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교시절 회상 <2024.3.7>
한숨나게 볼품없었지만. 폼 나던 중학시절보다 새록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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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당시 성동고등학교
고교시절? 좀 그랬었다.
봄의 들머리 2024년 3월. 기미 항일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가지는 1일 TV 뉴스는 정부의 올해 기념행사를 보도한다. 3일은 한국방송공사 KBS 창립기념일이라며 여러 특집들을 편성해 방영한다.
내 일생에 기념할 일은 ? 오! 있다! 2024년이란 년도에 있다. 60년 전 1964년 이맘 때(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난다) 내가 성동고등학교에 입학했었지 않나! 환갑의 세월이다. 이런 계기를 어찌 기념하지 않을 것이냐.
노년엔 과거를 먹고 산다니 고교시절을 회상해 본다. 나의 성동 시절? 입학 60주년의 계기적 의미는 크지만 고백하건데 그날들은 참 볼품없었다. 색감으로 표현하자면 녹 쓴 구리-청동의 검푸른 그것이었다.
전반적 뉘앙스로는 문학적 데카당스와 정서적 멜랑콜리 자체였다. 국어교과서의 청춘예찬을 읽으며 가슴 벅찼지만, 어떤 찬란한 젊음의 향연과 낭만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하필 내 배경인 가정형편이 1학년 하반기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위축된 상태로나마 나름 청년시기의 필요한 성장만큼은 레지스탕스처럼 키워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우울할 수밖에 없던 고교시절사정 간단한 상황묘사는 이랬다. 2학년 때 월사금 제 때 내지 않는다고 담임 미친개 장 아무개가 신고 있던 슬리퍼로 따귀를 때리더라. 덕분에 3학년 반편성에 누락돼 작은 키로 5반 맨 뒷줄 석성이 원탁이 선기 등 장골들과 나란히 앉게 됐다. 키 큰 뒷줄을 집중해 기습하는 쌕쌕이의 출석부 뒤통수가격도 덩달아 당했다. 1학년7반 때는 인수와, 2학년6반 때는 종국이와 짝이 되어 모두 2번째 줄에 앉았었는데 말이다.
1학년 소요산소풍 외엔 수학여행도 못 갔고, 학원 같은 덴 문턱에도 못갔다.
신발은 졸업 때까지 중고워커 하나로. 등하교는 전농동서 빈민천막 늘어선 청계천 둑길로 왕복. 대입진학은 언감생심, 육사입교 성공 못했으면, 평생 지독한 반사회적 혁명가로 성장했고 활약(?)중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성동으로
중학교 때는 비까번쩍했을 텐데도 추억이 적다. 초등학교는 강원도 삼척도계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길바닥 개들도 돈 물고 다닐 정도로 석탄산업 경기가 한창이라 흥청망청하던 그곳이다. 막장인생 광부의 아들로 저항아가 아니라, 월급 빵빵 광업소 소장의 은수저아들이라 중학을 서울로 유학 올 수 있었다.
충북단양 광산촌 분교에서 경남합천 가회를 거친 초등시절은 담임선생 귀염을 받는 우등생이고 급장이고, 방과 후 게시판 꾸미며 환경정리를 돕던 미화부였고 문예부였다. 담당선생 사택에서 개인지도 받으며 군 단위 도 단위 웅변경연대회 학교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새 광구를 찾을 동안 몇 개월씩만 가난했지 늘 부유했기에, 즈그 아버지가 선생들에 <와이로> 먹여 그렇다는 동급생들의 뒷 담화 덕분에. 원래 어릴 때부터 만화 좀 그리고 공부 좀 하고 글도 좀 쓰던, 하늘로부터 받은 고마운 재능은 도외시되고 말았었다.
그런 중에도 키워진 자만은 서울 오며 된통 혼난다. 방학동안 서울 신설동 고모 네에서 학원 다니던 형은 대광고등학교에 붙었지만, 난 1차도 보지 않고 2차 대광중학교를 같은 동네라고 덤벼들었다 당연히 나가 떨어졌다.
시험 치려 상경한 신설동에서 잠시 사귀던 동네친구들은 덕수니 재동이니 대부분 일류출신들로 1차에 실패해 2차를 벼르고 있었는데, 광산촌 출신이 감히 서울에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었지.
낙방하고 3개월을 쉬며 서울구경을 한다. 그 높은 화신백화점도 보고 난생처음 태극당 고로케빵도 맛본다. 창경원 야사꾸라 구경 갔다가 일행과 해어져 온 집안에 비상 걸어놓고 혼자 걸어서 귀가도 해 본다.
신설동 경마장이 비행장으로 됐다가 폐쇄된 넓고 낡은 아스팔트 광장에서 자전거도 빌려 배운다. 삔침으로 먹는 가판의 해삼 멍게와 국화빵도 맛보고, 어려부터 신동우 홍길동 그리기를 즐겼으니, 만화 빵에서 산호의 라이파이와 김경언의 칠성이 깨막이에 심취한다. 동보극장 뒷마당에 놀러가 그 유명한 털보 화백(?)에게서 간판 그리는 꿀팁도 사사(?) 받았다.
날렸었던 인창중학교 시절
인창의숙 야간고등학교를 늦깎이로 다녔던 친척형님이 선생님들과도 친했던 연고로 보결로 들어간 곳이 서대문의 인창중학교! 모표가 ‘벌’이고 고등학교엔 깡패도 많다고 해 유명했던 곳이지만(후일 유명해진 박한이 당시 양정고등학교에서 사고치고 인창고등학교로 피신 왔었다), 그나마 감지덕지였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서울도 처음, 입학도 석 달 뒤, 교복바지 잉크나 잔뜩 묻히고. 성적은 저 아래. 어리바리는 당연했지.
여름엔 중위권, 가을엔 10위 안 상위권에서 탑으로. 2학년에 오르며 학교가 임명한 반장으로 졸업 때까지, 더불어 내내 장학생,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에서 가진 졸업식에선 졸업우등 대표로 단상에 올랐었다.
가정형편 한창 여유 있던 시절의 그 은전은 내겐 참 영양가 없는 것이었다. 그 가정의 영화가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월사금도 못 낼 정도로 고꾸라졌던 내 사정을 생각하면, 이만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소위 똥통학교로 치부됐을 인창중학교의 실력은 이후 만만치 않게 발전했다. 지금의 경기대학교를 이룬 인창의숙이란 탄탄한 재정을 배경으로 명문으로 만들어 보겠다던 손상교 교장이 과감하게 경기서울의 우수교사들을 고액으로 막 스카우트 해, 소수의 수재들만이라도 명문고로 보내려던 집중적 성적상향의 전략적 쇄신을 시도하던 때였다.
동급생 대부분은 참 악동들이었다. 급성장기라 성적(性的)으로 성숙해진 놈들이 변소에서 나란히 서서 누가 먼저 토설하는지 ㄸㄸㅇ 시합을 하지 않나! 가방 속엔 자전거체인이나 호따이(붕대)사시미칼이 왜? 아버지는 당근 우리 ‘꼰대’고, ‘떡 친다’ 등의 비속어와 은어 사용이 한창이었던 시절이다.
요즘 애들의 ‘학폭’ ‘중2병’이 문제라고? 우리 때도 만만치 않았었다. 그래도 나라를 부국으로 만든 역군들로 성장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다.
당시에선 드문 오페라 마르타 공연이 시민회관에 있었고, 주연인 성악가 김금환이 우리 음악선생님이셨다. 또 한 분 아주 어여쁜 여자음악 선생님이 있어 우리에게 <코오르뷩겐>을 가르치셨는데, 여름철 흰 블라우스 옷깃이 열려 브래지어 가슴이 보였다. 아 이놈의 악동들이 그걸 엿보면서 낄낄 공유하며 티를 내다 들켜 출석부로 엄청 맞았다.
‘아니 선생님 왜 그러시는 데요?’ 선생님이 어찌 그 이유를 답할 수 있나? 얼굴만 발개지시고~~! 짝사랑했던 놈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한 20여명의 경쟁이 치열했다. 똥통 중학교에서 일류 고를 노리고 성공한 경우가 제법이다. 용산과 경동 정도는 무난했고 서울까지도 성공한 케이스가 있었다. 최고위 수준의 나만 경기도 서울도 아닌 경복에서 또 미역국 마시고 성동으로 오게 됐다. 그해는 경복 커트라인이 서울보다 높았다는 경복실패 무리들의 믿거나 말거나 자위에 일말의 위안을 삼았다. 용산만 갔었어도 7점이 남았고 서울만 갔어도 대충 들어갔었다는 푸념과 함께.
당시 함께 1차에 실패해 중동에 들어갔거나 그만 두고 검정고시를 거쳤던 잘 생긴 동료 반장 부반장 출신 두 명은 후일 육사생도로 다시 만난다.
그런 중학시절 추억이 왜 적을까? 공부에만 미쳐서? 이상하게 졸업앨범도 없고 졸업생 일동의 사진도 내가 군에서 보낼 때 집안이 이사다니며 사라졌다. 2~3명 친했던 이름과 얼굴만 기억에 남아있다, 이름이 김치국이어서 김칫국이라 놀려 잊지 못했던 친구는 후일 UDT훈련 받으려 월미도에 갔을 때 협조기관인 해군첩보부대 장교의 신분으로 상봉하게 된 정도다.
학교 밖의 추억은 좀 있지만 중학시절 이야기로 미루고 줄이겠다. 공부하면서도 좁은 문, 전원교향곡, 젊은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신곡, 심지어 파우스트 같은 중학생 수준 넘칠 소설도 마구잡이로 읽었지만, 학교성적이란 게 벼락치기시험공부를 통한 고득점 유지형태여서, 시험기간 외엔 거의 만화빵 에서 살았다. 번데기와 빙수를 기호하면서.
그 통에 만화를 잘 그려 역시 만화 잘 그리는 엄청 이쁜 아랫집 여중생과 뭔 일 날 뻔 했다. 아래윗집 어른들이 재미삼아 경쟁을 사주했기 때문이다. 키 크고 날씬했다. 지금 같으면 연예기획사가 당장 스카우트 해 잡아 갔을 것이다. 나중 소문 들으니 전농동 일대에서 얼굴값 좀 했다더라.
서울에서 중학교 유학 중 신설동에서 전농동의 지금 서울시립대학 근방의 적산가옥으로 이사한 고모네에 기거하던 1962년 화폐개혁 당시의 이야기다.
중 2에 오르며 생모님이 돌아가시고. 다섯 살 막내 육아 때문에 애를 못 낳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새 엄마가 들어오고, 아버지가 월급쟁이를 그만 두고 독자적 광산사업을 벌이며 1963년 중3 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 온다.
사서 온 블록벽돌 기와집은 청량리역 “기관고‘ 담장 뒤편 언덕 전농동 558번지. 서대문 중학교까지 청량리역에서의 전차 통학은 부친 사업 망해버린 성동고 1학년 때까지다. 집 번지 558과 헛갈릴 588 골목을 지나야한다. “야! 학생 이리 와봐 누나가 잘 해 줄게 호호호!” 언니들의 그 야지가 부끄럽기도 겁나기도, 야릇하게 한편으로 땡기기도 했었지.
성동의 새 종소리 우리얼 소리 뜻도 높았어야 했는데
그 1년 후 나머지 성동 시절 전반(全般)은 앞서 말 대로 우울한 나날이었다. 그러니 성동에서의 존재감이 뭐 있었겠나? 사랑했다면 짝 사랑이었을 게다.
그래도 천성이 낙천적이고 소년시절 한 때는 부유해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여유를 누리기도 했으니 낭만적 사유와 행보를 즐길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도 어려웠던 교교시절을 소중한 추억으로, 젊은 시절 나의 노래로 읊어낼 수 있겠다고 보는 것이다.
그 시절 추억을 떠오르는 대로 올려 본다. 어차피 이 글은 내 인생의 역사를 담아낸단 뜻의 노년 회고록의 한 부분이니 길기도 하겠지만, 함께 성동을 다녔던 친구들도 보라는 것이니, 많은 문제제기를 받을 것이다.
원래 개인의 옛 기억이란 게 다 자기중심적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며, 그 어떤 냉정한 지적과 혹독한 비판이라도 즐겁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전농동 삼총사
추억은 대부분 친구들에 관한 것이다. 물리적 생존을 위한 에너지의 원천은 섭생에 있지만, 고해란 인생을 이겨내는 사회적 에너지는 인연 맺는 사람에서 나오고, 친구로부터가 가장 크다는 게 우주 에너지 기(氣)의 원리다.
그래서 장수의 비결도 교유이고 나의 고교추억도 친구들과의 것인 게다.
우선 해당되는 친구들끼리의 자칭 ‘전농동 3총사’가 있었다. 1학년7반에서 만난, 집이 전농동 시장과 주변 1km 이내에 살던 김상배 이성준 김명수다. (나는 청량리역기관고 뒤에서 이사 다니다 시장통 전농교회 아래로 이사 옴) 졸업 때까지 우리 집 셋방 빼고 두 친구네 집도 오가며 입시공부도? 영화도! 당구도! 싸움도!(나는 빼고) 하며 잘도 놀러 다녔었다.
당시 인기몰이 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영화 <황야의무법자>를 흉내 내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휘파람 인상적인 띵디리딩’을 부르며 권총 뽑기 시합도 했고, 성준이 무등 위의 내가 두 팔 들어 올린 베개를 상배가 합기도 2단의 실력으로 뒤돌려 공중차기로 떨어트리고, 당수를 배운 성준이의 일품 연속 돌려차기도 멋졌던, 지금은 유치해보일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시 제일 성적 좋았던 상배는 연대 시험 보려다 수험표를 두고 가 기회를 놓친 이후 부친의 주택사업이 급락하고 본인 포함 가족들 건강이 악화돼 파란만장한 예상 밖 인생을 살았다. 성남 모란 분당의 개발 초기 양아치 날뛰며 살벌한 텍사스 개척촌 험지에서 당구장도 운영하며 치안을 다스렸고, 영동 강남개발 시절엔 기획부동산에도 뛰어들어 단단하게 커가며 그 방면의 실력자로도 성장하며 남부럽지 않은 재력도 모았다.
그 힘든 시절 나는 군문으로 들어간 사이 성준이가 얼마나 걱정하고 응원했었는지, 편지로 내게도 일일이 알려주곤 했다. 대입을 놓치고 실의에 빠져 그 강했던 합기도 무력(武力)이 자칫 암흑가로 엇나갈 뻔 했지만. 팝송에 심취하며 심기일전해 청년시절부터 경제전선에서 힘을 내기 시작한 상배의 곁에는 늘 성준이가 있었다. 서로의 부모님 및 형제들과도 소통하는 사이라 집안문제에도 오지랖을 펴다 지나쳐 친구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도 했다
그리 성장한 상배는 지금 어려운 이들을 돕는 신기하고 경탄할 만한 경지에 이르고 있고. 수수께끼 인생의 나와는 단속(斷續)을 가졌지만 아교처럼 끈끈하게 엮이며 여생을 함께 하고 있다.
그 시절부터 독한 구석이 있었다. 1학년 때 이미 합기도 2단으로 특히 운동실력이 출중했었다. 집안 장독대 앞 단련봉을 얼마나 끈질기게 매일 두들겨 팼던지 새끼줄이 금방 닳아 기둥자체도 패일 정도였고, 수도(手刀)부분이 터져 피 흘리고 굳어지기를 반복해 차돌과 강철 같이 단련됐었던 터였다.
일본 극진 카라테의 창시자 최배달(=최영의)의 주먹과 진배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고, 나중에 뭐가 돼도 크게 마음먹은 대로 해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합기도는 준비운동으로 기(氣)차단을 하니 그때부터 이미 기(氣)에 대해선 익숙했을 터다. 성인이 돼서도 매사에 열정적으로 사업에 전력투구했고, 피곤하든 술에 만취했던 새벽이면 어김없이 단전호흡을 수련했던 그 정진이 결국 오늘날 기공으로 환우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봉사에도 나선 것이리라. 세계유일의 원격치유기공의 자격을 대한민국 특허청으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성준이는 실력을 발휘해 고대 독문과로 가 2개의 박사학위를 가지며 교수로 전념했고, 신앙세계로 독실하게 들어가 지금은 자주보기 어려워 아쉽다.
독고성을 닮았다며 자기 얼굴을 자찬했지만, 사실 더 잘 생긴 성준이는 스포츠가리 머리를 날씬하게 세우고 이마의 솜털도 족집게로 뽑아낸다. 천상 날라리 연애박사 풍이던 녀석이 진지한 실력파 교수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71년 내 임관식 당시 좌측 중학교동창 절친 김정환과 전농동3총사 이성준 김상배
전농동엔 삼총사 말고도 몇이 더 있었다. 시장 통에서 좀 떨어져 살던 학근이와는 집안을 가볼 정도로 사이 깊었고, 근처 살거나 하숙하던 윤택이 찬철이와도 정답게 지냈었다. 졸업 후 일육산악회 회장으로 만나 존경하게 된 정천이도 그 동네 살았다던데 당시는 몰랐었다.
수년 전 한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 1층과 8층에 살게 되고 자전거동호회 바이콜릭스 멤버로 수호와 함께 설악산 평화의 댐 종주원정 라이딩도 함께 했으며, 여러모로 교감하는 절친이 된 학천이를 개별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동대문근처 학천이와 공교롭게도 이름이 유사한 대학천 상가 길에서였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모저모 여러 이야기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목이와는 어떤 인연이고 사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언젠가 하교 길에 당시 경춘선 시발 제기동역에서 약재시장을 지나며 한옥으로 잘 지어진 성목이네 집까지 알아두게 됐던 기억을 하게 한다.
1학년 7반
7반에서 복도 쪽 벽의 내 짝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 교훈적인 인수였고, 바로 뒷좌석은 인수와는 상반되는 캐릭터로 대한민국 모든 여학생들의 오빠였을 멋쟁이 영노였다. 그런 좌석배치로 삼각편대처럼 늘 즐거웠다. 인수와 나는 방학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받는 이념적 지기(知己)였다.
캐릭터 상반되는 영노와 인수는 목적은 달랐는지 몰라도 함께 YFC동료로서 영어웅변대회에서 상도 타고, 교장선생님이 주재하는 전교생 아침 조회 때 단상에 선교사를 안내해 소개하는 등 발군의 영어실력을 뽐냈었다.
후일 영노는 같은 육사 화랑대 생도가 되어 만났고, 인수는 정보학교 영어교수의 신분으로 나를 다시 만난다.
고교 때 이리 친구들과 인연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우리 집 가정생활에 여유가 있던 1학년 시절이다.
정문 앞 빵집에서 옆 좌석 여학생들에게 수작도 걸 수 있었고 (성동여실이 대분이지만 운 좋게 무학여고도 만날 수 있었지), 2본 동시 상영관을 찾아다니며 엄청난 영화 섭렵에 나섰고, 하교 길 전철 타러 신설동 가는 길목의 노벨 극장에서는 휴일에 ‘쿼바디스’ 종일전회를 반복해 보면서 대사를 거의 다 외우기도 했었다.(명우 피터유스티노프가 분한 네로황제가 로마를 불태우고 읊은 시 같은 부분)
친구들은 전혀 기억 못하겠지만, 나란 놈이 이런 소질도 있었구나구나 하는 존재감을 알린 적도 있었다. 미국 배우들 프로필을 제법 그려내던 때였다. 친구들은 누가 권총을 빨리 뽑나? 어느 여배우가 제일 유방이 크나? 등을 농 따 먹기 하던 시설, 교단으로 나가 칠판에 당대 최고 42인치를 자랑하던 제인멘스필드의 가로 누운 모습을 그려 놓다가, 선생님이 오신다 해 급하게 칠판을 지웠지만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조마조마했었다. 선생님이 모른 척 넘어가 주셨지만 이후로도 종종 불려나가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었지.
<선생님들>
이 때 선생님들도 만난다. 좋아하고 존경했던 은사님이든 싫었던 미친개이든 잊을 수 없는 인연이고 기억에도 새롭다.
1학년 담임 정인동 선생님은 3학년 때도 담임이시니 잊을 수 없다. 워낙 인품이 고우시니, 3학년 5반 반창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모셔왔고 근래에도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수학선생이신데 내가 수학에 잼뱅이어서 늘 미안했지.
초등학교 때 문예반이었던 만큼 글쓰기에 친했으니 이덕흥 국어 선생님이 만만했다. 국어만 배운 게 아니다. 청춘예찬 등의 시간에 사나이의 정열과 정의에 대해 열정적으로 해 준 강의는 가슴 뛰는 감명을 전해주어 일생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좋아했다.
6.25전쟁 때 소위로서 화천지구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낙오병의 신세로 청평까지 후퇴하며 굶주렸는데 도중에 만난 낙오병 병사가 가진 건빵을 나눠 주지 않아 카빈총으로 위협해 뺏어먹었다는 무용담도 아닌 참담한 패전담을 솔직하게 전해주시던 안영길 지리 선생님. 장난꾸러기처럼 소탈하게 웃는 그 잘 생긴 얼굴에 잘 매치되지 않는 그 고백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다 만주에서 패주하던 일본 관동군이 겪은 인간 이하의 참혹한 과정의 이야기를 담는 소설 <인간의 조건>을 떠오르게 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중공군에 깨졌다던 전사의 현장 화천 파로호 일대를 소위 임관의 초임지로 가게 됐고, 그 전적지를 확인하며 선생님의 그 일화가 떠올라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대원들에 대한 생생하고 값진 정훈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서 다시 고맙기도 했다.
실험하다 다쳐 늘 안대를 하시던 애꾸눈 장진원 화학 선생님! 그 예리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정말 멋진 사나이의 것이었고, 지금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동급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던 반사적 작용일까? 기억나는 선생님들은 여럿이다. 개인적 친분을 가졌던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목덜미에 늘 발찌를 달고 다니셨던 상업 장익상 선생. 체력은 약해도 무도를 좋아하니 이봉우 유도선생은 천상 무도인처럼 보였다.. 고3때 여드름 짠다고 뒤통수를 가격하기 전까지는 경례하는 폼이 멋져 참 군인의 상으로 좋아했었던 선우정 선생. 일타 강사처럼 실력 좋아 보이는 박종국 영어선생과 잘 생기기도 하고 차돌맹이 같던 이강법 선생도 떠오른다.
쎄미 클래식이 무언지 가르쳐주신 노성주 음악선생. 오쏠레미오 투영 오톰리브스 문리버 코로라도의달밝은밤 등은 지금도 폼 나게 흥얼거리는 명곡들이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2학년 때 무언가 대들고 놀리다 쫓기던 경식이가 창문 타고 토끼자 어이없어 하다 같이 창문을 넘고, 음악선생 답지 않게 걸핏하면 야구방망이를 들던 그 웃긴 장면들만 아니면 나름 멋쟁이셨다.
2학년 6반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절이지만 책상머리는 늘 즐거웠다. 친구지만 인품 좋아 지금도 늘 믿음을 가지고 대하는 종국이! 중학시절 기계체조 열심히 해 키는 작지만 단단해서 반에서 팔씨름으론 그 누구도 당해 낼 수 없어 농담 삼아 임꺽정 후손이냐 하면 씩 웃는 그 종국이가 짝이었다. 그리고 그 뒷좌석엔 조숙하게 여자관계 썰의 명 강의를 줄줄 읊던 경세가 있었으니 그랬다.
이때 좀 민망한 기억이 있다, 무슨 일인지 병집이와 다투었다. 출입구 쪽 교단에서다. 나보다 한참 큰 병집이가 마음 좋아 나를 더 어쩌지 못하고 난감했던 모양이다. 준영이와 땅땅한 원진이가 오더니 나를 교실 뒤편으로 불러 세워놓고 ‘까불면 죽는다!’란 식으로 으름장을 놓는다. 헤라, 텍사스, 미사일이니 하던 동패였던지 모르는데. 너무 하지 않았나! 볼 것 없이 왜소했던 나를 놓고 태권도부와 그레꼬로망 레슬러 닮은 친구 둘이서나 말이다.
준영이는 양 허리에 주먹만 올렸고, 원진이는 그냥 끝낼 양으로 알았지 하며 자기도 모르게 올린 손의 중지권이 내 입술을 스치며 금방 부르트고 말았다. 황당하고 비참했지만, 그냥 그걸로 끝나고 말았으니 망정이었다.
더 심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당시에 몰래 성동 가다들 도장 깨기 하던 상배가 나섰을 것이다. 더 심했으면 나의 배경 청량리 홍릉 춘삼이파까지 나섰을 지도 모른다. 춘삼이 파라니? 대광고로 진학했던 나의 형 김명세와도 동패였었기 때문이다. 형은 어려부터 보약 많이 먹어 장사였다. 이사 많이 다닌 환경 때문에 서울에서만도 무학국민학교를 시작으로 서대문 미동 돈암동 등 6년 동안 7개 학교로 옮기며 즐기던 게, 가자마자 ‘이찌 가다’ 깨는 거였고 . 방학 때 부모님 계시던 시골에 내려온 잠깐 새에도 동네머슴들과 막걸리 마시면서 야자 트던 못 말리던 소년 장사였다. 경기중학교를 가려고 전과지도서를 통째 외우며 열공했지만 사정상 내려앉은 지방 도계중학고 시절엔 공부도 짱이었고 가방 모찌들을 줄줄이 두는 안하무인 깡돌이었다.
미션 계통 대광고등학교에선 조신하게 공부나 하나 했더니, 생모님을 여읜 이후 정신 잃고 ‘빨간 양말 뱁새’로 이름을 떨치더니 성에 안 찼는지 청량리 홍릉 패들과도 겨루게 됐고 오야붕 춘삼이와 호형호제 하게 됐던 것.
배우지도 않은 당수실력이 비범해 패싸움에 나서면, 두한이 시절 낙화유수를 연상하듯 전광석화였다. 여름 방학 때 광나루에서 해병대들과 붙어 대검 자루로 머리를 찍었대나 어쨌대나, 형 친구가 황급히 달려와 알려 경찰서에 잡힌 걸 부모님들이 가서 애걸복걸 빌고 빌어 훈방으로 빼냈었다.
그 형이 집에서 시연하는 발차기를 자주 보아선지. 육사에 들어가 처음 태권도를 하던 나도 승급이 빨랐다. 6-4-2급으로 건너뛰고 바로 초단이다. 매년 중대대항 체육대회 태권도 선수였고 태권도부 지도생도였다. 유격훈련 공수훈련 받던 3학년과 4학년 때는 군화를 신고도 발차기가 고단 날리기로 날렵했었다. 특전사 여단 특공태권시범 지도 장교였고 특수전 교육대에선 피교육생들을 발로만 다스렸었다.
남산시절 2단으로 마쳤던 승단을 3단으로 올리는 심사를 받으면서는 조직의 파워 덕을 보아 올림픽 국가대표들과도 대련해보는 영광을 안았었다.
태권도 역사가 장황해진 건, 고 2 때의 잠깐이지만 황당했던 그 경험이 태권도를 수련할 때마다 내내 떠올랐었기 때문이다.
으름장 받던 그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계천 둑길로 나가던 하교 길 광무극장 골목에서는 우연히 원진이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찌 그리 다감하고 순수하던지~~. 은원이라면 그때 이미 다 사라졌었다.
그 등하교 청계천 둑길에는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있었다. 매일 등굣길에서 만나던 여학생의 희고 말간 얼굴이다. 둑길이 중앙선 철교 아래서 내려오다 답십리 방향으로 휘던, 지금의 신답역 동남단 지점이다. 나는 동대문중학교 방향에서 오고 여학생은 좀 더 하류 중랑천 벌판이 전개되던 방향에서 오다 만난다. 처음엔 무심했겠지만 어찌 서로 작정하고 오는지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도킹하니 서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선이 자주 마주쳤다. 1초 이하에서 엄청 길게 느껴진 3초 이상정도까지 시선키스가 길어졌다. 전기가 통하면서 피 끓던 청춘이니 가슴 속에 어찌 춘심이 동하지 않았겠나? 남자답게 먼저 말만 건넸으면 성사됐을 만남이었건만, 이대로의 애타는 짝사랑이었으니 더 오래 남는다.
당시 내 생활도 어려웠지만 그 둑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삶도 매우 고달팠던 곳이다. 중앙선 철교에서 그 지점까지 청계천 판자촌이 헐리며 쫓겨 온 사람들이 군대 A텐트 크기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잠만 자는 안에는 옷가지나 두고, 최소한의 살림도구 솥단지 그릇은 밖에 두었다. 그 움막에서도 아침이면 직장에 가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도 나타나곤 했었다. 여학생도 그걸 매일 보거나 어쩌면 그런 어려운 환경에 있었겠구나 하는 동류의식도 작용하고 보니 서로 더 애틋했었던 것 같다.
한편 동급생 중에는 참 부러워했거나 멋지고 어른스러워 범접하지 못하며 경원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함께하지 못했던 문예-미술-방송부의 시천이 성택이 희철이 현희 등이었고, 유도부 대성이, 밴드부 종권이와 명세, 야구부 용현이 등이다.
소위 클럽 소속의 친구들 보기는 좀 캥겼는데, 가방을 모로 끼고 빠른 말로 떠들며 노성주 선생까지 골탕 먹이던 경식이도 그중 하나였지. ^^
방과 후 철봉에나 매달려, 멀리 바라보기만 했던, 신나게 찜뽕 놀이하던 찬용이 홍보 영근이 같은 친구들도 부러웠었다.
그리 어려웠던 친구들도 졸업 후엔 막역한 사이로 됐으니, 사람 인연은 참!
찜뽕 팀이었던 영근이는 육사 동기생으로 입교해 같은 중대소속으로 4년간 한 생활관에서 연마하며, 중대장 부중대장 생도로 한 방에서 자며 청년기의 철학으로 치열하게 논쟁했었고, 임관 이후 지금까지도 서로 존경하는 일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1년 후 영노와 함께 육사에 입교한 시천이는 하필 나와 같은 중대로 나란히 들어와 3년 동안 매일 ‘김생도님!’ 하면서 깍듯이 선배로 모셨다. 물론 영근이게도 그랬고, 그 바람에 깡기가 있다며 1학년생도 군기반장에 점 찍혔던 나는 허무하게 물러났다, 중동출신 다른 동기생이 총대 매주었지.
경식이는 성지회에서 만나 나를 마라톤으로 끌어들였고, 바이콜릭스 자전거에는 내가 끌어들여 지금은 징글징글 만만하게 가까워진 사이다.
그밖에도 기억들이 참 많다. 누군가는 종손이라 집안의 강제로 방학 중 장가를 들고 온 친구도 있었고, 내연의 관계로 그런 친구도 있었던 걸로 안다. 개인 소사(小史)로 후세의 역사자료로 될 것이라 기록 자체에 목적을 둔 글이니 길어도 상관없다며 계속 이어나가려 하지만 지친다.
더 넣어야 할 사실이나 혹시 읽어 본 친구들의 고마운 교정이 있다면 더 보충하면 되겠지 하고 이만 줄인다.
3학년 5반
반 편성이 늦어 배정 받은 좌석이 맨 뒷줄. 여기서 만난 인상 깊었던 친구는 석성이. 잠깐 짝이었지만 거북했던 거구와 인상에 콘사이스의 외운 부분은 삼켜 없애며 열공하던 자세에, 와아! 고3이 과외도 가르치며 가정경제를 도왔다는 후일담에 늘 경외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추었다 할 선기의 옆자리에도 영광스럽게 앉았었다.
분위기 따라 음담패설을 하다가 조용하고 단호한 충고를 듣는다. ‘너! 임마! 그런 자세로 육사에 가려고 하냐?’ 그 한마디에 납작 엎드린 후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팬이 되어, 졸업 후에도 편지를 교환한 적이 있었다.
이후 찜뽕 팀 홍보와 함께 남산에서 직장동료가 된다. 그곳의 동료로는 재학시절엔 몰랐던 재봉이, 한성이, 치형이를 만난다. 잘 알던 인수도 잠깐.
사실 3학년 이과 물리 5반은 어학과 국어 등 문예가 쉬웠던 나로선 적성에도 맞지 않는 ‘울며겨자먹기’ 선택이었다. 형편에 맞춰 대학을 포기하고 육사로 가야했고, 입시과목이 이과 위주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실력으로 1학년 동안은 앞에서 좀 버텼지만. 성동 16회 쟁쟁한 건아들에 밀려 성적이 얼만지 나중엔 쳐다보기도 싫었다. 수학이 영 약한데 학원경험도 전무하니 그랬다. 만만한 영어와 국어와 국사를 믿고 계산보다 외우기만 해도 될 화학을 선택하고, 수학은 과낙 25%만 넘겠다며 확실하게 풀어낼 쉬운 문제 공부에만 전념해 겨우 들어갔다. 전국의 내로라 수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경쟁 속에 그 화랑대의 문을 두드리다니 기적이었다.
그래도 졸업성적 순위대로 먹이는 임관시의 군번을 보니 19909 영근이보다 20등 뒤졌지만 19929로 상위권이었다. 수업시간 졸기로 챔피언이었던 상황에선 그 또한 신기한 성적이었다.
가고 싶었던 대학은 문과나 미술대학이었는데, 억지춘양 육사 간 덕분에 내성적이던 성격도 개조하고 군문에서 기관을 거치는 동안 전략적으로도 성장했으니 여간 고마운 하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중학시절에 이어 읽던 소설 중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도 있다. 고교 졸업 이후 대학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형이 명동성당 다니며 마음을 잡으면서 권한 책이다. 봉지쌀로 연명하던 가난한 시절 형제간에 그 소설 주제인 종교와 신학과 신화에 관한(그렇게 기억한다) 토론으로 주림을 잊기도 했었다. 그런 이야기가 당시의 일기에 남아있다.
힘들면 한밤중 중랑천 둑길을 걸으며 간증처럼 들었던 신의 계시가 ‘그래 앞만 보고 달려라! 죽을 때 일생을 뒤돌아보며 쓱 웃음 한 번 웃을 수 있으면 그게 성공한 삶이란다!“ 였다. 그래서 용기 내어 살 수 있었다.
고모네 기거하던 중학교 때 사촌형으로부터 넘겨받은 보물 같은 자료가 1950년대 미국영화선전 팸플릿들로 와이셔츠 상자 한 가득이었다. 원탁의 기사의 로버트 테일러, OK목장의 결투와 유성과 같은 사나이의 커크 더글러스 같은 배우들의 프로필을 그림에 담았다.
검정 먹물 펜과 세필로 그린 작품은 초상화처럼 정말 거의 같았다. 뭐 엄앵란의 얼굴도 거의 그대로였다고 생각한다.
동생들이 그걸 밖으로 들고 나갔다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이들 놀이를 관찰하던 ‘문탁’이란 아동만화가가 솜씨를 인정하며 나를 보려 다시 찾아와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스카웃 제안을 해온 적이 있다.
당시엔 드물게 홍대 미대를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왔던 이의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육사를 바라본 그 형편에 어찌 미대까지 갔었겠나? 아쉬웠었다.
육사 27기 가입교가 1967년 1월25일, 성동고등하교 16회 졸업일이 1월26일 하루 전에 태릉으로 소집되면 성동고등학교 3년간을 마친다. 졸업 앨범은 나중에 상배인가 성준이로부터 대신 받았고,
졸업 후의 인연들
재학 시절 존재 없던 나도 졸업 후엔 많은 동창들과 어울리게 됐다. 전체 동창회와 몇 개의 소그룹 모임에서의 교유를 통해 여생에 더없이 소중해진 친구 사이로 되어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격스럽다. 2008년 8월 인구가 회장이던 때, 선배로서 재학생들에게 사람 사는 가치에 대한 강의도 할 수 있었으니, 그렇게 해서 재학시절 투명인간에서 졸업 이후엔 이름도 불리는 그런 영광을 안았으니 말이다.
2008년 7월 모교후배 학생대상 강연에 나선 16회 동창들
<16회 동창회>
졸업 후 군문에만 있다 10년 만에 서울에서 살게 되고 성동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다. 임관 후 소식이 끊겨 월남전 가서 죽었는지 어땠는지 몹시 궁금해 하던 전농동 삼총사의 상배가 그 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나를 찾아냈을 때는 19080년대 초 남산근무 시절이다.
성준이도 같이 청계천 아마존에서 술 퍼마시며 회포를 푼 뒤 상배를 연계로 사회생활 10년 지나 각자 진로의 안정권에 들던 친구들끼리 갓 시작하던 16회 동기동창 모임에도 나가게 된다. 시내 곳곳의 저녁모임으로부터 창인이가 회장할 때의 청평유원지 야유회도 참가한다.
재학시절 안면은 있으나 친교가 없었던 친구들도 그저 ‘16회다’ 한마디면 곧 어울린다. 3년 동안 한반이었거나 집이 이웃이면 더 가까워진다.
성동고교 동창이었다란 인연을 내건 그 한마디는 엄청난 친화력을 가진다. 인섭이 경우처럼 야밤의 느닷없는 전화도 받아주고 초면에 어려웠을 부탁 전화도 들어주고 만나게 된다. 그러다 종종 만나면서 취미가 같다보면 그냥 친구로도 된다. 많은 에너지의 원천들로부터 힘을 받기 시작한 거다.
송파동 동네 아파트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 성춘이를 동창회에 안내해 이후 일육 동창회 활성화의 막강 감초로 되게 하는데 기여하게도 됐다.
등산하는 친구들의 동호회 일육산악회에도 간혹 참여하고, 저 세상 가기 전에 성춘이가 조직한 걷기 동호회의 이름을 <우보회>라고 지어주기도 했다.
<35 반창회>
16 동창회에 나오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졸업반이던 5반 반창회도 꾸려진다. 타 반에 비해 조촐했지만 활동이 점차 왕성해 간다. 매월 두 번째 목요일 종로3가 중식당 대륙에서 점심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현재 평균 참석 인원은 대체로 10~16명 선이다.
5반 반창회와의 개인적인 인연에 대해선, 지난해 6월 열성적으로 반장 봉사하다 동배가 미국으로 돌아가며 가졌던 환송모임의 후기에서 내가 밝혔던 아래의 구절로 대신한다.
우리 성동16회 동문회에 반창회가 있고, 회장을 “반장”으로 호칭하게 된 것은, 5반이 시초이고 발의를 소생이 했음을 밝혀봅니다.
우리가 30대 초반에 들어 16회 동문회도 역시 초보를 내딛던 1980년대 초반에 각급 반창회도 전후로 시작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5반에서도 최원탁이 첫 반창회장을 했고, 이어 홍륜이가 회장을 맡았던 모임을 남영동 굴다리 옆(이름은 잊었지만) 맥주집이던가 2층에서 가질 때, 소생 김명수가 반창회 회장을 ‘반장’으로 하자고 제의했고 그리 되었습니다. 첫 회장 원탁이가 재학시절 반장이었는데, <재학시절 반장을 해보지 못했던 친구들이 반장 소리 한 번 들어보자>는 취지에서였지요! 이후 이 반장 호칭이 16회 전체로 펴져나갔던 것입니다. 혹시 이론을 제기할 동문들이 있다면 “참~!” 입니다. 당시 저작권을 신청해두지 않았으니 딱히 정색하고 반론할 수 없지만. ^^
<성지(城志)회>
강북 응암동 낡은 주택에서 강남 전세아파트로 이사 오는 어려운 과정에서 상배의 도움을 받아 송파구 송파동으로 온 것이 1986년이다. 1991년 송파 강동 일대에 살던 성동16동창 친구 10명으로 가족들도 함께 아는 친목단체 성지회가 꾸려진다. 상배 외엔 모두 재학시절 모르던 사이다. 그저 노년을 편히 동반하자며 모였다. 참 즐거웠고 사연도 많았다. 그리고 배움도 많았다. 친구들의 대부분이 참으로 속이 깊어,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존경하다 보니 이날까지 매월 모이고 있다. 가끔 모임의 동정을 동창전체의 인터넷 카페나 단톡방에 올리며 연륜을 더해가는 노년의 우정과 행복을 공유한다.
성지회의 발전과정과 개인적인 성지회에 대한 사랑은, 2017년의 2월 모임과 8월의 어느 날 우연히 꾼 내 꿈 이야기로 대신하다.
♣ 성지회 2017년 2월 월례모임-作號로 빛나
sd16 성지(城志)회 멤버들이 2017년 2월 월례모임을 3일 저녁 6시 오금동 중식 집“래향”에서 가졌다.
성지회의 월례모임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성동16회 카페에 올리는 경우는, 여름 휴가모임이나 송년모임의 경우 외에는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각시키게 된 데에는 이날 모처럼 회원 전체가 다 모였다는 점과, 이날 꽤 의미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란 점이 작용해서다.
의미 있는 일이란? 이제 친구들이 모두 경노우대를 받는 어르신 된 마당에 이름을 마구 부르기도 거시기 하니, 우리 모두가 명사(名士)들은 아니지만, 연륜의 격에 맞게 서로 허물없이 호칭할 수 있는 호(號)를 만들어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 제안은 이미 이전의 모임에서도 수차 나왔었다. 그래서 자칭(自稱) 타칭(他稱) 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부로 회원 10명의 호를 확정하고 공식화했다는 그런 일을 말한다.
이날 정해지고 불러주기로 한 친구들의 호는, 참으로 그 뜻이 깊었고 멋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평소 인품이나 활동과 직업, 취향이나 이미지들에 어쩌면 그리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여기 가나다 순으로 소개한다.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한자의 훈(訓)만 보아도 잘 알 일이다.
김경식 대붕(大朋) 김명수 일고(一鼓) 김상배 도담(道潭)
김진관 대원(大圓) 류제형 웅보(熊步) 박세웅 백미(白眉)
소치형 만취(晩翠) 이상철 월작(月酌) 이종복 성정(省政)
한현찬 다원(茶園)
이렇게 서로 만나 저녁을 함께 하며, 친구들끼리 작호(作號)하고 불러주기로 하니, 모임이 즐겁기도 하고, 격조도 한참 높아진 기분이다. 최근의 시국과 관련해 나라를 걱정하는 시국담과 애국심의 발로도 당연히 있었고, 건강증진을 위한 생활정보도 나누었다. 만찬이 끝난 후로도 일부는 근처의 당구장으로 가 취당(醉撞)까지 즐기고 헤어졌다.
이제 호(號)도 나누어 부르기로 했으니, 친구들은 그 호의 격에 어울리는 여생을 맞아야 할 것이다. 멋을 내는 만큼 여기서도 책임이 따라야 할 모양이다. 성지 친구들아! 그렇게 함께 하자.
이참에 잠시 성지회를 돌아본다.
성지회 월례모임은 매월 첫 주 금요일 모여 만찬을 함께 하고, 그날 저녁 값은 회원들이 돌아가며 담당한다. 회장도 가나다 순으로 돌아가며 하던 것을 언젠가부터 근 10년 돼갈라나? 한현찬이 말뚝회장을 맡고 있다. 전체 회원이 10명이라 총무도 없는 탓에 회장이 연락 회비 운영 전체를 맡으니 참 신경 쓸 일도 많고 고생도 많다. 그러니 이 나이엔 모두들 회장하기를 극구 사양하는 가운데 이리 오래 봉사하시니 갸륵하시고 거룩하시다.
돌이켜 보면 성지회는 1991년 6월30일 송파 강동 일대에 살면서 자주 얼굴을 보게 되는 성동16회 친구들이 모여 결성했다. 무슨 다른 큰 취지도 무슨 이념을 내세움도 없이, 고교동기동창이란 점이 매개가 됐을 뿐이다.
그래도 모임의 출발은 거창했다. 성지회 소사(小史)자료에 따르면, 1인당 당시로선 제법 되는 금액 20만원씩 출자(?)해 회비 기금 220만원으로 출발했다. 6월30일 첫 모임에 김상배 박세웅 김경식 신재봉 김성규 김진관이 뜻을 함께 했고, 7월6일 류제형 이상철이, 7월25일 소치형이, 이듬해 1992년5월6일에 이종복과 김명수가 각각 합류했다. 한참 지난 1998년1월10일 마지막으로 현임 회장 한현찬이 그 인품의 고고함을 높이 사 박세웅의 적극적인 추천과 회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가담했다.
신재봉은 1998년 이후 미국으로 가면서 빠졌고, 김성규는 2005년1월27일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매월 모여 저녁을 함께 했다. 부인들도 초창기엔 월례모임에도 동행했지만, 지금은 여름휴가나 송년모임에만 함께 한다.
그러고 보면 성지회는 결성 이후 27년째로 접어든다. 이젠 모두 영감태기들이다. 귀도 어둡고 눈도 침침하고 치아도 시리고 욱신거리며 팔 다리도 내 의지대도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전에 그렇게 돼야 할 것이라고 꿈꿔왔듯이, 서로 만만하기 그지없는 친구들이 돼 갈 것이다.
다툼도 있었고, 친구에게 폐를 끼쳐 힘들게 하기도 했었고, 힘든 친구를 제대로 위로하지도 못하면서, 아웅다웅하기도 했었지만, 이젠 늘 즐거운 만남을 만들어갈 것이다.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따지지 말고, 그저 용서하며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성지회 회원 친구들 가족과 함께 모두 건강을 위하여! ♣♣
친구들과의 꿈
오늘 새벽꿈에 성지회 모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길로 04시 40분 잠에서 깨어났다. 모임의 회원들이 돌아가며 밝히는 소감 술회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한 말이다. 그런데 왠지 회장도 아닌 상철이가 사회를 본다? 부스스 일어난 내가 밝힌 소감이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꿈에서의 기억이 깨어나서도 이렇게 비교적 생생한 게 이상했다. 글을 쓰며 첨삭을 하기도 했지만 대충 이랬다).
“우리가 1991년 만난 지 10~년~하니 누군가 17년이라 한다. (사실 27년이지만 잠결이니 그리 착각하고). 그래 그때 우리가 만나면서 결성기념으로 어디 가서 모두 동시에 애를 만들었으면, 지금 우리가 인연을 맺던 당시의 고등학생 나이로구먼.(낄낄 거린다). 그런 세월을 우리 부대껴 왔는데. 지금 우리는 당시 모임의 취지나 목적을 그대로 잘 살리고 달성했다고 본다. 무슨 이념이나 이익을 함께 하자는 그런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늙어서 그저 편하게 농담도 따먹고 시비도 거는 그런 편한 친구사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인데, 우린 지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서로 다투기도 해 삐져서기도 해, 사업이 여의치 못해 친구에게 피해를 주기도 해 미안해서기도 해, 그래서 모임에 나오지 않거나 못하기도 했었지만. 아웅다웅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들대로 들어 이젠 이렇게 늘 서로 허허 거리지 않나? 그래 이제 여생을 이렇게 계속 살아가세. 고희를 넘긴 옹(翁)들이 아닌가? 이 세상 이 허물 저 허물 다 보고 보이며 살아왔지 않은가? 빠지지 않고 삐지지 않고 따지지 않고 용서하는, 그래야 하는 <빠삐따용> 넉넉한 인생의 원로요 고수들이어야 하지 않겠나? 늙으면 도로 어린애가 된다고 하지 않나? 어린 아가는 옹알이를 한다. 우리 늙은이도 옹알이를 하면서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자. 늙은이가 “옹(翁)”이니 옹알이를 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우리 옹알이는 어린애와는 다른 철든 <옹알이>어야 하겠지.”
오는 25일 성지회 모임의 일정과 장소가 이리 저리 바뀌는 카톡을 주고받아서 나왔던 꿈일까? 성지회 친구들도 이런 꿈을 가끔은 꾸겠지?
2017년8월6일 새벽05시24분 一鼓
<바이콜릭스 bike-holics>
2006년엔 내 생의 후반 여가를 건강하고 화려하게 보내게 만든, 성동고16회 동창들과의 자전거 동호회 <바이콜릭스>를 회장 창인이와 함께 이루어 건강하고 즐거운 동행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바이콜릭스 창단 10주년을 맞아 동호회를 기념하고 소개하며 만든 동영상의 내레이션으로 대신해도 되겠다.
BIKE-HOLICS 10년이 흘렀다
바이콜릭스는 성동고등학교16회 동기생과 부인들로 이뤄진 자전거동호회다. 2006년9월3일 창단됐고, bike-holic이 “자전거중독자”란 뜻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자전거타기를 사랑했다. 그래서 올해 9월3일 10주년을 맞으며 팀 라이딩이 300회를 돌파한다. 매월 셋째일요일과 여름 혹서기, 겨울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 라이딩을 가진 결과다.
1회 라이딩 평균거리를 최소50km로 잡아도 1만5천km를 함께 달렸고 실제는 2만km가 넘는다. 1년 52주 일요일중 30번은 동호회 친구들이 함께 한 셈이니, 달린 거리만큼 대원들의 우정도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대원(隊員)은 첫 라이딩 4명으로 시작해 게스트를 포함 최대 30명까지 늘어났었다. 창인 명수 학천 성춘 4명이 창단멤버고, 충서 종국 창인부인 종국부인 경식 학천부인 명수부인 인구 영성 간진 정호 수호 경흠 종복 부부 영호부인 완식 부부 이동원 경흠부인 용일 시천 부부 광준 병무 성근이가 동참했다. 이밖에도 많은 동기생들이 신년출정과 송년모임 복달임행사 등에 참석해 물심양면으로 격려하고 찬조하며 발전을 성원해 주었다.
약칭(略稱) 바이콜의 라이딩코스는 초창기 서울에 머물며 한강과 지천(支川)들인 중랑천-왕숙천-창릉천-탄천-양재천-안양천 등 모든 한강(漢江)수계(水界)의 자전거 길을 섭렵하며 즐겼다.
이어 동두천-연천-포천-현리-청평, 구리-퇴계원-금곡-마석, 양수리-양평, 퇴촌-광주-오포-용인, 과천-의왕-안양-산본-반월, 수원-기흥, 시흥-소래-인천 등의 수도권까지 코스의 영역을 넓혔다. 이렇게 서울 외곽으로 원정한 데에는, 호승심과 정복욕도 작용했지만, 2009년 이후 자전거 인구가 폭발해 한강 수계 자전거길이 몹시 복잡해져 안전을 고려한 면이 크다.
2010년 이후로는 전철운행이 천안 춘천 영종도까지 연장되고 공휴일 자전거탑재도 허용돼, 독립기념관과 현충사, 서해포구와 강화도-신시도-자월도-장봉도-무의도 등 섬, 춘천호반과 홍천강 등으로까지 라이딩코스를 연장시켜 갈 수 있었다.
라이딩범위는 더욱 부채살처럼 퍼져 김포-강화-교동도, 파주-문산-임진각, 동두천-철원-월정, 청평-가평, 용문-홍천, 안산-오이-시화-대부-영흥-제부도 등 광역권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와는 별도로, 한반도 해안 라이딩을 계획해, 강화도를 시발로 태안-안면도, 신안 지도-증도, 진도-완도-청산도, 고흥 소록도 나로도까지 이르고 있고, 속초~양양, 강릉~삼척~죽변, 포항~영덕구간도 틈틈이 마친 상태다.
특별기획으로 산간지대와 역사문화탐방 라이딩도 병행돼, 일찍이 제주도해안종주를 마쳤고, 영월-단양 동강코스와 충주 청풍호 등 강변과 호반의 절경도 함께 했으며, 대관령을 비롯해 운두-구룡-한계-미실-진부-고치 등 고산준령을 넘고, 함백산 정상과 만항재, 운탄고도도 달려보며 장쾌한 험로산행을 맛보았다. 4대강 개발로 조성된 국토종주자전거 길도 완주한 상태다.
대마도의 동북단 히타카츠 항에서 서남단 이즈하라항까지 해안도로를 종주하며 해외원정 라이딩의 첫발을 내디디기도 했다.
이밖에 수많은 내륙의 저수지 길 등 달려본 아름다운 코스를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니 더 이상은 여기서 생략한다.
대원들의 개별 라이딩 코스 또한 대단하다. 설악산과 평화의 댐에 이르는 고산준령을 넘나들며 360km를 달리거나, 북한강 남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길을 발원지 샘터에서부터 하구 바다까지 수백km를 샅샅이 훑기도 하는 것들이 그런 예이다.
바이콜은 보기 드문 멋진 동호회다. 라이딩 중 마주치는 다른 팀이나 젊은 라이더들이 찬탄하면서 내려주는 객관적인 평가다. 60줄 나이에 시작한 멋쟁이들이며, 고교동기동창끼리고, 부인도 함께해 모범적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교육기관 말고 동호회원 전체가 유니폼을 겨울-춘추-여름으로 철철이 맞춰 입고 나서는 경우 또한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모임의 오-만찬에서 건배하며 자랑스럽게 브라보 바이콜을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대원들의 합심과 열의, 주변의 관심과 격려가 바탕이 됐다. 특히 대장 창인과 부인 애니박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 바이콜과 대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바이콜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이딩을 기획하고, 자전거와 복장 및 라이딩에 대한 상식과 기술을 전수해, 정신적으로도 풍부하게 뒷받침했음은 물론, 물질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희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원들에게 4대의 자전거와 각종 자전거용품을 창단기념일이나 송년회 및 신년출정식에서 공로상이나 선물 등의 명목으로 제공해 왔던 것이다..
누가 이런 열정으로 바이콜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10년 동안 애간장을 태우며 대장을 맡아온 바이크 손과 애니박께 끝없는 존경과 사랑의 인사를 보낸다. 오랜 세월 라이딩 대열의 선두와 후미에서 길안내와 뒷마무리 및 재정을 맡아 수고해온 콘닥 종국이와 앵커 경흠이도 고맙다. 나머지 대원들도 이후 더욱 열성적인 참여로 호응하고 응원할 것이다.
이제 바이콜 대원들은 70줄에 들어섰다. 10년을 함께 하는 동안 애석하게도 타계했거나 건강을 잃어가는 친구들이 생겨난다. 그 동안만이라도 그만큼 유익하고 즐거웠으니 만족할 일이다. 먼저 내세로 떠난 자전거 친구 정호를 다시금 추모(追慕)하게 된다. 10주년을 기점으로, 동행하는 친구들도 점점 더 줄어가겠지만 여생에서 힘이 닿는 한, 자전거타기를 통한 바이콜의 힘찬 여정과 진한 우정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우리 이렇게 다짐하면서 오늘의 축배를 들자. ♡♡
♣ 에필로그♣
나의 고교시절 회상. 돌아보아도 내다보아도 이만하면 가치 있는 게 아닐까? 문뜩 생각하니 성동(城東)은 진작부터 인연이었다. 태어나기를 행당동. 무학여고 뒤 적산가옥이 있던 언덕배기 어디쯤이다. 6.25가 막 끝나고 미군들이 왕십리에 주둔하며 전후 선무심리작전 일환으로 살수차에 오렌지 주스를 싣고 다니며 퍼줄 때 주전자를 들고 뛰어 내려가던 시절 우리 집도 신당동.
충북단양의 초등학교 시절 불개미에 항문을 물리고 곪아터져 소년 타계할 뻔해 수술 받으러 올라왔던 백병원의 당시 위치가 지금 상왕십리역 근처 어디로 기억한다. 자전거 동호회가 출범한 곳도 대장 창인이가 사는 응봉동이든 행당동이든 거기가 거기다. 앞으로도 더 성동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갈 것 같다. 저절로 웃음이 난다. 고맙다.
다만 이 보잘 것 없는 나의 회상이 보다 더 16회와 전체동문회와 모교에 공헌한 친구들을 무색하게 만들까 몹시 걱정이다. 더 멋진 글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이만 마친다.
성동고등학교 입학 60년 주년을 기념해
2024년 3월 16회 졸업생 一鼓 김명수
첫댓글 명수의 인생 여정의 싦과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군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필름을 보는 것 같군 대단한 기억력과 탁월한 문장 솜씨가 일품일세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흠뻑 빠지다보니 시간가는 즐 몰랐네. 재미있게 읽었네
나도 명수처럼 살았으면 인생이180도 달라졌을거네. 화초처럼 자라 내성적이어서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인생에 남는 기념비적인 추억을 만들지 못했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하네
무슨 당치도 않은 과찬을 우린 같은 성동 나와 육사 온거만 해도, 그래서 평생 애국하며 산 건만 해도 영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