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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歷史special(역사스페셜)
– 2010年(년) 探査報告(탐사보고),
東明(동명)root(루트)를 찾아서...
연개소문(淵蓋蘇文)
淵蓋蘇文(연개소문) 影幀(영정)(想像圖(상상도)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왜? Turk(투르크)에 使臣(사신)을 보냈나?
生涯(생애) ~ 594年(년) ~ 665年(년)
時代(시대) ~ 高句麗(고구려) 末期(말기)(7世紀(세기)
出生地(출생지) ~ 高句麗(고구려) 동부(東部) 순노부(順奴部)? 推定(추정)
다른 이름 ~ 개금(蓋金),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官職(관직) ~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막리지(大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
主軍(주군) ~ 영류왕(榮留王)↔보장왕(寶藏王)
父母(부모) ~ 아버지: 연태조(淵太祚), 어머니: 소씨(蘇氏)
子女(자녀) ~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親戚(친척) ~ 연정토(淵淨土, 남동생)
연개소문(淵蓋蘇文, 594年(년) ~ 665年(년) 5月(월)은 高句麗(고구려) 末期(말기) 將軍(장군)이자 政治家(정치가)다. 一名(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歷史(역사)special(스페셜)–武蔵野(무사시노)의 開拓者(개척자), 약광과 1799人(인)의 高句麗人(고구려인)
/ KBS 2010年(년).6月(월).12日(일) 放送(방송) /
中國(중국)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및 《資治通鑑(자치통감)》 等(등) 史書(사서)와, 이를 土臺(토대)로 再編輯(재편집)한 《三國史記(삼국사기)》 列傳(열전)에는 中國(중국) 唐(당)나라 高祖(고조) 이름 '연(淵)'字(자)를 避諱(피휘)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記錄(기록)하였다. 日本(일본) 史書(사서)인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이리카스미)라고도 標記(표기)해 있어, 韓國(한국)의 古代(고대) 人名(인명) 類推(유추)에 但書(단서)가 된다.
642年(년) 莫離支(막리지)의 亂(난)을 일으켜 대막리지(大莫離支)를 新設(신설)하고 淵蓋蘇文(연개소문), 연남생(淵男生), 연남건(淵男建)으로 世襲(세습)한 연씨정권(淵氏政權, 642年(년) ~ 668年(년) 26年間(년간) 武人政權(무인정권)을 세워 高句麗(고구려) 王朝(왕조)의 實權(실권)을 맡았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實際(실제)로 '얼가솜/얼가소미'라고 불렸다고 推定(추정)할 수 있다. 이는 '얼' + '가소' + 받침 미음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가소' + 접사 '이'가 結合(결합)하여 '가쇠/개쇠'로 불린 것을 蓋金(개금)으로 옮겼다고 推定(추정)한다. 淵(연)은 '얼'로 불렀다고 日本語(일본어) 標記(표기) 伊梨柯須彌(이리카스미)를 通(통)해 類推(유추)가 可能(가능)하다. 文(글월 문)은 받침 微音(미음)으로 使用(사용)했다.
1 生涯(생애)
1.1 千里長城(천리장성) 築造(축조) 責任者(책임자)
1.2 Coup d'etat(쿠데타)
1.3 寶藏王(보장왕) 擁立(옹립)
1.4 大唐(대당) 抗爭(항쟁)
1.5 末年(말년)
2 家系(가계)
3 人物(인물)
4 傳說(전설)
4.1 江華島(강화도) 傳說(전설)
4.2 中原(중원)廉探說(염탐설)
4.3 北京進出說(북경진출설)
5 參考文獻(참고문헌)
6 淵蓋蘇文(연개소문)이 登場(등장)한 作品(작품)
6.1 映畫(영화)
6.2 小說(소설)
6.3 fantasy(판타지) 小說(소설)
6.4 漫畫(만화)
7 脚注(각주)
8 參考資料(참고자료)
9 外部(외부) link(링크)
生涯(생애)
千里長城(천리장성) 築造(축조) 責任者(책임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淵太祚(연태조)의 아들로서 高句麗(고구려)
가 滅亡(멸망)할 때 唐(당)에 投降(투항)하여 唐(당)의 官職(관직)을 받은 연남생(淵男生)의 墓誌銘(묘지명)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따르면, 男生(남생)의 할아버지 卽(즉)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이름이 記錄(기록)되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高句麗(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官職(관직)을 世襲(세습)했다고 되어 있다. 《唐書(당서)》에는 莫離支(막리지)를 「唐(당)의 병부상서(兵部尙書) 兼(겸)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說明(설명)하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元典(원전)이 된 《舊唐書(구당서)》와 《新唐書(신당서)》 高麗傳(고려전)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동부대인(東部大人, 或(혹)은 서부(西部) 및 莫離支(막리지)를 지낸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자리를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品性(품성)이 좋지 않다는 理由(이유)로 사람들의 反對(반대)가 심하여, 그 自身(자신)이 直接(직접)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자리를 世襲(세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淵太祚(연태조)의 後任(후임)으로 千里長城(천리장성) 築造(축조) 責任者(책임자) 役割(역할)을 맡아 이를 契機(계기)로 長安城(장안성)의 中央政界(중앙정계)에 발 들였다.
Coup d'etat(쿠데타)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榮留王(영류왕) 14年(년)(631年(년)에 高句麗(고구려)의 西(서)쪽 國境(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을 때, 王(왕)은 淵蓋蘇文(연개소문)으로 하여금 長城(장성) 築造(축조)를 監督(감독)하도록 했다. 榮留王(영류왕)과 大臣(대신)들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性品(성품)을 두려워하던 끝에 죽이려 謀議(모의)했으나,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이것을 事前(사전)에 눈치를 채고 自身(자신)이 統率(통솔)하는 軍(군) 査閱式(사열식)에 代身(대신) 1百餘名(백여명)(《日本書紀(일본서기)》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等(등) 180餘名(여명)」)을 招待(초대)하여 모두 殺害(살해)하고, 大闕(대궐)로 쳐들어가 榮留王(영류왕)을 죽이는 Coup d'etat(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榮留王(영류왕)의 조카였던 장(臧)을 새로운 王(왕)으로 세우고 自身(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의 Coup d'etat(쿠데타)에 대해 도현신 作家(작가)는 《어메이징 韓國史(한국사)》(서해문집)에서 榮留王(영류왕)의 唐(당)나라에 대한 低姿勢(저자세) 外交(외교)에 대한 反感(반감)이 原因(원인)인 事件(사건)으로 읽는다.
唐(당)나라 使臣(사신) 陳大德(진대덕)은 隋(수)나라와의 戰爭(전쟁)에서 高句麗(고구려)가 이긴 事件(사건)을 記念(기념)하는 勝戰塔(승전탑)을 허물고, 戰死者(전사자)의 遺骨(유골)을 모아 葬禮(장례)를 치러서 民族感情(민족감정)을 刺戟(자극)하고, 高句麗軍(고구려군)에 잡힌 隋(수)나라 軍事(군사)들을 만나며 高句麗(고구려)의 失政(실정)을 照査(조사)하였음에도 抗議(항의)하거나 追放(추방)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이 象徵(상징)하는 民族主義(민족주의) 性向(성향)의 軍部(군부)에서 Coup d'etat(쿠데타)를 일으켜 榮留王(영류왕)을 弑害(시해)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寶藏王(보장왕) 擁立(옹립)
淵蓋蘇文(연개소문)이 寶藏王(보장왕)을 擁立(옹립)한 해에 新羅(신라)는 百濟(백제) 義慈王(의자왕)의 攻擊(공격)으로 大耶城(대야성)을 잃고,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에 依(의)해 당항성(唐港城)을 攻擊(공격)당했다. 新羅(신라)의 金春秋(김춘추)가 高句麗(고구려)에 百濟(백제) 攻擊(공격)을 위한 軍事(군사)를 要請(요청)하러 왔을 때 淵蓋蘇文(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로서 그를 迎接(영접)하기도 했다(《三國史記(삼국사기)》 金庾信傳(김유신전). 高句麗(고구려) 朝廷(조정)은 金春秋(김춘추)의 軍事(군사) 要請(요청)을 受諾(수락)하는 條件(조건)으로 新羅(신라)가 차지한 長壽王(장수왕) 時節(시절)의 옛 高句麗(고구려) 領土(영토) 返還(반환)을 要求(요구)했고, 이를 拒否(거부)한 金春秋(김춘추)는 高句麗(고구려)의 監獄(감옥)에 監禁(감금)되었다가 「歸國(귀국)하는 즉시 領土(영토)를 返還(반환)하겠다」는 거짓을 적은 便紙(편지)를 寶藏王(보장왕)에게 바치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大唐(대당) 抗爭(항쟁)
寶藏王(보장왕) 2年(년)(643年(년) 3月(월)에 淵蓋蘇文(연개소문)은 唐(당)의 숙달(淑達) 等(등)을 招請(초청)하고 《老子道德經(노자도덕경)》을 들여오는 等(등) 高句麗(고구려)에 道敎(도교)를 輸入(수입)하여 佛敎(불교) 勢力(세력)의 牽制(견제)를 꾀했고, 平壤(평양)에 새로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 이 무렵 唐(당)에서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일으킨 Coup d'etat(쿠데타)에 대해 '臣下(신하)로서 王(왕)을 弑害(시해)한 罪(죄)'를 물어 軍事(군사)를 일으켜 高句麗(고구려)를 칠 計劃(계획)을 模擬(모의)하고 있었지만, 唐(당) 太宗(태종)은 일단 高句麗(고구려)에 대해 友好的(우호적)인 gesture(제스처)를 取(취)하면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의 導師(도사) 派遣(파견) 要請(요청)을 受諾(수락)하는 한편 閏(윤)6月(월)에 寶藏王(보장왕)을 상국(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高麗王(고려왕)으로 冊封(책봉)해 高句麗王(고구려왕)으로서의 地位(지위) 繼承(계승)을 公認(공인)해주기도 했다. 한편 高句麗(고구려)에서 軍事(군사)를 얻는데 실패한 新羅(신라)는 9月(월)에 唐(당)에 使臣(사신)을 보내 救援(구원)을 要請(요청)했고, 唐(당)은 寶藏王(보장왕) 3年(년)(644年(년)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高句麗(고구려)에 新羅(신라) 攻擊(공격)을 中止(중지)할 것을 要求(요구)했는데, 相里玄獎(상리현장)이 高句麗(고구려)에 到着(도착)했을 때 이미 淵蓋蘇文(연개소문)은 新羅(신라)를 攻擊(공격)해 두 個(개)의 城(성)을 차지한 狀態(상태)였고(《三國史記(삼국사기)》 寶藏王(보장왕)의 命(명)으로 召喚(소환)된 그는 相里玄獎(상리현장)에게, 過去(과거) 隋(수)나라가 過去(과거) 高句麗(고구려)를 侵掠(침략)했을 때 新羅(신라)가 그 틈을 노려 빼앗아간 高句麗(고구려)의 옛 領土(영토) 5百里(백리)를 돌려줄 때까지 戰爭(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며 唐(당)의 要求(요구)를 拒絶(거절)했다.
末年(말년)
寶藏王(보장왕) 9年(년)(650年(년) 6月(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道敎(도교) 獎勵策(장려책)에 反對(반대)해오던 반룡사(盤龍寺)의 보덕(普德)이 高句麗(고구려)를 떠나 百濟(백제)의 완산(完山) 땅의 고대산(孤大山)으로 亡命(망명)하였다.
寶藏王(보장왕) 13年(년)(654年(년) 겨울 10月(월)에 高句麗(고구려)에서는 안고(安固)를 보내 靺鞨(말갈) 軍事(군사)와 合勢(합세)하여 唐(당)의 操縱(조종)을 받던 契丹(거란)을 攻擊(공격)했으나 敗(패)하고, 14年(년)(655年(년) 2月(월)부터 唐(당) 고종(高宗)은 新羅(신라) 金春秋(김춘추)의 救援(구원) 要請(요청)을 받아들인다는 名分(명분)으로, 寧州(영주)都督(도독) 정명진(程名振)과 左衛(좌위)中郎將(중랑장) 蘇定方(소정방)을 보내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하여 귀단수(貴端水)에서 高句麗軍(고구려군) 1千名(천명)을 相對(상대)로 交戰(교전)을 벌였고, 17年(년)(658年(년) 여름 6月(월)에 唐(당)의 寧州(영주)都督(도독) 兼(겸) 동이도호(東夷都護) 程名振(정명진)과 右令軍中郎將(우령군중랑장) 薛仁貴(설인귀)가 다시 高句麗(고구려)를 攻擊(공격)했다.
寶藏王(보장왕) 19年(년)(660年(년) 7月(월)에 新羅(신라)와 唐(당)의 聯合軍(연합군)이 百濟(백제)를 攻擊(공격)해 滅亡(멸망)시켰고, 高句麗(고구려)에서는 10月(월)에 新羅(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攻擊(공격)하였으나 敗(패)하였다. 唐(당)은 11月(월)부터 이듬해 1月(월)까지 左驍衛(좌효위)大將軍(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과 左武衛(좌무위)大將軍(대장군) 蘇定方(소정방), 左驍衛(좌효위)將軍(장군) 유백영(劉伯英), 포주자사(蒲州刺史) 程名振(정명진) 그리고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보내 高句麗(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며, 가을 8月(월)에는 平壤(평양) 方面(방면)으로 進軍(진군)한 蘇定方(소정방)이 高句麗軍(고구려군)을 浿江(패강)에서 擊破(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首都(수도) 平壤(평양) 附近(부근)까지 接近(접근)하기도 했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9月(월),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鴨綠江(압록강)에 보내어 遼東(요동) 方面(방면)의 攻擊(공격)을 맡고 있던 契苾何力(글필하력)의 軍隊(군대)를 막게 했지만, 契苾何力(글필하력)은 얼어붙은 鴨綠江(압록강) 위를 걸어 高句麗軍(고구려군)을 攻擊(공격)해 3萬名(만명)의 高句麗軍(고구려군)이 戰死(전사)하고 연남생(淵男生)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는 等(등)의 慘敗(참패)를 겪었다. 하지만 契苾何力(글필하력)은 直後(직후) 鐵勒族(철륵족) 이 일으킨 叛亂(반란)으로, 扶餘(부여) 方面(방면)에서의 高句麗(고구려) 攻擊(공격)을 맡았던 蕭嗣業(소사업)과 함께 鐵勒(철륵) 鎭壓(진압)에 投入(투입)된다.
이때의 戰鬪(전투)에 관해 日本側(일본측) 資料(자료)인 《日本書紀(일본서기)》 間メイ(사이메이)天皇(천황) 7年(년)(661年(년) 12月(월)의 記錄(기록)에, 高句麗軍(고구려군)이 唐軍(당군)의 侵攻(침공)을 擊退(격퇴)하여 唐軍(당군)의 堡壘(보루)를 빼앗고, 두 곳만 남겨둔 채 밤에 夜襲(야습)할 計劃(계획)을 세웠지만 唐軍(당군) 兵士(병사)들이 웅크려 우는 소리에 마음이 弱(약)해져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다는 高句麗側(고구려측)의 證言(증언)이 記錄(기록)되어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김인문(金仁問)列傳(열전)에도 浿江(패강)에서 高句麗軍(고구려군)을 擊破(격파)하고 平壤(평양)을 包圍(포위)한 蘇定方(소정방)의 唐軍(당군)이 高句麗(고구려)의 攻擊(공격)으로 "軍士(군사)와 말이 많이 죽거나 다쳤으며 軍糧(군량)을 調達(조달)받을 길도 끊어졌다(士馬多死傷, 糧道不繼)"는 記錄(기록)을 남기고 있다(金仁問(김인문)은 蘇定方(소정방)이 百濟(백제)를 칠 때 唐軍(당군)에 있었고 그가 唐(당)으로 돌아갈 때에도 同行(동행)했으며, 661年(년)에 新羅(신라)로 歸國(귀국)하여 金庾信(김유신)이 蘇定方(소정방)에게 軍糧(군량)을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同行(동행).
寶藏王(보장왕) 22年(년)(662年(년) 봄 2月(월)《三國史記(삼국사기)》는 正月(정월), 沃沮(옥저) 方面(방면)의 高句麗(고구려) 攻擊(공격)을 맡았던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백주자사(白州刺史)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江(강)가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의 軍隊(군대)에 包圍(포위)되어, 10萬名(만명)에 달하는 全軍(전군)이 沒殺(몰살)당하고 龐孝泰(방효태) 自身(자신)도 13名(명)의 아들과 함께 戰死(전사)하였다(蛇水戰鬪(사수전투). 平壤(평양)을 包圍(포위)했던 蘇定方(소정방)도 2月(월) 6日(일)에 新羅(신라)의 金庾信(김유신)이 이끄는 新羅軍(신라군)이 輸送(수송)해준 軍糧(군량)을 받고 暴雪(폭설)을 理由(이유)로 곧장 撤收(철수)하였으며, 唐(당)의 高句麗(고구려) 攻擊(공격)은 失敗(실패)로 끝났다.(高句麗(고구려)-唐(당) 戰爭參照(전쟁참조)
以後(이후) 淵蓋蘇文(연개소문)은 665年(년)에 死亡(사망)하였다.
家系(가계)
現存(현존)하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記錄(기록)인 《三國史記(삼국사기)》 泉蓋蘇文(천개소문)(淵蓋蘇文(연개소문) 列傳(열전)은 모두 《唐書(당서)》의 內容(내용)을 編輯(편집)한 것으로, 中國(중국) 側(측)에 依(의)해 變造(변조)되거나 歪曲(왜곡)된 部分(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姓氏(성씨)는 原來(원래) 연(淵)이지만 《舊唐書(구당서)》와 《新唐書(신당서)》가 唐(당) 高祖(고조)의 諱(휘)를 避(피)해서 천(泉)으로 그의 性(성)을 標記(표기)한 以後(이후)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아들과 孫子(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後孫(후손)이 천(泉)씨로 標記(표기)된 바 있다. 18世紀(세기) 朝鮮(조선)의 史學者(사학자) 安鼎福(안정복)은 著書(저서) 《東史綱目(동사강목)》 高夷編(고이편)에서 《三國史記(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高句麗(고구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내항(來降)하였다."고 한 記錄(기록)과 《통고(通攷)》에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고 한 점을 들어 「泉蓋蘇文(천개소문)」이 아닌 「淵蓋蘇文(연개소문)」이며, 中國人(중국인)들이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標記(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唐(당) 高祖(고조) 이연(李淵)의 諱(휘)를 避(피)하여 천(泉)자로 썼음을 밝혔다. 《三國史記(삼국사기)》 列傳(열전)에서는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며 사람들을 眩惑(현혹)시켰다(自云生水中以惑衆)"고 하였는데, 이것은 『泉男生墓誌銘(천남생묘지명)』에서 "멀리 系譜(계보)를 살펴보면 本來(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神(신)께 依支(의지)해 福(복)을 받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族屬(족속)의 이름을 붙였다(遠系出於泉, 旣托神以隤祉, 遂因生以命族)"고 讚美調(찬미조)로 적고 있는 것과는 對照的(대조적)이다.
『泉男生墓誌銘(천남생묘지명)』과 『泉男産墓誌銘(천남산묘지명)』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로 모두 高句麗(고구려)에서 莫離支(막리지)를 歷任(역임)하였으며, 墓誌銘(묘지명)은 그들의 任務(임무)를 中國(중국) 歷史(역사)의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에 빗대어 讚美(찬미)하고 있다. 兄弟(형제)로 이름이 確認(확인)된 것은 연정토(淵淨土)가 有一(유일)하며, 民間(민간)傳說(전설)에서 淵蓋蘇貞:延蓋蘇貞(연개소정)이라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女同生(여동생)이라는 人物(인물)이 지켰다는 청석관(靑石關) 遺跡(유적)이 中國(중국)의 遼寜省(요령성) : 盖州市(개주시)에 남아있다. 中國(중국)의 《唐書(당서)》와 韓國(한국)의 《三國史記(삼국사기)》는 淵蓋蘇文(연개소문)에게 연남생(淵男生)과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傳(전)하며, 淵蓋蘇文(연개소문) 死後(사후) 兄弟(형제)間(간)의 骨肉相爭(골육상쟁)으로 연남생(淵男生)은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에게 쫓겨 國內城(국내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唐(당)으로 도망쳐 高句麗(고구려) 攻擊(공격)에 앞장서는 等(등), 高句麗(고구려)는 滅亡(멸망)의 길을 걸었다. 高句麗(고구려)에 남아있던 연남산(淵男産)은 寶藏王(보장왕) 27年(년)(668年(년) 高句麗(고구려)의 首都(수도) 平壤城(평양성)이 陷落(함락)될 때 寶藏王(보장왕)과 함께 降伏(항복)했으며, 연남건(淵男建)은 平壤城(평양성)을 死守(사수)하다가 部下(부하)에게 背信(배신)당하여 城(성)을 빼앗기고, 羅唐(나당) 聯合軍(연합군)에게 붙잡혀 검주(黔州)로 流配(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연남생(淵男生)은 高句麗(고구려) 滅亡(멸망) 뒤 唐(당)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변국공(卞國公)을 除授(제수)받았고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현도군공(玄菟郡公)의 地位(지위)에 이르렀으며 의봉(儀鳳) 2年(년) 677年(년) 12月(월)에 46歲(세)로 卒(졸)하였다. 연남산(淵男産)은 사재소경(司宰少卿)의 벼슬을 받았으며 701年(년)에 죽었다.
연자유(淵子遊)~연태조(淵太祚)
연개소문(淵蓋蘇文) 연정토(淵淨土)
연남생(淵男生)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
연헌충(淵獻忠) 연헌성(淵獻誠)
연현은(淵玄隱) 연현일(淵玄逸) 연현정(淵玄靜)
연비(淵毖)
人物(인물)
傳統的(전통적)으로 淵蓋蘇文(연개소문)에 대한 評價(평가)는 '王(왕)을 죽이고 專橫(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기울게 한 역신(逆臣)'이라는 否定的(부정적)인 評價(평가)가 大部分(대부분)이었다. 高句麗(고구려)와 敵對(적대)했으며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시킨 當事者(당사자)인 中國(중국)에 依(의)해 記錄(기록)된 淵蓋蘇文(연개소문) 關聯(관련) 記錄(기록)은 淵蓋蘇文(연개소문)에 대해서 殘忍(잔인)하고 倨慢(거만)하며 胸幅(흉폭)했다는 單語(단어)를 써가며 淵蓋蘇文(연개소문)의 否定的(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儒敎的(유교적) 立場(입장)에서 敍述(서술)된 《唐書(당서)》와 그것을 全載(전재)한 《三國史記(삼국사기)》의 泉蓋蘇文(천개소문)전은 그가 "百餘名(백여명)에 달하는 大臣(대신)들을 죽이고, 大闕(대궐)로 쳐들어가 王(왕)을 弑害(시해)하고 그 屍體(시체)를 토막내어 시궁창에 버렸다", "貴族(귀족)이나 武官(무관)을 엎드리게 한 後(후) 말을 오르내렸다"는 等(등) 그의 驕慢(교만)하고 亂暴(난폭)한 모습들을 記述(기술)하였고, "바른 道理(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였고, 殘忍(잔인)하고 暴惡(포악)하여 스스로 아무 거리낌없이 行動(행동)하면서 大逆罪(대역죄)를 짓기에 이르렀다", "王(왕)을 弑害(시해)한 逆賊(역적)으로서 몸을 保全(보전)해 집에서 죽은 것은 運(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고 批判(비판)하였다.
하지만 同時(동시)에 "생김새는 熊衛(웅위)하였고 意氣(의기)가 豪放(호방)하였다(儀表雄偉意氣豪逸)"고 傳(전)하는 한편으로 宋(송)의 신종(神宗)과 王介甫(왕개보)의 問答(문답) 가운데 太宗(태종)이 高句麗(고구려)를 征伐(정벌)하지 못한 理由(이유)를 묻는 神宗(신종)에게 “蓋蘇文(개소문)이 非常(비상)한 人物(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對答(대답)한 王安石(왕안석)의 發言(발언)을 들어 淵蓋蘇文(연개소문)을 재사(才士)였다고 評價(평가)하기도 한다(다만 朝鮮(조선) 初(초)의 최보(崔保)는 《東國通鑑(동국통감)》에서 이러한 王介甫(왕개보)와 金富軾(김부식)의 議論(의론)에 대해서 "춘추(春秋)의 大意(대의)를 모른 말"이라며 批判(비판)하였다. 日本(일본)側(측) 資料(자료)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는 661年(년) 百濟(백제) 復興(부흥) 運動(운동)을 指揮(지휘)하던 나카노오에(中大兄)의 입을 通(통)해 「傳(전)해 들으니 대당(大唐)에는 魏徵(위징), 高麗(고려)(高句麗(고구려)에는 開襟(개금)(淵蓋蘇文(연개소문), 百濟(백제)에는 선중(善仲, 成忠(성충), 新羅(신라)에는 유순(有淳, 金庾信(김유신)이 있어, 各其(각기) 그 나라를 맡아 이름을 萬里(만리)까지 떨쳤으니 이는 모두가 그 땅의 준걸(俊傑)로서 智略(지략)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한다.」고 말하는 記述(기술)이 있어(이것은 물론 《藤氏家傳(도지 가전)》의 主人公(주인공)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 鎌足)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일본어: 藤原 鎌足, 614年(년) ~ 669年(년) 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 鎌足)는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重臣(중신)이자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先祖(선조)이다. 原來(원래)의 이름은 나카토미노 가마코(中臣 鎌子)였으나, 나중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 鎌足)로 改名(개명)하였다. 죽기 1年前(년전) 덴지 천황(天智天皇)으로부터 대직관(大織冠) 官位(관위)와 함께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이라는 呼稱(호칭)을 下賜(하사)받은 後(후)에는 「후지와라 씨의 始祖(시조)」로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 鎌足)로 불렸다. 字(자)는 주로(仲郞)이다.]를 讚揚(찬양)하기 위한 수식의 하나이다), 《도지 가전》이 성립된 나라 시대까지 日本內(일본내)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百濟(백제)의 선중(성충)이나 新羅(신라)의 유돈(金庾信(김유신)은 물론, 中國(중국)뿐 아니라 韓國(한국)과 日本(일본)에까지 「명신(名臣)」으로 알려진 위징에까지 比肩(비견)될 정도의 「俊傑(준걸)」로서 認識(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談山神社단잔신사)에 모셔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日本語(일본어): 藤原 鎌足)의 像(상)
《三國遺事(삼국유사)》는 그가 原來(원래) 隋(수)나라의 비장이었던 양명(羊明)이라는 者(자)의 還生(환생)으로, 《고려고기(高麗古記)》라는 冊(책)을 引用(인용)하여, 수(隋)가 高句麗(고구려)를 칠 때 群衆(군중)에서 죽었던 양명이 죽기 前(전)에 "高句麗(고구려)의 총신(寵臣)으로 還生(환생)하여 반드시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시키겠다"고 盟誓(맹세)하고 죽었고, 盟誓(맹세)한 대로 還生(환생)한 것이 바로 淵蓋蘇文(연개소문)으로, 唐(당)에서 도사들을 끌어들여 高句麗(고구려) 山川(산천)의 支脈(지맥)을 弱化(약화)시키고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개조하면서 千里長城(천리장성)과 같은 負役(부역)을 일으켜 高句麗(고구려)의 國力(국력)을 弱化(약화)시키고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逸話(일화)를 적고 있는데, 淵蓋蘇文(연개소문)이 政策的(정책적)으로 道敎(도교)를 受容(수용)하면서 佛敎(불교)를 相對的(상대적)으로 멀리한 것에 대한 佛敎(불교) 勢力(세력)의 歪曲(왜곡)으로 여겨진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傾向(경향)은 變(변)하지 않았고, 드물게 "安市城(안시성) 하나로 天下(천하)의 大兵(대병)에 맞서낸"(홍식洪湜), "敵數(적수)가 없는 효웅"(홍서봉)等(등)의 評價(평가)가 있을 뿐이었다. 儒敎思想(유교사상)의 支配(지배)를 받던 朝鮮時代(조선시대)까지 王(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人物(인물)로 評價(평가)받던 淵蓋蘇文(연개소문)의 評價(평가)가 전혀 다른 角度(각도)에서 再(재)解釋(해석)된 것은 民族(민족)의 自主精神(자주정신)이 要求(요구)되던 20世紀(세기)였다.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자 史學者(사학자)였던 丹齋(단재) 신채호(申采浩)는 《朝鮮相古史(조선상고사)》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을 偉大(위대)한 革命家(혁명가)로 評價(평가)했고, 박은식(朴殷植)은 〈泉蓋蘇文(천개소문)전〉에서 獨立(독립)自主義(자주의) 精神(정신)과 對外競爭(대외경쟁)의 膽略(담략)을 지닌 우리 歷史上(역사상) 一人者(일인자)로 評價(평가)했다.
각주(脚註) :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시킨 唐(당)나라와 新羅(신라){例(예) : 三國史記(삼국사기)(金庾信(김유신)을 推仰(추앙)하는 金富軾(김부식)의 著述(저술) 等(등)} 위주의 歷史的(역사적)인 記錄(기록) 中(중)에서, 특히 高句麗(고구려)의 ‘淵蓋蘇文(연개소문)’ 關聯(관련)記錄(기록) 等(등)은 全面的(전면적)으로 信賴性(신뢰성)이 상당히 높다고 보기 어려우며, ‘淵蓋蘇文(연개소문)’이라는 이름자에 ‘蓋(개)’라는 標記(표기)를 使用(사용)하는 等(등) 該當(해당) 人物(인물)에 대한 否定的(부정적)인 image(이미지)가 極大化(극대화)되어 後代(후대)에 傳(전)해지는 것이 顯著(현저)하므로, ‘연수영’의 오라버니인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이름자에서 辱說(욕설)을 상당히 느끼게 하는 '개' 글자를 뺀 ‘淵蘇文(연소문)’으로 標記(표기)되어 後代(후대)에 傳(전)해지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思料(사료)됨. - 허원 송연식, 2020年(년). 03月(월). 01日(일).
傳說(전설)~江華島(강화도) 傳說(전설)
韓國(한국)의 《강도지(江都誌)》(1932年(년)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江華島(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傳乘(전승)을 收錄(수록)하고 있다. 이 冊(책)은 16世紀(세기)부터 19世紀(세기)까지 著述(저술)된 江華島(강화도) 관련 鄕土誌(향토지) 6種(종)을 모아 發刊(발간)한 것인데, 江華島(강화도)의 高麗山(고려산) 北(북)쪽에 위치한 시루미산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이 태어났으며 시루봉 중턱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살던 집터가 있었고,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말을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오련정(五蓮井) 等(등)의 地名(지명)에 대한 傳乘(전승)이 《江都誌(강도지)》에는 收錄(수록)되어 傳(전)한다. 1993年(년)에 《江都誌(강도지)》의 內容(내용)에 根據(근거)하여 하점면 支石墓(지석묘) 앞의 고인돌 公園(공원)에 『高句麗(고구려) 大莫離支(대막리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遺蹟地(유적지)』라고 새긴 碑石(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現在(현재)까지 該當(해당) 地域(지역)에 대한 具體的(구체적)인 照査(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狀態(상태)이다.
중원염탐설
당의 전기소설 가운데 하나인 《규염객전(虯髥客傳)》은 저자가 장설(張說) 혹은 두광정(杜光庭)이라는 설이 있는데, 당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당 태종의 군사 고문이자 《이위공문대》의 저자로도 알려진 이정(李靖)과 홍불녀(紅拂女) 그리고 규염객(虯髥客)이라는 사내,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품은 《도장(道藏)》 공자(恭字)의 〈신선감우록(神仙感遇傳)〉과 송의 《태평광기(太平廣記)》권193, 명의 고원정(顧元慶)의 《고씨문방소설(顧氏文房小說)》, 루쉰(魯迅)의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에 각각 收錄(수록)되어 있다. 全國(전국) 各地(각지)에 번진 勢力(세력)이 割據(할거)하고 全國(전국) 各地(각지)에서 戰亂(전란)이 頻煩(빈번)했던 만당(晩唐)의 時代狀況(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이 作品(작품)은 널리 퍼지는 過程(과정)에서 部分的(부분적)으로 增補(증보) 내지 潤色(윤색)되었을 것으로 推定(추정)되는데, 明(명)의 雜劇(잡극) 《규염옹(虯髥翁)》과 장봉익(張鳳翼)의 傳記(전기)小說(소설) 《홍불기(紅拂記)》 等(등)의 原作(원작)이 되었으며 中國(중국)의 小說家(소설가) 金庸(김용)은 《虯髯客傳(규염객전)》을 '武俠(무협)의 元型(원형)’이라고 評價(평가)하였다.
《虯髯客傳(규염객전)》의 內容(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隋(수) 末葉(말엽) 장중견(張仲堅)이라는 사람의 수염이 규룡(虯龍)을 닮았다 해서 虯髯客(규염객)이라 불렸는데, 雄大(웅대)한 재주와 智略(지략)이 있었던 그는 隋(수) 末期(말기)의 昏亂(혼란)한 時代(시대)에 天下(천하)를 掌握(장악)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홍불이란 妓生(기생)을 이끌고 영석(靈石) 地方(지방)을 지나던 이정(理貞)과 만나, 이정(理貞)과 함께 태원(太原)에 갔다가 훗날 唐(당) 太宗(태종)으로 卽位(즉위)하게 되는 李世民(이세민)을 만나게 되고, 그가 영주(英主)가 될 것을 알고는 天下(천하)를 차지할 計劃(계획)을 斷念(단념)하고 代身(대신) 自己(자기)의 집과 財産(재산)을 이정(理貞)에게 주면서, “앞으로 10年(년) 뒤에 東南(동남)쪽 數千里(수천리) 밖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것이니, 그때가 바로 내가 뜻을 이루는 때일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뒤 정관(貞觀) 年間(연간)에 扶餘(부여) 땅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나라의 王(왕)을 죽이고 自立(자립)하여 王(왕)이 되었고 나라를 安定(안정)시켰다는 消息(소식)을 듣게 된 이정(理貞)은 그 사람이 다름아닌 虯髯客(규염객)을 알고, 紅拂(홍불)과 함께 東南(동남)쪽을 向(향)하여 술을 뿌리며 祝賀(축하)하였다. 사람들은 이정(理貞)이 지은 《李衛公問對(이위공문대)》 속의 兵法(병법)은 大部分(대부분) 虯髯客(규염객)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傳(전)했다고 한다.
18世紀(세기) 朝鮮(조선)의 實學者(실학자)였던 이덕무(李德懋)와 홍대용(洪大容)은 小說(소설) 《虯髯客傳(규염객전)》 속의 登場人物(등장인물) 虯髯客(규염객)은 바로 淵蓋蘇文(연개소문)이라고 指摘(지적)하였는데, 20世紀(세기) 初(초) 丹齋(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이 《虯髯客傳(규염객전)》과 함께 《갓쉰동전》이라는 只今(지금)은 傳(전)해지지 않는 韓國(한국)의 고소설(古小說)을 서로 分析(분석)하여, 虯髯(규염)과 갓쉰동은 마찬가지로 淵蓋蘇文(연개소문)이라는 人物(인물)을 motive(모티브)로 한 것이고,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젊어서 中國(중국) 大陸(대륙)을 廉探(염탐)했던 痕迹(흔적)이라고 主張(주장)하였다. 《갓쉰동전》의 主人公(주인공)인 '갓쉰동'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蓋蘇文)'을 中國(중국) 發音(발음)으로 '카이쑤원'이라고 읽는 것을 거꾸로 韓國語(한국어)로 陰事(음사)하여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은 것으로 《갓쉰동전》은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小說(소설)이라는 것이 丹齋(단재)의 主張(주장)이다. 《갓쉰동전》의 存在(존재)는 現在(현재)까지 그 實體(실체)가 確認(확인)되지 않고 있다.
北京進出說(북경진출설)
丹齋(단재) 신채호(申采浩)에 따르면, 只今(지금)의 中國(중국) 베이징(北京)의 朝陽門(조양문) 바깥 7里(리) 地域(지역)을 비롯해 산하이관(山海關)부터 베이징(北京)까지 '황량대(謊糧臺)'라는 이름의 遺跡(유적)이 10여 곳이 남아 있는데, 現地(현지)에서는 唐(당) 太宗(태종)이 高句麗軍(고구려군)의 來襲(내습)에 對備(대비)해 모래를 잔뜩 쌓아 軍糧(군량)倉庫(창고)처럼 보이게 해놓고 高句麗軍(고구려군)이 오면 攻擊(공격)하던 곳이라는 傳說(전설)을 傳(전)하고 있다. 이 謊糧臺(황량대)가 베이징(北京) 近郊(근교)까지 걸쳐 있는 것은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베이징(北京)까지 唐(당) 太宗(태종)을 追擊(추격)한 證據(증거)라고 丹齋(단재) 신채호(申采浩)는 主張(주장)하였다. 또한 遼東(요동) 地域(지역)을 벗어나 山東(산동)이나 直隸(직예) 等地(등지)에 '高麗(고려)'라는 地名(지명)이 남아있으며, 베이징(北京) 정안문 바깥에 위치한 '고려영(高麗營)'이라고도 불리는 '고려진(高麗鎭)', 河北省(하북성) 河間縣(하간현) 西北(서북)쪽 '고려성(高麗城)' 等(등)의 地域(지역)을 丹齋(단재) 신채호(申采浩)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占領(점령)했던 地域(지역)이라고 主張(주장)하였다. 이들 '高麗陣(고려진)'과 '高麗營(고려영)'이라는 行政區域名(행정구역명)은 오늘날까지 베이징(北京) 北部(북부) 地域(지역)에 남아있다.
參考文獻(참고문헌)
金用萬(김용만) 《새로 쓰는 淵蓋蘇文傳(연개소문전)》 바다出版社(출판사), 2003年(년)
淵蓋蘇文(연개소문)이 登場(등장)한 作品(작품)
《三國記(삼국기)》(KBS, 1992年(년)~1993年(년), 俳優(배우)趙卿煥:조경환)
《淵蓋蘇文(연개소문)》(SBS, 2006年(년)~2007年(년), 俳優(배우):유동근, 이태곤, 은원재)
《大祚榮(대조영)》(KBS, 2006年(년)~2007年(년), 俳優(배우):김진태)
《階伯(계백)》(MBC, 2011年(년)~2011年(년), 俳優(배우):고인범)
《大王(대왕)의 꿈》(KBS, 2012年(년)~2013年(년), 俳優(배우):최동준)
《칼과 꽃》(KBS, 2013年(년), 俳優(배우):최민수)
《韓國史記(한국사기)》(KBS, 2017年(년)~2017年(년), 俳優(배우):구중림)
映畫(영화)
《黃山伐(황산벌)》(2003年(년) , 俳優(배우) : 이원종)
《平壤城(평양성)》(2011年(년) , 俳優(배우) : 이원종)
《安市城(안시성)》(2017年(년) , 俳優(배우) : 유오성)
小說(소설)
김성한 「요하(遼河)」 東亞日報(동아일보), 1968年(년)
강무학 「淵蓋蘇文(연개소문)」(全(전)2券(권) 文藝(문예)春秋史(사)(춘추사), 1984年(년)
유현종 「淵蓋蘇文(연개소문)」(全(전)7券(권)) 杏林(행림)出版社(출판사), 1986年(년)~1992年(년)
최인호 「잃어버린 王國(왕국)」(全(전)5券(권)) 우석出版社(출판사), 1986年(년)
이남교 「삼국기」(全(전)2券(권) 高麗院(고려원), 1992年(년)
김정산 「三國(삼국)의 魂(혼)」(全(전)4券(권) 고도컨설팅그룹출판부, 1998年(년)
김정산 「三韓誌(삼한지)」(全(전)10券(권)) 中央(중앙)M&B, 2003年(년)~2004年(년)
김태영 「한단고기」(上下卷(상하권)) 儒林(유림), 2003年(년)
박혁문 「淵蓋蘇文(연개소문)」(全(전)6券(권)) 중명, 2003年(년)~2006年(년)
이언호 「淵蓋蘇文(연개소문)」 큰방, 2003年(년)
김종철 「千年戰爭(천년전쟁)」(全(전)2券(권)) 삶과꿈, 2004年(년)
정수인 「高句麗(고구려)」(全(전)7券(권) 새움, 2005年(년)
김영진 「淵蓋蘇文(연개소문)」 신성문화사, 2006年(년)
명건영 「安市城(안시성)」 한솜미디어, 2006年(년)
임동주 「우리나라 三國志(삼국지)」(第(제)9券(권) '淵蓋蘇文(연개소문)' 마야, 2006年(년)
정지아 「高句麗(고구려) 국선랑 을지소」(全(전)2券(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年(년)
황원갑 「연수영」 바움, 2010年(년)
배상열 「高句麗(고구려)의 섬」(上下卷(상하권) 황금책방, 2012年(년)
판타지소설
오수영 「帝國(제국)의 꿈」(全(전)2券(권) 반디출판사, 2004年(년)
여설하 「아, 高句麗(고구려)」 리얼판타, 2004年(년)
태제 「ReBirth(리버스) 淵蓋蘇文(연개소문)」(全(전)8券(권) 소드북(랜덤하우스중앙), 2006年(년)
서림 「칼텐버그의 영주」(全(전)4券(권) 마루&마야, 2012年(년)
漫畫(만화)
박성우 「천랑열전」(全(전)13券(권) 서울문화사, 1997年(년)
'갓쉰동' 淵蓋蘇文(연개소문)은 奴婢(노비)였다?!
천일 야화[千一夜사:아라비아 地方(지방)의 民話(민화)를 中心(중심)으로, Persia(페르시아), 印度(인도), Iran(이란), Egypt(이집트) 等地(등지)의 說話(설화)가 添加(첨가)되어 이루어진 作者(작자) 未詳(미상)의 說話輯(설화집)] 천일야사와 함께 보고 듣는 재미있는 歷史(역사) 이야기.
淵蓋蘇文(연개소문)은 靑年(청년) 時節(시절)
'갓쉰동'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집에서 奴婢(노비)로 살았었다.
갓쉰동은 奴婢(노비)임에도 불구하고
冊(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영리했으며 힘도 셌다.
주인집 딸 유영희는 이런 갓쉰동의 비범함을
보고 마음에 두었지만 갓쉰동은 身分(신분)의 限界(한계)로
마음을 表現(표현)할 수 없었다.
갓쉰동은 自身(자신)의 父母(부모)를
궁금해 했지만 自身(자신)이 便紙(편지)와 함께
버려졌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淵蓋蘇文(연개소문) 집안의
下人(하인)이었던 者(자)가 찾아와 眞實(진실)을 얘기해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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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宰相(재상)의 아들이었다.
일곱 살 때 原因(원인) 모를 病(병)에 걸렸고
有名(유명)한 高僧(고승)은 아이를 버려야 살 수 있다고 말해 버려진 것이다.
出生(출생)의 秘密(비밀)을 알고
彷徨(방황)하게 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유영희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가 罪責感(죄책감)에 집을 떠나게 된다.
아가씨가 危險(위험)하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온 갓쉰동은 忿怒(분노)에 휩싸여 殺人(살인)을 저지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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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희는 갓쉰동이 잡힐 것을 憂慮(우려)하여 멀리 떠나보냈다.
집을 떠나게 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隋(수)나라로 가서 情勢(정세)를 살폈고
高句麗(고구려)로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의 職位(직위)를 世襲(세습)한다.
淵蓋蘇文(연개소문)과 유영희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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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芳秀(양방수) 淵蓋蘇文(연개소문)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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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화 2021-03-30 오후 6:06 ~ 참 좋은 자료 잘 봣습니다. 언제나 참으로 대단한 일을 창조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