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49
5월6일[부할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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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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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hVSxaTtIy0
[의정부교구 정택찬 마르티노(송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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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고, 일상의 작은 일들을 지극정성으로 행했던 성 도미니코 사비오!>
오늘은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애제자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1842~1857)의 축일입니다. 돈보스코만의 고유한 교육방식인 예방교육의 소중한 결실이 바로 사비오의 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보스코를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오라토리오에 들어온 사비오는 안타깝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라토리오 생활 3년 만에, 불과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비오의 짧은 생애는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성인의 길은 결코 나이나 학력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비오는 어린이들도, 청소년들도,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성덕의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병고와 나약함,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도 성덕의 길로 나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잘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사비오는 오라토리오에 들어오기 전 모리알도에도 살았고, 몬도니오에서도 살았는데, 그를 가르쳤던 사제들은 한결같이 그의 덕행의 찬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를 돈보스코에게 보내야겠다며 추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스텔누오보 학교에서 사비오를 지도했던 알로라 알렉산드로 신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즉시 그가 큰 제목이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존재 자체로 제 눈을 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그의 아버지같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사비오, 슬기로운 아이였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돈보스코 오라토리오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자신의 생애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사비오는 결코 한눈을 팔지 않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로 직진했습니다. 오라토리오의 다른 친구들은 그 나이 또래의 즐길 거리를 찾아다녔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책들을 돌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비오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한 친구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너는 대체 그 눈을 어디에 써먹을 작정이길래, 이 재미있는 것 들도 안보고, 그렇게 줄창 성당에만 가있고, 맨날 예수님과 성모님만 바라보고 있냐?”
사비오의 대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는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가서 성모님을 만나뵐 때 써먹으려고 아끼고 있단다. 눈은 우리 영혼의 창문이란다. 이 창문을 통해 천사도 들어오고 마귀도 들어오지. 그러니 우리 눈과 마음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지.”
하루는 돈보스코가 오라토리오 아이들에게 성인이 되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요지로 강론을 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이랬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다 성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과 어느 정도의 노력만 기울이면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강론은 즉시 사비오의 마음속에 불씨 하나를 던졌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매사에 모범생이었던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서 물었습니다.
“네가 선물로 제일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
사비오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제가 신부님께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신부님께서 저를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영혼을 구하게 해주시고 저를 성인으로 만들어 주세요.”
사비오가 현대 가톨릭 영성 생활에 끼친 영향이랄까 업적이 있다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화의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려준 것, 지극히 작은 것, 늘 반복되는 일상적인 것 안에 성화의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 큰 업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비오는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고, 일상의 작은 일들을 지극정성으로 행하고, 매일의 고통을 기꺼이 참아내며, 가까운 이웃들을 사랑으로 도와주며, 그런 노력을 통해 하루하루 성인의 길로 나아갔으며, 마침내 교회는 그의 시복시성을 통해 만천하에 그 사실을 공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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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Z1fIzMYn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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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3)는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을 아들 하나 키우며 살아온 욕쟁이 오말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오말순 할머니는 싸움닭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인 오말순 할머니 때문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집니다. 손자들은 엄마를 위해서라도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오말순 할머니는 쓸모없어진 자신을 한탄하며 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젊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가족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가수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보려 합니다. 점점 유명해지고 사랑도 싹틉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밴드에 자기 손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위해 긴급히 피가 필요합니다. 손자와 피가 맞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그러나 피가 빠지면 다시 늙게 되는 것을 압니다. 젊어진 오말순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수혈하기로 합니다. 이때 그 젊은 여자가 자기 어머니인 것을 안 아들은 어머니에게 떠나라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은 자기가 알아서 살릴 테니까, 이젠 자신들 위해 희생하지 말고 당신 인생을 살아보라고 합니다.
붙들이라고 불리던 아들의 대사입니다. “갓난쟁이를 남편도 없이 키우던 젊은 여자가 있었어요. 근데 그 갓난쟁이가 병이 났는데 도통 낫질 않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줄을 놓으려고 했지요. 근데 그 갓난쟁이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해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슴으로 끌어안고 눈물로 말했어요. ‘붙들어라. 목숨처럼 붙들어라.’ 그냥 가세요. 그냥 가셔서 남이 버린 시래기도 주워 먹지 말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 장사도 하지 말고 자식 때문에 아귀처럼 살지 말고 명 짧은 남편도 얻지 말고 나처럼 못난 아이도 낳지 마세요. 그러니 제발 가세요. 엄마.”
그냥 가면 엄마가 아닐 것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그래야 내가 네 엄마고 네가 내 자식일 테니까.” 아들에게 어머니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피는 곧 성령이다.”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의심될 때 어머니께서 흘리시는 피를 보았습니다. 단팥빵과 흰 우유, 그리고 삼겹살과 휘어진 발가락과 굳은살. 이것이 그분이 누구인지 증명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피입니다. 어머니의 피는 곧 아버지의 피이기도 합니다. 그 피를 통해 나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자기 아버지를 전쟁 통에 잃은 딸에게 친척은 “아버지는 딸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아!”라고 말해줍니다. 이것이 진짜 아버지를 증명해 줍니다. 얼마 전에 “수술 4번 받고 교실 왔는데…‘눈물 버튼’ 눌러버린 선생님”이란 동영상이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는 휠체어를 타고 한 달 만에 반에 왔지만, 반 아이들이 신경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서러움에 울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를 놀래주기 위한 이벤트였습니다. 케이크도 준비되어 있었고 노래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엉엉 웁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준비한 그 노력이 성령님입니다. 그 성령님은 아이에게 이 아이들과 선생님이 진짜 자신의 친구들과 선생님임을 알게 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 이 진리의 성령을 주는 방법은 곧 피 흘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셨는지는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우리가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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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있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경조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은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님으로 있다가, 의정부교구 교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4일에 송별미사가 있었는데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손 주교님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용산 성당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신부였고, 저는 보좌신부였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신부님께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교구청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주교님은 사목국장 사제로 있다가, 2015년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되었고, 2024년에는 의정부교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주교님은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주교님께서 의정부교구의 교구장으로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시리라 생각합니다. 송별미사에 함께 하면서 아쉬움을 나누고, 축하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4월 16일에는 이홍근 스테파노 신부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1983년 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2학년이었고, 신부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5학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치회 간부를 맡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엄격하였지만,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본당에서 지낸 경험은 없지만 사제의 맛과 멋을 아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사제의 맛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입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제입니다. 동료 사제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제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제입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사제의 멋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두 번이나 춘천교구의 공소사목을 지원하였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처럼 주님만 아신다면, 해님만 아신다면 시골의 공소에서도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멋을 아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로서 맛과 멋을 아는 리디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리디아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하느님을 알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도시에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본당에서 그런 교우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도 그런 분들을 보았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힘들어 하는 분들의 짐을 들어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베로니카처럼 지친 분들의 땀을 닦아 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분들이 함께 했기에 은혜로운 성지순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사제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사제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교우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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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26-16,4: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보호자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주신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참 기쁨이 있다. 이 성령을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15,26)이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아들의 영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는 아들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한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 성령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것이다. 성령에 잠기는 삶이 우리를 그분과 더욱 가까운 사이로 만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쳤을 때, 제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 더욱 굳세게 주님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결합하여 있으라고 하신다.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4절) 이 말씀은 성령에 관한 약속과 그들이 고난받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실 증언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이 홀로 남아있게 되는 때이며, 그들이 박해를 받는 때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자신에 대해 긴장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유혹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 성령 안에 살게 되면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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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요한 복음서의 긴 ‘고별 담화’가 마무리되면서,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심을 예고합니다.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파라’(- 주변에, - 옆에)와 ‘클레토스’(‘칼레오’ 동사의 수동태, ‘불린’ 또는 ‘부름받은’)가 합성된 낱말입니다. 직역하면 ‘어떤 것 주변에 있도록 부름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곧 ‘파라클레토스’는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도록 불린 존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어떤 것의 ‘증언’이 필요한 경우는 관련 사건의 정보나 진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그때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제자들’이 “나를 증언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의문이 생길 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모두 ‘진리’였음을 증언할 존재는 성령과 제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함께한’ 이들만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는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처음부터 서로 ‘함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함께하지 못하니 소통에도 한계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소통’은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며 “처음부터 나와 함께” 계신 ‘진리의 영’과만 가능합니다. 참된 보호자이시고 변호자이시며 증인이신 성령! 이제 다가올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가 받게 될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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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4ㄱ)
1) 여기서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 18절-25절에 있는 “세상의 미움과 박해 예고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신앙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고 예고하셨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쪽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말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손 안에(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믿는다면, 어떤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2) 여기서 “성령께서 증언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공관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마르 13,11; 루카 21,13-15)
이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박해자들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신앙인들을 대신해서 증언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붙잡아서 최고의회에 세웠을 때, 두 사도가 증언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사도 4,8ㄱ.13)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사도들이 최고의회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하면서 의원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께서 두 사도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도와주신다고 해서, 신앙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은 능동적으로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신앙인들 자신들이 하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이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성령의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안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증언’은 ‘복음 선포’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를 증언하여라.”, 즉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했던 베드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모든 일과 말씀을, 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 증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4)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라는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금방 연상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사도 22,3-4)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갑자기 사도로 변화된 것을 본 열두 사도는, 아마도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냈을 것이고(요한 16,4ㄱ),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더욱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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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은 늘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의 책장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을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마다 또한 종교마다 믿고 따르는 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곧바로 적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이단이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서로 죽여 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예수님을 죽였고, 누군가는 그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죄명으로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와 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신의 적대자가 됩니다.”
우리 또한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과 신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는 내 하느님을, 내 신앙을, 내 교회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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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복음을 읽을 때 간혹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편으로 갈라서 내 편, 네 편을 갈라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90년 무렵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을 쫓아낸 유다 사회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메시아를 포기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유다 사회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고 따랐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믿었던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거치며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다 사회는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께서 우리만의 문화와 관점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따르고 찬미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한 것이 유다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사회가 굳건히 간직한 하느님에 대한 유다인들만의 인식의 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의 폐쇄성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이 세상의 다양한 관점과 개방성 속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는 저와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하여 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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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기에 당신 대신에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였지요.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리다툼이나 하다가,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시자 다들 제 목숨이나 구하려고 도망마저 갔지요. 더욱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마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오시자 제자들은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제자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고, 심지어 죽음마저 당하고 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진정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 언어와 문화, 관습을 통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지요. 그런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정성을 다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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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5,27;16,1)
부활 시기에 사도행전을 들으면서, 교회는 어쩌면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간 사역使役의 결실임을 더 분명하게 확신하게 됩니다.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파견되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선교활동에서 사도들은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처럼 ‘환영과 환대’ 혹 ‘배척과 거부’를 겪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사람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니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15,20) 하는 말씀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필리피에서 리디아와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사16,15)라는 환영과 환대를 받고 그곳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토록 성령의 역사하심에 힘입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교활동에서 이런 환대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때론 거부와 배척 그리고 박해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며,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 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증언할 사명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세상에 증언하는’ 주님의 참된 사도가 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제자가 될 때 참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전하는 사람입니다. 첫 제자들과 우리와 동질성은 바로 진리에 대한 갈망과 추구일 것입니다. 복음은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추구하는 인간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첫 만남의 이야기에서(요한 1, 39~39)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그들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시고 “와서 보라!”고 초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대를 거쳐 참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응답이며 초대입니다. 진리와 생명에 도달하리라는 확신 속에 제자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처음부터 생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다.”(15,27)라는 뜻이고, 이 함께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함께 하면서 듣고 본 것이 참된 증언 곧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입니다. 복음 선포는 직접 보고 듣고 만짐을 통해 체험한 진리를 세상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본 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다시 기억하고 숙고한 바를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성령과 함께 현실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되기 위해선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제자 기간이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보다 더 강력한 선포가 어디 있습니까? 체험하지 않는 자의 선포는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체험이 곧 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자신의 증언자가 될 것을 격려하고 당부하시면서 동시에 듣기 민망하고 서글픈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6,1) 여기서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언급하신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선 이미 수요일 복음을 통해 함께 묵상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며 마침내 불 속에 던져 태워버리게 됩니다. 떨어져 나간 가지(=믿음을 잃은 사람들)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노파심에서 하신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도 마음이 아프셨으리라 봅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며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원했건만 당신 생전에 이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 이스카리옷은 공개적으로 떨어져 나가 불 속에 던져지듯 자살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 사후에 또 많은 제자가 믿음을 잃었고요. 그러기에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제자가 누구이며 사도인가를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향한 주님의 노파심이며 격려라고 봅니다. 이렇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공동 증언자입니다, 이는 세상에 이미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을 선포하고 완수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성령 없이는 우리는 참된 증언자가 될 수 없지만, 성령은 또한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공동 증언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박해당할 때,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16,1) 하고 말씀하시면서 이내 그렇게 박해당할 때, “너희에게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4 )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일을 겪을 때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 안에 항구하게 머물고, 보호자인 성령께 의탁하라는 격려이며 당부입니다. 또한 그러한 박해의 때 그들이 너희에게 그렇게 하는 까닭이란, “그들은 아버지와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며”(16,3),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마5,12) 는 사실을 기억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의 증언자로 충실하라, 는 당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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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책상 위가 너무 지저분한 것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것일까요?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누가 와서 난장판으로 만든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원래 지저분했는데 느끼지 못했고 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책 내용을 되새기고 나서 눈을 떴을 때 그 지저분함이 보인 것입니다. 이 눈을 감고 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찰의 시간과 같지 않을까요?
성찰해야 주님과의 관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성찰 없이도 주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도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심지어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는데도,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할 때, 그리고 주님의 뜻보다 세속적인 마음이 더 크게 일어날 때,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바라보며 주님께 향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느끼며 큰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성령은 세상에 주님을 힘차게 증언할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의해 내쫓겨도,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진리의 영을 통해 용기를 얻어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가 이런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 안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보는 우리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과거만을 바라보면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시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벗어던져야 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 성찰을 통해 또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착각은 모두 벗어 던지고, 깊은 성찰과 성령의 도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철저히 주님께 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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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저는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세상 것을 그리워하고 쫓아갑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손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궁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 19)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약육강식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천상에 둡니다. 빛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히 거부합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함부로 하는 낙태법,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그것을 싫어할 수 있고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 합니다.(박병규) 미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미움은 결국 폭력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의 일을 예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북돋아 주시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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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
요한 15,26-16,4ㄱ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빛>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
빛은
어둠에
삼켜질지언정
스스로를 꺼트려
어둠 속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니
참으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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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hospitality)와 보호자 성령(the Paraclete)>
-교회선교의 본질적 두 요소-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3)
일기쓰듯 편안하게 쓰는 강론을 지향합니다. 오늘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기념일입니다. 꼭 40년전인 오늘 1984년 5월6일, 오전 10시25분, 순교자들이 피로 신앙을 증거한 절두산과 새남터 성지가 내다보이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보편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미사주례중 100만명이 신자들 앞에서 라틴어로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을 선언했습니다.
이 교황님 황금빛 곤룡포 제의는 요셉수도원을 참으로 사랑했던 매듭전문가 김희진 자매가 만들었고 후에 자매님은 남은 황금빛 천으로 제의를 만들어 우리 요셉 수도원에 기증하여 자주 대축일에 입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에 앞서 교황님이 1984년 5월3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려 땅에 엎드려 겸손히 친구(親口, 존경을 담은 입맞춤)하던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1984년 5월6일 이날은 평신도 92명(여성47명, 남성45명), 성직자 11명(한국외방전교회10명 포함)이 성인이 된, 참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TV 생중계를 통해 그 감동을 생생히 느낀 국민의 축제같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장충동 분원에 머물러 연학중이던 청원자 신분으로 이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또 교회 뉴스를 보니 지난주 4월29일에는 90세로 선종한 부산교구의 저명한 진보적 신학자 서공석 신부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서인석 신부와 사촌간이자 마르틴 아빠스와 절친관계에 있던 분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니 대개는 90세 전후로 세상을 떠납니다. 긴듯하나 짧은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청 베드로 광장에서 레지나 첼리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교황님은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들이라 부르겠다” 대목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우정의 성장을, 그리고 그 우정을 다른 이들과 나눌 것을 강조했습니다.
주님과의 우정,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말마디인지요!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상적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정말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웬만한 소원도 다 이루어지리란 생각이 듭니다. 어제부터 내린 하루종일 내린 봄비가 지금도 계속 오고 있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아 미사에 참석했던 어느 자매는 빗소리에 감격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빗소리 듣기도 힘든 아파트 주택구조라 그럴 것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23년전 써놨던 "대화"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바라봄의 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때로 둘만의 깊고 긴 대화가 필요하다
하늘님과 땅,
멀리서 보기만 했지 못다한 이야기들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두런두런 소리내며 내리는 비
나눠도 나눠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님과 땅의 정다운 대화
사랑의 일치
아! 때로 나누고 싶다
관상적 삶중에 주님과의 끝없는 대화를”-2001.7.5
오랜만에 내린 충분한 봄비로 흐르는 불암산 계곡 물소리도 반갑습니다. 하늘님과 땅의 대화를 상징하는 봄비 소리처럼 주님과의 관상적 대화는 신자들의 내적생활을 참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관상적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환대와 파라클레토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둘은 교회 선교 활동에 본질적 요소에 속합니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활동하는 역할의 겸손한 환대, 겸손한 보호자 성령입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피에서의 리디아의 환대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었음은 이런 자발적 겸손한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히느님은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을 환대하게 하십니다. 다음 대목의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아마도 분명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은 리디아의 환대에 응해서 그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이뤄집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환대에 바탕한 가정교회가 주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숨겨져 있는 겸손한 환대 없이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리하여 필리비는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의 활약에 힘입어 지역선교에서 유럽 대륙 선교의 영광스러운 교두보이저 전초기지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바오로와 그 일행은 몰랐겠지만 하느님의 계획에는 유럽 대륙의 선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관상적 환대에 이어, 겸손한 파라클레토 진리의 영이 또 절대적 역할을 합니다. 바로 2주 후에는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시는 성령강림 대축일이 있고 불교와 사이 좋은 관계를 상징하듯 그 앞 5월15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앞서 오시는 부처님이 성령님의 형님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교회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성령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행사때는 전례시 성령님이 임하기를 간청합니다. 이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을 보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 성령의 역할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조언하시며 강화하시고 지지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대로 성령은 교회 공동체내의 예수님의 현존이 됩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도 온갖 박해중에도 위로자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과 용서, 평화와 정의의 활동에 항구했던 교회였음을 봅니다. 코린토 2서의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넘칩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인 성령을 우리의 희망이자 참 좋은 위로자, 조력자로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환대와 더불어 성령과의 친교로 바람직한 관상적 선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환대와 주님과의 친교를 고백한 자작 좌우명시를 나눕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지녀할 환대의 앞문과 친교의 뒷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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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 미래형의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를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당신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께서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영으로서 당신의 진실을 증언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을 보호해주실 터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박해가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고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인데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일단이라는 말이 많은 경우 일단一旦의 뜻으로 쓰이지만 이 경우엔 일단一段이라는 뜻으로 제가 쓴 것이며 다음에 이단二段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씀과 달리 제자들이 당신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쳤으니 일단은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결과이고 그래서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은 인간의 단계段階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성령의 단계段階입니다.
일단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도망치고 봤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자 새로운 단계 곧 이 단계인 성령의 단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 단계에서 이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위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하느님도 손쓸 수 없게 자기가 완전히 끝장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열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리고 비록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었을지라도 다행히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우리가 오늘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될 때도 내가 끝장내지 않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하느님께 여지를 드릴 여유가 나에게 없습니까? 나로 가득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여지랄까 말미를 드리면 그 여지에 하느님께서 성령과 작당하여 모의하실 것이고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마침내 주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증언하게 될 것이며. 오늘 리디아의 마음을 연 바오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주님을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뭐든 우리가 끝장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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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성령의 힘!>
오늘 복음(요한15,26-16,4ㄱ)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미움과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렇게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곧 하늘로 오르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향한 애뜻한 사랑을 봅니다. 이제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3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우리를 사랑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이 답입니다.
오늘도 성령을 청합시다!
날마다 아니 매순간 성령을 청합시다!
보호자 성령은 우리가 온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주어지는 '큰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 진리의 영이신 성령, 파라크레토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신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그리고 끝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대변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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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s49Mt6gV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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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 26)
우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변화에 우리가
협력하고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켜야
나눌 수 있고
걸려 넘어져야
일어설 수 있는
진리를 뜨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으신
진리의 영은
온전한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며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을
증언하시며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새로운 차원에서
예수님의 선물이
되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하는
사랑과 일치가
되십니다.
우리의 살을
변화시키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삶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거짓 자아를
허물고 진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성령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살아납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새 마음이
생겨나게
하시는
새 마음의
성령이십니다.
기억 밖의
예수님이 아닌
살아계신
말씀과 진리로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에는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구원자를
알게되었고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방식으로
생명의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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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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