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 소녀
오 세 윤
지난 금요일(2011. 11. 25), 남산 아래 ‘문학의 집’에서 제 25회 이대동창문인회 작품집 『첫 클릭 클릭』의 출판기념회를 겸하여 제 15회 이화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식장을 가득 메운 이들은 거의 모두 본교 출신들로 시, 소설, 수필, 동화, 희곡, 평론 등 각기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오늘의 수상자인 박영자 수필가와의 친의로 나는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대표하여 같은 수필문우회 동인 몇 사람과 함께 그 자리에 동참했다.
식이 시작되고 10여분쯤 지나 노인 한분이 식장에 들어섰다. 식의 진행을 돕던 이들이 황급히 일어나 그분을 마중해 안쪽 좌석으로 안내했다. 족히 6척이 될 큰 키에 마른체구를 한 노인은 꼿꼿한 자세를 불안하게 유지하며 보폭 좁은 걸음걸이로 걸어가 안내받은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곁에 서서 존경어린 눈으로 그분을 주시하던 문우가 은사이신 윤원호 교수님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알려줬다. 오늘의 행사를 말씀은 드렸지만 다발성경화증으로 몸이 불편한데다 연세가 많아 정작 오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며 무척 감격스러워했다.
심사평이 끝나고 시상식이 이어졌다. 회장으로부터 상패를 받아 든 오늘의 주인공 박영자수필가가 은회색 한복에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수상소감을 시작했다.
여사는 이 자리에 서게 해준 분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한 뒤, 강인한 의지와 인고로 자신을 키워낸 어머니와 오빠(현재 워싱턴 거주) 단 세 식구로 지낸 어린 시절을 말머리로 자신의 과거사를 펼쳐나갔다.
24세에 홀로 되어 함경북도 청진에서 혹독한 추위 속에 남매를 키워낸 어머니는 광복에 즈음하여 행해진 B29 폭격에 놀라 그길로 사선을 뚫고 남하한다. 발이 부르트게 걸어 3·8선을 넘은 세 식구는 고향 김천으로 내려가는 대신 서대문 송월동에 거접한다. 어머니는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소규모의 버클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주인공과 오빠는 학교를 다니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그 당시를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른 새벽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고 오빠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드럼통위에 올라 앉아 온종일 해를 따라 돌며 하얀 신작로위에 엄마와 오빠가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주지도 않고 가엽게 여기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강인하고 엄격했다. 드럼통 위에서 나는 외로움을 배우고 외로움을 이기는 법을 익히며 그리움의 정체를 가슴 깊이 재워갔다.” 고 -.
서대문초등학교 5학년 때 주인공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6·25 전란으로 인민군치하가 된 장안에서 3개월을 공포와 배고픔 속에 지내고 9·28 수복을 맞은 주인공의 가슴엔 한 장의 흑백사진이 남는다. 수복 후 폐허화된 서울 도심 한 귀퉁이에 깡똥 치마 흰 저고리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채 만국기 앞에 선 열두 살 소녀 사진. 총칼보다 무서운 게 배고픔이던 때의 흑백 슬라이드 사진 한 장.
9·28 수복이 되고 나서 어머니는 기왕에 운영하던 버클공장의 공장장과 함께 집에서 재봉틀로 유엔 참전국 국기를 만들었다. 이를 오빠와 영자가 빈 레이선 박스에 담아 오빠는 종로로 영자는 남대문 쪽으로 갖고 나가 유엔군들에게 팔았다. 부서진 건물의 엿가락처럼 휘어진 벽돌기둥에 버려진 전깃줄을 이리저리 얽어매고 기들을 걸어놓으면 오색이 바람에 팔락거리며 지나는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만국기가 바람에 유난히 펄럭이던 날, 어린소녀가 장사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미군 종군기자 한 사람이 지나가다 멈춰 서서 슬라이드사진기로 영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갔다.
그가 들이대는 사진기 앞에 부끄러워 부서진 건물 기둥 뒤에 숨던 영자는 어느 순간 환하게 웃으며 나타나 모델이 된다. 잘하면 만국기를 두어 개쯤 팔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린 소녀다운 호기심에서였는지는 본인이 밝힌 바 없어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전자가 아니었을까 싶은 게 나의 추측이다. 장사가 잘되는 날이면 남대문시장 노점상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사과나 밤, 찹쌀꽈배기를 사들고 가는 속 깊은 딸이었으니 그 순간 어찌 셈 빠른 효녀머리에 찹쌀꽈배기가 떠오르지 않았으랴.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2011년 6월, 이제는 원로수필가가 된 73세의 박영자는 흑백사진 속 영자를 국립역사박물관의 6·25전란 사진전시회에서 뜻밖에 만난다. 그때의 종군기자 존 리치(93세, 현재 미국 메인주에 생존)가《칼라로 보는 한국의 전쟁사》라는 책을 내면서 만국기를 파는 영자의 사진을 싣고, 그 원판을 박물관에 보내온 것.
초라한 행색의 한 소녀를 통해 고난의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 얼마 전 사석에서 주인공은 사진을 내보이면서 ‘그날’을 말했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전쟁은 자기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며, 굶주려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았었다며, ‘그날’을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왔노라고 -.
주인공이 내려온 단상에 노교수가 예의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무슨 말씀을 하려는가, 말씀이나 제대로 할까. 하지만 기우였다. 또렷한 목소리로 먼저 “박영자 양”하고 주인공을 호칭한 뒤 교수는 발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무엇이 그녀에게 오늘이 있게 했나를, 그녀의 인성과 수필을 이야기했다.
첫째 여유가 있다고 말씀했다. 누구의 말도 차분히 다 들어주는 폭이 있고, 한쪽에 조용히 자리하면서 결코 부회뇌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수필은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는 말씀과 함께 줏대가 있고 소신을 가지고 쓰는 드문 수필가라며 간결하게 수상자를 칭찬했다.
노교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나는 그 옛날의 한 여자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동갑나기인 우리들의 ‘그날’을, 신문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신문이 발간되어 나오기 무섭게 30부, 50부를 받아 들고 거리를 뛰어가면서 팔던 나의 열두 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문이오, 신문! 오늘 나온 경향신문이오!”라고 소리치며 덕수궁을 지나고 남대문을 비껴 돌아 염천교 쪽으로 달리다 부서진 건물 모퉁이에서 만나던 여자아이. 늦가을 선득한 바람 속에 홑저고리 차림으로 서서 양손에 든 만국기를 흔들어대며 “덴 딸라, 덴 딸라!” 하고 새되게 외치던 여자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국기 살 사람을 찾아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빈약한 어깨위에 촐랑거리던 갈래머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전깃줄에 줄줄이 걸린 만국기가 오색으로 휘날리던 모퉁이를, 을씨년스럽던 그날의 하늘을 떠올리고 있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