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Coeur Est Fou - Dalida Mon cœur est fou je ne peux le calmer 내 마음은 내가 진정하지 못하는 바보인것 같아 Car j'ai rendez-vous 20, rue de Courcelles 나 때문에 그 사람은 벌써 와 있을거야 Et pour mon malheur ma voiture est bloquee 그런데 난 길이 막혀 아직 도착도 못했어 Depuis une heure pres de la Tour Eiffel 에펠탑 근처에서 한시간이나 지체하고 있어 Mon cœur est fou je suis dans le Metro 내 마음은 내가 지하철에 있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야 Je cherche partout ma correspondance 내가 바라봐야 할 시선이 어딘지 모르겠어 Mais je ne peux pas aller ou je voudrais 하지만 갈 수 없거나 아니면 그러고 싶어요 Je vais etre en retard 나는 늦을거야 Sera-t-il encore la 그것은 아직 살아있지 Mais a six heures 하지만 여섯시 Il me pardonnera 내 자신을 후회해 Mon cœur est fou on vient de s'arreter 내 심장이 그냥 멈추는것 같아 Voila tout a coup qu'on nous fait descendre 여기에 우리가 갑자기 나타나는것 같아 Juste devant nous la rame a deraille 우리가 타야 할 열차는 그냥 지나가 버렸어 Moi je suis a bout comment va-t-il le prendre 난 빨리 가야 되는데 몸은 그냥 이대로 있어 J'ai trois heures de retard 아직은 세 시간이 남아 있지만 Il ne sera plus la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Et a 9 heures du soir 그리고 오후 9시 Autant rentrer chez moi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Mon cœur est fou il a telephone 그 사람의 전화에 난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Que le rendez-vous etait impossible 그 약속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Un trop grand retard l'en avait empeche 너무 늦게까지 일하는 관계로 시간이 짧아요 Mais pour demain soir ce serait possible 하지만 내일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Mon cœur est fou, Mon cœur est fou 내 마음은 바보처럼 뛰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계인 Dalida(달리다)는 1933년 1월 1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Yolanda Gigliotti(요란다 질리오티)란 본명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카이로 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낸 Dalida는 가톨릭학교를 졸업한 후 속기 타이피스트 비서로 일하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탁월한 미모 덕에 모델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린다. 1954년에는 친구의 권유로 참가한 미스 이집트 선발 콩쿠르에서 Dalida는 미스 이집트 타이틀을 얻어내는데 이는 그녀의 인생에 평생 비춰질 하이라이트의 서곡이었다. 당시 미스 이집트 선출을 지켜보던 관람자 중 한명이던 프랑스 영화 제작자가 뛰어난 미모와 개성에 주목 Dalida에게 영화 출연을 제안한다. 이집트에서 3편의 영화에 출연한 Dalida는 본격적인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파리행을 결정한다. 1954년 Dalida는 여행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아는 사람이 전혀없던 미지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당시 21살이던 Dalida의 가방속에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차곡차곡 접혀 담겨 있었다. Dalida는 훗날 어릴때 부터 난 항상 중요한 사람이 되길원했다고 회상했다. 미스 이집트로 선출된 후에 이름을 달릴라로 바꾸었던 Dalida는 파리에 도착한 후에는 좀 더 부르기 쉬운 Dalida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이는 아마도 삼손 없이는 그 존재 이유가 미미한 성경의 데릴라에서 따온 이름 달릴라가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바꿨지만 Dalida는 항상 자신의 삼손을 찾아 헤매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파리생활 초기 Dalida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처음 4년동안 Dalida는 여러 하녀방 (옛날 하녀가 살았던 건물 꼭대기 층의 작은 다락방을 고쳐서 학생이나 독신자에게 세를 놓은 방)을 전전하게 되는데 1955년 16구에 있는 하녀방에서 살 때는 무명이던 영화배우 알랭 들롱이 같은 층의 다른 하녀방에서 살고 있기도 했다. 이 시기에 Dalida는 학원에 등록해 노래를 배우는데 결국 운명은 그녀를 영화보다는 음악 쪽으로 이끈다. 카바레에서 무명가수로 노래를 부르던 Dalida는 당시 올림피아 음악당에서 주관한 아마추어 노래자랑 참가를 권유받는다. 그 당시 유럽 1 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 디렉터이던 Lucien Morris(뤼시엥 모리스)가 이 노래자랑을 참관하는데 Dalida의 미모에 주목한 Lucien Morris는 그녀를 가수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2년 후인 1956년 Dalida가 하룻밤 만에 녹음한 샹송 Bambino(밤비노)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 대히트를 치면서 가수 Dalida가 탄생하게 된다. Dalida의 매니저가 된 Lucien Morris의 도움과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수와 매니저로 만난 두 사람은 5년 동안 동거한 끝에 결혼한다. 1961년 4월의 일이다. Dalida는 1969년 동양철학을 접하면서 가수생활을 접을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노래의 힘은 너무나도 컸다. 노래를 단념할 수는 없었다. 인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하고 노래를 새로운 방식으로 부르게 된 Dalida에게 운명의 가혹한 힘은 그 세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전 남편이던 Lucien Morris가 Dalida와 이혼한지 3년만인 1970년에 자살한다. 1975년에는 Dalida와 친한 친구인 가수 Mike Brant(마이크 브란트)가 1983년에 다시 셍제르멩 백작이라 불린 Richard Chanfray(리샤르 샹프레)가 자살했다. Richard Chanfray는 Dalida가 9년동안 삶을 같이했었던 동반자였다. Dalida는 친구 하나와 사랑했던 연인 3명을 16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모두 잃게 되는데 이들은 자살이라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Dalida의 곁을 떠났다.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역설적으로 Dalida는 이 기간 동안 가장 주옥같은 샹송을 부른다. 음유 시인이자 가수인 Leo Ferre(레오 페레)의 노래를 리바이벌한 Avec Le Temps(시간과 함께), 그는 갓 18세가 지났다, 기다릴게 등의 샹송이 여기에 속한다. Dalida가 이 기간 동안 부른 샹송은 대부분 행복을 노래하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Dalida는 점점 더 심한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1962년에 구입한 몽마르트르의 대저택에서 Dalida는 일요일마다 측근과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같이하고 토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고독감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집이 감옥처럼 느껴질때 Dalida는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기자들을 한없이 귀찮아 하였다. 또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Dalida는 그 집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게 된다. 금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 Dalida. 1956년에 Dalida를 위해 처음으로 골드 디스크 상이 만들어 졌고 1964년에는 플라티나 디스크 상이 만들어 졌는가하면 1981년에 다시 다이아몬드 디스크 상이 Dalida를 기리기 위해 창조됐다. 프랑스 가요 역사에서 보기드문 일이다. Dalida는 평생 동안 70개의 골드 디스크 상을 받았고 2000곡이 넘는 Dalida의 샹송 디스크는 세계에서 1억 2천만장이 판매됐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했고 모든 옷을 소화해 내는 완벽한 몸매 덕분에 Yves Saint Laurent (이브 생 로랑)등 많은 디자이너들이 다투어 옷을 지어주고 싶어 하였던 Dalida는 생전에 파리의 의상 유행을 이끄는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또한 레게, 트위스트,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고루 소화해 낸 만능 탤런트였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말년에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제스처로 미국식 할리우드 쇼를 프랑스에 선보였던 Dalida가 앵글로 색슨 국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Dalida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Dalida는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인들의 기억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2005년에 실시된 과거 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0명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녀를 꼽았다. 당시 여가수로는 Edith Piaf(에디뜨 삐아프)와 Dalida만 선정되는 영광을 안는다.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항상 외로움에 떨었던 Dalida는 이렇게 말했다. '관중이 내 연인이고 샹송이 내 아이들이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첫댓글 새벽에 카페 문을 열러 봄니다 귀에 익은 팝새벽이슬과 함깨경청 해봄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첫댓글 새벽에 카페 문을 열러 봄니다 귀에 익은 팝![^.^](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3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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