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구절초
20160522전라도닷컴[한송주 길따라 인연따라] 나주반 장인 김춘식
개다리소반에서 밥상머리교육 하시라
‘개다리소반’이라고 아실까. 얼핏 듣기에 좀 상스러운 품자가 떠오르지만 실인즉 전혀 천격이 아니라네. 커녕은 아주 우아하고 단정한 귀물이라오.
소반(小盤)은 작은 밥상을 말하고 개다리는 상다리 모양이 개의 다리처럼 휘었다해서 붙인 이름이다. 여럿이 둘러 앉아 먹는 두리반이나 잔치 벌일 때 쓰는 교자상이 아니면 여느 식사 자리는 혼자나 둘이서 쓰는 소반이다.
밥상이 상전이라 했듯 밥상은 우리네 살림의 으뜸 물목이었다. 밥상은 재질이 단단하고 가볍고 청결해야 했다. 그래서 밥상을 만드는 장인은 목장 중에서도 각별한 우대를 받았다.
소반장(小盤匠)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해 떠받들고 있다. 그 인간문화재가 나주반(羅州盤) 장인 김춘식선생(80)이다.
김 문화재는 만나자마자 “개다리소반에서 밥상머리 교육 좀 하라고들 허씨요” 하고 일할부터 가했다.
“책상보다 밥상이 더 중한 거여. 전에는 밥상머리에서 아이에게 예절 법도를 가르쳤어. 소반에서 어른과 함께 밥을 먹음서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마음공부를 헐 수 있었던 거쟤. 겸상은 부자 간에는 못해도 조손간에는 했던 거 알아? 왜 그랬냐, 아버지는 지 새끼라 감정이 앞서가 조단조단 이치를 못 가르쳐도 할아버지는 잘 참으면서 하나 하나 귀여운 손자에게 도리를 일깨워 줄 수 있었을 거 아녀. 그렁께 교육을 제대로 세울라면 당장 밥상부터 우리네 소반으로 바꾸고 텔레비전 끄고 밥상머리 대화부터 살려내야 써.”
아들과 함께 부창자수(父唱子隨)..맥 끊긴 나주반 복원
전남 나주시 죽림길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맞은 편에 있는 나주반 전수교육관. 이곳이 김춘식선생 부자가 함께 땀흘리고 숨결을 섞으며 나주밥상을 만드는 공방이다. 나주반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로 승격되고 그 기능보유자로 김춘식장인이 뽑히면서 2014년 이 시설이 마련됐다. 전수교육관에는 나주반 전시실과 공방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초중고학생 30-40명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나주반 제작을 가르치기도 한다.
김선생은 4남 1녀 중 막내아들인 영민씨(47)를 제자로 두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전공을 살리지 않고 가업을 잇는다고 하자 마음 한 켠 대견하면서도 정색을 하고 말렸다. 공부한 게 아깝고 또 목일의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도 않아서였다. 그러나 끝내 아들은 뚝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2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지금은 스승에게서 가끔 칭찬을 듣는 장인으로 성장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조교라는 어엿한 직함도 달고 있다. 나주반장 부자는 지금 행복하다.
“자식에게 궂은 일 시키기 싫어 어려운 형편에 대학을 보냈는디 애써 배운 전자공학을 때려치우고 대학원 산업공예과를 다니면서 목일 연장을 잡는다고 하니 애비된 도리로 좀 맘이 짭디다. 그런디 나도 30년 공들여 포도시 복원한 나주반 기술을 이어줄 내림이 마땅치 않아 상심이 컸던 것도 사실이고...어쨌건 직심있게 달려드는 걸 보고 좀 호되게 일을 가르쳤지요. 그런데 그작저작 따라 오더라고. 게다가 나름 지 재주대로 독창기미를 보여 선인들에게 큰 부끄럼은 면했는갑다 해, 허허.”
사부(師父)의 추임에 화답하는 제자(弟子).
“상일을 할 때 기교가 요구되는 섬세한 부분은 지금도 아버지가 직접 짜십니다. 저야 큰 틀이나 짜고 마무리 칠이나 하는 정도지요. 제 나름 재주를 부려보려고 하지만 아버님의 날렵하면서도 탁월한 조형감각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해요.”
헌 상 고쳐주면서 나주반 원형 찾아
그가 처음부터 전통 나주반을 전수한 건 아니었다. 장터에서 흔한 막상을 만들고 수리하는 목수였을 뿐이다. 나주 빈농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55년부터 집안 형 밑에서 목일을 배웠다.
“삼종형 김락연 목수가 상 만들면 먹고살 만 하다며 연장주머니를 안기데요. 그때가 열아홉살 때였으니 목일 배우기로는 이른 나이가 아니었지요. 공방을 차리고 막상인 장돌뱅이상을 만들어 팔면서 데리고 있던 장인들에게서 상일을 배웠어요.”
그러다가 20대 중반 우연하게 전통 나주반과의 인연이 트였다.
“어느 날 서울 손님이 공방에 찾아와 용각이 장식된 제상(祭床)을 주문합디다. 오래 전에 나주에서 특별 제작한 제상인데 당숙된 이가 그 제상을 가져가버려 다시 맞추어야 겠다며 선금까지 맡기데요. 그런데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그런 제상이나 장인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결국 서울 손님의 청을 못 들어주고 말았지. 그래서 아하 나주에서 제작되었던 그런 훌륭한 상을 찾아내고 그 기술을 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만.”
필생의 소명이 주어진 셈이었다. 그와 함께 소명을 실현할 방책도 떠올라 주었다. 헌 상 고치는 일이 그것이었다. 그래야 명맥이 끊겨가는 전통 나주반을 접할 수 있고 그걸 만든 장인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날부터 막상을 만들어 파는 일과는 별도로 헌 상을 수리하는 일을 겸했다. 나주의 상공장은 기술자들에게 맡기고 그는 영산포 허름한 창고에 박혀 헌 상을 고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싼 값에 튼실하게 상을 고쳐준다는 소문이 돌자 인근의 헌 상은 죄다 그의 작업장으로 몰려드는 판이었다. 상들 중에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전통 나주반도 더러 있었다. 그 원형을 본으로 해 10여년간 공방에서 독공을 쌓았다. 그러는 틈틈이 방방곡곡을 돌면서 전래의 기능을 갖춘 나주반 장인을 찾았다.
마지막 나주반 명장 장인태에게서 기술 전수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전통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이라 할 장인태목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장목수를 모셔다가 대우를 하면서 3년간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박판구, 이석규, 이운연, 우상숙, 장인태로 이어지는 나주반 장인의 계보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나주반 공부 10년째 되던 해 이운연선생의 자제인 이민섭씨로부터 장인태어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이운연선생은 조선민예에 조예가 깊은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책에도 등장하는 나주반의 명장인데 이민섭씨 말이 해방 후 아버지 공방에서 일하는 장인태씨를 봤다는 거여. 그래서 부랴부랴 수소문을 했더니 장목수는 영광에 터를 두고는 있으나 술에 젖어 전국을 유랑하면서 드문드문 상일을 한다고 해요. 어렵사리 어른을 찾아 공방에 모시고 극진히 대접해 가며 일을 배웠지요. 그 어른 좀 느리지만 일단 연장을 잡았다 하면 참으로 신기가 번득였어. 아, 대패질 소리부터가 달랐다니까.”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어 1977년 광주학생회관에서 전통나주반 재현 전시회를 가졌다 그동안 제작한 나주반 70여점을 선보이고 현장에서 직접 제작을 해 보인 행사였다. 이 전시회는 나주반이 영 사라졌다고 여겼던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나주반이 지정되고 기능보유자로 그가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뻔 했던 전통목물이 정정히 되살아난 것이다.
나주반 재현전시회가 전국 방송을 타면서 이름이 높아지자 부산공예학교에서 교사로 와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부산공예학교는 도자 목공 등을 가르치는 전문학교였는데 소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그에게는 분에 넘치는 기회였다.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그는 통 크게도 개인 작업실을 지어달라고 요구했고 학교측에서 난색을 표하자 두 말 없이 없던 일로 했다. 그 뒤로 사업이 어려워지기라도 하면 그때 못이긴 척 응할 걸 그랬나 싶어지기도 한다면서 웃는 그. 한 때 기술자를 18명이나 둘 정도로 번성하던 공방은 주거생활이 서양식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사양길에 들어섰다. 그래서 늘 빚에 쪼들려 지냈으며 1989년에는 나주에 큰 물이 들어 공방, 살림집 상점은 물론 바리바리 쌓아둔 목재 밑천까지 송두리째 떠내려 보내고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됐다.
절망적이었지만 신앙의 힘과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특유의 뚝심으로 버텨냈다.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하며 역경을 이겨나갔다. 그의 후덕함을 입은 이웃들의 도움도 컸다.
1990년대 들어 애물단지인 상공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명색이 인간문화재인데 천박한 막소반으로 생계를 도모하랴 싶었다.
나주반은 덕성스럽다
소반은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가장 쉽게는 생산지별로 이름을 부른다. 그중 나주반, 해주반, 통영반이 유명하다.
나주반은 꾸밈이 소박하고 결구가 견고한 것이 특색이라고 김춘식 장인은 정리한다.
“나주반은 소반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진상품이었다고 해요. 아마 이쪽에서 많이 난 황칠을 입혔기 때문일 거여. 나주에는 근자까지 이소목방, 박소목방, 선소목방 해서 목물을 생산하는 공방이 많이 있었어요. 나주반은 잡다한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가벼운 은행나무를 주로 써 실용적이며, 상판에 변죽을 따로 둘러 튼튼하지. 그리고 생옻칠을 한 덕에 자태가 곱고 건강에도 이롭고. 나주반에 음식을 내가는 아낙네 발걸음은 얼마나 가뿐하고 편했을 거여. 그리고 뜨거운 음식으로 인해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옻향은 식사를 하는 이들의 건강도 도왔을 것이니 나주반의 덕성은 이렇듯 풍성했더란 말씀.”
이제 명장을 공방으로 이끌어 실전 체험을 할 차례다.
은행나무판에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 후 톱으로 자른다. 대패질한 뒤 곱게 사포로 문질러 12cm 정도의 상판을 마련한다. 상판 가장자리를 따라 그므개로 칼금을 깊이 내고 변탕으로 변죽에 끼워맞출 촉을 마련한다.
그 다음 변죽을 빚는데 각재를 앞쇠로 앞을 깎아놓고 개탕으로 살판의 촉에 끼울 홈을 6cm 정도 파준다. 이제 상판과 변죽을 붙이는데 가장자리의 촉을 따라 아교풀칠을 한 뒤 변죽을 두른다. 변죽 이음매는 대나무못을 쳐서 단단히 한다. 뒷쇠를 써서 변죽 앞 면을 대패질해 모양을 낸다. 상판과 변죽을 붙이면 천판이 완성된다.
천판 아래에 두를 운각은 간결한 구름무늬와 당초무늬를 주로 들인다. 나무판에 운각 본을 대고 톱으로 잘라낸 뒤 칼로 다듬는다. 상이 사각이건 팔각이건 십이각이건 운각을 꼭 두 쌍을 낸다. 상판과 변죽을 두른 턱에 운각을 기대어 송곳으로 구멍을 낸 뒤 구멍에 대못을 쳐 운각을 고정시킨다. 대못은 운각을 관통해 판을 비스듬히 걸쳐서 변죽에 이르도록 깊이 박는다. 운각 하나에 4개의 대못을 친다.
다리는 대패로 나무 모서리를 친 뒤 위는 타원형으로 밑은 원형에 가깝게 깎아서 만든다. 운각에 턱을 내 다리를 끼운 뒤 다리 끝이 판 뒷면에 반듯이 닿도록 맟추고 대못으로 고정시킨다. 족대는 다리보다 조금 길게 만들어 수평을 잘 잡아 대못을 친다.
가락지는 평평한 것과 약간 굽은 것을 쓰는데 새끼줄 모양이나 대나무 줄기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다리 사이를 둘러서 끼워서 힘을 받게 하는 가락지는 나주반의 중요 부재인데 가락지를 다리에 끼우면 나주반이 완성된 것이다. 옻칠을 하지 않은 상을 백골이라 부른다.
마지막 단계가 옻칠이다. 묽게 탄 초칠을 백골에 발라서 하루 이틀 말린 뒤 결 고운 사포를 문지르고 다시 칠을 하고 사포질을 한다. 이렇게 일고 여덟 번을 반복하면 대춧빛 영롱한 나주반이 태어난다.
바라는 바 무어냐고 물었다.
“다른 거 없고 나주반 작품을 보관할 수장고가 절실해요. 나주반은 열이나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보존 관리가 중요한데 비좁고 시설도 안 된 전시관이나 창고에 쌓아놓다 보니 애써 만든 작품이 훼손될 우려가 큽니다.”
목수의 금과옥조가 무어냐고 물었다.
“나무의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목수의 재산은 나무입니다. 좋은 나무를 고르고 그 나무의 성품을 잘 살펴서 목물을 빚는 것이 목수의 소명이여. 좋은 나무 잘 말려서 쟁여놓고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게 목수랑께.”
글 한송주 대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