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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 |
■ 위치와 창건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리산(摩利山) 동쪽 화도면 사기리 464-3번지에 자리한 정수사(淨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마리산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사찰이어서 등산객들이 피곤한 다리를 쉬며 법당을 참배하곤 한다. 특히 법당 앞 마당에서 훤히 트인 서해바다를 보며 호흡을 갈무리하노라면 세파에 찌든 티끌이 사라지고, 날숨과 들숨이 오가는 사이에 무심의 경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조선 초인 고승인 함허선사가 수행하던 곳을 기리기 위해 이름 지어진 함허동천(涵虛洞泉) 계곡은 정수사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깊고 물이 더 없이 맑아 여름철 피서지로도 이름 높다. 정수사는 신라시대 639년(선덕왕 8)에 회정(懷正)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낙가산의 회정선사가 마리산 참성단(塹城壇)을 배관(拜觀)한 뒤 그 동쪽 기슭에 앞이 훤히 트이고 밝은 땅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면서 사찰을 짓고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03년에 지어진 <정수사산령각중건기(淨水寺山靈閣重建記)>와 <강도지(江都誌)>에는 창건년대를 정확히 밝힐 수 없다고 하였으니, 신라시대의 창건설은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사찰이름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는 조선시대 1426년(세종 8)에 함허 기화(涵虛己和)선사가 중창할 때 법당 서쪽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이름을 '정수(精修)'에서 '정수(淨水)' 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강도지>에 보이는 정수사와 관계된 함허스님에 대한 설화에서는 함허스님을 원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즉 '고려말 원나라 승려이자 한림학사였던 함허 득통이 이곳에 와서 도를 닦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찾아와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해다고 한다. 그러나 득통이 그 청에 응하지 않자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어 돌로 변했는데 지금 절 앞 극포(極浦)가운데의 세칭 각씨암(閣氏巖)이 그것이다' 라는 것이다. 함허스님은 우리나라의 실존 인물로 여러 책에 행장이 전해오고 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남아있는 등, 중국 원나라의 승려는 물론 아니다. 이 기록은 정수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로 이름을 크게 남기고 절을 중수한 함허스님의 발자취가 사찰 곳곳에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전기의 역사는 전해오는 자료가 없어 잘 알 수가 없다. 1848년(헌종 14)에 이르러 비구니 법진(法眞)· 만흥(萬興)스님 등이 화주가 되어 법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부화주(副化主)비구니가 20여명, 목수 165명, 그리고 인근 동네의 자원부역군(自願赴役軍) 305명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1878년(고종 15)에는 비구니 계흔(戒欣)스님이 나이 70의 노구를 이끌고 제자 성수(性修)스님 등과 함께 불상을 개금하고,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도 등 각단의 불화를 새로 그려 봉안하였다. 이 불사는 홍제 보혜(洪濟普慧)등이 증명하고 금어(金魚)인 용계 서익(龍溪瑞翌)· 대허 체훈(大虛체訓)등이 조성하였다 또한 1883년(고종 20)에는 화주 비구니 근훈(根訓)스님이 가람을 수선하였다. 그 5년 후인 1888년(고종 25)에는 비구니 정일(淨一)스님이 수좌 연오(演悟)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음존상 1위와 후불탱화 1축을 새로이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정일스님은 더욱 용맹심을 발하여 여러 사찰과 촌락을 두루 다니며 시주 받은 돈과 면포로 재목과 기와를 마련하여 1903년(고종 29)에는 산령각(山靈閣)을 중건했으며,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고, 그리고 1916년에는 불상개금과 각단의 불화를 봉안하였다. 당시 정수사에서 독서하고 있던 거사 이건승(李建昇)은 정일스님이 기울인 불사에 대해 "뜻을 한가지로 오로지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라고 구한말에 이르러 정일스님의 큰 발원과 노력으로 크게 중창되었다. 1937년에는 당시 주지 김선영(金善英)스님이 본산 주지 김정섭스님과 상의하여 대웅전을 당국의 보호 건물로 편입시켰는데, 당시에는 대웅전· 산령각· 큰방· 노전· 요사 등이 있었다. 근래에는 1974년 소실된 산신각을 산성각으로 고쳐 지으면서 보다 넓게 확장했고, 1992년에는 법당 앞에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함허선사의 수행을 기리기 위해 절 근처에 있는 그의 수도처인 함허동천이 경기도의 향토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위의 연혁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수사의 연혁 정수사의 연혁 년 주 요 사 항 639년(선덕왕8) 회정(懷正)선사가 창건. 1426(세종8) 함허 기화(函虛己和)선사가 가람 중창. 1848년(헌종14) 법진(法眞). 만흥(萬興)스님이 가람 중수. 1878년(고종15) 계흔(戒欣)스님이 불상개금과 각단 불화 조성. 1883년(고종20) 근훈(根訓)스님이 중수. 1888년(고종25) 정일(淨一)스님이 관음상과 후불탱화 조성. 1903년(고종29) 정일스님이 산령각 중건. 1905년 정일스님이 법당 중수. 1916년 정일스님이 불상개금, 각단 불화 조성. 1927년 광순(光淳)스님 주지 취임. 1930년 응택(應澤)스님 주지 취임. 1933년 충만(忠萬)스님 주지 취임. 1936년 선영(善英)스님 주지 취임. 1937년 대웅전이 보호 건물로 지정됨. 1992년 부처님 진신사리탑 건립. ■ 주요인물 ■ 성보문화재 |
![]() 정수사 ![]() 대웅보전의 연꽃창살 ![]() 삼선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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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 |
■ 위치와 창건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635번지 정족산성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를 가진 섬 강화도, 중부지방 전역의 물에 한데 모아 오는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합해져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물머리를 막고 있는 이 섬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소 주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군이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봉우리씩 맡아 쌓게 삼랑성(三郞城)이 있는 민족의 성지이기도 하다.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리산(摩利山)이 있고, 그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鼎足山)이다. 전등사는 삼랑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성문 동문(東門)은 암문(暗門)이고 남문은 1977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북쪽으로 대조루(對潮樓)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여기서 한단 높은 곳에 남향한 대웅보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서쪽으로는 향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명부전(冥府殿). 적묵당(寂默堂). 종각이 있다. 다시 서북쪽으로 한층 높은 곳에는 삼성각(三聖閣)이 위치하고 있어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1942년 편찬된<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의하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그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했으며, 또 고려시대 고종과 원종 때에 가궐(假闕)을 짓고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베푼 다음, 1266년(원종 7)에 사승(寺僧)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창건에 관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예컨대 강화도가 고구려 영토가 된 것은 소수림왕 11년보다 약 100년이 지난 475년(장수왕 63)의 일로서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백제의 불교공인은 384년]로 보아서 백제 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아도화상의 창건이라는 전설을 부연시킨 후대의 윤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에 제작된 연기(年記)를 지닌 향로(香爐)에는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향로는 일제시대때 반출되어 1910년에는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에는 그 즉위 46년(1259)에 삼랑성 동쪽에 가궐을 짓고, 1264년(원종 5) 5월에는 이곳에 대불정오성도량을 4개월 동안 설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1282년(충렬왕 8)에는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왕씨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중국의 송(宋)에 들어가 당시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가졌다는 중국 복주(福州) 동선등각원판(東禪等覺院板)의 송나라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 절에 보장했던 것이다. 그런데(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그리고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조선 전기의 지리서에는 삼랑산성이 있는 산이 정족산이 아닌 전등산(傳燈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등산을 길상산(吉祥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전등산에 있던 전등사를 길상산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사찰측의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 전등사는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玉燈)을 이곳에 시주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했다는 것이다. 혹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조계선종의 법맥과 종지(宗旨)를 천명하는데 필수적인 책이었던<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할 뿐 단정을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그후 전등사는 1319년(충숙왕 6)과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사승(寺僧)이 중창, 삼창(三創)했다고 있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근거가 되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심증만 있을뿐이며, 역시 조선시대 전기의 사찰에 한 역사를 살필 수 없음이 아쉽다. 조선시대 때에는 1605년(선조 38)에 불이 나 건물의 절반을 태웠고, 9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12월에 또다시 불이나 나머지 건물도 모두 한줌의 재로 변했다. 그러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소멸이 변하지 않는 우주의 원리인 것처럼 1621년(광해군 13)에 지경(志敬)화상이 중건하였다. 이것은 1916년 3월 12일 대웅전을 수리하던 중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양간록>의 대중질(大衆秩)에는 지경화상을 비롯하여 경화(敬和). 의상(儀尙). 응균(應均)등 24인의 전등사 승려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45인의 시주자의 명단 또한 밝혀져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국가적 기여로 인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즉 임진왜란이 끝을 맺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강화천도가 이루어지고, 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에는 또다시 강화천도를 시도하지만 왕이 미처 피난오기도 전에 길이 차단되고 강화도는 함락되고 왕실종친이 포로가 되어 결국은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렇듯 양란을 거치면서 강화도는 조정으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임을 재확인 받게 된다. 더욱이 1660년(헌종 즉위년)에는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柳심1608∼1667)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璿源閣)과 장사각(藏史閣)을 지어 왕실 세보(世譜)와 문적(文籍) 그리고 역대 조종(祖宗)의 실록을 이곳으로 이관 보장할 계획을 세운다. 1678년(숙종4)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그리고 충주사고(史庫)에 보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왜란으로 소실되자 전주사고본을 마리산 사고로부터 정족산 사고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璿源世譜)를 비롯한 왕실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장하게 된다. 이로 인해 1734년(영조 10)에는 선두포(船頭浦)의 곡식 수십 석을 하사 받기도 하며, 경기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首寺刹)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러한 사중의 대외적인 일 뿐만 아니고 사중에는 영조의 시주에 힘입어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대조루가 건립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한편 1784년(정조8)에는 조정의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40∼50칸의 정족창(鼎足倉)이 건립된다. 그 밖에 헌종과 철종 대를 지나면서 전등사는 법당 및 요사의 벽이 새롭게 도배되고, 시왕전(十王殿)이 수리되었으며 대웅전과 대조루가 중건된다 . 고종 대에는 병인. 신미양요를 치른 뒤 강화도의 방비를 충실히 하기 위해 포량고(砲糧庫)를 전등사에 세우기도 한다. 그후 약사전과 대웅전의 중수, 그리고 상단후불탱화(上壇後 佛撑畵)와 시왕개채불사(十王改彩佛事)를 하고 1884년(고종 21)에는 지장탱화의 개금과 시왕각부탱화 불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 이후의 전등사는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 하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1911년 6월 3일에 새로운 체제로 개편된 사찰령에 따른 사찰령시행규칙이 반포된 것에 기인한 것이다. 1915년 2대 주지 국창환(국昌煥)은 국고보조금 4690원 90전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이듬해 1916년 강화일원의 1200가구에서 평균 7전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를 중건했으며 그해 화주(化主) 이지영(李智永)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의 석가삼존상 및 강설당의 관음상 그리고 봉향각의 미타상 등을 개금하였다. 그 뒤 1930년에 취임한 이보인(李普仁)주지는 국고보조금 1440원과 도지방비 1500원, 기부금 5000원으로 대웅전. 극락암.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등경내의 모든 건물을 중건했으며, 1932년에도 대조루를 다시 중수했다. 1934년에는<전등본말사지>를 편찬했던 김정섭이 취임하여 경성교무원재단(京城敎務院財團)을 설립하면서 전등사 및 말사가 부담해야 했던 8600원 6전을 전등사. 화장사(華藏寺). 관음사(觀音寺). 연경사(衍慶寺). 대흥사(大興寺). 백련사(白蓮寺) 등의 6개 사찰 전답 84573평을 매각하므로써 정리했던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특히 현재 조실로 있는 서운(瑞雲)스님 등에 의해 주요 전각에 대한 해 체 및 수리작업과 중건이 자주 이루어지는 등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72년 적묵당이 해체 이전되어 1973년에 복원 완료되었고, 1975년에는 향로전이 역시 해체복원 및 단청되었다 또 1977년에는 명부전이 해체 이전되고 1979년에 적묵당이 수리되었으며 새로 지어졌다. 이해에는 또한 명부전이 중건되고 강설당이 단청 수리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극락암 삼성각이 해체됨과 아울러 증개축 되엇다. 최근의 이같은 불사는 장윤(章允) 주지스님의 노력이 많이 들어갔다. 위의 연혁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등사 연혁 년 주 요 사 항 381년(소수림왕 31)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함. 1266년(원종 7) 사승(寺僧)이 가람 중건. 1319년(충숙왕 6) 사승이 가람 중건. 1341년(충혜왕 복위2) 사승이 가람 재 중창. 1605년(선조 38) 화재로 건물이 절반이 불탐. 1615년(광해군 7) 화재로 건물이 전소됨. 1621년(광해군13) 지경(志敬)이 중건. 1749년(영조 25) 초윤(楚允)이 대조루 개축. 1839년(헌종 5) 서용(瑞龍)이 시왕전 중수. 1841년(헌종 7) 연홍(演弘)이 대조루 중건. 1855년(철종 6) 규영(奎塋)이 대웅전 중건. 1876년(고종 13)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 중건. 1884년(고종 21) 영담(映潭)이 관음전을 중건. 1911년 지순(之淳) 주지 취임. 1913년 창환(昌煥)주지 취임. 1915년 창환스님이 대웅전 중건. 1916년 시왕전과 대조루 증축 1917년 지영(智永) 주지 취임. 1922년 정해(晶海) 주지 취임. 1930년 보인(普仁) 주지 취임. 1932년 대조루 중수. 1934년 정섭(正燮) 주지 취임. 1973년 적묵당 해체복원 완료. 1977년 명부전 해체 이전, 종각 신축. 1979년 명부전 중건. 1986년 극락암. 삼성각 해체 및 증개축. ■ 성보문화재 ■ 대웅보전 ■ 약사전 ■ 명부전 ■ 대조루 ■ 선원보각. ■ 범종 ■ 법화경관 귀중한 장경판(藏經板)으로서 법화경목판 104매가 전래되고 있는데, <전등본말사지>에 의하면 이 경판은 1544년(중종 39)정수사(淨水寺)에서 개간(開刊)한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불경으로서, 이 경판은 처음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본사인 전등사로 옮겨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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