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그리스도교 수행의 근거와 이상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 세례는 우주를 창조한 성부(聖父)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성자(聖子), 곧 예수와 죄 많은 교회 안에 머물며 인간과 우주를 성화시키는 성령(聖靈)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信者의 이마 위에 물을 붓는 입문예식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로마서 6,3)하고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반문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와 함께 죄에 죽고,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생명 안에 거닐 수 있게 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군림하도록 자신의 욕정에 복종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지 말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한다. 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되어 정의를 섬기려면 (로마서6,16) 신앙과 그 실천인 수행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자신을 단련시키고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로 묘사했다(1고린토 9,24-27).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수행은, 죽고 부활한 예수를 따라 그를 닮아가는 일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와 그 일행에 봉사하며 동반하던 여성제자들의 발자취를 오늘날도 밟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을까? 우리는 ꡔ신약성서ꡕ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 안에서 제자되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평지설교”(6장 17-49절)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5-7장)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고 그분과 같이 살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o'iktírmon)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십시오.”(루가 6,36)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téleiós)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48)
그러면 하느님의 자비란 어떤 것일까? ‘o'iktírmos’라는 그리스어는 ‘rāham’이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자궁(창세 43,30)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어서 동정(compassion), 애타게 사모함(yearning) 등의 뉘앙스를 갖는다. 따라서 약하고 고통받는 인류를 하느님이 가엾게 여김을 표현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일상적인 인간의 상식과 율법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레위기 19,18)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마태 5.43-45)
하느님을 모방하라는 사상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9,2)는 구약성서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루가는 어록을 그대로 옮겨서 선한 이들에게 뿐 아니라 은혜를 모르고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느님을 닮으라고 했는데, 마태오는 어록의 “어질다”, “자비롭다”를 고쳐서 대신 “완전하다”(텔레이오스)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스 사상에서 “완전하다”는 신적 이상을 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하느님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은혜를 베풀며 원수를 사랑할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3) 마태오는 좀 더 수행적인 언어를 택했고 루가는 어짐 혹은 자비 자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루가 복음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예수는 인간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한다.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배부른 이들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웃고 있고 칭찬을 받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 울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루가 6,20-26).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받아들일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의로움에 목말라 괴로워하고,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았다. 교회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성사(聖事 sacrament) 혹은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자기 삶을 통해 보이게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 놓은 예수의 행복선언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수행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참으로 그를 따르는 수행자는 소수이다. 교회 안의 수행자들 중에서도 교회 제도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준된 수도회에 입회하여 가난․정결․ 순명의 세 가지 서원을 발하고 살아가는 남녀 수도자들이 공적 수행자들이다.4) 이런 공식 서원 없이 예수처럼 소박하게 살면서 베푸는 이들은 세상 속에 사는 평신도 수행자들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29-37)나 탕자의 이야기(루가 15,11-32)처럼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도 복음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쳤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 옆에 좋은 이웃으로 있어주는 일, 방탕하고 실망을 안겨 주는 젊은이를 기다려주는 일, 남에게 잘못한 것을 보상해서 정의를 회복하는 일, 사회에서 멸시받고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일들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안에 실현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수행이다. 이런 비유에서는 작은 겨자씨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일 때 놀랄만큼 큰 수확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확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네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 자신의 십자가 지심과 죽음으로 절정을 향해 다가간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라고 한 예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살아 메아리친다. 그래서 지금 내게 주어진 책임과 그에 따른 어려움을 하느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기쁘게 받아 지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교적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삶이야말로 그의 가르침을 살아있게 만들고, 십자가의 신비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어두움에 빛이 되고 힘을 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는 그리스도인 수행의 근거가 되고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수행의 이상이다.5) 불자들의 수행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진 위치가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위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 교회 역사 속에 전개된 네 가지 수행의 모델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완덕의 이상을 가르치고 직접 살아낸 예수를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담은 <사도행전>은 이미 신도들의 공동체생활 속에서 지향하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신명나는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온 백성에게 호감을 샀다. (사도행전 2,44-47)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상으로 하는 초기 교회공동체의 모습이었다. 신도들이 한마음 한정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갖는(사도 4,32) 이상적 공산사회를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들 가운데 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누구든지 밭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팔아서 그 대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치에 놓았다”(4,34)는 선언을 하자마자, 바로 반대되는 사건을 보고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라는 부부가 땅을 팔고 그 값의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사도들에게 가져왔다(5,1-5). 또 제자들의 무리가 늘어나면서 헬라계 사람들이 히브리계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배급 봉사에서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이때 복음 선포와 구별되는 교회관리 일을 담당하는 부제직이 생기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상적 공동사회는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는 몇백 년 후에 시작하는 出家者인 수도자들 사이에서만 지속되었다. 세상에 사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주일마다 성체를 떼기 위해 만나고 생사화복을 통과의례적 전례를 통해 함께하는 본당이라는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出家 수행생활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공인을 받아 국교적 성격을 띠게 된 그리스도교가 세속화되자, 본래의 복음정신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 고독과 극기고행을 실천할 수 있는 사막을 찾아 밖으로 나감으로써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출가수행의 첫번째 모델을 볼 수 있다.
1) 안토니오 성인과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定住)수행”
사막에 들어가 가난과 고행의 생활을 시작한 안토니오(Anthony, 250-356)성인의 가르침을 전한 카시안(John Cassian, 360-430)은 10년 동안 이집트 사막 여러 곳에서 수행하는 영적 지도자 15명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들은 말씀을 24가지 주제로 정리하여 《훈화집》을 썼다. 제2훈화에서 카시안은 안토니오 성인과 장로들의 대화를 소개하는데, 주제는 완덕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이다. 장로들 중에서는 단식과 밤샘, 마음과 몸의 청정, 사물에 대한 멸시와 가난을 최고의 덕으로 들기도 하고, 고독과 손님에 대한 대접이나 친절을 제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 되는 안토니오 성인은 위의 덕목들이 좋기는 하지만 지나치면 별안간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순례 중 완전한 단식을 서원했기 때문에 사막을 여행하면서 베드윈들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굶어죽는다든지, 고독을 지키느라고 부활절에도 공동체 미사에 나오지 않는 경우는 사탄에 넘어간 교만한 고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안토니오 성인은 분별력(discretio)이야말로 수도자들을 하늘에 오르게 하고 다른 모든 덕목을 다치지 않게 항상 지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6) 이렇게 분별력이 다른 모든 덕을 감싸서 지켜주지만, 카시안은 마음의 탐욕을 비운 겸허한 수용의 자세가 지속되어야 참된 식별이 가능하다고 했다. 사막이라는 고독의 장소를 담을 높게 쌓아 문명세계 한가운데로 가져온 베네딕도(Benedict 480-560년) 성인은 세 가지 서원 이외에도 정주(定住)의 서원을 수도자들에게 하게 했다. 定住란 한 수도원 안에 일생동안 머무는 것으로 세속과 성스러운 수도 공간을 구분짓는 것이다. 비록 도시 근교에 살더라도 세상에 잘 나가지 않고 수도원 담 안에서 기도하고 노동함으로써 자족적 생활 양식을 영위하는 수행법이다. 외부인들이 수도자들을 찾아오는 것은 허용하지만 수도자들은 근본적으로 수도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세상의 성화를 위해 기도한다. 수도원 안에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책임을 맡은 아빠스(abbas, 종신제 원장)는 젊은 수사들을 포함한 회원 전체를 소집하여 충분히 의견을 듣고 검토한 후에 판단하라고 베네딕도 성인이 쓴 <수도규칙>에 명시하고 있다.7) 사막이나 수도원의 담은 분리를 상징한다. 소승불교에서 계율(Vinaya)준수를 중시하여 계율 실천을 수행의 기초로 삼고 청정의 길을 단계적으로 제시했듯이,8)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규칙> 역시 수도자의 삶 전체를 규칙으로 보호하여 참된 수행의 길을 걷도록 이끌고 있다. ‘정주수행’은 공동체 삶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와해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다시 이 수행의 모델이 호소력을 되찾고 있다. 그리고 모든 수행에서 ‘포기’와 ‘분리’가 특별히 요구되는 초기 수행 단계에서는 이 정주 수행을 거치는 것이 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2)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탁발(托鉢)수행” 육칠백년간 남녀 베네딕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定住수행이 지속되면서 수도원들은 계속 신도들에게서 기증을 받아 많은 농토와 농노를 소유하는 부유한 봉건영주를 닮아갔다. 자연히 그들의 수행이 해이해지면서 계속 쇄신운동이 일어나다가, 마침내 13세기에는 定住와 정반대가 되는 탁발, 곧 걸식하고 여행을 하며(mendicants) 가난한 수행의 이상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대표자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of Assisi, 1182-1226)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을 체험한 후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出家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모범을 가능한한 가까이 따르기를 원했다. 그는 마태오 복음 10장 9절에 따라 가난하게 여행하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예수의 복음적 삶에 감명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의 소박한 삶은 평신도들 안에서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해와 달을 형제자매라고 불렀고, 바람과 공기, 구름과 물, 땅에 피는 꽃들과 풀들, 하물며 죽음에게도 하느님을 찬양하자고 초대했다.9)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생태학적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그는 생태학의 수호자로서 현대 영성의 중요한 부분과 직결되어 있다.10) 프란치스코의 탁발수행은 定住수행의 특징이 지니는 성속의 분리를 포기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넘어서서 가난한 예수의 발자취를 밟았다는 점에서 대승불교 초기의 보살수행과 맞먹는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3) 이냐시오 로욜라의 “선교수행”과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제시한 "내적 순례"
16세기 가톨릭 영성을 대표하는 두 인물을 들자면, 세계적 선교활동을 시작한 예수회의 창설자 이냐시오와 관상 갈멜회를 개혁한 아빌라의 대 데레사를 들 수 있다.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년)는 스페인 바스크지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서 세속적 영웅심을 지닌 기사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전투 중에 프랑스 군대의 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하여 휴양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읽고 성덕에 큰 매력을 느껴 삶의 방향을 바꿨다. 그는 고향을 떠나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을 시작한 곳에서 멀지 않은 이탈리아 만레사에서 동굴을 찾아 몇 시간씩 기도를 하고 그 지역 병원에서 병자를 간호하는 일을 하며 11개월간 수행을 했다. 이 수행 중에 이냐시오는 과거의 죄에 대한 소심증과 자신의 무가치성을 느끼며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내적 고통을 통해 이냐시오는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읽고 식별하는 법을 배웠고 마침내 까르도넬 강가에서 신비적 조명을 경험했다. 그의 자서전적 담화에는 이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가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여 만사를 깨닫게 되었다. 만사가 새로워 보일 정도로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다.”11) 후에 이냐시오는 그가 일생동안 알게 된 모든 지식을 합해도 이때에 받은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행한 자신의 수행 체험을 기초로 해서 피정지도 지침서인 <영신수련>의 골격을 잡았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삶을 네 주간으로 나누어 30일 동안 침묵 속에 깊이 묵상하는 피정자는 자신의 존재 핵심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다. 그래서 예수의 삶이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되고 사랑의 신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게 된다.12)
사실 이냐시오는 까르도넬 강가에서 체험한 깨달음의 조명을 통해 소심증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나가야할 방향을 잡았다. 그것은 예수가 살던 예루살렘 성지로 가서 자신의 일생을 봉사에 바치겠다는 것인데, 성지까지 가기는 갔으나 무슬림 세력과 알력이 있는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현실 속에서 그는 지리적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선교의 삶과 교회의 개혁을 위한 봉사 안에서 예수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가 받은 선교사명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그는 만학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1534년 학교에서 만난 동지들과 함께 교회 개혁의 쐐기 역할을 하게 될 예수회를 창설했다. 이때 그들은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살 것과 성지로 갈 것을 서약했다. 만일 성지순례가 불가능해지면 무엇이든 교황이 명하는 사도적 봉사에 헌신하기로 하였다. 이냐시오는 사도직의 효능과 가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定住 생활이 중시하던, 시간에 맞춘 성가대와 고정된 수도복과 일률적인 고행을 순명으로 대체했다. 예수회 초기 동지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최초로 일본에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파하러 갈 수 있었고, 마태오 리치와 예수회 일행이 명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들어가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매개로 그리스도교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세상 속에서 활동을 통해 예수와 일치하는 ‘선교수행’을 닦았기 때문이다.13) 예수회원들은 처해진 역사현실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활동과 봉사의 수행 양식을 발전시켰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는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1세에 갈멜수녀회에 들어갔다. 초기 18년 동안은 무미건조한 묵상과 남에게 알려지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지닌 채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방황하며 통합되지 못한 수도생활을 했다. 이 당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같은 수도원 안에서도 경제적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 수녀들은 수녀원 안에 있는 작은 개인 집을 가질 수 있었고 재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수녀들은 공동침실을 사용하였다. 또 필요한 경우에는 장기간 외출하여 가족과 친지들과 지낼 수도 있었다. 데레사 자신도 여러번 외출하여 가족들과 지냈고 데레사가 모범으로 삼고 있던 수녀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14) 39세 때 상처투성이의 예수像을 보고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에 온당치 못한 보답을 해왔음을 강렬히 느껴 데레사는 깊이 회개를 하게 되고, 이 체험 이후로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생생히 느끼기 시작했다.15)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데레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위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완숙한 저술인 ꡔ영혼의 城ꡕ(1577년, 62세)은 스페인어로는 Castillo Interior(內的 城)로 자신이 경험한 마음의 정화과정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나는 영혼/마음을 마치 금강석이나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城)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 안에는 마치 하늘나라에 자리가 많듯이 많은 방들이 있습니다(요한 14,2) … 이 궁성은 여러 방들로 되어 있습니다. 높은 데에 있는 것, 낮은 데에 있는 것, 또한 옆으로 앉아있는 것들도 있는데, 그 모든 방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으뜸가는 왕실로, 그 곳에는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그윽한 비밀이 이루어집니다.16)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하는 城은 만다라 모양으로 자아의 둥근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의 순례는 城 밖에서 시작하여 여섯 방을 지나며 시련을 겪고 정화되어 임금이 거하시는 성의 한가운데 방으로 들어가서 끝난다. 결국 순례의 목적지는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이다. 데레사는 많은 영혼들은 밖에만 머물러서 자기 마음 안에 방이 몇 개나 되는지, 자신이 원래 얼마나 고귀한지, 또 누가 그 안에 사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처음 세 개의 방은 중심에서부터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자아 인식의 방, 부르심을 인식하면서도 유혹이 심한 시기, 좀 더 확고해져서 질서 있는 생활과 자선을 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이 세 방을 지나는 순례자는 물을 길어오르듯이 자기 힘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아직 버리지 못해서 사는 것이 괴롭다.
그 다음의 세 방을 지나는 시기는 生水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서서히 조용해지고 수행이 자연스러워진다. 넷째 방은 명상이 논리적 사고를 떠나보내는 과도기이고, 다섯째 방은 누에가 나비로 되듯 자기에게 죽는 때이다. 여섯째 방은 하느님의 不在를 체험하는 시기로 안팎으로 시련을 겪는다. 때로는 중병이나 육체적 고통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는데 데레사 자신도 “몇 해 동안을 이 고통의 은혜 속에 살았다”17)고 고백한다. 이런 고통과 고독의 효과는 커서 수행자는 모든 애착에서 자유롭게 된다.
마지막인 일곱째 방에 다달으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영혼이 삼위일체의 나타남과 합일(合一)된다. “영혼은 일체의 형체를 떠나 순수한 얼로 남고, 하늘스런 합일로 지음 없으신 얼과 함께 결합된다.” 이런 합일을 영적 혼인에 비유하기도 하고 강물에 떨어진 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합일의 결과는 놀라워서 자신을 잊고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며 원수도 사랑하게 될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려는 열망에 가득차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같이 “주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사도행전 9,6)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한다. 결론 부분에 나오는 하나됨의 마지막 단계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깨달은 선사들의 상태와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요약해 보겠다.
나 역시 정신이 얼떨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즉 영혼이 이 궁방에 들게 되면, 어떠한 황홀이든지 다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감각이 힘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 저 가엾은 나비는 불안에 차있어, 날아다니기는 했어도 모든 것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쉴 자리를 얻어서인지, 아니면 이 궁방에서 본 것이 많아서인지, 다시는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19)
합일(合一)을 경험한 사람의 마음은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고 항상 고요잔잔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침묵 속에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감각이나 능력이 아무 힘도 없어서 수선을 피울 까닭도 없고 고독과 괴로움의 느낌도 없어진다. 황홀의 체험도 없어지고 두려움도 없어진다. 그 마음은 하느님의 장막 안에서 기쁨에 넘쳐 고통을 잘 견디어 내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열정, 실행의 열정만이 남는다. 그래서 아빌라의 대 데레사는 “마르타와 마리아는 나란히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잘 모시고 항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고 했다. 칼 융의 自我(Ego)와 自己(Self) 개념을 가지고 <영혼의 성>을 해석한 죤 웰치(John Welch)는 “하느님께로 가는 여행은 동시에 자아로 향하는 여행이다. 이 두 개의 목표는 한 가지 여정의 두 측면이다” 라고 했다. <영혼의 성>의 일곱째 방에는 인간 마음의 본 상태가 곧 하느님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모습을 아빌라의 데레사가 이해하듯이 이해한다면 불자의 깨달음과 훨씬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면적 순례의 끝이 활동의 순수한 열정으로 열매맺는 바로 이 점이 “선교적 수행”과 만나는 점이고 선수행의 결과와도 같지 않은가 생각한다. 十牛圖의 제十圖가 깨달은 사람이 중생을 위해 보살로서 저자거리에 들어가듯이, 마음의 중심에서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과 合一된 영혼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다. 아빌라의 데레사 역시 갈멜 수도원의 개혁부터 시작하여 교회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4) 빈첸시오의 “빈자를 섬기는 수행”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 de Paul, 1580/1- 1660)는 프랑스 남부 농촌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격려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서품을 받고 나서 처음 사제생활 10년 동안 그는 부유한 성직생활을 추구했다. 그가 28세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 파리에서는 영적 쇄신과 교회의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빈첸시오는 개혁가인 베륄 신부나 듀발 신부를 만나 그들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첸시오는 가난한 농촌 본당 신부로 지내면서 농부들의 정신적 가난을 목격했고, 1617년 병든 가정을 돕자는 그의 주일미사 강론이 반향을 불러 일으키면서 자선 동지회가 형성되어 빈자들을 위한 그의 소명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빈자들은 빈첸시오 삶의 중심이 되었고, 그가 파리에서 시작한 자선 부인회, 사제 쇄신을 위한 화요모임, 노예선의 영적지도 신부직 등도 모두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길이었다. 1625년에 그는 빈자들에게 설교와 사목을 하는 전교회를 창립했고, 1633년에는 과부였던 루이즈 드 마리약과 함께 가난한 병자들과 죄수 노예들을 직접 방문간호하는 사랑의 딸회를 시작했다. 빈첸시오 성인의 이런 자선활동과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은 가톨릭 사회복지의 시작을 알렸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 “빈자들을 우선 선택”한다는 귀감을 남겼다.
그런데 이런 자선활동이 본래의 정신을 잃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의 지상생활과 일치하려는 빈첸시오의 내적 열망과 수행 때문이었다. 나는 가난한 남녀 농부들을 그들의 외모나 지능만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통 그들은 거칠고 무례하게 보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지능이나 외관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난하게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사람들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빈첸시오 문서 11권, 32쪽)
빈첸시오는 궁핍하고 희망을 잃은 이들 안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루가 4,18) 일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은 예수의 삶을 다시 살고자 했다. 빈첸시오와 그가 세운 남녀 수도회원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들여다보게 하는 렌즈가 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네 개의 모델, 성속의 분리를 사는 定住수행, 그 분리를 허물어버린 탁발수행, 활동 자체를 수행으로 하는 선교영성,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자비의 수행은 오늘날 가톨릭 修道전통 안에 공존하고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안정과 문화전수가 요구되었던 6세기에는 베네딕도 성인이 정주수행을 시작했고, 부유해진 수도원 담을 헐어야 했던 13세기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신도 탁발수행이 호소력을 지녔다.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반분되고 내적 개혁이 필요했던 16세기에는 이냐시오의 선교적 열정과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보여준 내면적 순례의 결실이 개혁적 수행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갖고 균등한 배분을 위해 일해야 하는 자비의 수행이 부각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수행 모델이 일어나고 이런 수행의 영감을 카리스마(Charisma 恩賜)라고 부르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새로운 카리스마가 주어졌다고 해서 그 전의 카리스마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은 이 여러 카리스마 중에서 자기 마음 안에 공명을 일으키는 수도회를 찾아간다. 사실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도 이 네 가지 모델의 수행을 따르는 수도회들이 모두 들어와 있다. 서구 세계에서 천여년 동안 서서히 새로운 모델들이 사회와 교회의 필요 속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기에 이르는 100년 사이에 네 가지 수행 모델이 모두 소개되어 정착한 것이다. 한국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토착화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각 수도회의 고유한 카리스마인 창립자들의 영성까지 토착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가톨릭 교회의 수도회들은 시작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그 후에는 주교나 교황의 인준을 받는다. 그러니까 한 수도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첫째는 창립자의 카리스마, 둘째는 회원들이 입회에서 임종 때까지 법적 공동체에 소속되어 교회법에 따른 회헌을 갖고 사는 것, 셋째는 각 수도회가 경제적 독립체를 이루어 교육비, 병원비, 연금 등을 공동체적으로 확보하고 집행한다는 점이다. 국제 수도회의 경우에는 한구관구를 형성해서 법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한국에서 시작된 방인 수도회는 독립 공동체로 교회의 인준을 받는다. 아마도 불교의 승가와 가톨릭 수도회가 다른 점은 이런 법적 개별 공동체 개념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런 차이는 불교가 지방 분권적 전통을 지닌 인도에서 시작되었고, 가톨릭 교회는 중앙 집권적 로마 제국 전통 안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형성하게 된 데서 온 차이일지 모르겠다. 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佛法을 스승으로 하여 각 사람에게 정진할 것을 당부하시며 열반에 드셨다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나의 계명이라고 부탁하신 원초적 정신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종에서 법맥이 강조되는 부분은 창립자의 정신으로 묶인 수도회 전통과 가깝다고 느껴진다.
3. 예수의 복음적 이상은 한국 교회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나?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이승훈이 1784년 북경 北天主堂를 찾아가 예수회 신부 그라몽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와 함께 西學書를 강독하던 이벽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20대의 동료선비들에게 영세를 주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때를 창립 연대로 잡는다. 한국 개신교는 백 년 후 문호개방이란 큰 흐름을 타고 전래되었기 때문에 가톨릭처럼 큰 박해나 저항을 체험하지는 않았다. 1882년 한미 통상조약이 맺어진 것을 계기로 다음 해 미국 공사가 입경하자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H. N. Allen)은 미국 공관의 의사자격으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정국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을 계기로 고종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을 시작해서 무당이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하던 동서활인원의 기능을 대신했다.24) 1885년에 미국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같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와 배재학당 등의 현대식 교육기관과 세브란스 등의 병원을 통해 선교활동을 벌였다. 폐쇄사회였던 조선이 문호개방과 함께 유교적 문화기반이 붕괴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개신교는 큰 사회적 반발없이 짧은 시간 내에 근대화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며 우리 사회의 강력한 세력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한국 개신교인들의 대다수가 토착화의 필요에 둔감했던 것도 전통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제까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초기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미신타파가 큰 과제였다. “첫째 미신의 타파이니, 기독교가 유일신 밖의 모든 우상을 배척하여 미신이 들어오면 뿌리채 뽑아 정신적 해방을 이룬다.” 이런 초기 한국 기독교의 기본적 시각은 무속과의 알력은 물론 한국 전통문화 전반에 대해 부정적 자세를 취하게 했다고 하겠다.
그러면 전통문화가 훨씬 살아있었을 뿐 아니라 젊은 유학자들이 수용한 가톨릭의 경우는 어떠할까?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은 1784년 이지만 이미 그 전 백오십여 년 동안 西學은 한자로 된 서적을 통해 조선조 지식인들에게 전래되고 있었다. 특히 성호 이익(1681-1763)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서를 많이 읽었는데 마태오 리치가 쓴《천주실의》를 읽고 <天主實義跋>을 썼고, 西學의 수양서인《七克》을 읽고 유교의 克己와 같다는 긍정적 논평을 했다.《칠극》이란 1614년에 마태오 리치의 비서 역할을 하던 빤또하(Diego de Pantoja, 1571-1618)가 쓴 책으로 유가적 용어와 개념을 차용하여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유교 윤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제의 보응론, 궁극적 시간의 가치 등을 제시한다.
<칠극》의 기본주제는 인간이 지닌 일곱 가지의 욕망, 즉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란, 게으름을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七罪宗이라고 규정한다. 빤또하는 칠죄종에 대비되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칠극덕(七極德), 곧 신중, 정의, 자비, 강건, 절제, 순결, 온유를 성서와 성인전,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대중적 이야기를 풍부하게 인용하며 설명한다. 이 책을 읽은 이익이나 당시 한국 학자들은 미지의 세계였던 서양의 스토아 철학이나 서구 여러 나라의 임금, 왕녀, 상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상당히 매료되었던 것 같다. 후에 한국인들이 쓰는 교리서나 천주가사에《칠극》의 내용이 자주 언급된다.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서학서 연구열을 고조시켰다. 신후담, 안정복 등은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는 저술을 썼고, 청년층 중심으로는 신서파(信西派)가 형성되어 신앙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금장태는 조선 후기의 유교와 서학간의 교류와 갈등을 논하면서 신서파 청년층 유학자들이 서양과학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천주교 신앙으로 들어가게 된 이유를 다음 네 가지에서 찾는다.
1. 이들이 읽은 서학서(西學書)들이 예수회의 보유론(補儒論)에 따른 적응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마태오 리치는 유교경전의 상제(上帝)가 곧 그리스도교의 천주(天主)라는 결론을 내리는 등 유교경전과 긴밀한 소통점을 제시하고 있어서 유학자들이 접근하기 쉬웠다. 2. 서양과학서보다 천주교 교리서가 훨씬 이해하기가 용이했고 개방적인 젊은 학자들로서 천주교적 해석을 수용하기가 쉬웠다. 3.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유교이념은 권위화된 지배체제에 안주하면서 모순된 사회현실을 해결하는 데 무기력하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젊은 유학자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었다. 4. 세계에 관한 지리적 지식과 천문학적 우주관을 알게 되면서 중국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에서 벗어나 동서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유교이념에서 서학적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이런 전환점에서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유교적 거경(居敬)의 수양과 서학적 극기의 수행을 병행했다. 성호의 제자들 중 信西派들은 서울근교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777-1779년)에서 유교경전과 문헌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서에서 제기된 문제를 토론 주제로 삼았다. 또한 그들은 매일 규칙적으로 신유학의 대표적인 수양적 잠언들을 읽었다. 정약용은 이때의 수행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녹암(권철신)께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주시고는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나서 숙야잠을 암송케 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을 암송하고, 정오가 되면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을 암송하도록 하였으니, 씩씩하고 엄숙하며 정성스럽고 공손한 태도로 규칙과 법도를 잃지 않았다.
西銘, 敬齋箴, 夙興夜寐箴은 모두 퇴계의 <성학십도>에 열거된 유교적 수양지침문으로 天地를 부모로 하고 만물과 하나가 되는 마음, 上帝를 대하듯 항상 갖는 공경스러운 몸가짐, 일찍 일어나 허명정일(虛明靜一)한 상태로 정좌한 후에 독서하고 일하는 속에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덕을 실천하라는 말씀들이다. 사물잠(四勿箴)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공자께서 가르치신 실천방법을 程子가 잠언으로 만든 것이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십계명 실천 : 융합적 수행
이런 유교적 수행을 하며 교리를 배우다가 1784년 신앙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은 공동전례와 함께 십계명을 지키는 수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95년경에 한글로 저술된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뒷부분의 문답 안에서 “천주교를 믿기는 쉬우나 행하기가 어렵다”는 질문과 “천주 십계 중에 불의의 재산을 가지지 말라 하시고 남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 했으니 가난한 사람이 불의의 재산을 아니 가지고 어찌 살며, 젊은 사람이 여색을 범치 아니하고 어찌 견디리오?”라는 질문이 있다. 저자인 정약종의 대답은 확실해서 영혼은 죽지 않고 무궁한 상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렵다고 하지 말고 큰 복을 받는 공부에 힘쓰라는 권고이다. 그런데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수행의 지침을 제시한 십계명을 이제까지 배웠던 유교적 수양론과 어떻게 조화시켰을까? 1839년 기해박해 시기에 잡힐 것을 각오하고 <상재상서>라는 호교적 상소문을 써서 품고 다니던 정하상은, 그 글 안에 십계명을 나열한 후에 유교의 四勿과 九思는 물론 효제충신과 인의예지가 이 열 가지 계명에 다 들어있음을 주장했다. 또한 세상의 법은 그 일만을 다스리고 그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지만, 천주의 명은 그 일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까지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더 높은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긍지를 드러낸다. 1801년에 일어난 제1차 천주교 박해인 신유교난의 성격을 분석한 조광은 천주교 전래 이후 한 세대를 경과한 천주교인들의 특이한 생활 양식이 전통적 가치와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결론내린다. 예교질서의 상징인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양반과 서민의 신분차별과 남녀의 구별을 부인하며 忠孝를 상대화했는데, 유교사회는 부모나 군주보다 天主를 더 높이는 데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회적 평등사상이 소개되면서 신도들 중에 이향을 단행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교우촌이 형성되며 산중에 모여들어 민란의 가능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신명초행 神命初行>이라는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이 많이 읽던 영적 서적은 모든 이가 天主의 자식이므로 형제같이 지내야 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함은 天主를 사랑하고 미워함이라고 했다. 서로를 “交友”라고 불러서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수평적 관계로 이해했다. 한 예로 백정 출신인 내포지방의 황일광은 양반신도 방안에 들어와 앉을 수 있게 되자 “내게는 천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상에 있고 하나는 내세에 있다”고 기뻐했다. 권철신은 그의 비녀 순덕에게 신앙을 전해준 사실이 공초에 나오고, 유군명은 세례 후 노비를 풀어주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사학도들은 노예나 천인이라도 일단 그 당에 들어가면 형제처럼 되어 신분의 차이를 모르니 미혹함이 심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초기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의 자발적 운동으로 형성되었고 하느님을 “大父”로 다른 신도들을 “交友”로 인식하며 십계명을 수평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행을 했다고 하겠다. 단 이때의 평등사상은 직접적인 사회평등을 부르짖기보다 머슴과 주인 관계를 성찰케 하는 등 개인의 양심성찰을 통해 솔선수범케 하는 형태를 취했다.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이 보여준 하느님에 대한 충성개념은 大父인 주님에 대한 유교적 忠孝사상이 이어진 것이라고 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한 서울의 양반 최해두(崔海斗)가 귀양 살면서 쓴 <자책 自責>에는 그가 외우고 있던 그 당시 아침기도문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조과경(早課經)에 말씀하시되, “음란한 소리 듣지 말며, 사특한 빛을 보지 말며, 예 아닌 땅을 밟지 말며, 마음에 망녕된 생각을 말며, 뜻에 망녕된 움직임을 말며, 오직 날로〔나로〕하여금 주를 생각하고 주를 사랑하고야 죽기에 이르히〔도록〕규계(規戒) 좇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 구절을 무슨 뜻으로 외웠느냐? 미천한 사람을 대하여도 거짓말로 얻고자 하는 말을 청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지존지귀(至尊至貴)하신 주를 향하여 헛말로 구하는 바를 얻을소냐.
앞부분은 유교적 四勿의 틀을 유지하고 있고 뒷부분은 오로지 주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도와 수행이 하느님에게 한 약속이라는 의식과 지존한 분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自責> 전체를 흐르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에 유교적 수기론과 그리스도교적 수덕론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논설과 편지이다. 그가 1908년 신문에 기고한 <인심결합론>에서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무릇 사람이 만물보다 귀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처하되 첫째는 몸을 닦고, 둘째는 집을 정돈하고 셋째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마음을 서로 합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집은 부모와 처자에 의해서 유지되고, 나라는 국민 상하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같이 참담한 경지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다. 그 불화의 원인은 교만이다. 하많은 해독이 교만으로부터 생겨나나니 … 그러나 교만을 바로잡는 것은 겸손, 바로 그것이다.
처음의 삼강오륜과 수기-제가-치국으로 나가는 수행의 틀은 유교적인데, 그당시 한국 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인 불화의 원인을 교만에서 찾고 그 교만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겸손을 드는 것은 <칠극>에서 나온 칠죄종과 칠추덕의 제 1조목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적인 덕목 실천으로 유교가 제시해온 태평세계를 이루어보자는 호소이다. 1909년 갇혀있으면서 쓴 글에도 안중근은 문명을 修己安人하는 사회라고 묘사했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며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바로 그것이다.” 안중근이 세상을 떠날 때 열살이던 이용도(李龍道, 1901-1933)는 감리교회 목사로, 1928년에서 1933년까지 5년 동안 목회활동을 하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의 교회를 ‘병든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는 무기력하고 이기적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使臣이 되어야 할 목사직을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한 세속적 직업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부흥운동과 개혁을 강조하는 설교를 통해 교회의 침체를 개혁하고자 외로이 싸웠다. 이용도의 수행관을 살피기 위해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유․불․선의 한국적 전통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토착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용도의 사상에는 민족 구원과 개인의 강렬한 신앙체험이 겹치고 있다. 일제하에서 당하는 사회적 압박에 대해 “약소한 민족 우리들은 세상의 한 노예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갑니다”라고 써서 식민지 시기 민족 전체의 고난을 십자가로 이해했다. 또한 “아주 ‘나’라는 관념을 없이하여 주소서. 그리고 나의 속에는 오직 주님만이 살아계시옵소서”라고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추구하고 기도했다. 딸이 일찍 죽자 애도하는 시를 지어 “생사는 천명, 사람이 난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오나 가나 다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ꡔ논어ꡕ <안연편> 5장에 기록된 공자의 말씀을 불교적 분위기로 소화한 것이고, “나는 결단코 슬퍼하거나 괴로움으로 하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는 <헌문편> 37장의 말을 기도로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용도의 수행사상에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영성이 가장 뚜렷하게 융합되어 있는 예는 그의 지행합일 사상일 것이다. 그는 신앙 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행위로 실천되고 인격으로 열매맺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주의 행위와 나의 행위가 일치된 후에 비로소 신앙의 완성을 볼 수 있으며, 신앙의 완성이 온 후에야 비로소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유교를 성학(聖學), 곧 성인이 되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天理를 보존하고 사심을 비워 仁義를 실천함으로써 기질이 변화되어 인격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신교 목사인 이용도가 앎과 정감과 행동이 다 하나로 일치되어야만 비로소 신앙이 완성된다고 보았고, 주님과의 일치를 인격완성까지 이르는 것으로 결론 내린 것은 유교적 수행론과 그리스도교적 구원관이 조화된 것이다. 신앙과 실천과 인격으로 이어지는 수행과정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에 기본구조가 되고 있다고 본다.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신앙과 사회적 실천의 일치에서 힘을 얻었고, 1990년대 이후 생명운동이 강화되면서 우주의 생명을 보살피는 생활양식과 생명을 살리는 인격의 형성이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1984년 200주년을 맞은 한국 가톨릭 교회가 전체 신자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통해 사회조사를 한 결과,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수행의 이상으로 보는 수도자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이 ‘인격의 성숙’이었다. 신자들은 영적 지도자로 일하는 수도자에게서 지식과 판단력(13.3%)보다도 자신들의 삶과 어려움을 깊이 이해해주고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자애로운 인격자(69.4%)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은 앞으로 어디를 지향하고 나가야 할까?
4.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전망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전환기를 맞아 위기에 처해있다. 경제적인 부유가 성공의 척도가 되고 감각적 향락과 서구적 개인주의가 사회적 가치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인은 전체적으로 가벼워지고 종교적 진리를 위해 헌신하기 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종교를 유용하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른 수도자의 감소는 이제 한국 사회에도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교 수도회나 불교 승가에서나 ‘출가수행’이라는 어려운 길이 매력을 잃어간다고나 할까. 수도공동체들과 이런 수도회들을 품고 있는 교회 자체가 어디로 향해서 가야할 것인지 공동체적 대화를 통해 뚜렷한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무엇을 벗어버려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 식별하는 분별력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오늘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안토니오 성인과 베네딕토 성인이 그러했듯이, 외딴 곳에 가서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내 마음의 사막에 들어가서 고독 속에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그곳에서만 철저하게 회개하고 나를 비우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듯이 대중 속으로, 피폐된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함께 하느님의 구원을 찬미하자고 우주를 초대해야 한다. 이냐시오 성인과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했듯이 사회보다 먼저 교회부터, 그리고 수도회 안에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 경제적 균등성, 공동체 결정에 모든 구성원의 참여, 문화의 공유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매일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 빈첸시오 성인이 가졌던 자비로운 사회, 아픈 자식들을 살리고 보살핀 후에야 쉴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리스도인 수행자들의 유일한 비전이라면, 불교나 다른 종교 수행자들과 손잡고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교회 역사에 일어난 수행의 네 가지 모델은 오늘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에 남은 또 한가지 절실한 과제는 토착화이다. 교회의 전례, 예술, 신학 등 모든 면에서 토착화가 필요하겠지만 수행 면에서도 토착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행이 한국인의 수행 역사 안에 얼마나 깊게 자리잡고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불교는 통일신라기와 고려시기를 통해 한국적 수행과 그 이론을 이룩했고, 유교는 조선조 성리학을 통해 유가적 인격자들과 수행 이론을 산출했다. 여기서는 출가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한국 가톨릭 전통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았는데, 그리스도교 수행 모델에 함축된 카리스마를 한국 정신사에 자리매김 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요사이 긍정의 길인 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 부정의 길인 <향심기도>가 사제,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평신자들과 개신교 목회자들 사이에도 많이 실천되고 있는 것은 희망의 상징으로 보인다. 긍정의 길인 <영신수련>은 예수의 삶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그와 일치되어 선교현장으로 나가는 수행법이라 그리스도교 고유의 영성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부정의 길인 <향심기도>는 사고와 언어와 이미지들을 멈추게 하는 명상법이란 한국의 전통적 명상법-불교의 참선이나 유교의 정좌 등-과 가깝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 길을 걷든지 한국 그리스도인의 영적 순례가 한국인의 영성 안에 서서히 토착화하여 한국인의 수행으로 깊이 뿌리내리기를 기대해 본다.
Meav -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