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에 있어서 바퀴를 필요 불가결한 구성 부품이라고 할 때 이륜 및 사륜차의 발달 과정을 그 근원까지 정확하게 더듬어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퀴 역시 차량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4000년 말기에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 발상지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3000년 ~ 28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슈멜의 그림(그림1)에 바퀴가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보다 200~300년 전부터 그 실물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슈멜의 그림에 나오는 원반 차륜은 세 개의 판자 부분과 가죽 타이어, 중심부에 구멍이 뚫린 허브로 이루어져 있다.
울의 수장기, 텔 아그라브의 사두마차에 나오는 모델, 메소포타미아 기시왕의 분묘에서 발견된 실제 차량의 잔해 등 기원전 26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몇몇 발굴품에서도 당시의 차량 제조 기술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는 여러 장의 판자로 이루어진 원반 바퀴가 사용되었으며 4.5cm정도의 두께에 가죽띠로 된 타이어와 철이나 구리로 된 림의 구조를 하고 있다.
바퀴의 무게는 구조나 크기에 따라 30~70kg정도로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13인치 철제 차륜의 11kg보다 훨씬 무거웠다. 바퀴는 대부분 중심부의 허브 부분이 보강되어 있고 차체의 바닥면이나 뼈대의 직접 고정된 차축 주위를 회전하도록 되어 있다.
야생 당나귀가 끄는 슈멜의 사륜차. 지붕이 없고 차륜은 여러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쐐기로 바퀴를 차축에 고정시켜서 바퀴와 차축이 차체 바닥면 아래에서 일체로 회전하는 것도 있었다.
조향 장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륜차는 직진 기능밖에 없었기 때문에 커브를 돌 때는 엄청난 동물의 견인력이 필요했다. 차체는 대부분 간단한 상자형으로 이루어졌고 윗부분이 개방되어 있었다. 바퀴의 타이어는 동이나 청동으로, 그리고 각 부품은 납이나 아연으로 나무 부분을 보호 장식하여 전체적으로 차량, 바퀴, 차축, 채(차량의 전방에 길게 나온 견인용 막대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차량을 발명하고 발달시킨 이들은 누구일까? 슈멜인과 아카드인이 바로 기원전 3000년경 이후의 고대문화를 형성한 인류이다. 그들은 고유의 법률 체계 속에서 상형 문자를 발달시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많은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제방을 세워 운하를 뚫었다. 먼 곳에서 각종 물품을 들여오고 남는 곡물은 멀리 떨어진 넓은 장소에 보관하였다.
물품의 일부는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배로 운반되었는데 도시 국가가 늘어나면서 육로로 운반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바퀴 주행차가 발명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슈멜의 그림을 통해서 이미 완성된 형태의 차량을 볼 수 있다. 그 원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썰매가 그 전 단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회전 목재로 끄는 형태의 썰매, 즉 미끄럼나무 위의 활주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원반 바퀴 위의 주행기로 발전한 것이다.
◈ 취(썰매) ◈
우리는 차량의 원형을 받침대가 없는 썰매(그림 3)와 받침대 부착 썰매(그림 4)등의 미끄럼나무 주행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면과 적재대 사이의 거리는 받침대 부착 썰매가 받침대가 없는 썰매보다 길다. 그런데 회전 목재 위에서 이용하는 받침대 부착 썰매나 받침대가 없는 썰매는 바퀴 차가 등장한 이후에도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오베리스크 및 사원을 건설할 때 무거운 것을 이동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람이 걸터앉거나 짐을 얹을 수 있도록 차량을 지탱하는 네 개의 다리를 달아 차량이 지면으로부터 높아졌다.
이들 썰매는 모두 가로목을 붙인 포크 모양의 나뭇가지로 만든 원시적인 썰매(그림 5)에서 유래하며 포획한 사냥감을 싣고 오는 데 사용했다.
◈ 사륜차와 이륜차 ◈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사륜차와 하나의 축으로 된 이륜차의 발달은 진행 속도가 서로 달랐다.
사륜차는 단지 물자의 수송에만 사용되었으며 소가 끌었기 때문에 조향 장치가 없었다. 또한 무거운 원반 바퀴 때문에 다루기가 어렵고 속도도 매우 느렸다. 이와 달리 이륜차는 주로 수렵이나 전투에 사용되었다.
기원전 1700년경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침입해 온 히크소스족으로부터 말과 차량을 접한 이집트인은 기원전 1550년경 히타이트, 앗시리아, 미탄니 왕국과 벌인 전투에서 전차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가벼운 스포크 횔로 달리는 전투 차량은 전쟁 방법과 군수 조직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차량, 바퀴, 공구 제조업과 말의 사육업 등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고 회화 예술에도 새로운 탈것이 등장했다(그림 6). 부조, 벽화, 정물 등에 묘사된 수렵과 전차를 보면 이집트의 수가공 장인은 20세기의 공예가보다도 바퀴 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55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투 및 수렵에 이륜차를 사용하였다. 사진은 기원전 1290년경 고대 이집트의 스포트 차륜을 지닌 전투차이다.
바퀴와 바퀴 차가 다른 지역에서도 발명되었다는 추측을 배제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서쪽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크레타 섬에도 소가 끄는 무거운 화물차가 등장했고 기원전 1600년경에는 그리스의 뮤케나이에서 가벼운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 중에서 특히 옆으로 늘어선 네 마리의 말이 그는 이륜차가 유명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지붕이 없는 형태의 이 차를 카드리가(병렬 사두마차)라고 불렀으며 전투와 경주, 축하 행진에 사용하였다.
카드리가 경주는 기원전 680년 이후 그리스 올림픽의 경기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로마에서는 서민들의 오락으로 인기를 끌었다. 카드리가는 17세기 이후 승리의 상징으로 궁전과 개선문, 화폐에 장식되기도 했다(그림 7).
카드리가는 로마의 엠마뉴엘2세 기념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런던의 웰링턴 아치 등 국가적인 기념탑을 비롯해 드레스덴이나 모스크바 등의 극장 장면에도 새겨져 있다.
◈ 도로 ◈
그리스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을 끼고 상업과 식민지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 교통보다 해상 교통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 외곽에서는 도로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량 통행도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로마제국은 유럽 내, 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영국, 메소포타이마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도로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로마의 도로는 두 지점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기 위해 각종 보조 수단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직선도로로 건설하였다. 도로 표면에 쇄석을 깔았으며 폭은 3m정도였지만 카푸아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의 일부 구간은 4.5m폭에 포장을 한 곳도 있었다.
차도로 건설되었으나 낮에는 차량 통행을 금지하여 보행자를 우선으로 하였다.
◈ 포스트 ◈
로마는 도로를 이용해 군대를 신속하게 작전 지점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전차와 함께 투입하기도 했지만 차량이 없더라도 직선으로 연결된 로마의 도로는 군대의 기동력을 한층 높여 주었다. 하지만 기동성이 우수하고 값이 싼 기마대에 눌려 전차는 점점 그 중요성을 잃고 기원전 3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도로를 이용한 여행 및 교통 제도가 크게 발달하여 교통 요지 어디에서나 이륜차와 사륜차를 빌릴 수 있었으며 물품 수송에 짐수레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기원 원년 무렵에 이르러 전령, 급한 편지 등의 국가적인 업무에 지친 말을 교환하는 장소인 역이 도입되었다. 이 역은 라틴어로 'Posita Statio'라 하였는데 후에 이탈리아어로 우편(물), 축사의 한 구획, 정박지, 부서를 의미하는 'Posta'로 바뀌었다. 따라서 '포스트(Post)'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우편 제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말을 교환하기 위해 머무르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의 변화는 15세기 말에 이르러 생겨난 것이다. 로마의 포스트 제도는 몇 번의 위기를 거치면서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로마를 침입한 게르만 민족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피봇식 조향 장치와 레이더 ◈
로마인들은 피봇식 조향 장치 도 발명하였다. 이 장치는 차량이 커브를 돌 때 수직으로 만들어진 중심축 둘레를 앞 차축 전체가 함께 좌우로 돌도록 함으로써(그림 8)견인 동물이 받는 부하를 크게 줄였다.
타이로드 Z가 마찰 회전 스핀들 X를 중심으로 도는 앞 차축 P와 일체가 되어 조향 암 Y를 움직인다. 마찰 부재는 앞 뒤 연결봉 U 밑에서 움직이면서 조향 장치를 수평으로 유지시킨다.
이와 함께 겔트족의 차량에서 비롯된 조향 장치를 갖춘 레이더도 등장했다(그림 9). 레이더는 측판이 아래로 열리는 사륜차로서 장막을 부착하거나 떼어내면 시내 주행은 물론 여행, 우편, 군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임대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내장을 호화롭게 꾸며 제국의 황제나 귀족들이 서민처럼 가장하여 외출하고 싶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 피봇식 조향장치
앞차축 전체가 수직으로 놓인 회전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도는 조향 장치로서 앞쪽의 좌우 바퀴는 평행을 유지한다. 앞바퀴의 조향 각도가 커짐에 따라 바퀴가 안쪽으로 이동하므로 옆으로 넘어질 위험성이 높고 조향 봉, 마찰용 부품 또는 회전축 둘레의 회전링 등의 무게가 무거워 마찰저항이 커지며 조향을 위하여 많은 공간이 요구되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자동차에는 사용하지 않고 마차의 경우 차체 프레임의 앞부분 폭을 좁히거나 프레임을 바퀴 위에 배치하여 사용했다.
◈ 쿠체(코치) ◈
서로마 제국의 쇠퇴아 함께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도로 교통도 크게 퇴보하였다. 주요 교통 수단이 말로 바뀌자 도로는 황폐해지고 차량 제조기술은 더 이상 진보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세기 무렵 중부 유럽의 경제가 크게 번창하면서 도로 교통의 역할이 다시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1498년에 인도 항로를 개통하는 등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이동하면서 항만 도시인 리스본, 세빌리아, 앤트워프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차량의 구조도 다시 발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쿠체(코치)가 등장한 것이 주목된다. 쿠체는 헝가리의 브라치스슬라브 근처의 '코치(Kcos)'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지며 사륜 대형 마차나 버스를 의미하는 영어의 코치(coach), 승용 상자형 마차나 우편 마차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체(Kutsche)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제 C자형 리프 스프링과 가죽 벨트로 차체를 지지하며 연결봉으로 앞 뒤 차축을 연결하였다. 앞바퀴를 뒷바퀴보다 작게 만들어 차체 앞부분의 밑에서 자유롭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승용차를 베를리네라 하는데 이는 베를린 풍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베를리누, 영구에서는 설룬, 미국에서는 세단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주로 운전자가 있는 고급 승용차눈 리무진이라 하였우며 프랑스의 리모주지방 풍을 의미했다. 공항과 호텔 사이를 운행하는 대형 승용차를 리무진이라 하기도 한다.
쿠체의 차체는 스프링 역할을 하는 가죽 벨트로 차체 기둥에 연결되어 있으며 심한 충격을 완화시키는 정도의 기능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이르러 C자형 강철 스프링이 적용되면서 스프링의 아래쪽을 차대(섀시)에 고정하고 위쪽은 차체를 지지하는 가죽 벨트와 연결된 구조로 발전하였다.
또한 뒷바퀴의 지름을 키우고 스프링과 벨트의 활동 범위를 감안하여 차체를 높였다(그림 10). 이에 따라 쿠체는 험난한 도로에서도 큰 충격을 받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 차축 경사각과 바퀴 스포트 경사각
앞바퀴를 작게 하고 이를 차체 앞부분의 아래쪽에 설치하여 차량의 회전이 더욱 자유워졌고 바퀴(휠)도 원반 모양에서 깊은 접시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차축 양쪽 끝을 아래로 약간의 경사각(그림 11)을 이루어 바퀴가 축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너트로 고정했다. 이렇게 하여 바퀴가 축 안쪽의 마찰 원반으로 눌려져 쉽게 빠지지 않게 되어 안전성이 한층 높아졌다.
차축 가장자리의 스핀들(spindle)이 수평인 경우, 바퀴가 바깥쪽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너트로 차륜 중심부의 허브르 눌렀다. 이때 허브에 닿은 너트가 느슨해지면서 차륜이 스핀들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스핀들에 바깥쪽을 향해 캠버를 붙이거나 차축 중앙부가 위로 활처럼 휘도록 하여 바퀴가 스핀들 안쪽의 허브로 부착된 마찰 원반에 닿도록 하였다.
바퀴의 하중을 지면에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스포크가 지면에 수직으로 세워져야 한다. 따라서 스핀들과 바퀴의 허브가 수평 상태에서 기울어지면 허브에 대해 직각을 이룬 스포크도 비스듬하게 기울게 된다. 이 기울기 각도를 스포크 캠버라 한다.
반면 노면과 경사를 이룬 바퀴가 노면 마찰력을 축으로 직접 전달하기 위하여 축으로 향한 스포크를 노면과 수직이 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스포크는 바퀴 중심 허브의 축선과 직각이 되지 않고 약간 기울어진 휠 스포크 경사각을 이루게 되었다.
◈ 화물 운반차와 쿠체
화물 운반차는 승용을 위주로 하는 쿠체에 비해 기술적인 면에서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유럽 전역에서 농업용 차량이나 화물 운반차가 사용되었지만 대부분 브레이크와 스프링이 없어서 다루기가 힘들었다.
특히 화물 운반차는 피봇식 조향 장치를 채택한 것 외에는 고대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화물 운반차가 등장하게 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한편 중세에는 마차에 눌려 크게 사용되지 않던 승용 차량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술자이자 경제학자인 요한 베크만은 1782년에 발표한 논문 '발명이 역사에 미친 업적'에서 "여성이 장막이 부착된 차량을 사용하는 데는 오랜 동안의 저항이 있었다. 남성들은 그것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의 궁정에서부터 비롯된 쿠체의 인기는 유럽의 귀족들에게로 이어졌고 공식 마치도 더욱 호화스러워졌다. 이때는 실용성보다는 상징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그러나 1588년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하면서 유럽의 정치와 경제, 기술은 영국의 주도하에 넘어갔고, 영국은 스페인과 달리 쿠체의 이용을 궁정이나 귀족에 한정하지 않고 상류 시민계급으로 확산시켰다.
그리고 우편 마차로 여행하는 것이 보편화되면서 가볍고 다루기 쉬운 차량들이 생겨났다. 승용을 목적으로 한 차량의 개량은 대부분은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 타원 및 반타원 리프 스프링
1805년에 영국의 오버디어 엘리오트가 팔꿈치 모양(C자형)의 스프링 대신 리프 스프링, 즉 타원 스프링을 발명한 것은 자동차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리프 스프링으로 차축과 차체 사이클 직접 연결함으로써 앞 뒤 차축을 연결하고 있던 연결봉을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무게가 줄고 승강 높이가 낮아졌으며 스프링의 움직임이 개선되어 승차감이 향상되었다.
한편 오늘날에도 트럭과 일부 승용차에 타원 스프링 또는 반타원 스프링이 사용되고 있다.
타원형 리프 스프링의 적용으로 앞 뒤의 차축 연결봉이 없어짐에 따라 차체가 낮아져 타고 내리기가 편리해졌다. 또한 바퀴의 상하 움직임에 의한 차체의 좌우 흔들림도 감소했다. 프랑스어로 '잘라진'을 의미하는 쿠페는 보통 2열 4인승의 차체 뒷부분을 짧게 자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2열째 좌석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어린이가 탈 수 있는 정도이다.
스위스의 8인승 쿠페 란드, 우편물을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우편 마차로 사용되었으며 알프스 지방에서는 버스로도 이용했다. 마부석 아래의 2인승쿠페와 접이식 장막이 달린 가운데의 4인승 란드, 뒷부분의 2인승 긴 의자로 이루어졌다. 무게는 1,450kg이다.
◈ 브레이크
17세기 초부터 브레이크 장치가 사용되었다. 말의 제동력과 마부가 스포크 휠을 정지시키는 것을 돕기 위하여 도입된 쐐기가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V자 모양의 철로 된 쐐기를 뒷바퀴의 타이어와 지면 사이에 끼워 넣고 체인으로 위치를 고정하여 바퀴가 돌지 않도록 한 원시적인 형태였 다.
오늘날 철도 화물차에 사용되고 있는 슈 브레이크, 즉 마찰재에 봉을 끼워 바퀴를 누르는 제동 방법도 19세기 중반부터 마차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 차축
1850년 이후 철제 차축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목제 차축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함께 영국의 코링은 차축과 여기에 삽입된 바퀴 허브 사이에 오랫동안 기름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한 윤활 장치와 바퀴 축의 유격을 규제하는 장치를 개발하였다. 이에 따라 바퀴를 차축에서 떼어내어 기름을 넣은 뒤 다시 조립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 차량 기술의 발전
'차량을 발명한 이후부터 약5000년, 증기 엔진차를 발명하기 100년 전까지를 일컫는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차량 구조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717년 이후 스톡홀롬, 파리, 코펜하겐에서 차량 구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10여 년 동안 발표된 논문과 연구 성과, 서적, 프랑스의 드니 뒤드로가 만든 백과사전의 안장 만들기 및 차량 구조기술에 관한 부분(1772년), 독일의 베크만이 쓴 저서에는 차량 기술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 저작물은 큰 지름의 바퀴를 개선하고 차량 구조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차량 기술이 발전하면서 차량 제조업과 차체 목수, 단조실, 마구사, 장식 레이스 장인, 도장공 등의 수가공 업자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업종과 직업으로 자리하기도 했다.
§. 차량용 엔진의 탐구
◈ 호이헨스의 화약식 대깅바 가스 엔진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auto-mobile)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자동으로 견인되는 차량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차량은 기술적인 관심밖에 있었고, 17세기말 이후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시대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시작했다.
절대주의와 상업주의 시대에 태엽의 힘, 풍력, 수력 등 당시에 실현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면서 조금씩 차량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에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예로 바로크 정원의 물의 예술에서, 특히 진공을 이용하여 강물을 언덕 위로 끌어올리는 시험에 많은 학자가 참여하였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면서 수학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앙 호이헨스(Christioan Huygens, 1629 - 1695)는 프랑스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당시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을 뛰어넘어 화약을 이용하는 것을 연구했다. 그는 1673년에 독일의 자연과학자이며 정치가인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2)의 연구에 기초하여 실린더 안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얻은 부압과 외부의 대기압으로 실린더 내부에서 피스톤을 움직여 힘을 발휘하도록 만들었다(그림 15).
물론 화약 엔진을 이용한 실험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지만 이 엔진을 계속작동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이헨스는 "수상 및 육상 주행기계의 새로운 운동 방식의 발명자라 할 수 있고, 그의 화약 엔진은 실린더 안에서 기계적 에너지를 산출해 낸 가장 오래된 엔진으로 기록된 다. 따라서 그를 대기압 가스 엔진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 파팡과 뉴코멘의 대기압 증기 엔진
프랑스의 드니 파팡(Denis Papin, 1647∼1712/14)은 1688년 에 호이헨스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화약 엔진을 연구하여 성능을 크게 개선하였다.
그러나 파팡 역시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위험한 화약 엔진에 대한 연구를 포기한 그는 1690년에 실린더 안의 수증기를 압축하여 부압을 생성하는 새로운 엔진을 만들었다. 이것 역시 실제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지만 이후 대기압 증기 엔진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많은 발명가와 과학자, 기계 기술자가 증기 엔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영국의 토머스 서베리가 1698년에 증기의 팽창력과 대기의 압력을 교대로 움직이는 증기 엔진을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스템은 물을 퍼올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광산의 물의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토머스 서베리의 증기 엔진은 1712년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는 증기 발생기(보일러)를 작동실린더와 분리하고 실린더 안의 증기를 물로 식힘으로써 피스톤의 한쪽을 대기압이 누르고 다른 한쪽은 실린더 안에 발생한 부압에 의해 빨려들어가게 하여 물을 이동시켰다.
이와 함께 체인을 통하여 피스톤의 운동을 암에 전달하고, 반대쪽 암에 연결된 펌프를 움직여 갱안의 물을 퍼 올리도록 했다.
◈ 와트의 증기 엔진
뉴커먼의 대기압 증기 엔진은 영국에서 널리 일반화되었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증기가 유입될 때는 실린더를 가능한한 뜨겁게 하고, 응축할 때는 큰 부압을 얻기 위하여 최대한 차게 해야 했기 때문에 열, 즉 에너지의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이러한 물리적 관계를 깨닫고 대응책을 연구했다. 그는 1768년-1769년에 걸쳐 피스톤이 들어 있는 작동 실린더의 온도를 항상 뜨겁게 유지한 뒤에 실린더와 분리한 증기 응축기의 온도를 차게 한 증기 엔진을 만들었다.
그림 16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스톤을 누르는 것은 대기가 아니라 증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증기 엔진이 발명되기에 이르렀다.
1776년부터 볼턴과 함께 개발에 들어간 와트의 증기 엔진은 피스톤의 한쪽 방향에서만 힘이 발생 하는 단일 작동 방식으로 뉴커먼의 증기 엔진보다 석탄 소비율을 절반이나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증기압을 변화시킴으로써 20마력 정도의 출력을 조정할 수 있었다.
와트의 증기 엔진은 갱 안의 물을 배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콘 월 광산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이후 회전 기계를 이용하는 섬유 산업 부문으로 확대 보급되었다.
와트는 특허 문제로 인해 실린더 내 피스톤의 직선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변환하는 부품인 크랭크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81년에 유성 기어장치??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였다.
이 장치는 그의 조수인 윌리엄 머독(Wiliam Murdock, 1754-1839)이 개발한 것이다.
♠ 유성기어변속기
유성 기어 변속기(Planetary Gear Transmission)는 기어가 다른 기어의 둘레를 도는 형태이다. 와트의 증기 기관에서 2개의 기어를 사용한 이후 오늘날 대부분의 자동변속기에 이용되고 있다. 표준형은 중심부의 선 기어(Sun Gear), 3개의 플래니터리 기어와 이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캐리어, 가장 바깥쪽의 내치형(內齒型)기어로 구성된다. 이들 세 개의 기어 중 하나의 기어에 동력이 전달되어 다른 하나의 기어를 통해 출력되며 나머지 기어는 마찰 다판 클러치에 의해 회전 또는 공전을 저지함으로써 변속비의 회전 방향을 바꾸어 출력한다.
와트는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1782년 복동 증기 엔진(그림 17)을 개발했다. 그는 양 방향으로 rye대로 힘을 발생시키는 피스톤에 연결된 봉에서 나오는 체인 대신 편행 링 기구를 적용했다. 그리고 부하가 바뀌더라도 회전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원심 거버너를 발명했다.
와트의 증기 엔진은 기계화와 공업화를 앞당겨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있다. 석탄이나 광석을 더욱 깊이 파는 데 필요한 물 펌프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공작 기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증기 가래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디젤 트랙터의 개발로 이어졌으며 증기력은 일반 교통에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였다. 또한 증기 철도는 이동의 범위를 더한층 넓혀주었고 증기선은 수백만 이주자를 다른 대륙으로 실어 날랐다. 한마디로 증기 엔진은 사업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기반이 되었으며 석탄과 철의 필요성을 크게 증대시켰다.
◈ 퀴뇨의 증기 자동차
증기 엔진이 발명됨에 따라 무거운 고정식 증기 엔진을 작고 가볍게 만들어 주행 기계의 동력원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당시 독일, 영국 등과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의 외무대신 스와슬 공작은 육군 공병대 기사로 복무하고 있던 니콜라 조셉 퀴뇨(Nicolas Joseph Cugnot, 1725~1804)에게 대포나 탄약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증기 자동차의 개발을 제안했다.
곧바로 연구에 들어간 퀴뇨는 2년여간의 연구 끝에 1769년 증기로 구동하는 4인승 세바퀴 자동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험 주행 끝에 1771년 드디어 최초의 운반 자동차 파르디에를 만들었다.
퀴뇨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대기압 증기 엔진 대신 신선한 증기를 이용하여 응축기와 이를 제어하는 장치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또한 증기발생기(보일러), 증기엔진, 구동 장치를 앞바퀴 주위에 하나로 모음으로써 탄약을 운반할 수 있는 커다란 화물적재 공간을 확보했다.
또한 대포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힘이 연속적으로 작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피스톤이 순차적으로 교환되는 2실린더의 증기 엔진을 적용하고 각 피스톤에 연결되는 두 개의 봉을 방향 변환 암으로 연결하여 구동력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 차는 피스톤의 상하 움직임을 래췌트 기어(ratchet gear)를 통해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동시에 후진도 가능했다.
그러나 파르디에는 공식 시험 주행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제 몰락과 함께 파르디에의 개발을 지시한 스와슬 공작이 1770년 실각한데다 그의 후임자가 전쟁을 위해 기계적으로 구동되는 주행 기계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퀴뇨가 개발한 파르디에는 최초의 자동차로서 파리의 국립공예박물관(Consevatoire des Arts et Metiers)에 전시되어 있으며 뮌헨의 독일박물관과 이탈리아의 트리노의 카를로 뷔스카레치 자동차 박불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영국의 증기 자동차
영국의 리챠드 트레비딕도 자동차용 고압 증기 엔진을 개발, 1803년 런던에서 운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동력 장치를 부착한 택시이다(그림 22).
그러나 증기 엔진이 버스의 동력에 사용된 것은 이로부터 20년 두인 골드 워즈 거니 경이 만든 증기 버스(그림 23)부터이다. 이 중의 한 대가 글로스터와 첼던햄을 잇는 14km의 거리를 하루에 3회 왕복했는데 평균 속도는 정차 시간을 포함해서 약 18km/h였다. 이어서 1831년에는 월터 행코크가 만든 14인승 버스 '인펀트'가 런던과 스트래트포드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한편 1821년 기어 변속 장치가 개발되고 1825년에는 유니버설 조인트??가 발명되는 등 이 무렵 자동차의 주요 장치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 장치가 단 한 번의 연구 실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크랭크 샤프트가 구부러지고, 파이프가 새는가 하면 체인이 갈라져 끊어지고 증기 발생기가 파열하기도 했다. 증기 엔진의 진동과 연소된 기름의 악취, 여기 저기에 날리는 그을음과 석탄 먼지 등 고정식 증기 엔진에서는 없던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는 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한동안 마차와 철도에 밀려나고 말았다.
♠유니버설 조인트
각도가 변화하는 2개의 봉을 연결하여 힘과 회전력을 전달하는 부분을 말하며 크로스 헤드와 카르단 조인트 또는 훅 조인트로 불리는 십자형 조인트가 대표적이다. 출력 축의 회전 속도는 입력 축의 속도에 따라 한 번 회전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두 번씩 변동하며 그 크기는 양축이 일직선 상태를 기준으로 양 축간 각도의 2승에 비례하여 늘고(근사식 l (w1-w2)/w1 l max = (0.015/100) δ2, w1 : 입력 축의 각 속도, w2 : 출력 축의 각 속도, δ : 양 축을 이루는 각) 진동 문제를 일으키기 쉬우므로 특히 앞바퀴 굴림차에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등속 조인트가 이용되고 있다.
십자 조인트를 2개 연결하는 더블 카르단 조인트의 경우에도 등속성이 얻어지지만 무게가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그레고아르와 후나유는 1920년대 후기에 이를 하나로 통합한 트랙터 조인트(그림)를 고안하여 시트로엥 등 앞바퀴 굴림차와 지프에 사용되었다.
이후 여러 종류의 등속 조인트가 발병되어 현재는 양 축을 이루는 각도의 2등분 편상에 회전력을 전달하는 6개의 볼 또는 3개의 구면이 위치하도록 한 등속 조인트(더블 옵셋 조인트, 컨스턴트 벨로시티 조인트, 트라이포트 조인트, 트라이 플랜 조인트)가 이용되고 있다. 또한 앞바퀴 굴림 자동차의 차동 기어에 이어지는 부분에는 축의 신축을 흡수할 수 있는 슬라이딩 타입, 바퀴 축의 조향에 의해 각도 변화가 큰 부분에는 최대 굴곡 각도가 크게 신축하지 않는 조인트가 사용되고 있다.
♠ 차동기어(디퍼렌셜기어)
회전 속도와 관계없이 구동 회전력을 2개의 구동 바퀴 또는 구동 축으로 나누는 기어 장치로서 대부분 4개의 베벨 기어가 사용된다. 커브 주행시 안쪽 바퀴와 바깥쪽 바퀴에 속도 차이가 생김에 따라 일어나는 바퀴와 지면 사이의 미끄러짐 현상을 막아주는 장치이다. 일반적으로 4WD 자동차의 경우 변속기의 뒤쪽에 센터 디퍼렌셜을 장치하여 회전력을 전후로 나누고, 다시 좌우에 설치된 디퍼렌셜을 통해 좌우로 나눈다.
구동 바퀴 중 한쪽 바퀴가 공전하면 디퍼렌셜로 인하여 다른 구동 바퀴에 회전력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차동 기어를 로크시켜 구동력을 확보하는 디퍼렌셜 로크가 이용된다. 공회전하기 시작한 바퀴와 다른 바퀴를 어느 정도 결합시킴으로써 구동력을 확보하는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LSD)도 있다. 또한 미끄럼 마찰을 이용하여 LSD의 기능을 갖춘 웜 기어를 센터 디퍼렌셜에 이용하고 앞 차축 또는 뒤 차축의 구동 회전력 비율을 늘림으로써 앞바퀴 굴림차나 뒷바퀴 굴림차에 가까운 주행 특성을 얻을 수도 있다.
증기 버스의 운임이 마차 버스보다 훨씬 높은 것도 실용화를 늦추는 한 요인이 됐다. 리버풀과 프레스코트를 잇는 9km구간의 운임이 증기 버스는 48실링이었으나 마차 버스는 단지 4실링에 불과했다. 게다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 또는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본은 철도로 흘러 들어가고 기술자들은 보다 우수한 기관차와 증기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1840년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증기 버스의 개발을 완전히 중단하고 말았다.
◈ 영국의 적기조례
이런 가운데 증기차를 만들던 몇몇 업체와 일부 기술자들이 농업용 증기엔진(포터블 증기 기관)을 만들어 증기 엔진의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커다란 증기 발생기가 수평으로 설치되고 말로 견인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은 자동차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거운 화물차를 견인하는 속도가 느린 증기 견인차(트랙션 엔진)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트렉션 엔진은 농업에 많은 도움을 주며 1865년까지 보급이 확대되었고 해외로 수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증기 엔진은 도로를 망가뜨리고 말을 놀라게 한다는 이유로 도로검사관이나 마차 소유자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국민의 압력에 굴복한 영국 정부는 1865년 적지조례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증기 엔진 차량은 최고속도가 교외에서는 6.4km/h, 시내에서는 3.2km/h로 규제되었으며 길이와 중량의 한계를 엄격히 지켜야 했다.
또한 공공 도로를 달리는 증기차는 적기를 지닌 보행자가 먼저 기를 흔들며 인도하여 사람이나 동물에게 미리 경고를 해야 했다.
적기조례가 공포됨에 따라 증기차의 개발과 제조는 완전히 정지되었고 행코크와 거니가 이룬 연구 성과도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기술자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자본 투자도 거의 없었다.
1896년 영국의 적기조례가 폐지되었을 때는 이미 프랑스가 증기차 제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870~1871년 사이에 벌어진 보불전쟁 이후 증기 자동차 개발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내연 기관에 대한 연구도 많은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1880년대 중반에 가솔린 엔진을 얹은 최초의 자동차가 등장했다. 당시 유럽에는 이미 10여 개의 자동차 메이커가 있었다.
적기조례가 폐지되기 1년 전인 1895년 영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부레마'가 등장하고 그 이듬해에 '나이트'가 나오면서 영국에도 가솔린 자동차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10여 년이나 늦은 일이다. 비록 소량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벤츠는 이미 가솔린 자동차 뷔에르를 양산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 프랑스의 증기 자동차
프랑스에서는 1828년 이후 증기 엔진을 지닌 화물차와 견인차, 이륜차가 등장했다. 프랑스에 최초로 증기 자동차를 도입한 이는 아메드 볼레이다.
그는 1873년 두 개의 엔진과 두 개의 변속기 그리고 독립 서스펜션을 적용한 6인승 증기 자동차를 만들어 프랑스 증기 자동차의 시조가 됐다. 그는 1876년 이를 더욱 발전시켜 최고 속도가 시속 40km에 이르는 20인승 증기 버스를 만들었으나 10톤이나 되는 무게 때문에 실용화 되지는 못했다.
1880년대 이후 프랑스에 등장하기 시작한 증기 자동차에 매료된 알베르드 디옹(Albert de Dion, 1856~1946)은 주르주 뷔통과 손잡고 1883년 볼레의 것보다 한층 진일보한 증기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는 이륜차의 파이프 프레임 구조, 금속선 스포크 휠, 포크식 조향 장치 등을 적용하여 기존의 증기 자동차보다 무게를 크게 줄여 최고속도 60km/h를 달성하였다.
또한 1887년 이후 레옹 셀포레도 증기 자동차의 경량화와 기술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무렵 프랑스는 증기 자동차에 대한 수준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루기가 복잡 하고 무거워 대중 교통 수단으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그림 24).
◈ 르봉 당베르상과 드 리바의 가스 엔진
증기 엔진의 개발로 화약 엔진으로는 불가능했던 연속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효율이 매우 낮았다. 이에 따라 가스 엔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솔린 엔진을 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위한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석탄이나 가연 물질의 건류(乾溜)로 발생하는 가연성 가스가 발견되어 가스등에 사용된 이후 18세기 말에 이르자 가스를 연소시켜 힘을 발생하는 가스 엔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필립 르봉 당베르상(Phillippe Lebon d'Humbersin, 1769∼1804)은 1801년에 가연 가스와 공기를 혼합하여 작동 실린더 밖의 혼합실에 저장하는 원리를 복동식 2스트로크 엔진에 적용 했다.
가스와 공기는 미리 압축되어 전기불꽃으로 점화되고, 혼합 가스는 연소하면서 통로를 통해 작동 실린더에 인도되어 반대 방향의 2개의 작동 피스톤과 충돌하는 방식이다. 기술적인 한계로 이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르봉은 가스 공기 혼합식 사전 압축과 불꽃 점화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가스 엔진의 발명가라 할 수 있다.
르봉의 연구와는 별도로 스위스인 이작크 드 리바(Isaac de Rivaz, 1752-1829)도 전기 불꽃 엔진을 개발하여 4륜차에 얹었다.
그의 가스 엔진은 실린더를 수직으로 세워 윗부분이 열린 상태에서 수소와 공기의 혼합 가스를 폭발 시켰다. 이 힘에 의해 피스톤을 밀어 올리고 대기압으로 다시 아래로 밀어 내리는 동안에 래췌트 기어로 주행 기계를 구동하여 어느 정도 이동시킨 다음 새로운 혼합기를 작동 실린더에 손으로 주입하는 원리였다.
매우 복잡한 원리였지만 1807년에 프랑스 특허를 획득한 드 리바의 가스엔진은 세계 최초로 내연기관을 도로 주행 기계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
가스 엔진의 연구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약한 장 조셉 에티앙느 르노와르(Jean Joseph Etienne Lenoir, 1822-1900)에 이르러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은 증기 엔진에 비하여 경제성이 월등하게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운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1860년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증기 엔진과 마찬가지로 흡입 배출의 미끄럼 밸브를 이용한 복동식이었으며 당시의 수평 증기 엔진과 비슷한 형태였다(그림 27, 28).
왼쪽의 가스 흡입구(a)를 통하여 가스가 실린더 방향으로 흐르다가 공기를 흡입하기 위하여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미끄럼 밸브(c)를 통과한다. 이 곳에서 가스와 혼합된 공기는 흡입 통로를 통해 물로 식혀진 실린더로 들어간다. 플라이 휠이 작동하면서 피스톤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다가 중간 위치에서 점화 플러그(s)에 의해 가스가 착화된다. 이때 발생하는 연소 가스가 피스톤을 밀어올려 커넥팅 로드 (o)를 지나 크랭크에 힘을 전달하고 왼쪽의 배출 미끄럼 밸브(d)를 통해 배기 가스가 배출구(b)로 흘러나온다. 이와 같은 동작이 왼쪽에서도 반복된다. 미끄럼 밸브는 크랭크 샤프트의 편심 원반 및 복원 스프링이 붙은 바(Bar)로 제어된다. 1 :유도 코일, k : 원반 접점(p)을 가진 점화 분배기, r : 실린더 커버측 점화 플러그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은 윤활유와 가스 소모가 많은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는데 이는 가스를 미리 압축하지 않은 데 따른 현상이다. 또한 행정의 한가운데에서 피스톤 속도가 가장 높을 때에 점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회전이 다소 거칠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은 높은 가격 때문에 대규모 공장에서만 사용하는 증기 엔진을 대신하여 소규모 공장으로 널리 보급되어 300여기 정도가 생산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작은 수량이지만 당시로서는 거의 양산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동차산업사상 높이 평가받고 있다.
르노와르는 가스 엔진을 주행 기계에 이용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시험 결과 가스 발생기를 필요 로 하는 등 동력원으로서는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단하고 말았다(그림 29).
◈ 오토의 4스트로크 엔진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이 유럽지역으로 보급되자 독일의 쾰른에서 상업을 하던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 1832∼1891)는 이를 기본으로 본격적인 자동차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르노와르의 가스 엔진과 달리 그는 액체 연료, 즉 알코올을 연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와 함께 '육상 도로에서 여행자의 이동을 도와주는 주행 기계(특허 청구 1861)'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르노와르 엔진의 모조품으로 연구한 결과 그는 가스와 공기의 혼합기는 실린더 안에서 압축되어 압축 압력이 가장 높은 순간, 즉 피스톤이 역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점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1862년에 그가 만든 4기통 엔진은 착화 충격으로 인해 파손되고 말았다.
낙담한 오토는 액체 연료 엔진 대신 당시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간주되고 있던 대기압 가스 엔진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주행 기계의 동력원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접어두었다.
이 엔진은 대기압의 효과를 배제한 동 단기통 4스트로크 엔진으로서 대기압 가스 엔진 이후에 일반화된 화염 점화 방식??을 적용하고 고속 회전 영역에서는 가스의 공급을 중단하도록 설계되었다.
♠ 화염식 점화장치(오토의 4스트로크 엔진, 1876년)
미끄럼 밸브의 가스 통로가 적당한 위치에 올라오면 항상 유지되고 있는 화염을 통해 실린더 안에 있는 가스와 공기 혼합기가 점화된다.
배연통은 화염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대 토크는 200rpm이다.
오토의 4스트로크 엔진은 200여 년에 걸친 차량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걸친 동력 기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토에게 있어서 2스트로크 방식이나 4스트로크방식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4스트로크방식을 특허로 방어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피스톤 윗면의 노킹을 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확실한 점화를 위하여 점화 위치에는 짙은 혼합기를 설정하고 피스톤 방향으로 갈수록 점점 엷어지도록 함으로써 성충화를 추구했다. 즉 그는 혼합기의 성충화야말로 엔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2스트로크 엔진이 그의 성충화 혼합기 형성에 대한 특허를 침해한다고 생각한 오토는 2스트로크 엔진 제조 기업들을 상대로 법률적인 싸움을 벌였고, 독일 최고재판소는 1886년 1월30일에 혼합기 형성과 연소에 대한 오토의 특허를 정당하다고 판결내렸다.
이후 충격적인 연소는 혼합기의 성충화가 아니라 점화시기, 연료의 품질, 연소실 형상 등에 따라 결정되며 성충화에 기초한 오토의 4스트로크 원리에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4스트로크를 최초로 발명한 오토의 공로는 높이 살 만하다. 다만 그 원리는 1861년 프랑스의 보 드 로샤(Alphone Beau de Rechas, 1815~1893)에 의해 최초로 설명되었다.
한편 도이치사에서 근무하던 빌헬름 마이바하(Wilhelm Maybach, 1846~1929)도 1876년에 더욱 큰 엔진을 만들었다.
그는 엔진의 외형을 보기 좋게 다듬고 중단식 속도 제어를 와트 방식의 원심식 조속기로 바꾸는 한편 피스톤의 힘을 크랭크 샤프트로 전달하는 커넥팅 로드를 2개로 나누어 그 중간에 크로스 헤드(굴곡계수)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 엔진은 현재 독일박물관의 엔진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