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최승로 (崔承老 927∼989(태조 10∼성종 8)
고려 초기 문신·재상. 신라 6두품(六頭品)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갔다. 총명하여 일찍부터 학문계통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고려 초기 문신·재상. 신라 6두품(六頭品)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갔다. 총명하여 일찍부터 학문계통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982년(성종 1)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을 때 성종이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자,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왕의 치적평(治績評)과 북쪽 경계의 확정·방위책, 공덕재(功德齋) 폐지, 불교 폐단에 관한 건의문과, 그 밖에 사회문제 및 대중국관(對中國觀) 등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당시 실시된 새 국가체제 정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988년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989년 태사(太師)에 추증되었고, 1033년(덕종 2)에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이 가증되었다. 998년(목종 1)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2. 최충 (崔沖 984∼1068(성종 3∼문종 22)
고려시대 문신·학자.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 본관은 해주(海州).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급제, 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3년 국사수찬관을 겸하면서 태종에서 목종까지의 7대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고려시대 문신·학자.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 본관은 해주(海州).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급제, 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3년 국사수찬관을 겸하면서 태종에서 목종까지의 7대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정종 초에는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고, 37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로 《현종실록》을 편찬하였다. 41년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事)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여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50년 서북면도병마사를 겸하면서 동여진(東女眞)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53년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훈작이 내려지고, 55년에는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숙(私塾)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썼다. 구재학당의 학생은 시중(侍中)·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沖徒)라 불렸다가, 뒤에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칭하여졌다. 문헌공도는 그때 성행하였던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로,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되어 그를 해동공자라고 일컬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무신의 난 때 많은 시문들이 불태워져 지금은 시구 몇 절과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 및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
3.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충숙왕 17∼공민왕 23)
고려 제31대 왕(1351∼1374). 이름은 전,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49년(충정왕 1) 원(元)나라에 갔다가,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妃)로 맞았다.
고려 제31대 왕(1351∼1374). 이름은 전,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49년(충정왕 1) 원(元)나라에 갔다가,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妃)로 맞았다. 원나라가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원에 반항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원나라에 다녀온 최영(崔瑩)·유탁(柳濯) 등의 보고로 원의 쇠약해 가는 진상을 파악,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52년(공민왕 1) 변발·호복(胡服) 등 몽고풍속 폐지, 56년(공민왕 5)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를 복구했다. 또한 내정을 간섭하던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했으며, 100년 동안 존속되어 오던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68년(공민왕 17)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서 명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있는 원의 잔존(殘存) 세력을 공략, 70년(공민왕 19)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고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國威)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전형권을 쥐고 있던 귀족회의 기관인 정방(政房)을 폐지, 신돈을 채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兼倂)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60년(공민왕 9)과 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의 우환이 끓기 시작했다. 더구나 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죽자 불사(佛事)에 전념, 왕비만을 추모하며 국정을 신돈에게 맡겼다.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하므로 사사(賜死)했다. 그 뒤 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는데 소년승(少年僧)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까지 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1점뿐이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개성직할시 개풍군(開豊郡)에 있다.
4. 일연 (一然 1206∼1289(희종 2∼충렬왕 15)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수행하였고, 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현풍(玄風)의 보당암(寶幢庵)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하였다.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고, 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와 이 절을 주재하며 대장경을 주조하던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었고,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영일(迎日)에 있는 오어사(吾魚社), 달성(達城) 인홍사(仁弘社;뒤에 仁興寺)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고, 77년(충렬왕 3)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 왕을 따라 경주(慶州)에 머무르며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으며, 89년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를 지었는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로는 《화록(話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5. 최치원 (崔致遠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 학자·문장가·경주(慶州)최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주최씨 가문에서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신라 말기 학자·문장가·경주(慶州)최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주최씨 가문에서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간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라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대산군(大山郡)·천령군(天嶺郡)·부성군(富城郡) 등의 태수를 지냈다. 839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비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 뒤,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는 유교·불교 이외에 도교·노장사상·풍수지리설 등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咸陽)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 불교관계의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그 밖에 <숭복사비(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 비문의 글씨가 남아 있다.
6. 의천 (義天 1055∼1101(문종 9∼숙종 6)
고려 승려. 속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천태종(天台宗) 중흥의 시조이다. 1065년(문종 19) 경덕국사 난원(爛成)을 은사로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고려 승려. 속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천태종(天台宗) 중흥의 시조이다. 1065년(문종 19) 경덕국사 난원(爛成)을 은사로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때부터 학문에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經)·율(律)·논(論)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두루 배웠다. 67년 왕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廣智開宗弘眞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의 직책을 받았다. 84년(선종 1) 송(宋)나라 정원법사(淨源法師)의 초청을 받고, 85년 구법(求法)을 위하여 유학길에 올라 송나라에 도착한 뒤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면서 화엄법사 유성(有誠)과 교유하며 현수(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을 방문하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의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에 관한 여러 가지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86년 불교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요(遼)나라·송(宋)나라·일본 등에서 경서를 구입하여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하였다. 94년 홍원사(洪成寺) 주지를 거쳐 해인사(海印寺)·흥왕사(興王寺)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그뒤 99년(숙종 4)에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1101년에는 국가에서 대선(大選)을 실시함으로써 천태종은 국가에서 공인한 종파가 되었다. 원래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으나 천태종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교일치(禪敎一致)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천태종을 개립하였다. 교단의 통일과 불교전적의 정리 등에 힘을 기울이다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신집원종문류(新集成宗文類)》 《석원사림(釋苑詞林)》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화엄경》 180권을 국어로 번역하였고, 강의한 것이 300여 권에 이르지만 거의 없어지고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대각국사.
7. 지눌 (知訥 1158∼1210(의종 12∼희종 6)
고려 중기 승려. 속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이다. 8세 때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로 당시의 종파대립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모든 이에게서 배운다는 트인 자세로 정진하였다.
고려 중기 승려. 속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이다. 8세 때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로 당시의 종파대립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모든 이에게서 배운다는 트인 자세로 정진하였다. 1182년(명종 12) 승과에 급제하였고, 나주(羅州) 청량사(淸凉寺), 예천(醴泉) 보문사(普門寺) 등지에서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음을 깨우쳤다. 90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고 취지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사운동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야 온전한 공부가 됨을 설파한 운동이었다. 이에 97년 왕족·관리 등과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가하였다. 지눌은 다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선정을 닦다가 홀연히 마음을 크게 열었다. 1205년(희종 1)에는 송광사(松廣寺)에서 120일 동안 큰 법회를 열었고 그곳에 머무르며 강설·저술을 계속하였다. 10년에 법상(法床)에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천진(天眞)·확연(廓然)·인민(仁敏) 등 수백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저서에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탑호(塔號)는 감로(甘露),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8. 최무선 (崔茂宣 ?∼1395(?∼태조 4)
고려 말 조선 초 무신. 무기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지금의 永川).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 기승을 부리자 화약제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원(元)나라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고려 말 조선 초 무신. 무기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지금의 永川).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 기승을 부리자 화약제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원(元)나라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우왕 3) 그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에서 화약을 만들고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육화석포(六火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 등의 화기를 제조하는 한편, 이를 실을 전함(戰艦) 건조에도 힘썼다. 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배로 진포(鎭浦)에 침입하자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화통·화포로 격퇴시켰다. 고려 때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등을 지냈고, 조선 태조 때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냈다. 뒤에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화약수련법》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9, 최영 (崔瑩 1316∼1388(충숙왕 3∼우왕 14)
고려시대 무신·재상.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적의 침입을 막은 공으로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된 뒤 원(元)나라 요청으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였다.
고려시대 무신·재상. 본관은 동주(東州;鐵原)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적의 침입을 막은 공으로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된 뒤 원(元)나라 요청으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였다. 56년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펴자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하였다. 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적선 400척을 격파하고 이듬해 서경(西京;지금의 平壤)을 함락한 홍건적을 물리쳤다. 61년 홍건적이 다시 개경(開京;지금의 開城)을 점령하자 안우(安祐) 등과 함께 물리쳐 훈(勳)1등·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라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임하였다. 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을 진압하였고 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쳐들어오자 의주(義州)에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물리쳤으며, 이어 연주(延州)에 침입한 박백야(朴伯也)도 격퇴시켰다. 65년 신돈(辛돈)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훈작을 삭탈당하였으나, 71년 신돈이 처형된 뒤 복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74년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으로부터 6도를 소동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에서 파면되었으나, 곧 등용되어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어 제주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 75년(우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80년 왜적의 침입으로 서울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는 계획에 반대, 이를 철회시켰다. 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때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북변 일대를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우왕과 함께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출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이성계의 개경 진입에 맞서 싸우다 패전하여 공료죄(攻遼罪)로 참형당하였다. 시호는 무민(武愍).
10. 윤관 (尹瓘 ?∼1111(?∼예종 6)
고려시대 문신·명장.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 문종 때 문과에 급제, 1088년(선종 5) 합문지후(閤門祗候)로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95년(숙종 즉위년)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요(遼)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98년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 송(宋)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렸다.
고려시대 문신·명장.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 문종 때 문과에 급제, 1088년(선종 5) 합문지후(閤門祗候)로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95년(숙종 즉위년)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요(遼)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98년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 송(宋)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렸다. 1101년(숙종 6)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추밀원부사·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여진 토벌을 위해 별무반을 조직하여, 1107년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로 출전, 전승하여 국토를 확정하고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驗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 등 9지구에 성을 쌓고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가 되었다. 그 뒤 여진족은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고, 조정에서는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9성을 되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 이로 인하여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호마저 삭탈되었다. 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