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로(그리고 고고학자들이 옛 배 안이나 그 주변에서 찾아낸 유물들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후기 고리(高麗)[왕건이 세운 나라] 중기/후기에 살았던 후기 고리 사람들은 “청동 숟가락”을 비롯한 청동 식기도 썼다.
2. 지금으로부터 799년 전(또는 872년 전)인 후기 고리 중기/후기에 살았던 후기 고리 사람들은 곶감도 만들어 먹었다(그러니까, 곶감은 근세조선 때부터가 아니라 후기 고리 때부터 만들어 먹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배가 고파서 사람의 집에 사는 송아지를 잡아먹으려고 뫼(山)에서 내려온 줄범(“줄무늬가 있는 범”이라는 뜻. “호랑이”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이 초가(草家) 앞으로 왔는데,
집 안에서 아이가 울며 떼를 쓰는 것을 들었고, 아이의 할머니가 “너 자꾸 울면 줄범이 잡아간다!”하고 겁을 줘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결국 할머니가 “옛다, 곶감이다!”하고 말하며 곶감을 주니까, 그제야 아이가 울음을 그쳤고,
밖에서 그 모든 말을 들은 줄범은 <곶감이 누구지? 나보다 더 무서운 놈인가?>하고 생각하며 의아해하고, 바로 그때 소를 훔치러 초가로 찾아온 소도둑이 (어두운 나머지) 줄범을 소로 잘못 알고 담을 넘어 줄범의 등 위로 올라타자,
줄범이 소도둑을 곶감이라고 생각하고 벌벌 떨고, 소도둑은 자신이 소가 아니라 줄범의 등 위에 올라탔음을 뒤늦게 알고 <아이고, 이러다간 줄범한테 잡아먹히겠구나!>하고 생각하며 벌벌 떨며,
그 때문에 줄범은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고, 소도둑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줄범을 꼭 끌어안고 악착같이 매달렸으며,
그런 식으로 달리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긴 소도둑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뒤, 줄범이 자신을 보기 전에 나무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줄범은 <드디어 곶감이 나한테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안도한 뒤 털퍼덕 땅바닥에 드러눕고,
그때 토끼가 줄범에게 와서 <왜 그러고 계세요?>하고 물어보자, 줄범이 <말도 마라. 난 곶감에게 붙잡혀서 죽을 뻔했어!>하고 말했다.’
는 이야기(배달민족의 전래동화인 [호랑이와 곶감]이야기)는 근세조선 때가 아니라 후기 고리 때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배달민족이 후기고리 때도 곶감을 만들어 먹었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에 곶감을 집어넣는 건 당연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는 못해도 800 ~ 870년 전, 아니 그 이전에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
3. 후기 고리 사람들은 고려청자만 쓴 게 아니다. 그들은 토기보다는 단단하고 수준 높은 흙그릇이지만, 자기(瓷器. 사기그릇)보다는 수준이 낮고 아름답지 않은 흙그릇인 도기(陶器. ‘오지그릇’이라고도 한다. 항아리나 장독을 비롯한 옹기[甕器]도 이에 포함된다)도 만들어서 썼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보통 사람들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청자 대신 도기를 썼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모든 후기 고리 사람들이 청자를 썼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옛 지배층이 쓰던 물건(예를 들면, 청동 거울이나 의자왕의 바둑판이나 신라의 금관이나 후기 고리의 상감청자)을 보고 그것이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고루 쓰던 물건이라고, 그러니 과거는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며 많은 이가 행복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고대의 궁궐은 화려했으나, 백성들의 집은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었다는 걸, 그리고 후자가 더 많고 더 오랫동안 이어졌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평범한 옛 사람들의 유물인 후기 고리의 도기를 말할 때 이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4. 후기 고리 중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청어/전어/밴댕이/조기”를 먹었고, 이들을 뒤섞어서 항아리 안에 넣은 뒤 소금에 절여 ‘잡젓’(“잡[雜]”이 ‘섞이다/뒤섞이다.’라는 뜻이고, ‘젓’은 ‘젓갈’을 줄인 말이니, 이는 ‘여러 물고기를 뒤섞어서 담근 젓갈’이라는 뜻이다)을 담가 먹었다. 이들이 잡젓을 만들어 먹은 까닭은, 전어와 밴댕이가 쉽게 썩는 물고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물고기들을 소금에 담가 썩는 것을 막고, 그것들을 ‘삭혀서(발효해서)’ 젓갈로 만들어 먹은 것이다. 젓갈은 후기 고리 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잡젓 뿐 아니라 새우젓도 후기 고리 시대부터, 아니 그 이전인 양국(兩國)시대(이른바 ‘남북국시대’)부터 있었던 건 아닌지. 나는 이 기사를 읽다 보면, ‘발효식품 자체가 고대나 중세부터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이들은 짐승 고기를 마음놓고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고기의 값이 비쌌을 뿐 아니라, 여름지이[‘농경’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를 할 때 부려야 하는 소나, 짐을 나르고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고 전령이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말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고, 살생을 죄악으로 여기는 불교의 교리 때문에 육식이[적어도 겉으로는, 그리고 집짐승을 대상으로는] 금지되었던 까닭도 한 몫 했다), 그 ‘대안’으로 해산물에서 동물성 단백질을 얻었고, 그 때문에 잡젓을 만들어 먹은 것이다
(이런 ‘육식 금지’가 해제된 것은 후기 고리가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속국이 된 뒤부터이다. 지배자였던 몽골 사람들이 짐승의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육식문화가 꽃핀 것이다. 크게 보면 배달민족이 불교로 개종하고 불교가 널리 퍼지기 전에 있었던 육식 문화가 ‘되살아난’ 셈이지만!)
5. 후기 고리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말린 뒤 어포(魚脯. 생선살로 만든 포)를 만들어서 먹었다. 불교승려들은 예외였겠지만, ‘속세 사람들’인 일반인들이나 황족/왕족/귀족들은 이 어포를 먹었다. 중세시대이자 8세기 전의 사람들인 후기 고리 사람들은 어포, 그러니까 생선포를 만들어서 먹었고, 서기 20~21세기의 한국인들은 쥐포를 만들어 먹으니, 과연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어포뿐 아니라, 다른 “건어물”도 후기 고리 사람들이 만들어서 먹은 점을 생각하면, “건어물”을 반찬/술안주로 쓰거나 국/찌개를 끓일 때 집어넣어 조미료로 쓰는 배달민족의 문화는 후기 고리 때에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6. 오늘날의 한국인은 ‘된장’하면 ‘(근세)조선의 된장’을 떠올리나, 사실은 후기 고리 사람들도 된장을 담가 먹었고, 그것을 항아리 안에 집어넣어 저장했다. 다른 나라의 기록에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은 콩으로 음식을 잘 만든다.”고 했으니, 어쩌면 된장은 고구리 때부터, 그러니까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고, 후기 고리 사람들은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7. 후기고리 사람들은 “쌀”과 “콩”만 먹은 게 아니라, “메밀”도 길러서 먹었다. 나는 지난해에 이 게시판에 ‘장인용’ 선생이 쓰신 글인 「 로마제국의 영광, '빵심'에서 나왔다! 」 를 올렸는데, 그 글에는
“메밀의 원산지는 동아시아 북부로 추정되며, 만주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다. 환경 적응력이 밀보다 강해서 기후가 나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도 메밀을 심는 지역은 평안도의 산지나 강원도, 제주도 등 다른 곡식을 재배하기 어려운 곳이다.”
“메밀은 밀보다 더욱 야생종에 가깝기 때문에, 약간의 독이 있다.”
“메밀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이 여진족이었다고 한다. 여진족은 메밀에 독이 있어 이것만 상식하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메밀을 많이 먹고, 몸이 나빠지라.’는 뜻에서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메밀을 길러 국수나 묵(나아가 전병 – 옮긴이)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늘 상식하던 무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무에는 이 메밀의 독을 중화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기에 아무런 탈이 없이 이 메밀을 즐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메밀의 독성을 생각하면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소리다. 메밀 냉면에 꼭 함께 먹는 무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메밀이 ‘만주’에서 코리아(Corea) 반도에 전해진 때가 후기 고리 때인지, 아니면 근세조선 때인지를 알 수 없었으나(두 나라 다 전기에는 주션 – 한자로 ‘여진[女眞]’이라 쓰는 민족의 참 이름 – 족과 피 튀기며 싸웠기 때문이다), 후기 고리의 배에서 “메밀”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메밀이 코리아 반도로 전해진 때는 후기 고리 때이며, 더 정확히는 후기 고리 조정이 동북쪽으로 북진정책을 펼친(그러니까 후기 고리와 주션족이 본격적으로 충돌/갈등하기 시작한) 서기 11세기 초이고,
마치 거북섬(‘아메리카’)에서 유럽에 건너간 감자와 고구마와 호박과 옥수수가 널리 퍼져서 많은 유럽 백인 여름지기(‘농민’/‘농업인’/‘농부’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들이 그것을 기르게 되었듯이,
일단 메밀이 후기 고리로 내려오자, 그 곡식은 “평안도의 산지나 강원도”처럼 그다지 기름지지 않고 곡식이 자라기 어려운 땅에 널리 퍼졌고(농경사회의 특성상, 대부분 백성들이기도 한 여름지기들은 일단 먹을 수 있는 식물이면 그게 어느 나라 것이건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기르고 본다. 그래야 먹고 마실 것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곡식으로 세금을 내고, 툭하면 자연재해로 여름지이를 망칠 수 있는 – 그래서 늘 먹을 것이 모자라는 - 현실 속에서 살다 보니, 설령 적인 주션족이 준, ‘독이 든 곡식’이라 해도 꺼리거나 가릴 형편이 못 되었으리라. 말할 것도 없이, 주션족은 후기 고리 사람들에 대한 반감/적개심 때문에, ‘먹고 죽어버려!’하는 생각을 품고 메밀을 전해주었겠지만 말이다),
후기 고리 사람들은 처음에는 메밀의 독성 때문에 당황했으나, 곧 - 불교가 들어온 때(서기 4~6세기?)부터 기르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살던 때에는 “중요 채소로 취급(<네이버 지식백과>)”되었던 – 무로 만든 무김치를 곁들여 먹음으로써 독을 중화하는 데 성공했고,
따라서 장 선생이 들었다는 메밀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실(事實)이자 사실(史實)로 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례에서 ‘적이 전해준 것이라도, 그것을 나에게 이로운 것으로 바꾸면 된다.’는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8. 후세 사람들인 우리들의 막연한 상상과는 달리, 후기 고리 사람들은 고급 청자를 “참기름병과 꿀단지”로 썼다. 그러니까, 청자는 단순한 ‘관상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병이나 단지로 쓰이기도 한 그릇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청자 찻잔이나 청자로 만든 주전자나 청자 밥그릇이나 청자 연적(硯滴. 벼룻물을 담는 작은 그릇. 옛날에는 이 그릇에 담긴 물을 벼루에 부은 뒤, 먹을 물이 든 벼루에 갈아서 먹의 가루와 물을 섞어 먹물을 만든 다음 붓으로 그 먹물을 찍어서 붓글씨를 썼다)이나 청자로 만든 베개나 청자로 만든 의자(등받이나 다리는 없다)나 청자로 만든 장구(단, 소리를 내는 부분에는 가죽을 씌웠고, 그 가죽을 두드려서 소리를 냈다)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옛날은, 과거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상상하고 추측하고 짐작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고, 논리와 이치를 바탕으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과장인지를 따져봐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를 배울 때 명심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9. 후기 고리 사람들은 참기름과 꿀을 먹었는데, 이 가운데 꿀은 사치품이어서, 부자나 귀족이나 왕족/황족만 먹을 수 있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당분이 든 음식, 그러니까 단 음식은 사치품이었고, 이는 후기 고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10. 후기 고리에는 종이가 있었고, 그것을 후기 고리 사람들이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죽찰(대나무 조각)이 종이와 함께 쓰였고, 종이‘만’ 쓰지는 않았다.
이는 근세조선 왕실이 세자의 책봉을 다룬 문서를 종이가 아니라 목간이나 옥책(玉冊)으로 만든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후기 고리 이전인 양국(남북국)시대나 삼국시대에는 목간이 많이 쓰인 사실을 생각하면, 종이가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종이가 들어온 뒤에도 실생활에서는 목간이나 죽간이나 죽찰을 더 많이, 더 자주 썼고, 세월이 흐르면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고 종이가 더 널리 퍼진 뒤에는 종이로 문서나 책을 만드는 비율이 높아졌다가, 근세에 와서야 종이책이나 종이문서가 다른 것들을 몰아내고 뿌리내린 게 아닌가 한다.
후기 고리는 목간/죽간을 많이 쓰던 고대와, 종이를 많이 쓰던 근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과도기’고, 그것은 후기 고리의 죽찰로 입증된다.
11. 후기 고리 시대 사람들은 장기(將棋)를 두었고, 심지어 뱃사람처럼 신분이 높지 않은 보통 사람들조차도 장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배 안에서도 장기를 두었다. 사국시대인 서기 4세기의 고구리와 백제 지배층도 바둑을 두었던 걸 생각하면( 『 삼국사기 』「 백제본기 」< 개로왕 > 조 ), 그보다 8~9세기가 흐른 뒤에 살았던 후기 고리 사람들이 바둑이나 장기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아마 장기의 놀이 규칙이 바둑처럼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기 때문에, 뱃사람 같은 서민들은 바둑 대신 장기를 좋아했던 건 아닌지.
12. 후기 고리의 뱃사람들도 오늘날의 뱃사람들처럼 갑작스러운 풍랑이나 파도 때문에 배가 부서지고, 그 때문에 배가 가라앉아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을 각오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무너져내려 자신을 덮치는 물건들에 깔려 죽는 일을 겪는 것처럼, 후기 고리의 한 뱃사람은 자신이 탄 배가 가라앉을 때 “5겹으로 선적되어 있던 도자기”에 깔렸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아 죽고 말았다.
뱃일은 중세시대나 지금이나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13. 후기 고리 사람들은 나무로 빗을 만들었고, 그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빗으로 머리를 빗는다.’는 문화/관행은 후기 고리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 빗은 빗살 사이가 아주 좁고 빗살이 촘촘해서, 머리를 단정하게 빗기에는 딱 좋았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정함을 추구하는 문화는 중세시대에도 있었다.
14.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에 살았던 후기 고리 사람들도 삿갓을 만들어 썼다. 우리는 ‘삿갓’하면 근세조선 사람들이 쓰던 삿갓을 떠올리나, 사실은 중세시대부터 삿갓을 쓰는 문화가 배달민족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15. 후기 고리 사람들은 나뭇가지 뿐 아니라 “솔방울”도 땔감으로 썼다.
16. 비록 몽골제국에 항복하기 전에는 후기 고리의 불교 사원과 나라가 백성들이 짐승 고기를 먹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이를 막거나 제한했으나(요나라나 금나라나 송나라처럼 고기를 많이 먹는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대접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짐승고기를 요리해서 내놓기는 했으나, - 북송의 사신인 ‘서긍’의 보고에 따르면 – 그런 고기는 도살 솜씨가 형편없고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맛이 없었다), 후기 고리 중기의 뱃사람들은 그런 금기를 잘 지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배에서 “돼지/사슴/개/고라니/오리/닭”의 뼈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식물성 음식을 구하기가 힘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다 보니, 이것저것 가려가면서 먹을 형편이 못 되었고, 뱃일을 하다 보면 몸의 힘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했으리라.
(단, 그런 그들도 소와 말의 고기는 먹지 않은 걸 보면, 그들도 그 두 짐승을 죽이는 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짓’으로 여겼던 게 확실하다)
후기 고리 사람의 뱃사람들은 오늘날(서기 2023년 현재)의 한국인들과는 달리 “사슴”과 “개”와 “고라니”의 고기를 먹었고, 이는 조상의 입맛과 후손의 입맛은 다를 수도 있음을 설명하는 사례다(북송 이전의 ‘한족[漢族]’들도 기름에 볶거나 튀긴 ‘중화요리’는 먹지 않았고, 로마 제국 후기/말기에 살았던 동로마 사람들은 근세나 근대의 유럽 백인들과는 달리 ‘매운 맛이 나는 향신료가 잔뜩 든 요리’를 좋아했으며, 중세시대 초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의 아랍인들은 그 이전에 마셨던 술들을 버렸고, 베다 시대에 쇠고기를 비롯한 온갖 고기를 좋아했던 아리아인들은 고대 말 불교나 자이나교로 개종한 뒤에는 – 또는 그 뒤 베다교가 힌두교로 탈바꿈해서 나타난 뒤에는 – 쇠고기를 먹는 문화를 버리거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사례가 특이한 건 아니다. 후손이 반드시 조상이 하는 일을 이어받지는 않고, 조상이 후손과 완전히 똑같은 문화를 지닌 것도 아니며, 둘이 지닌 문화가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은, “과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선 나라’다.”라는 말이 왜 옳은지를 가르쳐준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다른 인종/다른 민족/다른 지역 출신 사람들/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의 ‘동족’인 동시에 ‘선조’인 사람들에게도 ‘낯선 사람들’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잊지 말자!).
나는 근세조선 시대나 개화기나 대일 항전기(서기 1910~1945년)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아직도 사람들에게는 낯선 후기 고리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이 글을 썼는데,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이 후기 고리 사람들의 생활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여러분이 그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빈다.
“이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 단기 4356년 음력 5월 3일에,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