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제주 출신 재일동포 사업가 김창인씨 제주대에 발전기금 쾌척 약정서 전달
---오-늘-의--소-사----------------------------------------
1878년 화폐속의 인물 오스메냐(필리핀) 출생 필리핀 50piso(1999년 발행) 1878. 9. 9 ~ 1961. 10. 19. 필리핀 대통령 오스메냐(Sergio Osmena)
-------------------------------------------------- 1976년 화폐속의 인물 모택동( 중국) 세상떠남
마오쩌둥(毛澤東) 1893. 12. 26 ∼1976. 9. 9 베이징.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공부하여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고 1919년 5 ·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고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맺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가 중국최고의 영도자로 간주되고 아직도 영웅으로 추대 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당시 인민군에 참가한 모택동의 아들(모안영)이 한국전에서 전사를 했다. 그의 며느리가 최소한 시체라도 찾아와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모택동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우리의 동지가 몇 명인데 내 아들의 시체만 찾아온단 말인가? 라는 일언지하에 며느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 했다고 한다.
-----------------------------------------------------------------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해 열창
1956년 9월 9일 미국의 록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열광적으로 전신을 뒤흔들며 무대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수백만명의 TV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주로 10대들을 상대로 한 TV프로 ‘에드 설리반’에 출연한 21세의 프레슬리는 ‘하운드 도그(hound dog)’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등 두곡을 불러 청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시골청년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테네시 주의 트럭운전사였던 그는 선 레코드 사장 필립스의 눈에 띄어 세계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굵고 부드러운 바리톤, 냉소적으로 입을 비트는 표정, 허리를 꼬는 제스처는 그를 남성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흑인음악의 중심가였던 멤피스 출신답게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백인음악에 흑인음악 리듬&블루스를 결합해 새로운 록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그로부터 ‘엘비스’는 그 이름만으로 신화가 되었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빌 보드 톱 랭킹을 독차지했다. 그가 출현하자 당시 청소년이었던 비틀스의 존 레넌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엘비스는 대중의 시대 20세기가 만든 우상이었음에 틀림없다. -------------------------------------------------------------------- 1087년 잉글랜드 정복왕 윌리엄 1세 전사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를 열었던 정복왕 윌리엄 1세가 1087년 9월 9일 사망했다. 1066년 잉글랜드 고해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사후 위턴회의의 결정에 의해 에드워드의 의형제인 해럴드 백작이 후계자로 결정되자, 윌리엄이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해럴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 시대를 연 윌리엄은 1035년에 이미 '노르만디' 지역을 상속받았다.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만디공이었던 윌리엄의 가장 큰 적대 세력은 프랑스 왕과 앙주 백 풀크 심술보(Fulk le Rechin)이었다. 윌리엄과 반대 세력은 루앙(Rouen)과 파리 세느강 북쪽의 벡생(Vexin) 그리고 메인(Maine) 백령을 주요 전장 터로 해서 오랜 기간 대립했다. 특히 윌리엄의 장남인 로버트가 반란을 일으킨 뒤, 프랑스 왕 필립 1세 편에 가담한 사건은 정복왕의 불운한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프랑스 망트(Mante) 요새 수비대가 노르망디를 기습공격하자 1087년 7월 망트 요새에 대한 반격을 가했으나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이로 인해 9월 9일에 사망하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은 제위 시절, 잉글랜드에 노르만식 봉건제도를 도입했으며, 효율적인 징세를 위해 전국적인 토지대장인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기도 했다.
---------------------------------------------- 0384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호노리우스 출생 1087년 정복왕인 윌리엄 1세(William Ⅰ) Maine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다 죽다. 1513년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 세상떠남 1513년 스코틀랜드 the Battle of Flodden Field에서 잉글랜드에게 패하다. 1585년 프랑스 정치가 리셜리에 추기경(Cardinal Richelieu) 출생 1737년 이탈리아 심리학자 루이기 갈바니(Luigi Galvani) 출생 1778년 이탈리아 건축가 지암바티스타 피라네시(Giambattista Piranesi) 세상떠남 1828년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에비치 톨스토이(Leo Tolstoy) 출생(구력-8.28) 1835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영국에 지방정부가 만들어지다. 1850년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31번째 주로 되다. 1867년 런던조약 조인 1867년 룩셈부르크, 런던조약으로 영세중립국 됨 1883년 미국 북태평양 철도 완성 1896년 3대 삼림자원 채벌권을 러시아인에게 허가 1898년 프랑스 시인 스테파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세상떠남 1900년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 출생 1901년 독일의 식물학자 심퍼 사망 - 최초로 대륙을 식물지리구로 나누는 데 성공 1901년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세상떠남 1921년 천주교 지학순 주교 출생 1926년 미국 NBC 설립 1941년 미국 가수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출생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살레노(Salerno)에 상륙하다. 1944년 프랑스, 드골 임시정부 수립 1945년 그레이스 호퍼 박사, 컴퓨터 오작동(버그) 첫 발견 1945년 독립운동가 차리석 사망 1945년 미군 서울에 진주(군정실시 포고), 일본군 항복조인식 거행 1945년 조선총독부, 미군에 항복문서 조인 1948년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1954년 북알제리아에 지진 약1,500여명 사망 1955년 한국, 국제도서관협회에 가입 1956년 서독서 통독촉구각서를 4개국에 전달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해 열창 1957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흑인 투표권 보장 위한 민권법에 서명, 흑인의 투표권이 처음으로 보장됨 1957년 유엔안보리 한국가입 소련대표가 거부 1961년 서해 소연평도 근해에서 무장간첩선 격침. 1962년 일요신문 창간 1965년 티베트, 자치구 성립을 선언 1966년 북한, 한국문제해결 위한 참전국회의 제안(10일 정부 거부)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막 1972년 '8·3 명령' 긴급재정명령 국회에서 승인 1972년 문공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국내 배포 금지 1975년 18살의 체코 테니스 선수인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요청하다. 1976년 모택동(마오쩌둥毛澤東) 사망 1976년 미국 NBC방송 뉴욕서 설립 1978년 미국 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설립한 워너 사망 1979년 비동맹국 수뇌회의 아바나선언 채택 1980년 이란-이라크 서부 중앙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 1981년 레이건-베긴 정상회담 198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사망 1981년 프랑스 내각 주요산업 및 은행 등 국유화법 의결 1982년 국산전투기 F-5F(초음속제트기 : 제공호) 1호기 출고식, 공군에 이양(타이거 II의 시험비행 성공,마하1.6) 1982년 아랍국 지도자들 폐즈헌장 발표 1982년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소련 방문 1985년 멕시코에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여 4,700명이 죽고, 30,000 명이 부상당하다. 1985년 영국 버밍햄서 폭동 1987년 강수연, 제 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 1990년 60여년만의 집중호우(∼12일)에 군헬기 178대, 고무보트 549정을 투입하여 주민 12,331명 구조(고양 부근 한강제방 334m 붕괴, 복구활동에 병력 14,800여명과 중장비 1,800여대 투입) 1991년 하이텔(hitel) 서비스 개시 1993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 위원장에 조선일보사 방상훈 사장 선임 1994년 미국은 매년 2만명씩 쿠바난민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하다 1994년 정부, "일본해(日本海)" 표기 수용 않기로. 1996년 유럽인권의회는 부모에게 물리적 처벌을 허용하는 영국법률에 의의를 신청한 12세 소년의 청을 듣기로 동의했다. 1996년 초고속 '정보통신용 교환기(ATM-MSS), 국내 최초 개발 1997년 미국 배우 버제스 메레디스(Burgess Meredith) 세상떠남 1997년 북한, "주체연호" 사용. 개시. 김일성 생년(生年)인 1912년을 원년(元年)으로 함. 황장엽: 이는 김일성 왕조를 유지하려는 것이며 현대판 봉건주의다 1997년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 침입한 북괴군 1명 사살. 2000년 서태지 4년7개월 만에 컴백 공연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개봉. 5일 만에 90만명 동원해 사상최대 동원기록 경신 2002년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59회)에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감독상과 신인상(문소리)을 수상하였다. 2004년 삼성전자 세계최초 90나노미터 D램 양산 ------------------------------------- 행복하세요....^^
|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첫댓글 매일 소사를 올려 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재일동포 사업가인 김창인씨가 대학교 발전기금을 100억원이나 기부하였네요. 이전에 기부한 금액도 적은 금액이 아닌데 진정 훌륭한 사업가로 칭송할만 합니다.
한국전쟁당시 인민군에 참가한 모택동의 아들(모안영)이 한국전에서 전사했다는 것 알게되었네요
모택동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우리의 동지가 몇 명인데 내 아들의 시체만 찾아온단 말인가? 라는 일언지하에 며느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 했다는 사실도
감사합니다.
요즘 기부얘기가 많이 나오는 군요... 헌데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이 생각나는건 왜 일까요....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먼 타국땅에서도 모국을 잊지 않고 자수성가해서 기부까지 하시네요. 자랑 스럽네요. 행복하세요.
2002년 영화'오아시스'의 쾌거가 보입니다... 감독상과 신인상이지만 세계 3대 영화제의 수상이니 감탄이 나옵니다... 모스크바영화제가 퇴색되어 세계 4대 영화제라는 말보다 3대 영화제로 더 많이 알려지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