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나로크 (Ragnarök) 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말이며 북유럽의 많은 신들이 마지막 날에 대대적으로 싸워 다 죽게되는 사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신화로나 혹은 게임으로나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잘못된 발음이나 뜻이 퍼져 있습니다.
우선은 잘못된 발음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Ragnarök를 라그나뢰크라고 잘못 읽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것은 모음 ö을 독일어에서처럼 움라우트로 잘못 생각한 결과입니다. 아이슬란드어가 게르만어의 하나이긴 하지만 철자 ö는 독일어와는 달리 움라우트 "외" 소리가 아닙니다. 아이슬란드어의 ö는 우리말의 "오"를 입을 좀 더 크게 벌린 소리에 가깝기 때문에 Ragnarök는 라그나로크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의외로 전문적인 책에서도 잘못 읽는 실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대 아이슬란드어 Ragnarök는 후대에 Ragnarøkkr (라그나뢰크르)라고 잘못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철자 ø가 바로 독일어의 움라우트 모음 ö와 같은 발음입니다. 즉 한글로 표기를 정확하게 하려면 원래의 정확한 단어인 Ragnarök를 읽어서 라그나로크라고 표기하든지, 아니면 후대의 잘못 기록된 단어인 Ragnarøkkr를 읽어서 라그나뢰크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라그나뢰크라고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체 불명의 표기가 되어 버립니다.
라그나로크와 라그나뢰크르는 뜻 자체도 다릅니다. 원래의 단어인 Ragnarök 라그나로크는 ragna 와 rök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ragna (라그나)는 통치자 / 신(神) 이라는 뜻의 명사 regin의 복수소유격이라고 불리는 문법형태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regin은 사전에 나오는 모양이고, ragna는 regin이 다른 단어에 붙어서 통치자들의 / 신들의 란 뜻으로 쓰일 때 변하는 형태입니다. 뒤에 붙은 rök (로크)는 원래 놀라운 일을 뜻하며 Ragnarök에서는 엄청난 일 중에서도 특히 신들이 마지막날 싸우는 대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딱히 맞는 번역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신들의 운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신화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앞의 ragna는 바뀌지 않았는데 뒤에 붙은 rök는, 후대에 황혼이란 뜻의 명사 røkkr (뢰크르) 로 바뀌게 됩니다. 황혼이란 뜻이 마지막이란 뜻과 일맥 상통하며 또 매우 시적인 표현이어서 그런지 신들의 황혼이란 표현이 더 널리 퍼지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황혼이란 말을 들었어도 신들의 운명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을 겁니다.
번역을 할 때 신들의 황혼 또는 신들의 운명 어느 쪽을 택해도 괜찮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신들의 황혼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단어는 Ragnarøkkr (라그나뢰크르)이며, 신들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Ragnarök 라그나로크란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발음은 라그나로크인데도 널리 알려진 번역은 신들의 황혼이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나 라그나뢰크르나 별로 차이도 없으니 대수냐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두 단어는 분명 기원과 뜻이 다른 단어이니 정확한 구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잘못 쓰이는 구절이, 실제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인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와는 뜻이 좀 다르듯이요. 이런 작은 부분의 차이까지 잡아내는 꼼꼼함이 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