세웠는데 다 이루지는 못했어. 좀 아쉬운데 인연이 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때 개운사 보리수 합창단, 칠보사 어린이 합창단 등이 속속 창단되었는데 그 영향이 지방에도 상당히 미치긴 했어.”
어린이 청소년 포교는 운문 스님의 찬불가 운동과 함께 봄 들판의 풀잎처럼 돋아나 자랐다. 그리고 1956년부터 8년 동안 만든 찬불동요 87곡을 묶어 <불교동요집>(1964년)을 발간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찬불가와 관련한 많은 대목에 운문 스님이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부여 받는다. 어린이 합창단, 피아노 반주, 찬불동요집 등등.
그렇게 찬불가 포교의 대명사가 된 운문 스님은 주로 서울에서 지내며 많은 일을 진행했다. 그 공로로 조계종 포교대상을 두 차례(제1회 공로상, 제3회 대상) 받았고, 중앙종회와 포교원에서도 요직의 소임을 맡았다. 몸도 마음도 참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인데, 이 동안에도 꾸준히 노랫말을 쓰고 작곡을 의뢰해 찬불가를 만들었다.
운문 스님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혼자가 아닌 단체를 통한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제3세대불교음악동호회가 발족되면서 찬불가는 대형화 되고 법회현장을 벗어나 본격적인 무대공연의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는 찬불가의 새로운 도약기이자 저변 확대 시기였고 운문 스님은 찬불가 운동 40년을 넘기면서 각종 모임의 정신적 지주였다.
2000년 (사)삼보불교음악협회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보다 다양한 찬불가집을 편찬하고 사찰 합창단의 연합과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도모했다. 전국불교음악제 등의 대형 찬불가 무대의 뒤에는 항상 운문스님이 반세기 전에 세운 서원의 불빛이 비치고 있었던 셈이다.
세상에서는 운문 스님이 작사한 찬불가가 족히 1000곡은 될 것이라 말한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노랫말만 만들고 곡을 붙이지 못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 숫자 역시 허상이다.
“많이 만든 게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많이 불리느냐 하는 게 문제지. 요즘 찬불가 많이 부른다고 하지만 아직 생활화된 것은 아니거든. 나는 우리나라에도 찬불가 성지(聖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그리고 여기 구기동 운문사에 있는 한국불교음악역사관을 중심으로 찬불가 성지가 이뤄지는 것도 좋을 것이야. 내가 살던 곳이라서가 아니라 실재로 여기서 불교 음악과 관련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스님은 지금 거처하는 운문사를 삼보불교음악협회에 기증해 불교음악역사관을 건립하도록 했다. 20세기 불교음악의 뿌리와 줄기 그리고 열매를 보전할 상징적인 장소가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한 세기동안 굵은 선으로 흘러 온 찬불가의 역사가 어떻게든 정리되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5년 전인 여든 살부터 작사를 안 해. 눈이 나빠져서 글을 읽는 것도 만만치 않고, 더 이상 노랫말 만드는 것보다 널리 보급되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한국불교음악역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건물은 아주 특별해. 한국 찬불가의 역사를 담은 곳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토굴이야. 토굴인데 이렇게 엘리베이터까지 있으니, 얼마나 좋은 토굴인지 알겠지? 이 방에도 여기 안 선생(안병길 지휘자)이 좋은 황토 흙을 엄청나게 많이 넣었고 벽도 전부 황토벽돌이야. 일 층에 천불단을 만들고 천불을 모셨는데, 거기 인연 있는 불자들이 공덕을 심으면 불교음악도 발전할 거야. 나는 매일 ‘불설천불인연경’을 독송하는데 참 좋아.”
운문 스님의 서원은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동안 찬불가의 발전을 견인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제 대중 속으로 그 많은 노래들이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향의 기도를 올린다. 그렇다고 운문 스님에게서 찬불가의 향기만 나는 것은 아니다.
스님이 매일 독송하는 발원문이 하나 더 있다. ‘동식물천도발원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다 생명이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생명이다. 또 날마다 호흡하는 공기와 마시는 물도 더 없이 감사한 존재들이다. 그들을 위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은 경건하고 진지하며 성실한 삶을 다짐하는 서원인 것이다.
“일체가 하나인 것은 하나가 일체이기 때문이야. 나는 주변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야. 그러니 항상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운문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평생 찬불가와 찬불동요를 만들었다. 30년만 하려던 일을 평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일이 그만큼 즐거웠고 중요했기 때문. 이제 스님은 일체와 하나를 어우르는 생명의 화엄을 노래하고 있다.
<옮길글 >
글 사진 =임연태 / 2012년 3월 27일
첫댓글 운문 스님에 -
- 평생 찬불가 보급으로 수행을 삼은 원력보살이십니다
일체가 하나인것을 하나가 일체이기 때문이야 "
공경하는마음으로 ..잠시 법문에 귀기울려 보는시간
합장 _()_드립니다 ..
즐건오늘도 귀감이 되는 하루 맞이하십시요
고마워요 찬불가에 대한 무지가 부끄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