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지도자의 역할과 사명
1. 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공동체는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상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교제'입니다. 본인은 이 세 가지 관점에서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고, 그런 후에 이러한 교회론에서 평신도가
차지하는 신학적 위치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2. '교회론'에서 본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어떤 신학적 위치를 갖고 있습니까? 아니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말대로,
직분을 맡은 교역자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교회에 소속된 모든 자들이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 직분과
은사의 차이가 없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기능과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가 차별은 아니며, 구분이 구별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하나님의 선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거룩한
나라, 제사장 같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모두가 다 제사장이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다 사제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교황과 감독, 사제를 중심으로 위계적-계급적 질서를 이루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며 종교개혁을 할 때 재발견한 '모든 신도의 만인사제직'이라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는 바로 1.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기초하며, 2. 기나긴 구속사라는 시간대를 거치면서,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세우며, 3. 모두가 다 사제로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어떠한
위치에 있습니까? 아니 누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머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 머리, 통치자는 없습니다. 교황이나 목사도, 힘있는 장로나 민주적인 다수 신자들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우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지체요, 그분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구분이나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별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엄격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도
없습니다. 어떤 지체도 다른 지체를 향하여 "너는 소용없다, 너는 무가치하고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지체를 더 감싸주고 추한 지체를 아름답게
가꾸어 지체가 고루고루 자라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지체들이 다 똑같은 일을 할 수 없으며, 또
한 지체가 모든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무를 획일화할 수도 없고, 또 어떤 직분이 독주하거나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에서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한다든지, 개신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교회를 마음대로 주장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임무를 모든 지체에게 고루고루 나누지 않고 어떤 자가 독점하려고 하든지, 또 교회가 해야 할 다양한 임무를 억압해서 다른
임무와 그 임무를 맡은 자를 억압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직분과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섬기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과 우주 안에서 충만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지 지배의 직분이 아닙니다. 지배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 사탄의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요, 작은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서 동등히 섬기고 동등히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분쟁이나 분열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는 1. 예수 그리스도가 설립, 유지, 갱신하시고, 2. 그리스도를 머리(주인)로 삼아 수직적-공간적인 형태를 이루면서 일치하며, 3. 하나의 머리 아래 모든 지체가 평등한 형제-자매가 되어 서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 '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
'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 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 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입니다.
그런데 가끔 교회를 보면, 목회자나 치리자가 다른 성도들의 어떤 은사들을 억압하거나, 장로나 성도들이 목회자의 은사를 억압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납니다. 주로
카톨릭 교회가 사제들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은사들을 집중화하는 경우도 봅니다만, 때로는 개신교회에서도 교황보다 더 막강한 은사들을 독점하려는
목회자들도 봅니다. 그 반면에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나
견해만을 내세워 목회자의 독특한 은사들을 억압하려
들거나, 교회의 은사나 직분이 반드시 의회적-민주주의적 결정으로 다 되는 줄 알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경우도 봅니다만, 이것은 결코 성서적인 참된
교회의 모습이랄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고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하기에, 교회는 민주적 결정이나 목회자의
판단 이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우리를 늘 다스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는 낯선 은사, 낯선 지배자, 낯선 힘들의 지배를 받기 쉽습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는 1. 성령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그의
피조물이고, 2. 성령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 사회적 형태를 이루며, 3. 성령의 은사들을 함께 나누며 서로 섬기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 보충설명: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 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1.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2. 시간대(성부시대-성자시대-성령시대 혹은
구약시대-신약시대-교회사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1. 세상의 백성 안에서 세상 안에서 존재하면서도, 2.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의 주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3. 그러면서도
이 세상의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초월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기능'에서 본 평신도의 사명
교회의 본질에서 본 평신도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했으니, 이제 교회의 기능에서 본 평신도의 사명 혹은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오늘 날 특히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여러
백성인 양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하고 이 몸을 수없이 많이 갈기갈기 찢어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 성령 안에서 하나의 교제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다양한 집단을 이룬 채
서로를 배타시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기조차 합니다.
물론 교회가 한 기구와 제도 아래 통합되어 있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한, 하나의 교회라고
우리는 고백할 순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날 한국교회의 분열된 교회상은 효과적인 복음전도와 통일실천에도 큰 장애물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 원인은 복음과 교회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에도
있지만, 그 결과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자신
안에서 서로 다른 위격과 주체로 계시면서도 하나를 이루시듯이, 한국교회는 서로 다른 교회론을 조화시키고
일치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전한
교회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서는 다양한 기능들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조화시키고 통합시키려는 노력은 다하여야 합니다. 이 일에도 평신도의 역할과 사명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역할과 평신도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1)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 여기서 설교와 신학, 목회상담은 주로 목회자의 기능에 속하며, 예배와
찬양, 교육, 친교는 주로 평신도의 기능에 속합니다. 그러나 목회상담 즉 영혼치유에서도 평신도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를 제외하면 대개의
교회에서 이제 목회자의 심방과 상담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들고, 그 대신에 평신도 상호 간의 상담, 위로, 친교의 비중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지도자(구역 지도자, 권사, 상담자, 행정 관리자 등)를 육성하는 일도 중요해지며, 아울러 서구 교회처럼 평신도 사역자 제도를 고려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목회자가
성도들을 다 관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주거지가 확장되고 교통시간이 길어지며 주말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어지는 오늘 날의 사회에서 목회자의
손을 뻗칠 수 없는 영역은 과감히 평신도에게 개방하여
교회를 위해 협동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신도 간의 친교는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핵심은 성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도 평신도의 사역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 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성찬은 일년에 거의 몇 번 정도만
행사치레로 열리며, 그것도 큰 교회에서는 친교와 은혜의 의미는 날로 퇴색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목회자 그것도 목사가 성찬 집행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입장에서는 좀 어색하고
전통에 반하는 듯이 들리겠지만, 성서와 다른 교회의
전통에서도 이미 안수받지 않은 전도사나 평신도 지도자가 성찬을 집행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장로나 권사를 신학적-실천적으로
훈련시켜 구역별로 혹은 소규모의 모임에서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성찬을 행하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친교를 더욱 더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찬양과 교육을 위한 평신도의 사명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여기서 목회자의 기능으로 여겨지는 것 즉 설교와 신학에서 평신도가
기여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날
주로 목회자의 선포형태로만 이루어지는 설교양식에
덧붙여 평신도의 간증, 연극, 찬양 등의 다양한 설교형태를 활발하게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대화설교나 성경공부 식의 설교에 평신도를 참여시킬 여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신도는 신학 그리고 신학대학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평신도는 선교와 교회개척,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는 많은 헌신을 하지만, 교회를 지탱하고 유지하고 계승하는 신학과 신학대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너무나 인색한 재정적-정신적 지원을 보냅니다. 이것은 수원지를 잘 가꾸고 확장하지 않고 수로와 밭만을
확장하겠다는 어리석은 태도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일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한경쟁체제에 들어간 한국대학 사회에서 평신도 여러분이 신학대학을 지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교회도 위기를 겪을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이 지금 특색을 잃어 가고 있고 신학이 없다고 비탄조로 말하면서도, 제가 성결교회 신학을
이어가고 살리는 '성결신학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하니까 지원의 손길이 너무 약합니다. 교회 하나 개척할 있는 돈으로도 성결교회 전체를 위한 유익한 신학연구소
작업을 할 수 있지만, 교회개척이나 선교사 파송을 위해서는 큰 헌금을 하면서도 이 일에는 정말 무관심할
정도입니다. 뭔가 빠른 시일 안에 효과가 드러나고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에는 열심인 것 같으나, 장기적 투자가 요하고 서서히 효과가 나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에도 평신도 여러분의 관심과 역할이 더
커지길 바랍니다.
2)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지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 흩어지는 교회에서는 앞의 이 기능들이 거의 전적으로 평신도의 몫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왜 모이는 교회의 기능이 아니고 흩어지는 교회의 기능입니까? 교회는 모여 있을 때 기도를 행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가 자신의 일보다는
세상을 위해, 세상의 통치자와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나라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세상의 아픔과 죄를 대변하여 속죄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평신도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세상의 문제를 속속들이 체험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하나님께 고하고 이 세상의 구원을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에서 평신도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두말
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국내선교만이 아니라 특히 해외선교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비중이 날로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평신도는 이웃을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독일교회처럼 한국교회의 평신도들도 사회복지-봉사기관에서 평생 동안에 평신도 목회자로서 헌신할 수 있도록 더욱 더 평신도 사역의 범위와 기회를 넓혀야 할
것이고, 또 머지 않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모범적인 생활을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두움과 부패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와 정의, 평화를 증언하는 예언자적 임무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적 임무와 함께 바로 이 예언자적 임무를 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교단은 비교적 이 예언자적
임무에 소홀히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도 주로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평신도들은 그저 입을 다물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저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성결교회사에서 처음으로 한 목소리로 5,18 관련 주모자들을 처벌하라고 성명서를 내었습니다만, 이제 평신도들도 단결하여 이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경제적 정의, 사회적 평등, 건전한 문화와 환경조성과
자연보호 등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젠 평신도들이 교회 안팎에서 선한 파숫군의 역할을 다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해 헌신할 때가 왔습니다.
4. 마치는 말
21세기 미래사회의 교회에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크게
기대될 것입니다. 이전 세기에서는 교회가 거의 목회자의 역량에 크게 의존해 왔습니다만, 앞으로는 지도적인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의 활동에 의해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크게 좌우되리라고 예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인적-물적 자원들을 활용하고 평신도의 은사들을 개발하여 이들의 역량을 목회에 최대한도로 적용하는 새로운 목회-교회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평신도 목회자, 평신도
동역자, 평신도 선교사, 평신도 봉사자 등의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바야흐르 이제 평신도의 시대가 활짝 무르익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시는 현명한
여러분 평신도들이 다 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