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조가 활동하는 무렵, 선종사적 배경
달마선 정통성 두고 계파 난립
신회의 6조 현창 운동에 자극
우두종·정중종·보당종 등 등장
마조 때에 비로소 선종 완성
서민적 풍조에 마조선 확산
지난주에는 마조가 활동하기 이전, 전반적인 불교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당나라 초기, 교종은 왕실과의 접촉으로 왕권의 도움이 컸으며, 그 반동으로 불교학이 발달해 최극점을 이루었다. 반면 선종은 발달초기 단계로서 교단으로서 확립이 미흡한 상태였으며, 선사상 측면에서도 진보적인 정립은 되지 못했다. 이번 주는 선종사 측면에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이전에 언급했지만, 4조 도신과 5조 홍인의 동산법문에서부터 승가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 5조 홍인 문하에서 북종[北宗, 神秀]과 남종[南宗, 慧能]으로 나뉘게 된다. 이 점은 혜능의 제자인 하택 신회(670∼762)에 의해 나눠졌다. 곧 신회는 장안·낙양에서 활동하던 신수 계를 겨냥하며, 혜능을 6조라 추켜올리는 현창운동을 통해 자신이 7조임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단순히 6조 현창운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회의 활동을 계기로 선종 각파에서도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강소성 남경 우두산에서 일어난 우두종에서도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우두종의 우두법융(594〜657)은 4조 도신의 제자로서 남종과 북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두종은 6조 현창운동에 자극받아 달마의 심법을 내세우며, 자파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두종은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반야공관의 선사상을 내세웠다. 후대 규봉종밀이 선사상의 체계를 세웠는데, 우두종을 교종의 공종(空宗)에 비견하였다. 우두종의 선사상은 이후 마조선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우두종의 2조인 윤주지암(577~654)은 제자에게 법을 전하고, 석두성(石頭城)으로 들어가 나인(癩人)들과 함께 생활했다. 마조와 동시대 인물로는 7조인 경산 법흠(714~792)이 있는데, 마조와 매우 절친한 도반이다.
우두종이 중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무렵, 사천성(泗川省) 성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선종이 정중종(淨衆宗)과 보당종이다. 이 또한 남종과 북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정중종은 신라인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이 일으킨 선종이다. 무상의 법맥은 5조 홍인–지선–처적–무상이다. 무상대사는 우리나라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이다. 마조가 이 무상대사의 제자라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천여 년이 흐른 근자에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 무상은 사천성 성도에서 활동했으며, 선종의 한 일파를 이루었다. 보당무주(714∼774)가 무상의 법맥을 받아 선법을 펼쳤는데, 바로 보당종이다. 무주 또한 자파의 선종 계보를 강력히 주장했다.
마조 당시 불교사를 언급하며, 법상종의 현장이나 화엄종의 법장 등이 왕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선종에서도 몇 선사들이 왕권과 결탁했다. 대통 신수의 경우, 측천무후나 중종 또는 현종의 즉위에 진력한 장설(667∼730) 등과 가까웠다. 또 하택신회는 신수의 신자였던 장설·왕거(王琚, 656~746)와 가까웠는데, 이들은 측천무후·중종·현종의 측근이었다.
한편 그 반대인 이들이 있다. 신수·신회 이전인 4조 도신은 태종이 세 차례나 입궐할 것을 권했으나 한사코 거절했다. 화가 난 태종이 네 번째 입궐할 것을 권하며 ‘이번에 입궐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는데도 도신은 굴하지 않고, 쌍봉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6조 혜능도 몇 차례 왕궁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선종은 달마를 초조로 하고 있지만, 선종이라는 종파로서의 완전한 성립은 아니다. 마조 이전의 여러 선종을 정리해보자. 달마와 그 제자들을 달마종·능가종이라 불렀고, 4조 도신과 5조 홍인에 이르러서는 ‘동산교단’이라고 했으며, 그 이후 남종·북종·우두종·정중종·보당종·하택종이 발전하였다. 이 시대를 지나 마조 교단인 홍주종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종으로서 사상적·역사적·교단사적인 측면에서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마조와 그 이후 교단에서부터이다. 또 이를 기점으로 이론적·권위적인 교학불교에서 실천위주의 불교가 변형되었다. 한편 안사의 난으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도 지방 중심적·서민적인 사회풍조가 만연되는 시기였으므로 중국 전 지역에 걸쳐 마조 선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정운 스님 동국대 강사 saribul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