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名品)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씁시다
"이 추리닝은 댁이 생각하는 그런 추리닝이 아냐.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추리닝이야."
십여 년 전 드라마에서 등장한 이 대사 이후
‘이태리 장인의 한 땀 한 땀’은 명품을 얘기할 때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수식어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태리 장인의 한 땀 한 땀’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쓰기가 민망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 2,600유로(약 385만 원)에 판매되는
디올(Dior) 가방의 원가가
53유로(약 8만 원)이라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가방은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이태리로 건너간 불법체류자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24시간 쉴 새 없이
기계를 ‘드르륵드르륵’ 가동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명품 하청업체의 노동 착취를 조사한
법원의 판결문으로 알게 된 내용으로
문제의 가방은 모델코드 ‘PO312YKY’로 알려졌습니다.
이른바 명품 산업에 대한 무성한 소문 중 하나가
이태리 어느 지역은
중국인지 이태리인지 모를 정도로 중국 노동자가 많은데,
그곳의 명품 하청 공장은
중국 노동자들로 거의 다 운영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Made in Italy’가 무늬만 그렇다는 거지
사실은 중국 노동자가 만든 이태리 제품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앞선 판결로 소문이 상당 부분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셈입니다.
과거에 부모님 세대가 “만년 구짜일세.”라며
아껴 들고 다녔던 품질과 내구성을 요즘 명품에서는
왠지 느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명품(名品)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작품’입니다.
이름난 디자이너가 직접 고객의 치수를 재고 재단을 해서
제작한 드레스라면 명품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오래전에 필자가 진행하는 방송에서
이태리 구두 장인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손님이 오면 우선 석고로 발 모양을 떠서
그 모양으로 구두골을 제작합니다.
손님의 발 모양에 맞춰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100% 맞춤형으로 구두를 제작하는 데,
한 켤레를 완성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국내에도 같은 방법으로
신발을 제작하는 분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제품은 명품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하지만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들을
명품이라고 부르기엔 호칭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물며 근로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하청 공장에서
불법체류자들에게 값싼 임금을 주며 마구 찍어내는 물건을
명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단 이번에 문제가 된 디올 백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명 이태리 브랜드 제품이
더 이상 명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는 생각입니다.
전 세계의 명품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LVMH(모에헤네시 루이비통)의 2000년도 매출액은
약 106억 유로였는데 2023년 매출액은 약 719억 유로로
7배나 늘었습니다.
이 기간 전 세계적으로 사치품의 수요가 늘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니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서 만들다가는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마구 찍어내듯이 제작을 해야 하는데,
값싼 노동력을 찾다 보니
중국과 필리핀 같은 동남아가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하지만 현지에 공장을 세워 made in China가 되면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도 가고 무엇보다 비싸게 팔 수가 없으니
made in Italy를 고수하면서
중국 노동력을 이용하는 전략을 택해서
수요도 감당하고 이윤도 극대화하는 해결책을 찾은 겁니다.
결국 중국 소비자는 이태리에 불법 체류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자국민이 만든 껍데기는 made in Italy,
실상은 made in China 제품을
비싸게 사서 들고 입고 신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수작업으로 제작한다는
에르메스(Hermes)의 버킨백과 캘리백도
한 해에 무려 12만 개가 제작된다고 합니다.
물론 12만 개나 제작하는데도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연 1년이면 12만 개,
10년이면 120만 개가 세상에 나오는 제품을
명품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면 생산 능력에 맞게
1년에 12만 개로 수량을 제한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세상에 넘쳐나는 제품을
명품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명품에 열광하고 명품을 구매하며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명품이 지닌 풍부한 가치 때문입니다.
명품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들에 의해
최고급 소재로 수준 높은 제작과정을 거쳐 탄생합니다.
아무리 인기 있고 수요가 많아도 소량 생산을 원칙으로 하기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일반 제품과 달리
흔히 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큽니다.”
지학사의 <중학독서평설>에서 명품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한 내용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럽 브랜드 중
이 기준에 맞는 명품이 있긴 한 건지 궁금합니다.
- 박상도님의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