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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9일 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어리석음과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11,1-10
† 복음 루카 10,21-24
◈ 오늘의 묵상
쇠약한 다윗 왕조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말라비틀어진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터 나옵니다. 비록 허약해진 나무라 할지라도,
새로운 생명의 싹이 다시 올라온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가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미약한 새싹에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당신의 왕국을 완성해 나가실 밑거름으로
삼으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의 기존 가치들과 인간적인 현실들을 모두
뒤엎는 완전히 새로운 가치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여백으로 밀려나
있던 가난한 이들, 미천한 이들, 그리고 철부지 어린이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미약함과 빈손 덕분에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나라로
채우고,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우선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날 지식 정보들이 넘쳐 나고, 과학 기술들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세상은 겉으로는 점점 번성하고 완벽해져 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오히려 숨 쉴 공간이 부족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씨앗이 자라날 여백의 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손을 디미는” 평화의 나라가 아니라, 온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어,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는 성모님의 노래가 그루터기의 햇순처럼
다시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을 1순위에
2016년 가해 11월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1-10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24
구약성경을 보면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가장 큰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돈’이라는 우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보다 돈이 더 윗자리에
올라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자녀’ 역시 하나의
우상숭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자녀가 우상이
될까요? 자녀를 위해서 하느님께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어떻게
우상이라고 할까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지요. 배우자와 자녀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합니까? 많은 분들이 자녀를 배우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는 끊이지 않으면서, 정작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교육문제로 ‘기러기 아빠’가 나오는 것
역시 자녀를 배우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1순위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2순위는 부부관계, 3순위는 자녀관계, 마지막 4순위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기준에서 어긋날 때 우상화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배우자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에 올라서게 되었을 때, 분명
자녀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순위를 지키면서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 부부, 자녀,
이웃이라는 순서를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대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고 전해주지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주님께서 즐거워하셨던 것은 제자들이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광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하느님을
1순위에 모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1순위에 모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부부, 자녀, 이웃 순의
우선순위를 기억하면서 결코 어떤 우상화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뿌릴 때 나에게도
몇 방울 묻는다(벤저민 디즈레일리).
어제 동창모임이 있어서 화려한 시티를 돌아다녔습니다.
내 얼굴만 봐도....
두 눈이 얼굴의 맨 위쪽에 있는 것은 가까운 곳만 보지 말고, 먼 곳을
좀 내다보라는 뜻이랍니다.
귀가 두개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은 적게 하고 들을 때는 두 귀로
많은 것을 잘 들으라는 뜻이랍니다.
귀가 입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내 말보다 남의 말을 더 존중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래요.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닫을 수 있는 반면, 귀는 항상 열리어 있는
것은 남의 말을 차단하지 말고, 항상 잘 들으라는 뜻이랍니다.
사람의 혀를 이중벽으로 쌓아 놓은 것은 이빨로 성벽을 쌓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입술 성문을 만들어 닫아 놓아 꼭 진실하고
필요한 말만 하라는 뜻이랍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두 번 이상 보고, 두 번 이상 듣고, 두 번 이상 숨을
들이쉬고 난 후에 비로소 하고자 할 말을 하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것이랍니다.
이렇게 내 얼굴만 봐도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을 잘 안 봐서 그럴까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대형 트리를 보니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어리석음과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행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1월29일 가해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
어리석음과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행복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온 존재를 바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헤로데의 반대에 부딪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10,21)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으뜸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철부지들인
부족하고 무식하며 미약한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0,22).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은 거꾸로 가는 인생이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와 달리 세상살이에서는 해박하고 탁월한
지식으로 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어 출세하려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잘 나고 힘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이 힘을 발휘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은 곧, 생명과 선, 자비와 정의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려면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힘을 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낮추어 진정 가난한 사람이 되고, 내 중심적인 애착들을 비워내어
영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을 뵙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잡다한 지식과 남을
이기는 법, 나만 잘 사는 법,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랑과 윤리가 결여된 지식과 힘에 의존하지 말아야겠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미천하고 율법에 무식한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한없는
은총으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소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고, 천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고 평범한 나날처럼 보이고,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선물을 주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자신을 낮추고 비워, 철부지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선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 가운데 머물 수 있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삶이 중단됩니다!
2016년 가해 11월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삶이 중단됩니다!
독일 베네딕토회 수도사제이자 명 저자이신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한
말씀을 요즘 자주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삶이
중단됩니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순탄한 지름길, 곧 지속적인 성공의 삶은 한
인간을 무엇인가에 빠지게 만듭니다. 자아도취에 빠지게 합니다.
안하무인의 삶에로 빠지게 합니다. 결국 삶의 성장을 멈추게 합니다.
요즘 각종 매스컴에 밥 먹듯이 오르내리는 분들, 나름 한 가닥 한다고
어깨에 힘 꽤나 주던 분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던 분들, 그들의
수직 낙하를 바라보며 인생무상을 실감합니다. 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기본적인 품성과 인간미, 영성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하고 피폐한 그들의 인생을 안타까워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결핍된
존재이지요.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 할 미완성의 존재들입니다.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고 거기 멈춰서는 안 되는 현재진행형의
존재들입니다. 수시로 첫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또 다른 깨달음을 위해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덕이 겸손의 덕인 것 같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단순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음흉하고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래서 삶의 성장이 멈춘 그들을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복음 10장 21절)
어제는 철부지 어린이들과 한참을 같이 놀았습니다. 그들의
천진난만함, 그들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무장해제가 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들은
우리 어른들보다 사심이 적어보였습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처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결국 투명함과 순수함, 솔직함과 단순함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지름길인 듯합니다.
참담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며 또 다시 우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건강, 이 재물, 이
인기, 이 직책은 모두 허상입니다. 나란 존재 역시 지상생활동안 잠시
빌려 입고 있는 옷과도 같습니다. 그 무엇 하나 내 것이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큰 과오를 범한 사람들이 지니는 큰 착각은 그 모든
유한한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인생 아무리 길어봐야
90년이요 100년입니다. 꽃은 지고 잎은 시듭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영원한 내 자리도 없습니다. 언젠가 낡은 옷을 갈아입듯이
훌훌 다 벗고 내려놓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지금 잔뜩 취해있고 누리고
있는 성취도 잠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한결같은 겸손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멋진 말을 남겼더군요. “인생의 오후가 되면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외적인 성공만을 추구했던 삶을 이제 중단하고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화요일
2016년 가해 11월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동생 수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홍콩과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카오에는 육포를 파는
거리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의 육포가 입맛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명동에는 마카오서 볼 수 있었던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육포를 좋아하시는지도, 명동에 육포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어머니에게 육포를 보내드리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육포를 드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경륜과 슬기의 영이 함께 하면 고목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아름답게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합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돌보아주고,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이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낙원’을 이야기합니다.
1988년 저는 군대를 제대한 후에 ‘돈 보스코 직업 훈련원’에서 잠시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멀리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게 하고, 틈틈이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낮에는 용접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서 후원회원들을 만나기도 하셨고,
재미있는 강론으로 학생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수사님들은 직접
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점심 식사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셨습니다. 권위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랑과 관심을 주셨습니다. 존경받는 사제, 권위적인 사제,
엄한 사제들을 보았던 제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만주에 있는 ‘직업 훈련원’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잘살게
되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신부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 수사님들은
멀리 아프리카로 가셨다고 합니다. 역시 더 어렵고, 가난한 곳을 찾아서
떠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과 수사님들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가별’이라고 불러주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쉽고
편안한 길이 있지만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공부를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자주 읽고,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 세상은 분명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 오웅진 신부님은 그런 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볼 것을 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1월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 10,21-24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기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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